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최)

강릉 최씨(江陵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세 계통(系統)이 있다. 첫째는 고려 왕건(王建)의 창업을 도와 삼중대광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영첨의 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경주계(慶州系), 둘째는 고려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전주계(全州系), 또 다른 한 계통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駙馬)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올랐던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始祖)로 하는 강화계(江華系)다.

최필달계(崔必達系)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에 의하면 시조 최필달(崔必達)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후예로 전해지나 정확히 고증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필달(崔必達)은 고려 초기에 경주 최씨에서 분적(分籍)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시조 김주원(金周元)이 강릉(江陵)으로 낙향할 때 최필달(崔必達)도 함께 온 것으로 설명된다.

최필달(崔必達)은 고려 초기 왕건(王建)을 도와 삼한통합(三韓統合)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이 되었으며, 영첨의 좌정승(領僉議左政丞)의 벼슬과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ㆍ경흥은 강릉의 별칭)에 책봉되어 강릉(江陵)이 본관(本貫)이 되었다. 그는 고려 초기 학문을 정립하고 예(禮)를 가르쳤던 문무(文武) 겸비의 학자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의 묘는 전하지 않으나 자손들이 시조를 기리기 위해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황산사(篁山祠)를 건립하였으며, 사당 앞에는 시조와 사당의 내력을 적은 황산사비(篁山祠碑)가 있다.

 ▲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최필달(崔必達)의 위패가 봉안된 강릉시 운정동 황산사(篁山祠ㆍ강원도유형문화재 제58호).

 

 

 

 

 

 

최필달계(崔必達系)는 낭장공파(郞將公派)ㆍ양근파(楊根派)ㆍ비인공파(庇仁公派)ㆍ용연동파(龍淵洞派)ㆍ행정파(杏亭派)ㆍ안동파(安東派)ㆍ수헌공파(睡軒公派)ㆍ문정공파(文正公派)ㆍ해창공파(海窓公派)ㆍ춘천파(春川派)ㆍ황주파(黃州派)ㆍ고성파(高城派)ㆍ정선파(旌善派)ㆍ생원공파(生員公派)ㆍ신리파(新里派)ㆍ경성파(鏡城派)ㆍ태안파(泰安派)ㆍ제학공파(提學公派)ㆍ충주파(忠州派)ㆍ장단파(長湍派)ㆍ냉정파(冷井派)ㆍ의주파(義州派)ㆍ덕원파(德源派)ㆍ능주파(綾州派)ㆍ사간공파(司諫公派)의 25개 파로 분파되었다.
 


 

최필달(崔必達)의 증손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최필달(崔必達)의 13세손 한주(漢柱)는 강릉 최씨(江陵崔氏)가 자랑하는 ‘삼군(三君ㆍ경흥부원군 必達·명주부원군 崇彦·명주군 漢柱)’ 중의 한 사람이다.


수헌공(睡軒公) 응현(應賢)의 신도비문을 인용하면 몽고의 임금이 고려를 시켜 일본을 치게 할 때 넓은 바다에서 회오리 바람을 뜻밖에 만나 쇠닻이 바다 밑의 바위틈에 걸리는 통에 바람에 닷줄이 끊어지려 하자 수군 장졸들이 모두 기가 죽어 실색했는데, 한주(漢柱)가 향을 피우면서 하늘에 호소하기를 “이 한 몸을 희생하여 여러 목숨을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빌기를 마치자 쇠망치와 정을 가지고 짐작하기도 힘든 틈이 벌어진 바위를 찾아서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닻을 빼내는 일을 해냈다. 몸을 솟구쳐 물 위로 올라와 보니 배는 이미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떠다니는 널판지를 얻어 죽지는 않았다. 혹은 자라 등에 업혀 뭍에 나올 수 있었다고도 전한다. 고향 사람들이 그 사실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도 울진에 있다.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으며, 출생 및 사망에 대한 사항은 알 수 없으나 울진(蔚珍) 죽포사(竹浦祠)에 배향되어 있다.

