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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초계 최씨(草溪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초계(草溪)는 경남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ㆍ합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때는 초계(草溪)로 하였고, 현종 9년(1018년)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숙왕 3년(1316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 있다.

▲ 초계 최씨 시조 최용궁(崔龍宮)과 중현조 7위의 유택이 자리한 전남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 도선산(道先山)과 최용궁신단비(崔龍宮神壇碑).

▲ 신재(新齎) 최산두(崔山斗) 유묵과 중종이 15▲최산두(崔山斗) 유묵과 중종이 1513년 하사한 옥홀(玉笏ㆍ전남유형문화재 제40호).

초계 최씨(草溪崔氏)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전주 최씨(全州崔氏)에서 분파(分派)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시조(始祖) 최용궁(崔龍宮)은 호가 운성(雲星), 시호가 문숙(文肅)이다.

전주 최씨(全州崔氏) 일파의 시조 최균(崔均)의 4세손으로 충렬왕 22년(129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충익대보조공신(忠翼戴保祚功臣)에 책록되어, 판사(判事)와 참찬(參贊)을 거쳐 광록대부 세자태부(光祿大夫世子太傅)에 이르렀다. 팔계군(八溪君ㆍ팔계는 초계의 옛 이름)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여 문호를 열었다.


최용궁(崔龍宮)의 장남 징(徵)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있다가 벼슬은 찬성사(贊成事ㆍ문하부의 정2품 관직)에 이르렀고, 징(徵)의 아들 덕강(德康)은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으며, 덕강(德康)의 아들 성일(成一)은 시호가 양경(良敬)으로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최용궁(崔龍宮)의 3남 당(?ㆍ1265~1330)은 자는 순부(純夫), 호는 송파(松坡)로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속했다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초계 최씨(草溪崔氏)는 13세 신재(新齎) 산두(山斗ㆍ1483~1536)를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산두(山斗)는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로 참봉(參奉)을 지낸 한영(漢榮)의 아들이다. 성종 14년(1483년) 4월 광양읍 산저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용모와 기개가 뛰어나고 학문을 좋아하여 9세 때 까마귀가 그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봉양함을 보고 그 효성에 감동하여 영오시(詠烏詩)를 지었다. 중종 8년(151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ㆍ홍문관의 정6품 벼슬)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호당(湖堂)에 뽑혔다. 뒤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지평(持平)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올랐으나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동복(同福ㆍ전남 화순군 동복면)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 윤구(尹衢)ㆍ류성춘(柳成春)과 함께 호남(湖南)의 3절로 알려졌으며, 동복(同福)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었다.

 

▲ (上)신재(新齎) 최산두(崔山斗)를 제향하는 전남 화순군 동복면 서삼리 도원서원(道源書院). (中下)최산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전남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봉양사(鳳陽祠)와 입구에 세워진 유허비.

▲ 전남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에 자리한 신재(新齎) 최산두(崔山斗)의 묘.
 

그는 슬하에 어모장군(御侮將軍)을 지낸 병길(丙吉)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정길(丁吉) 형제를 두었다. 손자 중 종원(宗元)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둘째 손자 종언(宗彦)은 벼슬을 마다하고 순창에 은거했다. 산두(山斗)의 아우 산후(山厚)는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를 지내다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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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계곡에 자리한 학사대(學士臺)에는 최산두(崔山斗)가 소년시절 10년 동안 공부한 바위굴이 있다.

그외에 이(?)는 자는 효형(孝亨)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전력부위 수문장(展力副尉守門將)이 되었으며, 규록(圭祿)의 아들 경모(璟模)는 고종 10년(1873년) 경과정시(慶科庭試ㆍ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적으로 보던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