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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연원
 

전주 최씨(全州崔氏) 집안에는 모든 전주 최씨가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3세손인 문영공(文英公) 최언위(崔彦僞ㆍ868~944)의 자손(子孫)이라고 전해오지만 족보에 의한 세대(世代) 연결이 불가능하므로 어떤 계파에서도 문영공(文英公)을 시조로 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문영공(文英公)은 전주 최씨의 원시조(原始祖)인 셈이고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최씨경주대동기원설’을 믿는 사람들은 문영공(文英公)이 전주 최씨의 원시조(原始祖)이며, 모든 전주 최씨가 문영공(文英公)을 통하여 득성시조(得姓始祖)인 돌산(突山)의 고허촌장(古墟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연결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비교적 세계(世系)가 복잡하여 동본(同本)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4개 종파로 구분한다. ‘전주최씨연원보(全州崔氏淵源譜)’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高麗) 제10대 정종(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숙종(肅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신호위 상장군(神號衛上將軍)을 지내고 완산부개국백(完山府開國伯)에 봉해진 최순작(崔純爵)을 시조(始祖)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역시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진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명종 4년(1174년)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道指揮使)로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潮位寵)의 난에 순절하여 완산군(完山君)에 추봉된 최균(崔均)을 시조로 사도공파(司徒公派) 또는 복야공계(僕射公系), 완산부개국백(完山府開國伯) 최순작의 7세손으로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 계통이 있다.

‘최씨상계세보(崔氏上系世譜)’에 기록된 것으로는 최순작(崔純爵)을 시조(始祖)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와 최균(崔均)을 시조로 사도공파(司徒公派)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고,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는 동주 최씨(東州崔氏ㆍ동주는 철원)의 시조인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으로 나타나 있다.

▲ 1686년 발간된 전주 최씨 문성공파(文成公派) 최초 족보인 ‘초성일권(草成一卷)과 복사영인본.

 

 

 

문성공파(文成公派) 족보인 ‘초성일권(草成一卷)’ 시수(始修) 경보서(京譜序)에서 말하기를, “옛날부터 전해오는 여러 문헌(文獻)에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가 문정공(文貞公) 최재(崔宰)의 큰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舜爵)을 시조(始祖)로 하여 전주 최씨 문성공계(文成公系)와 문정공계(文貞公系)의 통합 족보(合譜)를 만들기로 지난 무술년(戊戌年ㆍ1658년)에 전주 최씨 각 문중(門中)이 합의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각 계파(系派)의 가승(家乘)과 모든 기록들을 모아 고증과 편집하는 일을 문정공(文貞公)의 후손 최관령(崔寬令)에게 일임하였으나 최관령이 그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외지(外地) 관직에 나갔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이어받아 추진하게 되었다.


내가 최관령이 수집한 모든 자료를 검토하여 보니 잘못된 곳이 많고 문성공(文成公)과 문정공(文貞公)을 형제로 한다면 문열공(文烈公)을 시조로 하여도 큰 문제는 없겠으나 문성공(文成公)을 문정공(文貞公)의 아들로 하니 연대가 맞지를 않고, 또 위로는 복야공(僕射公) 최균(崔均)에서 최윤중(崔允中)에 이르는 11세대에 있어서 세대(世代)의 사이가 문열공(文烈公)의 선조(先祖)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최명(崔明)과 상호군공(上護軍公) 최입평(崔立枰)을 문성공(文成公)의 선조로 하는 등 본원(本源)의 같고 틀림과 세대의 앞뒤가 서로 엇갈리고 섞이어 있으니 이는 모두 서로가 개인적 의견을 기록하여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고려사를 참고해 보면 완주백 최순작(崔舜爵)은 고려 16대 예종 무자년(戊子年ㆍ1108년)에 돌아가시고 그 후 22년이 지난 고려 17대 인종 정미년(丁未年ㆍ1127년)에 박춘령(朴春齡)이 완산군수(完山郡守)가 되어 연구(聯句)로 시(詩)를 짓는 시험을 열어 최척경(崔陟卿)ㆍ최균(崔均)ㆍ최송년(崔松年)의 3명 최씨 어린이(三崔童子)를 뽑아 완산의 3최(完山三崔)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3최는 모두 완산백 문영공(文英公) 최언위(崔彦?)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그 연대를 상고하여 보건대 복야공(僕射公) 최균(崔均)은 문열공(文烈公)의 조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소윤공(少尹公) 최득지(崔得之)의 묘비(墓表)를 살펴보니 선조(上系)의 이어짐이 분명치 않고 대호군공(大護軍公) 최용각(崔龍角)의 사적(史蹟)에도 이들의 관계가 섞이어 있었다.
이런 고증의 어려움 속에 무인년(戊寅年ㆍ1698년은 무오년<戊午年,1678년>을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겨울에 전주 최씨 각 종파(宗派) 대표자 10여 명이 대전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에 모여 모든 자료를 검증하고 토론한 바 선조의 세대가 분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족보를 통합하는 것은 윤리를 그르치는 일이라고 결론지어 통합을 못했으나 같은 조상에서 나누어 진 후손임은 틀림없으니 비록 고증은 하지 못했으나 같은 조상의 후손임을 후대에 전하리라.”라고 하였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을 비교적 많이 배출한 명문으로 특히 고려 때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조선조에 모두 109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해 최씨(崔氏) 가운데 본관별로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고, 그 중 정승이 3명, 대제학이 2명, 청백리가 5명이다. 3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은 모두 문열공파(文烈公派)이고, 청백리는 문열공파(文烈公派)가 3명, 문성공파(文成公派)가 2명이다. 그러나 고려조에는 사도공파(司徒公派)가 가장 융성을 나타냈다.

문열공파(文烈公派) 시조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ㆍ?~1108)은 고려 초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문무를 겸비하여 여진 토벌에 많은 전공을 세워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ㆍ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신호위 상장군(神號衛上將軍)에 이르렀으며,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그후 완주(完州ㆍ지금의 전주)로 낙향하여 곽여(郭輿)와 친구를 맺었으나 곽여는 나라의 부름에 벼슬에 나가고, 그는 산수를 즐기다가 예종 3년(1108년) 9월에 사망했다.