 

 ▲ 조선 세종의 명으로 최치운(崔致雲) 등이 편찬한 법의학서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 강릉시 대전동에 자리한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묘.

 

고려 말 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내고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역임했던 원량(元亮)의 손자 치운(致雲ㆍ1390~1440ㆍ국자생원 안린의 아들)은 자는 백경(伯卿), 호는 경호(鏡湖)ㆍ조은(釣隱)으로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선 태종(太宗) 17년(14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후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종 15년(1433년) 여진족 이만주(李滿住)가 변경을 침범하자 평안도 절제사(平安道節制使) 최윤덕(崔閏德)의 종사관이 되어 야인(野人) 정벌에 공을 세우고 돌아와 참의(參議)ㆍ승지(承旨)를 역임했고, 세종 21년(1439년)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건너가서 야인(野人) 회유에 관한 의논을 했으며, 그 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하여 외교적 공적을 쌓았다. 왕명(王命)을 받아 ‘대명률(大明律)’을 참고로 ‘무원록(無寃錄)’을 주해(註解)하여 위로는 형조(刑曹)로부터 아래로 군옥(軍獄)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옥사(獄事)가 없도록 하였고, 천성이 청백하여 왕이 내려준 전답(田畓)과 노비를 일곱 번이나 사양하였다. 뒤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으며, 세종 22년(1422년) 12월 그가 사망하자 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예관(禮官)을 보내 조문하였다고 한다. 묘는 강릉에 있고,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 조선시대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최치운(崔致雲), 최응현(崔應賢), 최수성(崔壽城) 등 강릉의 대표적인 학자 12명을 배향하는 강릉시 교동의 향현사(鄕賢祠ㆍ강원도유형문화재 제8호).

그는 평소에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왕이 절주(節酒)하라는 친서(親書)를 내리자 벽에 걸어 놓고 출입할 때마다 이를 보며 자성(自省)했다. 어쩌다가 바깥에서 폭음(暴飮)을 하고 오는 경우, 부인이 머리를 들어주면서 어찰(御札)이 붙은 벽을 가리키면 아무리 취중이라도 번번히 사죄하는 모습을 지었다고 하며, 술이 깨면 “내 임금의 은혜에 느껴서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기에 이른다”고 하였다.

어느 해 임금의 명을 받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어떤 관가(官家)의 대살나무 울타리 밑에 밥덩이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긴 여정으로 허기진 탓도 있었지만 농부가 땀을 흘려 수확한 쌀을 버린다는 것이 아까웠던 치운(致雲)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채를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줍는 체하면서 밥덩이를 주워 냉큼 삼켰다. 이때 지나가던 관상쟁이가 이 광경을 보고 “선생의 골상(骨相)에는 조상의 숨은 덕(德)이 많이 있는 터인데 오늘 밥덩이를 주운 일도 그 음덕(蔭德)에 의한 것입니다.”라고 치하했다. 일국을 대표하는 사신(종2품)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전혀 권위를 앞세우지 않았던 치운(致雲)의 소탈한 성품을 잘 말해 주는 일화다.

그는 사람을 알아보는 선견지명도 대단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태어난 지 8개월쯤 되었을 때 치운(致雲)은 우연히 그를 보고 장차 큰 일을 할 신동(神童)이라며 “이 아이의 이름을 내가 마땅히 지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치운(致雲)이 지어준 이름이 ‘시습(時習)’이었다. 매월당(梅月堂) 자신 또한 장성한 후에 “저 태어난 지 8개월밖에 안 된 아기 때에 이미 스스로 글을 깨쳤으며 척조(戚祖)이신 최치운(崔致雲)이 나를 시습(時習)이라고 이름지어 줬다”고 술회했다 한다.

 ▲ 최치운(崔致雲), 최응현(崔應賢), 최수성(崔壽城)의 신도비가 있는 강릉시 대전동 삼현비각(三賢碑閣).

