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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개성 왕씨(開城王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우리나라 왕씨(王氏)는 중국 태원 왕씨(太原王氏)에 연원(淵源)을 두며, 개성(開城)ㆍ제남(濟南)ㆍ강릉(江陵)ㆍ해주(海州)를 비롯하여 22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고려왕조를 주도해 온 개성 왕씨(開城王氏)와 본성(本姓)이 박씨(朴氏)였으나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왕씨(王氏)의 성(姓)을 사성(賜姓)받은 제남 왕씨(濟南王氏)가 있다.

그 외 문헌에 전해지는 강릉 왕씨(江陵王氏)는 시조인 왕유(王裕)가 왕건(王建)의 아들이므로 결국 개성 왕씨(開城王氏)와 동근(同根)이며, 또 다른 계통의 강릉 왕씨(江陵王氏)는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주원(金周元)의 6대손인 김선희(金善希)의 아들 우(又)의 딸을 왕건(王建)이 비(妃)로 삼고 왕씨(王氏)의 성을 사성(賜姓)했으나, 그의 13대손 탄지(坦之) 대(代)에 이르러 강릉 김씨(江陵金氏)로 복성(復姓)하였다. 이 밖에도 강릉지방의 호족 순식(順式)이 왕성을 사성(賜姓)받았고, 발해(渤海)의 태자 대광현(大光顯)도 계(繼)라는 성명을 하사받고 종적(宗籍)에도 편입되었다.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누대(累代)에 걸쳐 송악(松嶽ㆍ개성의 옛 지명) 지방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집안으로서, 고려(高麗) 때 국조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에 추존된 왕국조(王國祖)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태조(太祖)의 증조부로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어 왕국조(王國祖)라 부르며, 일부의 주장에 그의 이름을 보육(寶育)이라 하나 보육은 그의 처 정화왕후(貞和王后) 강씨(康氏)의 친정아버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왕국조의 비(妃)를 정화왕후(貞和王后)로 기록하고 있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정화왕후를 강보육(康寶育)의 딸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정화왕후의 아들인 의조(懿祖ㆍ作帝建)의 아버지를 당 숙종과 정화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인용하며 의조(懿祖)의 아버지가 당 숙종이라는 이야기를 허구로 규정하였다.

 


▲ 개성 송악산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그의 제1왕비인 신혜왕후 류씨가 함께 묻힌 현릉(顯陵)과 왕건의 모습.



그의 증손으로 후삼국(後三國)을 평정하고, 500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문호를 연 태조(太祖) 왕건(王建ㆍ재위 918~943)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資質)이 비범하였다. 그는 20살 때 태봉국왕(泰封國王)인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을 세웠으며,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왕건(王建)은 궁예(弓裔)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어 벼슬이 시중(侍中ㆍ국정을 총괄하던 대신)에 이르렀는데, 궁예(弓裔)의 횡포가 날로 심해져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918년 신숭겸(申崇謙)ㆍ홍유(洪儒)ㆍ복지겸(卜智謙)ㆍ배현경(裵玄慶)등 중신(重臣)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랐다.

 
 
▲ 1397년 태조의 명으로 묘(廟)를 세우고, 1399년 고려 7왕의 제사를 지내고 문종이 이름을 내린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崇義殿).


 

그 후 34대 왕조(王朝)에 걸쳐 475년동안 왕씨(王氏)의 찬란한 문화는 꽃을 피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희군으로 왕업(王業)이 무너지면서 잔인한 정치적인 보복에 멸족(滅族)의 참변을 당하여 전(全)ㆍ옥(玉)ㆍ금(琴)ㆍ전(田)씨 등으로 변성(變姓)하고 혈맥(血脈)을 유지하였으며, 조선 정조(正祖) 때 와서 왕씨(王氏)로 환성(還姓)하고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따라서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으로 분파는 개성 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東陽君派)의 파조는 태조의 제15왕자인 원(垣)이며, 시중공파(侍中公派)는 제30대 충정왕(忠定王)의 맏아들인 제(濟), 안경공파(安慶公派)는 제23대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인 창(滄), 양양공파(襄陽公派)는 제20대 신종(神宗)의 둘째 아들인 서(恕), 평양공파(平壤公派)는 제8대 현종(顯宗)의 넷째 아들인 기(基)이다.
 

 
 
▲ 개성 왕씨 동양군파(東陽君派)의 족보.