후손으로는 순작(純爵)의 아들 숭(崇)이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예종(睿宗) 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인종 때 호부상서(戶部尙書)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남부(南敷)는 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文宗) 때 공부상서(工部尙書)ㆍ수문전 태학 겸 대장군(修文殿太學兼大將軍)을 역임하여 전주백(全州伯)에 봉해졌다.

당대 권력가의 세도에 개탄하여 현량 및 비서소윤(秘書小尹)을 지내다 병을 핑계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전(佺)은 남부(南敷)의 아들이고, 전(佺)의 아들 정신(正臣)은 고종 13년(1226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전중어사(殿中御史)를 거쳐 삼사부사(三司副使)로 있을 때 좌간의(左諫議) 유경탄(柳璥彈)과 최항(崔沆)의 참담한 실례(失禮)를 탄핵하다가 북방으로 귀향갔다. 다음해 풀려나와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었고 원종(元宗) 때는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로서 다시 삼사(三司)에 들어가 임연(林衍)의 권리남용한 죄를 논하다가 다시 남방(南方)으로 귀향을 가니 세인(世人)들이 감탄하여 최시랑(崔正臣)의 정직함을 그 이름과 다르지 않다고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득평(得枰)은 청렴과 정직으로 모든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으나 성품이 너무 강직하여 여러 차례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조정의 참소를 당하니 지방관(地方官)으로만 재임했으나 사직하고 물러났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냈다.

? ▲ ‘고려사(高麗史)’ 111권 열전 24권에 기록된 문정공(文貞公) 최재(崔宰)의 열전.

 

 

 

 

득평(得枰)의 아들 재(宰ㆍ?~1378)는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중부령(中部令)을 거쳐 감찰지평(監察持平)이 되었고, 충목왕 3년(1347년)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각 도의 양전(量田ㆍ토지를 측량함)이 실시될 때 판관(判官)에 임명되었으나 “전왕 때에 잘못을 그 당시의 실무자가 다시 파헤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개탄하며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어 전법정랑(典法正郞)을 거쳐 지흥주사(知興州事)로 나갔다가 인승단(印承旦)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전객부령(典客副令)에 등용되었다. 충정왕 때 지양주사(知襄州事ㆍ양주군수)로 나갔다가 원나라 강향사(降香使ㆍ불사로 향을 내리는 원나라 사신)가 와서 존무사(存撫使)를 욕보이는 것을 보고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귀가했으나,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감찰장령(監察掌令)에 특진되었다. 공민왕 11년(1362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있을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남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扈從)하는 관리들을 푸대접하여 한때 파직, 같은 해 다시 기용되어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고 이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진 뒤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전임, 우왕 3년(1377년)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이해 완산군(完山君)에 개봉(改封)되었고 성품이 강직했다. 시호는 문정(文貞).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리 자봉산(紫鳳山) 기슭에 자리한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묘.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0호. ?

 

전주 최씨(全州崔氏) 중흥의 시조로 역사의 흐름 속에 가문의 번성을 이룩해온 후손들을 많이 배출시킨 유경(有慶ㆍ1343~1413)은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시호는 평도(平度)로 재(宰)의 아들이다. 공민왕 21년(1372년) 판도좌랑(判圖佐郞)에 이어 사헌장령(司憲掌令)에 있을 때 충렬과 의협심으로 의를 중요시하여 환자(宦者ㆍ내시) 윤충좌(尹忠佐)의 교만 방자함을 단호히 탄핵, 최씨의 기개를 나타내었다. 우왕 1년(1375년) 전법총랑(典法摠郞), 우왕 14년(1388년)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요동정벌 때에는 서북면 전운사 겸 찰방(西北面轉運使兼察訪)이 되고, 최영(崔瑩)이 실각한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으며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그외 여러 벼슬에 올라 왕조에 공헌했으며, 청렴결백을 일생의 지표로 삼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청주(淸州)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여섯 아들도 모두가 나라에 충성했으므로 전주 최씨 최순작(崔純爵)의 후손 평도공파(平度公派)의 중시조(中始祖)로 섬기고 있다.

▲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재실인 효렴사(孝廉祠). ?

 

 

 

 

문열공파(文烈公派)는 시조 이하 5세손까지의 묘가 실전된 상태이다. 가장 오래된 선산은 문정공(文貞公) 재(宰)와 그의 아버지 묘소가 있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이다.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영면하고 있는 유경(有慶) 역시 이 마을 출생으로 태종 13년(1413) 71세로 세상을 마치자 조정에서는 국장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 때 자봉산(紫鳳山) 아래 구동(駒洞)을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는데, 유경(有慶)의 묘역은 경기도문화재자료 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봉산의 묘역에는 그의 아들 사규(社規)ㆍ사강(士康)ㆍ사용(士庸)의 묘가 있고 장남 사위(士威)의 묘는 좀 떨어져 있는데, 유경(有慶)의 장례 후 3년간 시묘(侍墓)하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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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리에 자리한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장남 최사위(崔士威)의 묘.?

 

 

 

 

유경(有慶)의 장남 사위(士威ㆍ1361~1450)는 태종 4년(1404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다음해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總制)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차남 사의(士儀)는 세종 6년(1424년)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태종 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3남 사규(士規)는 중백부(仲伯父) 최덕성(崔德成)에게 글을 배워 학행(學行)으로 도판관(都判官)에 천거되었고 도관좌랑(都官佐郞)ㆍ영평군수(永平郡守)를 거쳐 태종 5년(1405년) 24세 때에 사헌부 남대지평(司憲府南臺持平)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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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리에 자리한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4남 최사강(崔士康)의 묘.