치운(致雲)의 둘째 아들 응현(應賢ㆍ1428~1507)은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헌(睡軒), 세종 30년(144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단종(端宗) 2년(1454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직되었으나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이를 사양하고 자청하여 강릉훈도(江陵訓導ㆍ종9품)를 지낼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그후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 및 박사(博士)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성종 11년(1480년) 모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한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ㆍ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ㆍ예조참의(禮曹參議)ㆍ대사헌(大司憲)ㆍ경주부윤(慶州府尹)ㆍ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및 공조ㆍ형조ㆍ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연산군 11년(1505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임명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 중종 31년(1536년) 만들어진 자격루(自擊漏ㆍ국보 제229호)의 청동제수수통에 ‘製造 工曹判書 崔世節’이라 양각되어 있다.

 

응현(應賢)의 셋째 아들 세절(世節ㆍ?~1535)은 호는 매창(梅窓)으로 연산군 4년(1498년) 소과(小科)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급제하고, 연산군 10년(1504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중종 원년(1506년)에 왕에게 상소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정6품)에 올랐고,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으면서 호당(湖當ㆍ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다. 그후 이조정랑(吏曹正郞) 및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있으면서 승정원 지제고(承政院(知制誥)의 업무도 맡아 임금의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는 일도 겸하였다. 중종 15년(1520년) 동부승지(同副承旨),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 그해 11월에 좌부승지(左副承旨) 겸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일했다. 그후 황해(黃海)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대사헌(大司憲)ㆍ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호조판서(戶曺判書)에 올랐으나 주위의 모함을 받자 판서직(判書職)을 사양하고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인 외직(外職)으로 물러나 있다가 중종 30년(1535년) 사망했다. 


 

 

 

 

 

 

 ▲ 충암(沖菴) 김정(金淨)이 고봉(孤峰)이라 칭하고 학문을 연마하던 삼파연류봉(三派連溜峰) 정상에 최수성(崔壽城)이 고봉정(孤峯亭)을 세우고 은거했다. 후에 구수복(具壽福)이 이어받았고, 5대손 구봉우(具鳳羽)가 퇴락해 있던 정자를 봉우리 아래로 옮겨 현재의 고봉정사(孤峯精舍)를 지었다.

 

응현(應賢)의 손자로 생원(生員) 세효(世孝)의 아들인 수성(壽城ㆍ1487~1521)은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 또는 북해거사(北海居士)로 어려서부터 의지와 기개가 남과 다르고 지혜가 뛰어나 9살에 이미 문장에 일가를 이루어 주위 사람들에게 천재라는 칭호를 받았다. 당시의 시인 홍유손(洪裕孫)이 그를 보고 경탄하며 “이 아이는 세속 바깥의 인물이므로 마땅히 깊은 골짜기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문장과 서예와 미술ㆍ음악 네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사람들은 그를 ‘사절(四絶)’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그는 학문에만 열중하고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았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과 함께 학문을 닦고, 혼탁한 세상에서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며 전국 명산을 찾아 다니며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며 선비의 도를 지키고 거문고로 산해곡(山海曲)을 타며 회포를 풀었다.

 ▲ 강릉시 운정동 황산사(篁山祠)에 세워진 문정공(文正公) 최수성(崔壽城)의 묘정비(廟庭碑)와 유묵.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주위의 모함으로 조광조(趙光祖) 일당과 음모하였다 하여 문초관(問招官)이 문초하니 고문을 받으면서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광조(光祖)와 당을 이루어 국정에 참여하다니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일생 배운 바는 오직 충(忠)ㆍ효(孝)뿐이다.”라고 했다. 동지들이 처형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명산을 유람하다가 중종 16년(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간신들의 모함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가로지르고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려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강릉의 향사에 배향되었다.

