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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동주(東州)는 철원(鐵原)의 옛 이름으로 강원도 북서부, 영서지방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 철원(鐵原)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군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로 고쳤고, 성종 14년(995년)에 단련사(團鍊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년) 이를 없애고, 현종 9년(1018년) 지동주사(知東州事)를 두었다가 고종(高宗) 때 강등하여 현령(縣令)을 두었다. 그 후 승격하여 목(牧)이 되었으며, 충선왕 2년(1310년)에 철원부(鐵原府)가 되었다. 조선시대인 태종 13년(1413년)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으며, 고종 32년(1895년)에 철원군으로 고친 후 1931년 철원읍(鐵原邑)으로 승격되었다.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시조(始祖) 최준옹(崔俊邕)은 득성시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2세손인 계양성(桂陽聖)의 증손으로 본래 신라인(新羅人)이었으나 창원(昌原ㆍ현재의 鐵原)에서 살았다.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개국에 진력하였으며, 왕건이 태조(太祖)가 된 후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에 책록되어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 경기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학저수지 옆 솔밭에 자리한 동주 최씨 시조, 2·3·5세, 6·7·8세 각 1기의 단비(壇碑).

준옹(俊邕)의 증손인 석(奭)은 시호는 예숙(譽肅)으로 문종 5년(1051년)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려의 최고 중앙정치기관인 좌습유(左拾遺ㆍ종5품 관직)를 시작으로 문종 29년(1075년)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어 4월 요(堯)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 뒤 돌아와 전중감(殿中監)ㆍ지어사대사(知御史臺史)가 되었고, 이듬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올랐다. 1080년 동번(東藩)의 난이 일어나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를 진압하고 이듬해 이부상서 겸 참지정사(吏部尙書兼參知政事)에 전직,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1083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선종 3년(1086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을 역임하고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최유선(崔惟善)ㆍ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동주(東州)에 퇴거하여 후손들이 세거한 데서 관향(貫鄕)이 연유한다고 한다.



 

 

 ▲ 동주 최씨 시조·2세3·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둔지산에 세운 망배단(望拜壇).

 

현재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둔지산(頓地山)에 동주 최씨 4세로 고려조의 문종(文宗)ㆍ순종(順宗)ㆍ선종(宣宗)의 삼조(三朝)에 걸쳐 벼슬을 지낸 예숙공(譽肅公) 석(奭)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예숙공의 묘역이 위치한 둔지산(頓地山)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일명 뱀산이라 일컫어지고 있는데, 동주 최씨 대종회에서는 이곳에 시조(始祖) 최준옹(崔俊邕)과 2세 은숙(殷叔), 3세 원립(爰立)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효친애족(孝親愛族)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2002년 10월 20일 동주 최씨 망배단(望拜壇)을 세웠다.

동주 최씨(東州崔氏)는 4개로 분파되었는데, 5세 유청(惟淸)의 아들 대에서 분파된 지후공파(祗候公派), 6세 당(讜)의 자손들인 정안공파(靖安公派)와 문의공파(文懿公派), 9세 원중(元中)의 자손들인 원외공파(員外公派)로 나누어졌다.

 ▲ 예숙공(譽肅公) 최석(崔奭)이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와 이부상서 겸 참지정사(吏部尙書兼參知政事)를 지냈다는 ‘고려사(高麗史)’ 9권 세가 9권의 기록과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자리한 묘.

 

 

석(奭)은 나이 70세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당대의 문장가 유청(惟淸ㆍ1095~1174)이다. 유청은 자는 직재(直哉), 시호는 문숙(文淑)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예종(睿宗)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학문이 넉넉하게 된 뒤라야 벼슬에 오르겠다” 하며 두문불출하고 오직 글만 읽었다. 주위에서 벼슬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곧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읍니다”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오랜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으나 인종(仁宗) 초에 이자겸(李資謙)의 간계로 파직, 이자겸 몰락 후 내시(內侍)에 속했다가 인종 10년(1132년)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 ‘동문선(東文選)’ 권4에 실려 있는 최유청(崔惟淸)의 한시 ‘잡흥(雜興)’.

 ▲ ‘고려사(高麗史)’ 99권 열전 12권의 문숙공(文淑公) 최유청(崔惟淸)의 열전. 클릭!