4남 사강(士康ㆍ1385~1443)은 음보(蔭補)로 청요직(淸要職)을 역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고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승정원 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특임되었다. 이어 우부대언(右副代言)ㆍ예조참의(禮曹參議)ㆍ호조참판(戶曹參判)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441년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이듬해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했다. 두 딸은 성녕군(誠寧君ㆍ태종 아들)과 금성대군(錦城大君ㆍ세종 6남), 손녀는 임영대군(臨瀛大君ㆍ세종 4남)에게 출가시켰다. 5남 사용(士庸)은 세종 원년에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내고 실록청 당랑(實錄廳堂郞)에 뽑히어 서강원(書講院)에 들어갔다가 세종 5년(1423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중추부 상호군(中樞府上護軍)을 지냈다. 6남 사흥(士興)은 유복자로 태어나 시문에 능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효심이 극진하였다. 모친의 환후가 위중하므로 백약이 무효라 하늘에 기도하고 다리의 살을 베어 탕약을 대신하고 지성으로 간호하여 회복시킴으로 성종(成宗)이 정려(旌閭)를 충북 진천군 문맥면에 세웠다.

 

 

 

문렬공파(文烈公派)는 유경(有慶)의 아들대에서 7개 분파(分派)로 세분된다. 사미(思美)의 후손이 예의판서공파(禮儀判書公派), 사위(士威)의 후손이 판윤공파(判尹公派), 사의(士儀)의 후손이 양도공파(襄度公派), 사규(士規)의 후손이 지평공파(持平公派), 사강(士康)의 후손이 경절공파(敬節公派), 사용(士庸)의 후손이 첨추공파(僉樞公派), 사흥(士興)의 후손이 감무공파(監務公派)다.

▲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자리한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의 묘.?

 

 

 

 

그후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충절과 기개를 이어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은 인조반정(仁祖反正) 1등공신 명길(鳴吉ㆍ1586~1647)을 빼 놓을 수 없다.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泰川)ㆍ창랑(滄浪)이며,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기남(起南)의 아들로 일찍부터 당대의 명망높은 문신 이항복(李恒福), 신흠(申欽)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 명문의 긍지를 남겼다. 16세 때에 성균관 유생이 되어 선조 38년(1605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ㆍ공조좌랑(工曺佐郞)ㆍ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광해군 4년(1612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하였다고 하여 파직을 당하고 가평(加平)으로 내려가 조익(趙翼)ㆍ장유(張維)ㆍ이시백(李時白) 등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 정치적 변혁으로 당시 이단시(異端視)되었던 양명학(陽明學) 연구에 몰두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이귀(李貴) 등과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정랑(正郞)ㆍ참의(參議)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승진, 인조 1년(1623년)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호패법(號牌法)의 실시를 주장, 호패청 당상(號牌廳堂上)이 되어 이를 관장했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왕을 강화로 호종하였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있을 때 인조 14년(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수차에 걸쳐 청진(淸陣)을 왕래하여 강화(講和)의 조건을 타진했으며, 인조 15년(1637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포로의 석방과 척화신(斥和臣ㆍ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친을 극력 배척하던 신하로 홍익한ㆍ윤집ㆍ오달제 등 3학사가 유명함)의 귀환을 교섭,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 21년(1643년) 명(明)나라와 내통한 관련자라 하여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가 인조 23년(1645년)에 풀려나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진봉되고 어영청 도제조(御營廳都提調)를 지냈다. 그는 특히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서예는 동기창체(董其昌體ㆍ글씨의 체형보다 내용을 더 추구함)를 잘 썼다. 시호는 문충(文忠).

그의 형 내길(來吉ㆍ1583~1649)과 동생 혜길(惠吉ㆍ1591~1662)도 명문의 맥을 이어온 가문의 인물들이며, 혜길(惠吉)의 아들 후량(後亮ㆍ1616~1693)은 영의정 명길(鳴吉)에게 입양해 인조 15년(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 대신들의 아들이 볼모로 심양(瀋陽)에 갈 때 잡혀갔다가 1642년 명길(鳴吉)이 명나라와 통교(通交)한 죄로 심양(瀋陽)에 잡혀오자 세 차례나 청군(淸軍)을 찾아가 그를 변호했다. 인조 23년(1645년)에 명길(鳴吉)과 함께 귀국, 효종(孝宗) 2년(1651년) 생원(生員)이 되고 음보(蔭補)로 청풍부사(淸風府使)에 이르러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했다. 그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 문정공(文貞公) 최석정(崔錫鼎)의 유묵과 유품함에서 나온 흉배(胸背).?

 

 

 

 

후량(後亮)의 아들 석정(錫鼎ㆍ1646~1715)은 자는 여화(汝和), 호는 명곡(明谷)ㆍ존와(存窩)로 명길(鳴吉)의 손자이다. 응교(應敎) 후상(後尙)에게 입양하여 당대의 명신으로 명성이 높은 박세채(朴世采)ㆍ남구만(南九萬)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현종 7년(1666년) 진사가 되고, 현종 12년(167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ㆍ설서(說書)ㆍ봉교(奉敎)ㆍ교리(校理)를 역임했다. 숙종 11년(1685년) 부제학(副提學)으로 윤증(尹拯)을 변호하고 당시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을 논척(論斥)하여 파직되었고, 숙종 13년(1687년) 선기옥형(璿璣玉衡ㆍ혼천의라고도 하며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기구)을 수리하는 데 참여,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이조판서를 지내고 숙종 23년(1697년) 우의정(右議政)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숙종 25년(1699년)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여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속편 편찬과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증보를 주청, 그를 실현케 하므로 역사적 중요한 기록을 남게 하였다.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쟁 속에서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 전후 여덟 번이나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당시의 크고 작은 정치적 변혁에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자신의 능력을 성실히 개발하여 타인들에게 명문의 혈족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숙종 36년(1710년) 영의정으로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하다 왕의 병환 때 시약(侍藥)을 잘못한 책임으로 삭직(削職), 이듬해 복관되었다.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다가 죽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조부의 학문을 계승, 정제두(鄭齊斗)와 함께 당시 배척받던 양명학(陽明學) 발전시켰으며, 숙종(肅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 손와(損窩) 최석항(崔錫恒)의 시문집인 손와유고(損窩遺稿). 13권 6책(필사본).?