 

원(垣)은 고려 태조(太祖)의 열다섯 번째 아들인 효은태자(孝隱太子)로, 어머니는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유금필(庾黔弼)의 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다. 정사(正史)에 그 이름이 빠져 있는데 동양군(東陽君)이라고도 불렸다. 성품이 사나워 군소(群小)들과 사귀어 몰래 다른 생각을 품으므로 광종(光宗) 때 사사(賜死)를 받았으나 아들 림(琳)과 정(禎)은 어리므로 죽음을 면하고 도망하여 민가에서 목숨을 이어오다 강조(康兆)가 정권을 잡았을 때 종실을 부흥시킬 것을 주청해, 작위를 주고 노비와 토지를 지급하여 종실의 적(籍)에 올리게 하였다.그후 림(琳)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있다 죽었고, 정(禎)은 태자첨사( 太子詹事 )ㆍ상경거도위(上輕車都衛)에 있다 현종 3년(1012년)에 죽었는데 시호는 온결(溫潔)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었다. 


 

▲ 1789년 출간된 개성 왕씨 족보의 첫째 권인 ‘고려성원록(高麗姓源錄)’.


강(康ㆍ?~1394)은 고려 왕실(王室)의 원친(遠親)으로 공민왕 20년(1371년) 회시(會試)에 합격했으나, 연소한 것으로 의심을 받아 다음 시험인 전시(殿試)가 정파(停罷)되었다. 뒤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동진사(同進士)ㆍ성균직학(成均直學)ㆍ강녕부승(江寧府丞)을 거쳐, 공민왕 23년(1374) 대군시학(大君侍學)ㆍ주부(注簿)와 우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을 역임한 후 성균좨주(成均祭酒)로서 서북면 안무사(西北面按撫使)가 되어 유리인(流離人)들을 안집(安集)했다. 공양왕 2년(1390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서 양광 전라 경상도 수군도체찰사 겸 방어영전 염철사(楊廣全羅慶尙道水軍都體察使兼防禦營田鹽鐵使)가 되고, 예조판서를 거쳐 밀직부사 겸 전라 경상 양광삼도 수군도체찰사(密直副使兼全羅慶尙楊廣三道水軍都體察使)가 되어 염철(鹽鐵)ㆍ조전(漕轉)ㆍ초토(招討)ㆍ영전(營田)ㆍ선성(繕城)의 일을 겸하여 조운(漕運)의 공이 많았고, 어염(魚鹽)의 이(利)로 국가의 재정(財政)을 튼튼히 했다. 1392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고 이 해 조선 개국으로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나와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追錄)되었으나 1394년 다시 대간(臺諫)ㆍ형조(刑曹)의 탄핵으로 공주(公州)에 유배, 이어 왕씨 일족이 화를 당할 때 살해되었다.
화(和ㆍ?~1394)는 고려의 왕족으로 아버지는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향(珦)이다.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으나 공양왕 4년(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주살될 때 도평의사(都評議司)의 탄핵을 받아 원지(遠地)로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 3년(1394년) 고려 종실들이 거제도(巨濟島)에 다시 갇힐 때 경북 안동(安東)에서 투옥되었으며, 이어 수원부(水原府)에 잡혀가 문초를 받고 주살(誅殺)되었다.

승귀(承貴ㆍ?~1394)는 고려의 왕족으로 우왕 4년(1378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1383년 밀지상의(密直商議)로서 금화(金化)ㆍ평강(平康)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파했다. 공양왕 1년(1389년) 양광도 절제사(楊廣道節制使)가 되어 이듬해 또 왜구를 격파, 뒤에 청주절제사(淸州節制使)를 지냈다. 공양왕 4년(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에게 살해될 때 그 일파로 몰려 원지(遠地)에 유배, 뒤에 풀려났다. 이 해 조선이 개국되자 그간 태조의 휘하에서 노고가 많았다 하여 태조 1년(1392년)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올랐으나, 태조 3년(1394년)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 등이 밀성(密城)의 맹인 이흥무(李興茂)에게 신국가의 안위와 공양왕의 복립 가부 등 왕씨의 운명을 점친 사건을 계기로 한 조정의 왕씨 일족 제거에 연관되면서 대간(臺諫)ㆍ형조(刑曹)의 탄핵으로 합포(合浦)에 유배되었다가 여러 왕씨와 함께 살해되었다.
승보(承寶ㆍ?~1394)는 고려의 왕족으로 우왕 6년(1380년) 왜구가 광주(光州)ㆍ능성ㆍ화순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원수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 우왕 9년(1383) 밀지상의(密直商議)로서 금화(金化)ㆍ평강(平康) 등지에서 왜구(倭寇)를 격파, 이듬해 10월에는 서해도상원수(西海道上元帥)로서 장연(長淵)에서 왜구에게 대패했다. 1387년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전 판사 박영무(朴英茂)의 부정을 조사하다가 그를 옥사시켰으며, 이해에 임주(林州)ㆍ한주(韓州)ㆍ홍산현(鴻山縣) 등에 입구한 왜구와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조 3년(1394년) 왕승귀(王承貴)와 함께 왕씨로서 무예가 출중하다는 이유로 대간과 형조의 탄핵을 받아 영흥에 유배되었다가, 이어 왕씨 일족이 화를 당할 때 함께 살해되었다.