 

 

1142년 간의대부(諫議大夫)로서 금(金)나라에 가서 책명(冊名)을 사(謝)하고 돌아와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고, 이듬해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1151년 판병부(判兵部事)를 겸직했다. 이해 처남인 낭중(郎中) 정서(鄭敍)와 왕제(王弟) 대령후(大寧侯) 경(暻)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관련되어 남경유수사(南京留守使)로 좌천, 1157년 대령후(大寧侯) 경(暻)이 천안부(天安府)에 유배될 때 또 충주목사(忠州牧使)ㆍ광주목사(廣州牧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의종 15년(1161년)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고 명종 2년(1172년) 수사공(守司空)ㆍ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ㆍ판예부사(判禮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경인난(庚寅亂ㆍ1170년 정중부가 주축으로 무인들이 일으킨 반란)과 고려 명종 때 장군 김보당(金甫當)이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을 물리친 계사(癸巳)의 난(亂)에 문신(文臣)들이 모두 해(害)를 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그의 덕망에 경복(敬服)하였으므로 친척들과 함께 모두 화를 면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불경(佛經)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그가 집필한 저서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와 ‘유문사실(柳文事實)’은 왕이 보고 칭찬하여 판목(版木)에 새겨 전하였다고 하며, 그는 독자(獨子)로 태어났으나 슬하에 8남 2녀를 낳아 이로부터 가문이 번창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99권 열전 12권 제신(諸臣)의 정안공(靖安公) 최당(崔讜) 기록.

 

당(讜ㆍ1135~1211)은 유청(惟淸)의 넷째 아들로 글을 잘 짓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며 명성과 공적을 남겨 명망이 한 시대에 두터웠다. 명종 1년(1171년) 우정언(右正言)으로 승선 이준의(李俊儀)와 문극겸(文克謙)의 대성(臺省) 겸관을 사면(辭免)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을 거쳐 1183년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오몽림(吳夢霖)ㆍ김우(金瑀) 등을 뽑았다. 1197년 참지정사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민공규(閔公珪)와 함께 진사 방연보(房衍寶) 등 30인을 뽑았다. 신종 때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고, 신종 2년(1199년)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쌍명재(雙明齋)를 설치하였고, 아우 선(詵)과 장자목(張自牧)ㆍ고영중(高瑩中)ㆍ백광신(白光臣)ㆍ이준창(李俊昌)ㆍ현덕수(玄德守)ㆍ이세장(李世長)ㆍ조통(趙通)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여 시주(詩酒)로써 소일하니 당시에 지상선(地上仙)으로 불렸다. 시호는 정안(靖安).

 ▲ 정안공파(靖安公派)의 파조  정안공(靖安公) 최당(崔讜)과 그의 후손들의 단소(壇所).

당(讜)의 동생 선(詵ㆍ?~1209)은 명종 8년(1178년) 공부낭중(工部郎中)으로 흥화도 찰방사(興化道察訪使)를 겸한 뒤 우사간(右司諫)이 되어, 태후의 동생인 중 충희(충曦)가 궁중에서 궁녀들과의 음란한 행위를 탄핵하다가 삭출(削黜)되었다. 1186년 판장작감(判將作監)이 되고, 1192년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을 교정하고, 또 ‘태평어람(太平御覽)’을 교정ㆍ간행했다. 1186년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신종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신종 3년(1200년) 수태부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傅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에 특진되고 이듬해 개부의동삼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上柱國)이 되었다. 1202년 식목도감사(式目都監事)로 활동하였으며, 1204년 당시의 집정자였던 최충헌(崔忠獻)과 함께 신종의 선위(禪位)를 의논하였다. 1209년 문하시랑 평장사로 죽었다. 희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



 

 

 ▲ ‘고려사(高麗史)’ 99권 열전 12권 제신(諸臣)의 문의공(文懿公) 최선(崔詵) 기록.