 

 

 

 

석정(錫鼎)의 동생 석항(錫恒ㆍ1654~1724)은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窩)로 후원(後遠)에게 입양되었다. 숙종 4년(1678년) 진사(進士)가 되고, 숙종 6년(16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숙종 10년(1684년) 정언(正言)으로 이익(李翊)을 탄핵하다 파직당했다. 숙종 13년(1687년)에 정언(正言)에 복직되고 부수찬(副修撰)ㆍ경상도 관찰사ㆍ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을 거쳐 숙종 34년(1708년) 형조판서(刑曹判書), 경종 1년(1721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이 되어 노론(老論)측 세제(世弟ㆍ영조)의 대리청정을 소론(少論) 4대신 중 한 사람으로 이광좌(李光佐)ㆍ조태억(趙泰億) 등과 함께 반대하여 철회케 하고 노론을 실각시켰다. 영조 1년(1725년) 신임사화(辛壬士禍ㆍ왕위의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당쟁)의 원흉이라 하여 관작(官爵)이 추탈(追奪), 그후 여러 번 복관과 추탈이 반복하다가 죽은 뒤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나 복관되었다. 사리판단이 정확하여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전국 관찰사 가운데 최고라는 평판을 들었다고 하며, 저서로 ‘손와유고(損窩遺稿ㆍ13권)’가 전한다.

▲ 영조 1년(1725년) 간행된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의 시문집인 곤륜집(昆侖集).?

 

 

 

 

석정(錫鼎)의 아들 창대(昌大ㆍ1669~1720)는 자는 효백(孝伯), 호는 곤륜(昆侖)으로 숙종 20년(16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ㆍ설서(說書)ㆍ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숙종 24년(1698년) 암행어사가 되어 전국을 돌며 만백성들의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하였다. 이어 교리(校理)ㆍ이조정랑(吏曹正郞)ㆍ헌납(獻納)ㆍ응교(應敎)를 거쳐 숙종 30년(1704년) 이조정랑(吏曹正郞), 숙종 32년(1706년) 겸사서(兼司書)ㆍ보덕(輔德)을 지낸 후 숙종 37년(1711년) 대사성(大司成)에 승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아 파면당했다. 그 뒤 이조참의(吏曹參議)ㆍ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경서(經書)에 밝아 당시 사림(士林)에게 촉망을 받았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곤륜집(昆侖集)’을 저술했다.

그외 사의(士儀)의 10대손 관(寬)은 조선 제18대 현종(顯宗) 때 정언(正言)ㆍ집의(執義)를 거쳐 은성부사(隱城府使)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ㆍ강원도 관찰사ㆍ제주목사ㆍ경기도 관찰사ㆍ대사헌(大司憲)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고,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숙종(肅宗) 때 청백리(靑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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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파(文成公派) 시조 최아(崔阿)는 자(字)는 형지(衡之),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으로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낸 득평(得枰)의 형인 입평(立枰)의 아들이다. 고려말 평장사(平章事)로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등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평장사(平章事)로 있으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당시의 복잡한 국내문제를 해결한 공으로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 전주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에 자리한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묘로 전하는 의총(疑塚). ?

 

 

 

 

문성공파(文成公派)는 큰아들 용생(龍生)이 1350년에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지내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둘째아들 용각(龍角)이 1357년에 검교대호군(檢校大護軍)을 지내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셋째아들 용갑(龍甲)이 1323년에 중국 원나라(元) 과거에 합격했고 판사(判事)를 지내 판사공파(判事公派), 막내아들 용봉(龍鳳)은 고려 충정왕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로 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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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19년(1743년) 초성일권(草成一卷)에 이어 두 번째로 발간된 문성공파대동보(계성제지박물관 소장)?

 

감찰공(監察公) 세영(世榮)은 전주 최씨 문성공파(文成公派) 최초의 족보인 ‘초성일권(草成一卷)’에서 말하기를 “최씨 각 계파(系派)의 역사를 전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성공(文成公)의 선조는 최균(崔均)이라고 하기도 하고 최순작(崔舜爵)이라고 하기도 하며, 최청지ㆍ최○○ㆍ최송년(崔松年) 심지어는 최선능(崔善能)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왔다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비록 모두가 같은 성씨, 같은 본관이라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혈연관계가 없거나 그 관계가 매우 멀어서 비록 같은 혈연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누어진 데를 알 수가 없으므로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서로 따로 따로 믿고 서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고증을 거쳐서 문성공(文成公)을 시조로 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으로서는 상세히 알 수가 없는 일이다.”(崔之別以史傳人物言之則先祖又有崔均崔純爵崔淸之崔○○崔松年之異至於崔善能又自中國淸河而來矣此皆雖曰同姓字同本貫而其實則不相統屬遠矣雖?或同是一源而亦不知其分派之所自來故隨其諸本之誤認辦證如後而直以文成公爲始祖此誠後人之不可不知者也)라고 적었다.

▲ 전북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에 자리한 문성공파 시조 최아(崔阿)의 재실인 주덕재(周德齋)와 1~3세를 모신 단각(壇閣).

 

 

 

 

문성공(文成公) 제단(祭壇) 비문(碑文)에는 “우리 동방의 전주 최씨는 문성공을 시조로 하니 공의 선조(先祖)는 전해오지 않는다. 공의 휘(諱)는 아(阿)이고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문성(文成)은 공의 시호(諡號)이다. 공은 네 분의 아들이 있으니 큰아들 최용생(崔龍生)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按廉使)를 지냈고, 둘째아들 최용각(崔龍角)은 검교대호군(檢校大護軍)을 지냈으며 셋째아들 최용갑(崔龍甲)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判事)를 지냈고, 막내아들 최용봉(崔龍鳳)은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공의 후손은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와 중랑장공(中郞將公) 최용봉(崔龍鳳)의 후손만 하더라도 향사(享祀)가 열 여섯이고 정려(旌閭)가 여섯으로 문과 급제가 41명, 무과 급제가 67명, 생원과 진사가 84명이다. 그 외의 대소 관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여기에다 다 적을 수가 없다. 할머님에 대해서나 공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산소의 위치 등의 기록은 오랜 세월과 그 동안의 수많은 전쟁으로 없어져 전해오지 않는다. 전주 주덕산에 있는 분토동에는 전주 최씨의 선산이 있고 또 옛날 노인들의 입을 통해 공의 현손인 존양당공(存養堂公) 최덕지崔德之)의 산소 앞에 있는 4개의 옛 무덤 너머에 있는 옛 어른 무덤(大人葬)이 공의 산소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정조년간 병진년(丙辰年)에 봉분(封墳)을 열고 발굴 조사를 했으나 광(壙) 위에는 넓은 돌 하나가 덮여 있을 뿐 다른 유물이나 지석(誌石) 등 공의 산소라고 증거할 만한 자료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다음해인 정사년에 후손들이 합의하여 산소라고 전해오는 장소에서 북쪽으로 수궁허(數弓虛)에 제단(祭壇)을 쌓고 위토(位土)를 두어 제사를 올리니 전해오는 이야기만 그대로 믿기 어렵다. 경진년에 다시 표석(標石)과 산문(山門)을 세워 예전에 못 이룬 바를 모두 이루었으니 눈이 미치지 못하여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옛날 일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조선 순조 21년 경진년(1821년) 통훈대부 경기전령 이병운 근지”라고 되어 있다.