 ▲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문정공(文正公) 최수성(崔壽城)을 제향하기 위해 두 가문에서 세운  강릉시 구정면 제비리 화동서원(華東書院). 현판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세절(世節)의 증손이며 수성(壽城)의 손자인 기벽(基鐴ㆍ1573~1645)은 광해군 4년(161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생원(生員)이 되었다. 광해군(光海君) 5년(1613년)에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로 있으면서 이이첨(李爾瞻)의 심복들이 여론을 조작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을 상소하자 대궐에 나가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졌나이다.”라고 반대하다가 당시의 세도가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고 동생 기백(基銆)과 함께 금고형(禁錮刑)을 받아 원주(原州)로 내려가 살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그 억울함을 풀었다. 후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인조(仁祖)가 강화도로 갈 때 호위하였다. 숙종 2년(1676년)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ㆍ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 취석(醉石) 최문발(崔文潑)이 창건한 후 새로 지어진 취석정(醉石亭)과 최문발(崔文潑)이 아래 냇가의 돌에 새겨진 바둑판과 ‘醉石’이란 두 글자.

 

 

 

 

 

 

기벽(基鐴)의 슬하에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문오(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고, 차남 문활(文活)은 군수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셋째 문발(文潑ㆍ1607~1673)은 호는 취석(醉石)으로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탈하고 시주(詩酒)와 더불어 보내며 595수(首)의 주옥 같은 시(詩) 3권 2책에 담은 ‘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남겼다. 막내 문식(文湜ㆍ1610~?)은 인조 8년(1630년) 중형인 문활(文活)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헌종(憲宗) 때 장령(掌令)과 헌납(獻納)을 지내고 숙종조(肅宗朝)에 황해도 관찰사ㆍ승지(承旨)ㆍ대사간(大司諫)ㆍ예조참판ㆍ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했다.

배천(配天ㆍ1565~1640)은 경성부 남주북면(鏡城府南朱北面)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자주성(自主性)이 강하고 정의(正義)로웠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백의창의(白衣倡義ㆍ벼슬없이 의병을 일으킴)하여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 등과 왜병을 물리쳤으며, 선조(宣祖)가 그 공을 치하(致賀)하여 망건(網巾)을 비롯한 많은 상품을 하사(下賜)하면서 군기사 판관(軍器寺判官ㆍ종4품)의 벼슬을 주었다. 광해군 8년(1616년) 조산대부 회령교수(朝散大夫會寧敎授)를 지내고, 조봉대부(朝奉大夫)ㆍ사복시(司僕寺ㆍ궁중의 수레와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직)를 제수했다. 인조 18년(1640년)에 사망하여 창렬사(彰烈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강릉최씨시조숭모비(江陵崔氏始祖崇慕碑).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

 

최흔봉계(崔欣奉系) 시조 최흔봉(崔欣奉)은 고려 태조(太祖)의 딸인 오경대주(玉慶大主)를 맞아 부마(駙馬)를 지냈으며, 그의 11세손 입지(立之)가 고려 말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삼았다. 그 선계(先系)는 전주 최씨(全州崔氏)인데 전주(全州)와의 계대(繼代)를 찾지 못하고 있다.

강릉군(江陵君) 입지(立之)는 자는 양필(良弼), 호는 성묵당(誠默堂)으로 충렬왕 1년(127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의 선조는 원래 완산주(完山州ㆍ전주)에 거주하였으나 입지(立之)가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강릉(江陵)으로 바뀌었다. 벼슬은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匡靖大夫門下平理上護軍)을 거쳐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후에 충익사공신(忠翊社功臣)으로 검교태보 문하시랑(檢校太保門下侍郞)과 성찬화안사공신(成贊化安社功臣) 태사개부의동삼사상서우정승상주국(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右政丞上主國)에 증직되었다. 조선 개국 후 수태사태상(守太師太常)으로 증직되었고, 세종 때에는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숙(忠淑).

 ▲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 자리한 충숙공(忠淑公) 최입지(崔立之)의 묘역에는 7개의 묘가 있는데, 실제 묘는 오른쪽 1개라고 한다. 