 

선(詵)의 아들 종준(宗峻)과 종자(宗杍)도 당대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종준(宗峻ㆍ?~1246)은 신종 4년(1201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 초에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역임하고 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궤장(机杖)을 하사 받았다. 의학에 정통하여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을 저술했으며, 사치한 생활을 했다. 종준(宗峻)의 동생 종자(宗杍)도 고종 12년(1225년) 위위경(衛慰卿)으로 과거시험의 감독관을 거쳐 고종 23년(1236년)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 ‘고려사(高麗史)’ 99권 열전 12권 제신(諸臣) 최종준(崔宗峻) 기록과 1239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국사(守國寺) 고려 불상과 복장(腹藏)에서 나온 다라니경. 다라니경 왼쪽에 선숙공(宣肅公) 최종준(崔宗峻)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讜)의 손자 인(璘ㆍ?~1246)은 성격이 호탕해 술과 놀이를 좋아했다. 30세에 독서를 시작한 뒤 강종(康宗) 때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지내고, 고종 24년(1237년) 나주부사(羅州副使)가 되어 지휘사(指揮使) 김경손(金慶孫)과 함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1241년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몽고에 볼모로 가는 영녕공(永寧公) 준(綧)을 수행했고, 고종 41년(1254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몽고 장수 차라다이(車羅大)가 주둔한 합주 단계현(陜州丹溪縣)에 가서 철병을 청하고 사신으로 몽고에 가서 화친에 힘썼으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죽음에 임하여 처자가 울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어디를 의지하고 사느냐” 하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너희들은 오랑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더니 뒤에 과연 그 말과 같이 오랑캐 군사에 함몰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景).



인(璘)의 아우 징(澄)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징(澄)의 아들 유(濡)는 선종 7년(109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교감(敎書校勘)ㆍ중서 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예종 6년(1111년)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인종 6년(1128년) 이부상서(吏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인종 16년(1138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올랐다.

 

 ▲  ‘고려사(高麗史)’ 99권 열전 12권 제신(諸臣)의 문신공(文信公) 최온(崔昷) 기록. 클릭!

종자(宗杍)의 아들 온(昷ㆍ?~1268)은 유청(惟淸)의 증손으로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내고, 고종 45년(1258년)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권신 최의(崔竩)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김준(金俊) 등과 참여했으나 아들 문본(文本)이 중랑장(中郞將) 이주(李柱) 등과 함께 이 모의 사실을 최의(崔竩)에게 보고했다. 최의(崔竩)가 김준(金俊) 등의 야습으로 살해된 뒤에 앞서의 밀고 사실이 발각되어 아들이 섬으로 유배되자 이에 대해 원망한 것이 김준(金俊)에게 알려져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얼마 후 장군(將軍) 이주인(李柱仁)의 청으로 풀려 나와 원종 1년(1260년) 추밀원사(樞密梡使)에 복직하고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거쳐 원종 3년(1262년) 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낸 후 수태부 중서시랑 평장사(守太溥中書侍郎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시호는 문신(文信).

 ▲ ‘고려사(高麗史)’ 99권 열전 12권 제신(諸臣)의 최옹(崔雍) 기록.

옹(雍ㆍ?~1292)은 유청(惟淸)의 증손이며 정소(貞紹)의 아들로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관승(大官丞)을 거쳐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이 태손(太孫) 때 그 스승이 되었다. 충렬왕 6년(1280년) 정랑(正郞)으로서 경사교수(經史敎授)를 겸임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충렬왕 18년(1292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ㆍ문한학사(文翰學士)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자리한 최영(崔瑩)의 아버지인 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 최원직(崔元直)의 묘.

 

문신(文臣)들의 권세가 압도적인 비중으로 흘러온 시대에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대표적인 인물은 고려조의 명장이고 충신인 영(瑩ㆍ1316~1388)이다. 그는 유청(惟淸)의 후손인 원직(元直)의 아들로 태어나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 번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우달치(迂達赤ㆍ임금의 신변을 호위하던 숙위병)가 되어 공민왕 1년(1352년)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호군(護軍)에 임명되면서부터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그 때부터 무예와 용기가 뛰어난 것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원나라의 요청으로 류탁(柳濯) 등과 함께 중국이 고우(高郵)ㆍ사주(四州) 등지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평하고 돌아와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 세력을 용감히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데 큰 영향이 미치도록 하였다.

