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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흥해 최씨(興海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흥해 최씨(興海崔氏)의 시조 최호(崔湖)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전주 최씨(全州崔氏) 시조(始祖) 최균(崔均ㆍ최치원의 7세손)의 9세손으로 전하는 최식(崔寔)의 셋째 아들이다. 최식(崔寔)은 큰 아들 연(衍)이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ㆍ경주), 둘째 한(漢)은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ㆍ영천), 셋째 호(湖)는 곡강부원군(曲江府院君ㆍ흥해), 넷째 익(瀷)은 호산부원군(湖山府院君ㆍ순천)으로 각각 분적(分籍)하여 시조가 됐다.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3동에 자리한 흥해 최씨 시조 최호(崔湖)의 묘.



흥해 최씨(興海崔氏)의 시조 최호(崔湖)는 고려 공민왕조에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ㆍ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 등을 역임하였으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훈되고 곡강부원군(曲江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곡강(曲江)은 흥해(興海)의 다른 이름으로 그가 사후에 곡강서원(曲江書院)에 제향되고, 자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흥해(興海)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 명당으로 소문난 최호(崔湖)의 묘 앞에 자리한 묘비와 묘를 찾지 못한 부인 황씨(黃氏)의 단비(壇碑) .

경북 영일군 의창면(義昌面) 남송동(南松洞)에 시조 최호(崔湖)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시조에 대한 제사가 끊어졌다가 철종 14년(1864년) 23세손 계항(桂恒)이 향화(香火ㆍ문중제향)를 잇게 되었다고 실전(失傳) 내력을 전하고 있으며, 인근 서원마을에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흥해 최씨(興海崔氏)는 김해파(金海波)ㆍ밀양파(密陽派)ㆍ거창파(居昌派)ㆍ자인파(慈仁派)ㆍ경산파(慶山派)ㆍ나주파(羅州派)ㆍ대구파(大邱派)ㆍ사량파(思良派)ㆍ청도파(淸道派)ㆍ노산파(魯山派)ㆍ시흥파(始興派)ㆍ합천파(陜川派)ㆍ이천파(利川派)ㆍ하대대파(下大垈派)ㆍ서울파ㆍ양평파(楊平派) 등의 지파가 있으며, 곡강 최씨(曲江崔氏)와는 동원분파(同源分派)이다.

 ▲ (左)최팔개(崔八凱)ㆍ최팔원(崔八元) 형제를 제향하는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용산서원(龍山書院). (右)의병장 최응담(崔應淡)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대구시 동구 율하동에 세워진 회당유허비각(晦堂遺墟碑閣).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팔원(八元)은 선조 18년(158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봉사(奉事)를 거쳐 박사(博士)에 재임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형 팔개(八凱)와 함께 전장에 참여하였으며, 부산진(釜山鎭) 전투에서 왜군(倭軍)과 격전 중에 전사하여 시신을 거두지 못하고 후일 의관을 거두어 선대의 묘곁에 장사하였다. 한편 형 팔개(八凱)는 겨우 죽음만 면하여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말씀하기를, “내 이 지경에 오로지 적과 부딪쳐 싸워도 장차 죽음만 따를 것이고 이익은 없을 것이다.” 하며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오로지 종사를 보살폈다. 팔개(八凱)과 팔원(八元) 형제는 경산시 용성면 용산서원(龍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의병장 최응담(崔應淡)을 제향하는 대구시 동구 부동 귀후재(歸厚齋)와 귀후재기(歸厚齋記).

 

 

 

응담(應淡ㆍ1564∼1593)은 자는 군응(君應), 호는 회당(晦堂)으로 그의 전공(戰功)으로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을 배명(拜命)받았으나 진중(陣中)에서 얻은 병으로 나이 30에 일생을 마쳤다. 지금 대구시 동구 율하동(栗下洞)에는 삼사당(三斯堂)과 그의 공적을 기린 회당유허비각(晦堂遺墟碑閣)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