 

 
 
▲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자리한 개성 왕씨 중시조인 왕미(王亹)의 묘는 
조선 고종말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게 뼈져린 수난의 역경의 딛고 일어선 왕씨(王氏)는 교서감(校書監)을 지낸 미(亹)를 시작으로 하여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고려가 망하자 왕씨(王氏) 성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죽이므로 미(亹)는 어머니의 성(姓)으로 변성(變姓)하여 충주에서 숨어 살았다. 이때 이웃 아이들과 놀다가 성이 왕씨(王氏)임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마침 태종(太宗)의 꿈에 고려 태조(太祖)가 나타나 왕씨를 함부로 살해한다고 호통치므로 태종이 크게 뉘우쳐 방면하였다. 이 때부터 고려 태조(太祖)의 후손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으며, 미(亹)는 제용감정(濟用監正)ㆍ전교서판교(典校書判校)에 추증(追贈)되었다.

흥(興ㆍ?~1401)은 선비(善妃ㆍ우왕의 비)의 아버지로 우왕 11년(1385년) 딸을 우왕에게 바쳤는데, 실은 변안렬(邊安烈)의 아들과 성혼시키려 하였으나 우왕의 강요에 의하여 납비한 것이었다. 이때의 직함은 전공판서(典工判書)였으며, 이로 인하여 우왕이 그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우왕 13년(1387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릂 거쳐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으며, 딸은 선비(善妃)에 봉해졌다. 같은 해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퇴위하자 다른 비부(妃父)들과 함께 유배되었고, 곧 사면되었으나 공양왕 3년(1391년)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고, 정종 1년(1399년) 대궐문 앞을 말 타고 지나간 일로 문하부(門下府)로부터 조정을 모욕했다는 탄핵을 받고 개성(開城)에 안치되었다. 1401년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이르렀다. 

 

 
 
▲ 절도사공파(節度使公派)의 파조인 왕종인(王宗仁)의 묘와 장군석.

 
 
▲ 병사공파(兵使公派)의 파조인 왕종지(王宗智)와 그의 아들 강릉부사 왕장(王璋)의 추모비.


 

순례(循禮)는 본명은 우지(牛知), 고려 현종의 원손(遠孫)으로 휴(休)의 후취(後娶)인 오씨의 소생 미(美)의 아들이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 왕조의 핍박을 피해 공주(公州) 왕촌(지금의 충남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로 추정)에 숨어 살았다. 그후 조선 왕조의 유화정책(宥和政策)으로 태조 6년(1397년) 고려 태조(太祖)를 비롯한 7대 왕을 제사지내는 묘(廟)가 중건되고, 문종 원년(1451년) 숭의전(崇義殿)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고려조의 충신인 정몽주 외에 고려 왕실의 후손들을 찾는 와중에 공주(公州)에 머물고 있다 발탁되어 우지(牛知)는 순례로 개명(改名)되었으며, 이듬해인 단종 원년(1452년) 7월에 숭의전(崇義殿) 부사(副使)가 되었다. 후손들은 대대로 숭의전의 전감(殿監) 또는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자리한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 왕
순례(王循禮)의 묘.


 

단종(端宗)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방연(邦衍)은 사육신을 중심으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발각되어 폐위된 상왕(上王) 노산군(魯山君ㆍ단종)을 왕명에 의해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가는 것을 호종하였으며, 세조 3년(1457년) 노산군에게 사약이 내려질 때 그 책임을 맡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였다. 그는 영월에 이르러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魯山君)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자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뜰 가운데 엎드려 있었고, 단종이 익선관(翼蟬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이때의 괴로운 심정을 읊은 시가 전하는데, 이 시에 대해 ‘장릉지(莊陵誌)’에는 금부도사(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가 밤에 굽이치는 여울의 언덕 위에 앉아 슬퍼하면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뒤 1617년에 김지남(金止男)이 금강에 이르러 여자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한문으로 단가를 지었다고 전한다.