▲ 전북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자리한 2세 최용각(崔龍角)의 묘.

 

 

 

 

현재 전주 최씨 집안에서는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만이 이 의총(疑塚)을 문성공(文成公)의 묘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나머지 3파에서는 그 묘를 인정하여 제단(祭壇)에서 제사를 올리지 않고 그 무덤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사는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는 음력 3월 3일에 단각에서, 그리고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ㆍ대호군공파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ㆍ판사공파(判事公派)는 한식날 이 무덤에서 올린다.

▲ 전북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자리한 최용각(崔龍角)의 2남 최철(崔哲)의 묘는 무학대사의 소점처로 알려져 있다.?

 

 

 

 

용봉(龍鳳)의 손자 담(?ㆍ1346~1434)은 호는 월당(月塘)으로 17세에 사마시(司馬試), 1377년에는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고향에 계신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가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 5년(1396년) 중신들의 추천을 받아 봉상시 소경(奉常寺小卿)이 되고, 태조 7년(1398년)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0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시와 글을 벗삼아 살았는데, 전주에 한벽당(寒碧堂)을 짓고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학문과 풍월로 자적했다.

▲ 월당(月塘) 최담(崔?)이 태종 4년(1404년) 별장으로 세운 전주시 완산구 교동 한벽당(寒碧堂ㆍ전북유형문화재 제15호)과 ? 묘.

 

 

 

 

그의 아들 4형제는 모두 현달했다. 맏아들 광지(匡之)는 조선 태종 때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역임했으며, 둘째 직지(直之)는 나주판관(羅州判官)과 순창도사(淳昌都事), 셋째 득지(得之)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막내 덕지(德之ㆍ1384∼1455)는 태종 5년(140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올랐다가 사퇴한 후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 월당(月塘) 최담(崔?)의 막내로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낸 최덕지(崔德之)의 초상화(보물 제594호).?
▲ 전북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에 자리한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의 묘와 그의 위패가 모셔진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녹동서원(鹿洞書院).

 

그외 조선의 무신(武臣) 강(堈)이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ㆍ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내고 광해군(光海君) 때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정치의 혼란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퇴, 후에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그의 형 균(均)도 임진왜란 때 이름난 의병장으로 동생 강(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자칭 풍운장(風雲將)이라 하고 고성(固城)ㆍ사천(泗川)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수문장(守門將)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도 형제가 함께 무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 경남 고성시 구만면 화림리의 도산서원(道山書院ㆍ경남문화재자료 제35호)은 인조 1년(1623년) 최강(崔堈)과 최균(崔均) 형제를 제향하기 위해 세웠으며, 고종 7년(1870년) 다시 세웠다. ?

 

 

 

 

그외 용봉(龍鳳)의 8세손인 경행(敬行)은 자는 주도(周道), 호는 이순당(二順堂)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아버지 안(安)과 함께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거두어 명나라 장수에게 보냈으며, 광해군 때에 정치의 혼란으로 벼슬을 단념, 이식(李植) 등과 사귀며 학문을 닦았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량을 모으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난이 평정되어 군량을 관가에 바쳤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의거했으나 화의가 성립된 후에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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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공파(司徒公派) 복야공계(僕射公系)라고도 하며, 2개 파(派)로 나누어지는데 을의(乙義)의 후손이 완성군파(完城君派), 병례(丙禮)의 후손이 판서공파(判書公派), 정지(崔丁智)의 후손이 총랑공파(摠郞公派)다.

시조 최균(崔均ㆍ?∼1174)은 자는 간유(幹儒)로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소부주부(小府注簿)에 이르고, 의종(毅宗) 때 재상 최윤의(崔允儀)의 천거로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 명종(明宗) 초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내시(內侍)에 속했다가 예부낭중 겸 태자문학(禮部郞中兼太子文學)으로 전임, 명종 2년(1172년) 금(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종(毅宗)을 폐하고 명종(明宗)을 세운 경위를 조사하자 접반사(接伴使)로 무사히 해결했다. 명종 4년(1174년)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鄭仲夫)의 토벌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정벌하려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道指揮使)가 되어 화주(和州)에 들어가며 “내가 보건대 여러 성은 위총과 더불어 서로 연결되어 모두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만약 적병이 도착한다면 주군(主軍)의 향배(向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명령을 회피할 수야 있겠습니까” 하고 화주영(和州營)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적장 김박승(金朴升), 조관(趙冠) 등이 와서 공격을 하니 낭장 이거가 문을 열어 주어 병마사 대장군(兵馬使大將軍) 이의(李儀), 어사(御史) 지인정(智仁挺)과 함께 붙잡혔다. 그러나 그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죽음을 직면하여 불의를 참지 못한 그의 강직한 충절은 적으로 하여금 더욱 가혹한 대우를 채찍질했다. “너희 역적의 괴수 위총은 한낱 군졸로서 지위가 팔좌(八座ㆍ상서복야의 계급)에 이르렀으니, 나라의 은혜가 더 클 수 없는데 이에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역모를 꾸미거늘 너희들이 어디로 도망할 것이냐" 하며 꾸짖다가 이의(李儀)와 막료 군교(軍校)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 ▲ ‘고려사(高麗史)’ 99권 열전 12권에 기록된 최균(崔均) 열전. 아들 최보순(崔甫淳)과 손자 최윤개(崔尹愷)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클릭!

