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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제남 왕씨(濟南王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시조(始祖) 왕유(王儒)는 본성(本姓)이 박씨(朴氏)였는데, 처음에는 태봉국(泰封國) 궁예(弓裔) 때 관직에 올랐으나 궁예의 횡포가 차츰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산 속에서 은거하였다가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자 등용되어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왕씨(王氏)로 사성(賜姓)한 것으로 전한다.

 

 
▲ 왕봉강(王鳳崗)과 함께 조선으로 망명한 왕문상(王文祥)ㆍ풍삼사(馮三仕)ㆍ황공(黃功)ㆍ정선갑(鄭先甲)ㆍ배삼생(裵三生)ㆍ양복길(楊福吉)ㆍ왕미승(王美承)ㆍ유계산(柳溪山) 등 9명의 명나라 사람을 ‘9의사(九義士)’라 칭하며, 제향하는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대통묘(大統廟).

 

한편 일설에는 제남 왕씨(濟南王氏)의 시조 왕유(王儒)의 아들 훈(訓)은 태학사(太學士), 손자 취화(翠華)는 병조상서(兵曺尙書)를 역임했고, 명(明)나라가 이자성(李自成)의 침입과 군소도적(群小盜賊)들이 날뛰어 민심이 소동(騷動)되여 혼난하게 되었을 때 명나라 황제 의종(毅宗)은 취화(翠華)의 아들 즙(楫)을 순무안찰사겸도어사(巡撫按察使兼都御使)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도록 명하였다. 즙(楫)은 좌춘방 태학사 겸 이부시랑(佐春芳太學士兼吏部侍郞)으로 있는 아들 충추(忠推)와 함께 적진에서 분전하다 영하대전(寧夏大戰)에서 순무유적(巡撫流賊) 이자성(李自成)에게 살해당했고, 명나라가 망하자 충추(忠推)의 아들 봉강(鳳崗)은 가족과 노예를 인솔하고 해도(海島)로 피신하였으나 1637년 9월 해도(海島)마져 함락되자 적에게 생포되었다.



청(淸)나라 세조(世祖)는 왕씨(王氏)를 멸족하고자 1645년 봉강(鳳崗)을 심양포로소(瀋陽捕虜所)로 압송하였다. 그때 마침 심양(瀋陽)에 볼모로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ㆍ조선 제17대 왕인 효종)이 그를 보고는 서로 뜻이 맞아 결의(結義)하였다. 후에 봉림대군이 풀려날 때 배종(陪從)하여 함께 우리나라에 정착하였는데, 효종이 이문(以文)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하였고, 궁중(宮中)에서 침식을 같이 하며 북벌대계(北伐大計)를 논의하였다.

 

 


▲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건천리에 자리한 왕이문(王以文)의 묘


그러나 1659년 5월 4일에 효종이 승하(昇遐)하자 이문(以文)은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함을 애통하게 생각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장일(葬日)까지 영릉(寧陵)을 향해 혈루(血淚)를 흘리면서 통곡하니, 주위 모든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문(以文)은 그토록 갈망했던 북벌이 수포로 돌아가자 한(限)을 가슴속 깊이 묻어 두고 고국을 그리며 여생을 보내다 1699년 75세로 영면하니, 부음(訃音)을 받은 숙종(肅宗)은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로 추서(追敍)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제남(濟南)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왕유(王儒)를 원조(元祖)로 하고 이문(以文)은 류조(流祖)라 칭한다. 
 

 
 


▲ 왕이문(王以文)의 아들 군자감정(軍資監正) 왕진걸(王震傑)의 묘.

 

 

 

 

 


▲ 왕이문(王以文)의 아들 절충장군행용호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虎衛副護軍) 왕진성(王震聖)의 묘.
 

 

 

 

 

 

 
▲ 왕이문(王以文)의 아들인 왕진영(王震英)의 묘.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한익(韓翊ㆍ1728~1783)과 군수(郡守) 한정(韓禎ㆍ1728~1798)이 유명했으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도욱(道郁ㆍ1751~1839)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원(道源ㆍ1753~1835), 이조참판(吏曹參判) 경진(景進ㆍ1769~1825), 호조참판(戶曹參判) 덕구(德九ㆍ1788~1863) 등이 뛰어났다.

그 외 중추원(中樞院)의 의관(議官)을 역임한 제만(濟萬ㆍ1828~1902)ㆍ근식(瑾植ㆍ1850~1939)ㆍ정식(廷植ㆍ1865~1945)ㆍ원식(瑗植ㆍ1865~1916) 등이 이름을 날려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