 

 

 

 

 

 

입지(立之)의 맏아들 안소(安沼)는 평장사(平章事)로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차자 안빈(安瀕)은 문관으로 전서(典書ㆍ판서직 벼슬)를 역임한 후 예성군(芮城君)에 각각 봉해졌으며, 삼남(三男) 안언(安彦)은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올랐다.

안소(安沼)는 충숙왕 때 경상도 존무사(慶尙道存撫使)에 임명되었고, 충목왕 3년(1347년) 통정대부 안동판관(安東判官)에 임명되었다. 벼슬이 삼중대광 문하시중 동중서평장사 예부사(三重大匡門下侍中同中書平章事禮部事)에 올라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공민왕 때에 순성보리공신(純性輔理功臣)에 책봉되어 다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안소(安沼)는 정사(政事)에 오직 청백(淸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생활을 넉넉하게 해 주었고, 굶주림을 덜어 주었다. 충정왕 때 음죽별감(陰竹別監)이 되었을 때 관직에 나가 근실하고 검소하여 부정하게 재물을 모은 자들의 재산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기도 하였다. 녹사(錄事) 김용기(金龍起)가 음죽별감(陰竹別監)으로 있으면서 백성의 재산을 많이 빼앗고 국가 재산을 훔쳤던 일이 발각되어 헌사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김용기는 지평(持平) 안소(安沼)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너는 음죽(陰竹)에 있을 때 백성의 재산을 빼앗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어찌 도적이 도적을 심문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김용기(金龍起)를 석방하라고 하였다. 이때 안소(安沼)는 “김용기는 나라의 좀도둑이니 지금 그를 석방하면 사람들에게 도적질하도록 장려하는 것으로 됩니다.”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공민왕 10년(1361년) 11월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과 공주가 태후(太后)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할 때 안소(安沼)를 양광도순문사(楊廣道巡問使)에 임명하였다. 공민왕 23년(1374년) 봄에 사직하고자 청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이르기를, “최평장(崔平章)은 시종일관 청렴한 신하인데, 어찌하여 나를 등지고 은거하려 하는가?” 하며 특별히 허락하고 궤장(机杖)을 하사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

 ▲ 태조 4년(1395년) 나라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것을 치하하기 위해 최유련(崔有漣)에게 발급한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ㆍ보물 제1282호).

 

 

 

 

 

 

안소(安沼)의 장남 유련(有漣)은 공민왕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공신으로 강릉군에 봉해졌다. 태조 1년(1392년) 경상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로 있을 당시 왜구에게 사로잡혔다가 몰래 도망쳐 나온 명나라 사람 이순 등을 구해 주었다. 후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역임하였다.

유련(有璉)의 아들 이(迤ㆍ1356~1426)는 자는 유명(惟明), 초명(初名)은 원(遠)으로 처음 벼슬로 도평의사사지인(都評議使司知印)을 지냈고, 공양왕 2년(1390년)에는 사헌집의(司憲執義)가 되었다.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있을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던 이방원(李方遠)과 친교를 맺어 조선 개국에 기여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 중추원 우부승지(中樞院右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태조 3년(1394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승진하고, 정종 2년(1400년)에는 좌군총제(左軍摠制)로 대사헌을 겸직하였다. 1405년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 1412년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1413년에는 공조판서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와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세종 2년(1420년)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가 되었으나 부하가 공금을 착복한 것을 관리하지 못하였다는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1424년에 재기용되어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가 되었고, 명나라 태종이 죽자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숭록대부(崇祿大夫ㆍ종1품)가 되었다. 시호는 희경(僖景).

입지(立之)는 아들 안소(安沼)와 손자 유련(有璉) 등 3대가 모두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그들이 살던 곳인 현재의 강릉시 장현동 모산의 지명을 평장동(平章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일족을 평장 최씨(平章崔氏)라 일컫게 되었으니 강릉의 큰 명문거족(名門巨族)이 분명하다.