 

 

 

균(均)의 아들 보순(甫淳ㆍ1162~1229)은 문과에 급제한 후 황주(黃州)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소부감(小府監)이 되어 희종 4년(1208년) 금나라 황제의 즉위 축하문을 지었다가 문장이 금나라 황제의 뜻에 거슬려 파직당했으며, 후에 이조시랑(吏曹侍郞)이 되고 고종 9년(1222년) 참지정사(參知政事ㆍ고려 때 종2품 벼슬)로서 지공거(知貢擧ㆍ고려 때 과거의 시험관)를 겸했다.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ㆍ판병부사(判兵部事)를 거쳐 이듬해 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와 동수국사(同修國史)를 역임, 고종 13년(1226년)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 수찬관(修撰官) 김양경(金良鏡)ㆍ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수했다.

▲ 최성지(崔誠之)를 동지밀직사사 대사헌(同知密直司事大司憲)에 임명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34권 충선왕 4년(1312년) 6월 기록과 충선왕이 토번(吐藩)으로 귀양갈 때 최성지 등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기록한 35권 충숙왕 7년(1320년) 12월 4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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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유묵.??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문신의 절조를 지킨 윤개(尹愷ㆍ?~1266)는 균(均)의 손자이며 보순(甫淳)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이르렀으나, 당시 집권자인 최의(崔儀)가 현량한 선비들을 대우하지 않고 경박한 무리들의 참소에 현혹되어 무모한 살육을 함부로 하여 이를 개탄,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그후 최의(崔儀)가 죽자 고종 45년(1258년) 좌부승선(左副承宣)에 발탁,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원종 4년(1263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ㆍ병부상서(兵部尙書)ㆍ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고, 후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ㆍ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보순(甫淳)의 4대손으로 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비일(毗一ㆍ?~1319)의 아들인 성지(誠之ㆍ1265~1330)는 이름을 부(阜)ㆍ당(?)ㆍ수(琇)ㆍ실(實)ㆍ성지(誠之) 로 5번이나 바꾸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 계림(鷄林)의 관기(管記ㆍ임관된 관리들에게 주는 사령서)를 거쳐 사한(史翰)이 되어 춘궁(春宮)에 속했다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서 원나라에 갔다. 1307년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 무종(武宗)이 내란을 평정하고 즉위하는데 공이 컸으며,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가 되었다. 충렬왕이 즉고 충선왕이 귀국, 즉위한 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ㆍ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충숙왕 7년(1320년) 충선왕이 토번(吐藩)에 유배될 때는 몸을 피하여 나타나지 않다가 일부 고려인들이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省)으로 하자고 책동할 때 김이(金怡)ㆍ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원나라에 그 득실을 진정하여 마침내 그 논의를 중지케 했다. 만년에 퇴관하여 7년 동안 한적한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그가 원나라에서 배워 온 역수(易數)의 학(學)은 그 뒤 고려의 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 시호는 문간(文簡).

▲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복지리에 자리한 6세손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묘. ?

▲ 양경공(良敬公) 최문도(崔文度)가 졸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37권 충목왕 원년(1345년) 6월 1일 기록과 108권에 기록된 그의 열전.

성지(誠之)의 아들 문도(文度ㆍ1292~1345)는 자는 희민(羲民), 호는 춘헌(春軒), 시호는 양경(良敬)으로 균(均)의 6세손이다.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했으며, 일찌기 원나라에 갔다 와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렀다.

▲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복지리에 자리한 양경공(良敬公) 최문도(崔文度)의 묘와 묘비명 및 유묵.



문충공파(文忠公派) 시조인 삼중대광(三重大匡) 문충공(文忠公) 최군옥(崔群玉)은 고려 때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문충공파(文忠公派)는 다른 전주 최씨와는 다른 혈족(血族)으로 문성공파(文成公派) 등 전주 최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살다가 도래(渡來)하여 왔으나 문충공파(文忠公派)는 한국 토착(土着)의 최씨라고 한다.

▲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자리한 문충공(文忠公) 최군옥(崔群玉)의 단소(壇所). ?

 

 

 

 

‘문충공사적(文忠公事蹟)’에는 “공의 휘는 군옥(群玉)이요 자는 경윤(景潤)이니 고려 선종 때 벼슬에 나가시고 유명한 선비 한익군(韓翼君)의 사위이시다. 벼슬이 추밀원지사 진현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중국 송나라 철종 원우 원년에 사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황제께 축하(大賀)를 올렸다. 그 때에 사마광(司馬光), 여송저(呂宋著), 범조우(范祖禹) 등이 정이(程?)를 천거하여 숭정전(崇政殿) 설서(設書)로 삼고 공을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천거하였다. 얼마 아니 가서 정이(程?)가 소철(蘇轍)ㆍ손각(孫覺)의 미움을 받아 모함으로 파직되어 돌아가게 되니 공께서 소철ㆍ손각이 저지른 일을 개진하여 잘못을 설명하므로 파직되어 환국하게 되었다. 그 때가 기사년 봄이었다. 공이 귀국하니 대현진사(大賢進士)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벼슬이 주어지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하여지니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공의 큰아들 최송년(崔松年)은 전주 소년 3최 중의 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아 중의대부(中議大夫) 밀직사사(密直司使)에 올랐으며, 6세손 위정공 최칠석은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시어 두 번째 완산부원군에 봉해지니 거족(巨族)으로 번창하여졌다.”라고 적혀 있다.

문충공파(文忠公派)는 다른 전주 최씨와는 혈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전해오지만 기록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특히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박춘령(朴椿齡)이 완산군수(完山郡守)로 있을 때 시문(時文)으로 군내 소년들을 시험하여 뽑을 때 최척경(崔陟卿)ㆍ최균(崔均)ㆍ최송년(崔松年)의 3최(三崔) 동자가 뽑히자 박춘령(朴椿齡)은 이들을 모두 문영공(文英公) 최언위(崔彦?)의 후손이라고 했고, 그 외에도 문충공(文忠公)을 문영공(文英公)의 후손으로 보는 설이 있다.

▲ 위정공(威靖公) 최칠석(崔七夕)의 행장록(行狀錄)과 그의 제단(祭壇). ?