 

 

 

 
▲ 1457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단종에게 사약을 전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바라보며 시조를 읊은 곳인 강원도 영월 비’.
  

 

득인(得仁ㆍ1556~1597)은 호는 남전(藍田), 아버지는 참봉 언기(彦起)이다. 정유재란 때 왜장 시마쓰[島津義弘] 등이 구례에 침입하여 읍이 함락되자 격문(檄文)을 내어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 의병을 이끌고 하동과 구례 사이의 통로 가운데 요새지인 석주관(石柱關)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나 왜군과의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곧이어 이정익(李政翼)ㆍ한호성(韓好誠)ㆍ양응록(梁應祿)ㆍ고정철(高貞喆)ㆍ오종(吳琮) 등이 다시 석주관에서 적을 맞아 항전하다가 죽음으로써 이들과 함께 세칭 석주관칠의사(石柱關七義士)라 불리고 있다. 순조 4년(1804년) 조봉대부(朝奉大夫)ㆍ사헌부 지평을 증직받았고, 1813년에는 정려가 세워졌다.


 

의성(義成)은 자는 덕보(德甫), 호는 서강(西岡),으로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부친 득인(得仁)이 석주관 전투에서 순절하자 분연히 일어나 부친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한호성(韓好誠) 등과 더불어 왜구에 대항하였으나 모두 순절하고 자신만이 살아 남자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산속에 숨어 살았다. 이후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북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인조 임금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충청도 청주에서 귀향하여 두문불출하며 여생을 보냈다. 순조 4년(1805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고, 남전사(藍田祠)에 제향(祭享)되었다.



희걸(希傑ㆍ?~1553)은 일명 시걸(時傑), 자는 사웅(士雄)으로 부사(府使) 무(懋)의 아들이다. 중종 29년(1534년) 생원(生員)이 되고 중종 38년(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인종 1년(1545년)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가 1546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다. 1550년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이 되고 이듬해 자산군수(慈山郡守)ㆍ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ㆍ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을 역임,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천거되었으나 병사했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던 1545년에 함경도 어사(咸鏡道御史)로 나가 있으면서 보우(普雨)가 안변 황룡사(黃龍寺)ㆍ석왕사(釋王寺)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계림군(桂林君)을 숨겨 주었다고 장계를 올렸다. 당시에는 조작한 말이라고 무시되었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고 조정 내부에서 배불(排佛)의 상소가 계속되자, 이 때의 그의 장계가 보우의 승직(僧職)을 삭탈시키는데 큰 증거가 되었다. 이황(李滉)ㆍ노수신(盧守愼)ㆍ홍섬(洪暹) 등 명유(名儒)와 교유하였으며, 문장ㆍ글씨ㆍ그림에 능하였다.

태(太)는 일명 한상(漢相), 호는 수리(數里), 한미(寒微)한 집안의 출신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영조ㆍ정조 때 천수경(千壽慶)을 중심으로 장혼(張混)ㆍ김낙서(金洛瑞)ㆍ박윤묵(朴允黙) 등과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시를 읊었으며, 윤행임(尹行恁)의 추천으로 왕 앞에서 시를 지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조령별장(鳥嶺別將)에 이르렀다. 

 
 
▲ 왕재일(王在一)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숙식을 (동아일보) 지국에서 하며 약간의 공부도 하면서 신문을 돌리고 있습니다. (중략) 오늘은 신유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입니다. 함께 거처하던 사무원들도 설을 쇠러가고 차가운 빈방에 혼자앉아 이것저것을 생각하니 번민이 일어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하다가 (중략) 한줄기 눈물로 설을 쇱니다(1921년 제야  왕재일)”.


 

그 밖에 한말(韓末) 독립운동가인 재일(在一ㆍ1903~1960)은 호는 호산(壺山), 광주(光州) 출신이다. 1926년 광주고보(光州高普)에 다니면서 비밀단체 성진회(醒進會)를 조직, 총무(總務)로 있다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에 가담하여 4년간 복역했다. 1936년 전남농민회(全南農民會) 사건으로 다시 3년 6개월간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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