그외 수(洙ㆍ1443~1472)는 자는 도원(道源), 호는 춘헌(春軒)으로 평장사(平章事) 강릉군(江陵君) 입지(立之)의 5세손이며, 아버지는 음직(蔭職)으로 교수(敎授)가 된 여남(汝南)이다. 세조 12년(1466년)에 왕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동 일대를 순시할 때 오대산(五臺山) 어림대(御林臺)에서 별시(別試)를 개최하면서 숭불문(崇佛門)과 벽불문(闢佛門) 2개를 설치하고 무사로 하여금 벽불문(闢佛門)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모두가 숭불문(崇佛門)을 통과였는데 수(洙)가 벽불문(闢佛門을 통과하려 하자 무사들이 그를 철추(鐵椎)로 치려 하였다. 이에 왕이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의사(義士)라고 칭하였다. 이후 세조 14년(1468년)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었으며 성종 3년(1472년)에는 불도(佛道)의 횡행과 단종(端宗)이 복위되지 못함에 분개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비답(批答)은 하지 않고 그를 진잠현감(鎭岑縣監)에 제수하였다. 성종 12년(1481년) 박천(博川)과 서천군수(舒川郡守)를 지냈으며, 그 뒤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숙종 8년(1682년)에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최문한계(崔文漢系) 시조 최문한(崔文漢)은 호가 충재(忠齋)이며,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駙馬)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이다. 그는 기상이 웅위(雄偉)하고 일의 처리가 명쾌해서 삼도(三道)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고려 말 국운이 다하자 고려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ㆍ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은거하였으며, 그 후 강화로 이주하였다가 강릉(江陵)으로 낙향하였다. 그의 선계(先系)는 고려 때 문과(文科)에 올라 위국공(偉國公)이 된 최전(崔佃)이며,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강릉(江陵)으로 정하고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강릉시 유천동(楡川洞) 마명산(馬鳴山)에 자리한 시조 최문한(崔文漢)의 묘.

 

 

 

 

 

 

전설에 의하면 시조 최문한(崔文漢)이 송경(松京)에서 강릉으로 올 때 타고 온 애마(愛馬)가 문한(文漢)이 사망하던 날 강릉 옥천동 대창역 남쪽 큰 길가에 있는 못에 빠져 죽었으나 곧 용(龍)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그 후부터 그 못을 용지(龍池)라고 불렀으며, 못가에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 다른 얘기로는 늘 말을 타고 다니던 최문한(崔文漢)이 개경에서 돌아와 못 가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에 말고삐를 매어 놓았는데, 갑자기 못 속에서 안개가 구름처럼 솟아 올랐다. 그러자 그의 말이 크게 울면서 못 가운데로 뛰어들어 운무(雲霧)를 타고 용(龍)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이 연못을 용지(龍池ㆍ강원도기념물 제3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최문한계(崔文漢系)는 부사공파(府使公派)ㆍ통정공파(通政公派)ㆍ참봉공파(參奉公派)ㆍ훈도공파(訓導公派)ㆍ참의공파(參議公派)ㆍ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ㆍ진사공파<형>(進士公派<泂>)ㆍ판서공파(判書公派)ㆍ교수공파(敎授公派)ㆍ부정공파(副正公派)ㆍ진사공파<호>(進士公派<浩>)ㆍ참판공파(參判公派)로 분파되었다.

 ▲ 최문한(崔文漢)의 애마(愛馬)의 전설이 전하는 강릉시 옥천동 용지(龍池)의 기념각.

 

 

 

 

 

 

그런데 이 파는 같은 강릉 최씨(江陵崔氏)이면서도 시조가 다르다고 하여 강릉 최씨(江陵崔氏)에서 분적(分籍), 수 백년 전부터 강릉 최씨와 통혼(通婚)을 하고 있다. 일제 때에도 호적법(戶籍法)에 강릉 최씨만은 동성동본(同姓同本)끼리 상혼(相婚)할 수 있는 특례가 있었다고 한다.