 

 

 

문충공(文忠公) 최군옥(崔群玉)의 5세손으로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사위가 되는 최선능(崔善能)의 아들 위정공(威靖公) 최칠석(崔七夕)의 행장인 ‘위정공 정남선생 행장(威靖公征南先生行狀)’에는 “선생의 성(姓)은 최씨이고 휘는 칠석(七夕)이며 자는 중칠이다. 처음에는 휘가 지였고 자는 중연이었으나 뒤에 가서 바꾸었다. 선생의 선조는 상산(尙山)에서 전주(全州)로 옮겨와 완산군(完山君)에 봉(封)해지므로 전주 최씨가 되었는데 시조 최군옥(崔群玉)은 고려 선종 때 문신으로 벼슬이 추밀지사 진현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들어가 황제(皇帝)께 등극 축하를 올렸다…”라고 하여 문충공(文忠公)이 경상도 상산에서 전라도 전주로 왔다고 적고 있다.

문신(文臣)들의 압도적인 권력투쟁 속에 혈전의 공으로 가문을 빛낸 무신 칠석(七夕ㆍ?~1394)은 우왕 7년(1381년) 해도 만호(海島萬戶ㆍ정4품의 무관직)가 되고, 우왕 14년(1388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 소탕에 공을 세우고 창왕(昌王) 때 박위(朴?)와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했다. 공양왕 2년(1390년)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무고(誣告)에서 비롯된 옥사인 ‘이초(李彛)의 옥(獄)’에 연루되어 한때 유배되었고, 태조 1년(1392년) 조선 개국 후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경기우도 수군절제사(京畿右道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다.

▲ 두문동 72현 최양(崔瀁)이 3년 동안 은거했던 입구폭 4m, 길이 8~9m, 높이 2m의 동굴과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자리한 묘.?

 

 

 

7세손 양(瀁)은 자는 계함(季涵), 호는 호는 만육당(晩六堂), 시호는 충익(忠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생질로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고려 공양왕 4년(1392년)에 외숙인 포은(圃隱)이 선죽교(善竹橋)에서 장절하자 진안 팔공산으로 들어가 3년간 은거했다 전주 대승동 봉강리에 퇴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는 친구인 양(瀁)에게 800결의 전록(田祿)을 하사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세종 6년(1424년) 74세에 타계했는데, 이 부음을 전해들은 세종은 3일간 조회를 폐하고 특령을 내려 만육(晩六)의 자손이 등과하면 지체없이 군역(軍役)을 면제하라 했다. 그리고 “학문 도덕은 정이천(程伊川) 같고 절의 청직은 엄광(嚴光)과 같다.”고 한 치제문(致祭文)을 도승지(都承旨)로 하여금 쓰게 했다. 개성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에 포함되었고, 그의 후손들도 선조의 유지를 쫓아 끝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 난포(蘭圃) 최철견(崔鐵堅)이 1546년에 건립한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난포고택(경북유형문화재 제80호)과 유묵,?

 

 

 

철견(鐵堅ㆍ1546~1618)은 자는 응구(應久), 호는 몽은(夢隱)으로 선조 9년(1576년) 진사(進士)가 되고, 선조 18년(1585년) 참봉(參奉)으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한 후 선조 24년(1591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 도사(全羅道道師)로 전주(全州)를 방어했으며, 그후 내자시정(內資寺正)ㆍ장령(掌令)ㆍ승지(承旨)ㆍ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선조 34년(1601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전임, 1604년에 춘천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낙향했다.

죽음으로써 매운 절개를 지켰던 조선의 의사(義士) 기필(琦弼ㆍ?~1593)은 자는 규중(圭仲), 호는 모산(茅山)ㆍ행의(行誼)로 천거를 받아 봉사(奉事)가 되고 진주부관(晋州副官)을 지낸 뒤 진주 서쪽 백운동(白雲洞)에 은거했다. 선조 26년(1593년) 진주(晋州)가 왜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6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성(城)으로 들어가 군량 공급을 돕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뒤에 조정에서 사당을 세워 창렬사(彰烈祠)라 사액(賜額)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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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휴정(休靜ㆍ1520∼1604)은 이름은 여신(汝信),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ㆍ서산대사(西山大師)ㆍ풍악산인(楓岳山人)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양부(養父) 이사증(李思贈)에게서 자랐는데, 과거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입산, 숭인(崇仁)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그 뒤 영관(靈觀)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명종 4년(1549년) 승과에 급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고 봉은사(奉恩寺) 주지를 지냈으나 1556년 승직을 그만두고, 금강산·묘향산 등지를 편력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승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제자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금강산에서,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승군을 모았고 자신은 문도 1500명을 모아 이를 총지휘하여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성싸움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俊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직위에 올랐다. 1594년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유정(惟政)에게 승군일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내다 입적하였다.

 

 

 

 

이렇게 고려의 흥망과 조선의 역사속에 문신과 무신 혹은 선비로서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일이 없었고, 벼슬보다는 문장(文章)과 충의(忠義)로써, 문무(文武)의 영화보다 효(孝)로써 명문의 긍지를 가졌고, 때로는 역사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 자신의 능력을 성실하게 개발하여 선비로서 만족하고 한 세상을 아쉬움 없이 살다간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물들이 나라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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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영의정 최석정(崔錫鼎) 묘-전주최씨-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37-15