공민왕 7년(1358년) 왜적이 오예포(五乂浦)를 침범하므로 복병을 베풀고 있다가 싸워 이를 격파시켰고, 공민왕 8년(1359년)에는 중국의 홍건적 4만 명이 서경(西京ㆍ평양)을 침범하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그 공으로 일등도형벽상공신(一等圖形壁上功臣)이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의 벼슬을 받았다. 그 외 수많은 국내외 침입과 반란이 있을 때마다 격퇴ㆍ평정하여 고려의 시련을 극복하였다. 그는 성품이 굳세고 충성되었으며 전장에 임하여 적을 대하였을 때에도 그 정신과 의기가 안정되어 있었으며, 화살과 포탄이 좌우로 날아와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군사를 다루는 데도 엄격하여 군사가 싸움 마당에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면 당장에 군법을 시행한 까닭으로 크고 작은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 (上)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왕산 국사당의 무민공(武愍公) 최영 화상(중요민속자료 제17-17호) 및 경남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무민사(武愍祠)에 봉안된 최영 화상. (下)최영(崔塋)이 남해안 일대의 왜구들을 물리친 전공을 기리기 위해 남해군 주민들이 1470년 지은 사당인 무민사(武愍祠)는 1494년 완공되었으며, 최영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어 장군당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죽음에 임하여 “너는 꼭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하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하여 기쁜 마음과 정성스러운 태도로 일하며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아 의복과 음식은 검약하고 소박하였으며, 때로는 끼니가 떨어지는 일까지 있었다. 비록 신분이 장상(將上)의 최고 지위에 있었고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비굴한 행위를 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청렴결백한 뜻에 감복하였다. 옳지 못한 행위를 보면 통렬히 배척하였으며 강인한 성품 탓으로 주위의 모함을 받아 한 때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고 억울하게 귀양가기도 했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왕위(王位)를 폐하고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충신들을 참형(斬刑)하니 500년 고려 사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로 죽음에 임하여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내가 평생에 탐욕한 마음을 가졌다면 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뒤에 그의 무덤 위에는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하였고, 그가 죽는 날 개경(開京)을 비롯하여 전국 백성들은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 무민공(武愍公) 최영(崔塋)이 주살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137권 열전 50권 창왕 즉위년(1388년) 12월 기록과 열전 26권 최영 열전.

동주 최씨는 무민공(武愍公) 영(塋)이 죽은 후로 후손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심산벽지(深山壁紙)로 피신하며 생활하다가 이조 중엽에 회복되어 다시 평등한 인권을 되찾았으나 조선 초 수십 년 동안 동주(東州)의 사적은 변조되고 소멸되었으며, 더욱이 왜정 36년간에는 무민공(武愍公) 영(塋)의 사적이 삭제되었으니 후손들은 무척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 자리한 무민공(武愍公) 최영(崔塋)과 부인 문화 유씨의 합장묘. 경기도기념물 제24호.

 

영(塋)의 후대에서는 그의 아들 담(潭)이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손자 언(彦)은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언(彦)의 후손인 충국(忠國)ㆍ양진(良振) 두 부자(父子)가 함께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근대에 와서 국학자 육당(六堂) 남선(南善ㆍ1890~1957)이 가문의 중흥(中興)을 이룩했다. 남선(南善)은 독학으로 국문을 깨우치고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글을 투고하였으며, 1908년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여 잡지 ‘소년’을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가출옥했다.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는 한편 국사연구에 전심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1938년 만주 신경(新京)에 가서 ‘만몽일보(滿夢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귀국 후 1943년에 재일(在日) 조선유학생의 학병(學兵) 지원 권고 강연차 이광수(李光洙)ㆍ김연수(金秊洙)ㆍ이성근(李聖根) 등과 같이 동경에 건너갔다.

해방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하며 역사논문(歷史論文) 집필에 전심하다가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기소,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나와 한국전쟁 때 해군전사 편찬위원회 촉탁을 지냈고 서울시사편찬위원회(市史編纂委員會)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박람강기(博覽强記)했고 신문학운동과 국학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 (좌)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과 동생 최두선(崔斗善).

 

 

남선(南善)의 동생 두선(斗善ㆍ1894∼1974)은 서울 중앙중학교 교장ㆍ보전상무(普專常務)를 거쳐 1945년 경방사장(京紡社長)을 역임하였고, 1947년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장으로 언론계에 몸담았다가 대한적십자사 총재(1960~1961)ㆍ국무총리(1963~1964)를 비롯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971년 한국장학재단 이사를 지냈다. 국가로부터 청조소성훈장(靑條素星勳章)ㆍ국민훈장무궁화장(國民勳章無窮花章)을 수상했고,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