 ▲ 강릉시 종암(鍾岩)에 자리한 좌승지(左承旨) 최윤(崔允)과 부인의 묘(右).

 

 

 

 

 

 

후손들로는 그의 손자 윤(允)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둘째 자호(自湖)는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막내 자점(自霑)은 세조(世祖) 11년(1465년) 진사(進士)와 생원(生員) 양시에 합격하였고, 성종(成宗) 3년(1472년)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있었으나 간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고성군수(固城郡守)로 나갔다. 이 때 강원도 감사 박원종(朴元宗)이 간신들이 사주를 받아 자점(自霑)을 파직시키기 위해 자점(自霑)의 재산을 조사하였는데, 재산이 겨우 서책 몇 권뿐이었음을 알고서 이에 탄복한 박원종(朴元宗)이 자점(自霑)을 찾아가 사죄하였다고 한다. 그후 홍문관 교리(弘文管校理)를 지내고 평강(平康)ㆍ고성(高城)ㆍ금성(金城) 등지의 군수(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겨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 강릉시 종암(鍾岩)에 자리한 최자점(崔自霑)과 부인의 묘(右).

 

 

 

 

 

 

연(演ㆍ1500~1549)은 자는 연지(演之), 호는 간재(艮齋)로 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세건(世健)이며 정언(正言) 자점(自霑)의 손자이다. 중종 14년(1519년)에 진사가 되고, 152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들어가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어 저작(著作)이 되어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수찬(修撰)ㆍ정언(正言)ㆍ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고, 이조정랑(吏曹正郞)ㆍ응교(應敎)ㆍ직제학(直提學)ㆍ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간(大司諫)ㆍ도승지(都承旨)에 나아갔다. 이어 지신사(知申事)로 품계를 더하고,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1546년 이조참판ㆍ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고, 이듬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승진하였다. 1548년 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知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를 거쳐 1549년에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귀국 도중 평양에서 죽었다. 좌찬성(左贊成) 겸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양(文襄)이다.

 ▲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신리에 자리한 문양공(文襄公) 최연(崔演)의 묘.

 

 

 

 

 

 

연(演)의 조카 운우(雲遇ㆍ1532~1605)는 명종 7년(1552년) 생원에 급제하였고,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는 못했다. 명종 9년(1554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와는 24살 때부터 교류하며 도의지교(道義之敎)로 사귀었다. 이밖에도 당대의 유학자인 성혼(成渾)ㆍ정탁(鄭鐸)ㆍ정유일(鄭惟一)ㆍ양사언 (楊士彦) 등과 교유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순후하여 마을사람들이 존경하고 복종하였다고 한다. 선조 28년(1595년) 횡성현감(橫城縣監)으로 부임해 갈 때 이달(李達)이 그에게 보낸 시에서 “앞길이 험하고 세월도 별로 인데, 그대가 임무 띠고 먼 길을 가는구만. 뛰어난 재주는 옛 일을 회상케 하고, 보잘 것 없는 벼슬 평생토록 부담될 걸세. 바닷가 언덕에는 매화가 만발하고, 산과 들 여기저기 새소리 구성지네. 헤어지는 이 마음 쓸쓸하기 짝이 없어, 경치에 마음을 달래보나 이별의 정을 어이 이기리.”라 하였다. 운우(雲遇)는 현감에 부임한 지 몇 달 뒤 노환을 핑계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나 강릉부 북쪽 50리 되는 신리면 향동산(香洞山)에 묘를 썼다고 한다.

그 외에 자점(崔自霑)의 증손이며 해(瀣)의 아들인 운부(雲溥ㆍ1548~1575)는 자(字)는 대중(大中), 호는 내한(內翰)으로 선조 3년(1570년) 식년시 을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한림원(翰林院ㆍ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인조(仁祖) 때 문과에 급제, 문장(文章)ㆍ서예ㆍ성명(聲名)ㆍ음율(音律) 등에 능하고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낸 응천(鷹天)이 강릉 최씨를 더욱 빛냈다.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