최석정[崔錫鼎, 인조 24년(1646)∼숙종 41년(1715)],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전주(全州), 영의정 완성부원군 지천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한성좌윤 완릉군 최후량(崔後亮)의 아들로, 응교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신동이란 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남구만(南九萬)·이경억(李慶億)의 문인으로, 박세채(朴世采)와 종유하면서 학문을 닦아, 초시에 장원, 진사시에 장원, 동시에 생원시 합격,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발령받아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관직생활 초기는 여러 이유로 삭직과 사퇴를 거듭하여 순탄치 않았으나 1689년 기사환국까지 승정원승지·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과 제학·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주로 외직으로 안동부사·연안부사를 역임하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물러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한성판윤·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장희재(張禧載)의 사형을 주장하였고, 홍문관대제학·이조판서를 거쳐 1697년 우의정에 올라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단종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김장생(金長生)의 문묘배향을 반대하였고, 인현왕후가 죽고 장희빈에 의한 무고(巫蠱)의 변이 일어나자 왕세자 보호를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반대하였으며, 또한 붕당문제보다 도학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이유로 파직, 유배의 명령이 내려졌다가 다음해 석방되어 진천에 거주하였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이후 1710년까지 모두 열 차례 입상(入相)하였으며, 1711년 이후 미사(渼沙)에 은퇴하였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하였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적 관료의 성격이 강하여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하였던 행정가였으며,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특이한 이력은 세계 최초로 '9차 직교라틴방진'을 발견하는 등 새롭고 독창적 내용이 담긴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수학책을 펴낸 수학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2013년 10월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헌정 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지천 지산서원·오창 송천서원에도 배향되었으며,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37-15로 할아버지 지천 최명길 묘역에서 200m쯤 더 올라가서 오른쪽 산록에 있다. 그리고 최석정 묘 바로 뒤에는 11대조인 고려 완산군 최재(崔宰)의 묘가 연하여 있다.

▣ 전주최씨 주요 세계도 ▣

【전주최씨 문열공파 세계도】

(시조)최순작(崔純爵) : 문하시중, 완산부개국백, 문열공, 아들 - ①숭(崇) ②공(?)

( 2세-①)최 숭(崔 崇) : 예부상서, 아들 - ①남부(南敷)

( 3세)최남부(崔南敷) : 공부상서, 전주백, 문강공, 아들 - ①전(佺) ②선(선) ③건(健)

( 4세-①)최 전(崔 佺) : 비서소윤, 아들 - ①정신(正臣) ②직신(直臣) ③양신(良臣)

( 5세-①)최정신(崔正臣) : 병부시랑, 아들 - ①득평(得枰) ②직평(直枰) ③입평(立枰)

( 6세-①)최득평(崔得枰) : 선부전서

( 7세)최 재(崔 宰) : 감찰대부, 완산군, 문정공, 아들 - ①사미(思美) ②덕성(德成) ③유경(有慶)

( 8세-③)최유경(崔有慶) : 판한성부사, 개국원종공신, 청백리, 평도공파 중시조, 아들 - ①사위(士威) ②사의(士儀) ③사규(士規) ④사강(士康) ⑤사용(士庸) ⑥사흥(士興)

( 9세-④)최사강(崔士康) : 우찬성, 경절공

(10세)최승종(崔承宗) :

(11세)최효공(崔孝恭) :

(12세)최명손(崔命孫) :

(13세)최 업(崔 嶪) : 빙고별제

(14세)최수준(崔秀俊) :

(15세)최기남(崔起南) : 영흥대도호부사, 아들 - ①내길(來吉) ②명길(鳴吉) ③혜길(惠吉) ④가길(嘉吉)

경길(敬吉)

■(16세-①)최내길(崔來吉) : 공조판서, 완천군

■(16세-②)최명길(崔鳴吉) : 대제학, 영의정, 완성부원군, 정사공신1등, 문충공, 아들 - ①후량(後亮, 조카를 입양) ②후상[後尙, 후량(後亮) 입양 후 계비 소생의 친자)

▣(17세-①)최후량(崔後亮) : 한성좌윤, 완릉군, 아들 - ①석진(錫晉) ②석정[錫鼎, 후상(後尙)에게 입양] ③석항[錫恒, 후원(後遠)에게 입양]

(18세-①)최석진(崔錫晉) : 공조정랑

▣(17세-②)최후상(崔後尙) : 홍문관응교, 최명길의 친자(親子)

(18세-②)최석정(崔錫鼎) : 홍문관대제학, 영의정, 문정공, 생부 - 최후량(崔後亮)

■(16세-③)최혜길(崔惠吉) : 이조참판, 아들 - ①후정(後定) ②후량[後亮, 중부 명길(鳴吉)에게 입양] ③후원(後遠)

(17세-③)최후원(崔後遠) : 내시부교관

(18세-③)최석항(崔錫恒) : 좌의정, 생부 - 최후량(崔後亮)

☞최유경[崔有慶, 충혜왕 복위 4년(1343)~태종 13년(1413)]은 상락군 김묘(金昴)의 셋째딸을 계배로 맞이하여 척약재 문온공 김구용(金九容)의 매부가 되며, 안렴사 김사렴(金士廉)의 손아래 동생 김사안(金士安)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전주최씨 문충공파 세계도】

(시조)최군옥(崔群玉) : 문하시랑평장사, 완산부원군, 동주최씨 시조 최준옹(崔俊邕)의 후손, 아들 - ①송년(松年) ②구년(龜年) ③용년(龍年)

( 2세-②)최구년(崔龜年) : 아들 - ①희평(希平) ②자평(自平)

( 3세-①)최희평(崔希平) : 아들 - ①구(球) ②유(王柔)

■( 4세-①)최 구(崔 球) :

( 5세)최서룡(崔瑞龍) :

■( 4세-②)최 유(崔 王柔) :

( 5세)최선능(崔善能) :

( 6세)최 돈(崔 沌) :

( 7세)최 지(崔 贄) : 문하찬성사, 아들 - ①양(瀁) ②지(沚)

▣( 8세-①)최 양(崔 瀁) : 대제학, 문하찬성사, 충익공, 두문동 72현, 아들 - ①진명(進明) ②진형(進亨)

□( 9세-①)최진명(崔進明) : 아들 - ①여녕(汝寧) ②여정(汝貞) ③여관(汝寬) ④여달(汝達)

□( 9세-②)최진형(崔進亨) : ①여징(汝澄) ②여문(汝汶) ③여담(汝淡)

▣( 8세-②)최 지(崔 沚) :

( 9세)최진성(崔進誠) : 이조정랑

(10세)최여돈(崔汝 ) :

[최명길 묘역 입구에서 좌측으로 바라다 본 최석정의 묘역]

[명곡(明谷) 崔錫鼎 묘소]

묘역에는 명곡의 명에 따라 일체의 비갈을 세우지 않았다. 최석정 묘 뒤에는 11대조인 최재의 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