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최)

해주 최씨(海州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해주최씨(海州崔氏)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알려진 최충(崔沖)의 아버지 최온(崔溫)을 시조로 한다. 최온은 해주에서 오랫동안 세거한 호족출신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최온의 선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최온의 초기 벼슬이 호장이었던 것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지방 호족으로 목민관을 대신하는 경우에 호장이라는 직책을 주었는데, 최온의 첫 번째 벼슬이 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 제4대 광종(光宗) 때 태어나 현종(顯宗)과 덕종(德宗)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온은 해주(海州)에서 목민관(牧民官)이 되고, 이후에는 판리부사(判吏部事)를 역임했다.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삼고 수양산 아래서 세거(世居)하였기 때문에 해주최씨가 되었다.

해주최씨는 고려시대에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5명을 냈다. 해주최씨의 대표적 인물은 동방 유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고 있는 최충(崔沖)이다. 그는 문하시중을 역임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와 최초의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로 인해 최충은 ‘해동공자’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 최유길(崔惟吉) 형제도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고 있다. 또한 5대손 최윤의(崔允儀)는 예학(禮學)에 밝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편찬하였다고 하나, 전해지진 않고 있다.

이렇듯 해주최씨는 학자나 문인들을 배출한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문인가문 중의 하나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세종 때의 학자요 청백리였던 최만리(崔萬理)가 있으며, 그밖에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최경창(崔慶昌),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황(崔滉) 등이 있고,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했던 최규서(崔奎瑞)가 있다. 또한 3·1운동을 일으켰던 33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崔麟)도 해주최씨 문중이다.

해주최씨는 주로 황해도에서 세거했으나, 이후에는 27개 파가 전국 각 지역에 퍼져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7개 지파에는 사정공파(司正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대녕군파(大寧君派) 서운부정공파(書雲副正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현감공각파(縣監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전한공파(典翰公派) 판사복시공파(判司僕寺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사평공파(司評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해릉군파(海陵君派) 복야공파(僕射公派) 등이 있다.

해주최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총 5만6592가구에 18만184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최씨의 8.4%를 차지하는 것이다. 물론 북한 지방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만큼 북한에도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

해동공자 최충과 문인(文人) 명문 해주최씨

해동공자 문헌공(文憲公) 최충의 후예를 내세우는 해주최씨는 총 인구 18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는 본관성씨 인구 순위에서 43위에 위치하는 것이며, 최씨 가운데서도 경주최씨(慶州崔氏)·전주최씨(全州崔氏)에 이어 세 번째이다.

해주최씨의 시조는 최온이며, 그의 아들이 고려의 명재상이며, 석학이었던 해동공자 최충이다. 최충 이후 해주최씨 가문은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학문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구재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워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해동공자로 추앙받고 있는 문헌공 최충의 영정. 해주최씨에서는 시조 최온보다도 그의 아들인 최충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최충은 고려 성종 5년에 황해도 대령군(大寧郡·지금의 海州)에서 향리(호장)였던 최온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향리 집안 출신인 최충이 벼슬을 하게 된 것은 광종 때 시행된 과거제도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22세에 장원급제를 하고 좌습유(左拾遺)를 시발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역임했으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등을 거쳐 62세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고, 9년 후인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구재학당을 세우고 83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인재를 양성했다. 그 후 구재학당을 본떠 많은 사람이 사학을 세우게 되었고, 고려시대 유학발전에 기반이 되었다.

그는 슬하에 최유선과 최유길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재상에 올라 해주최씨를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최유선은 형부상서(刑部上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문종묘정에 배향되고 문화(文和)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최유길은 호부상서(戶部上書)를 거쳐 수사공섭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에 올랐다.

최충이 두 아들에게 내린 유훈으로 ‘계이자시(戒二子詩)’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해주최씨의 정신적 규범이 되고 있다고 한다.

“…(상략) 청렴하고 검소함을 몸에 새기고 문장으로 한 몸을 수놓아라…(중략) 문장은 비단이요 덕행은 구슬이라. 오늘 이르는 말을 뒷날 잊지 않으면, 나라의 기둥이 되어 길이 흥창하리라.” 이렇듯 해주최씨는 ‘문장’과 ‘덕행’을 중시하는 가문이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최충(崔沖)의 자손에 문행(文行)으로 재상에 오른 자가 수십 인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사 명신전에 수록된 문헌공 최충 열전.
최충의 손자인 최사추(崔思諏)는 이부상서(吏部尙書)·추밀원사(樞密院使)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숙종 8년에 고문개(高文盖)의 반란음모를 적발, 처리한 공으로 보정공신(輔正功臣)이 되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의 형 최사량(崔思諒)도 서경유수(西京留守)와 좌복야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를 역임했다.

의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는 학문에도 뛰어나 ‘상정고금예문(祥定古今禮文)’을 저술했다. 이 책의 간행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최충(崔沖) 이후 무신란이 일어나기까지 100여년이 해주최씨 최전성기였다. 하지만, 무인시대가 도래하자 문장을 중시여기는 해주최씨 집안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정중부(鄭仲夫)-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최충헌(崔忠獻)으로 이어지는 20여 년간 무인정변시대는 문인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세월이었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崔瑀)시대에 와서야 무인들의 전횡을 피해 중앙을 등진 문인, 학자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규보(李奎報) 이인로(李仁老)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때 해주최씨 가문에서도 최자(崔滋)가 초빙되었다. 그는 충청, 전라안찰사(按察使)를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른다. 그는 ‘유가집(有家集) 10권’ ‘보한집(補閑集)’ 등 저술을 남겼고, 그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 문인집안인 해주최씨에서 무인도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최춘명(崔椿命)이다. 그는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평안도의 자주부사(慈州府使)로 몽골장수 살리타이(撒禮塔)에 맞선다. 인근의 모든 성이 다 함락되고 끝내 고려는 몽골과 강화했으나, 그는 끝까지 성을 지켰다. 그로 인해 조정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오히려 살리타이가 나서서 ‘몽골에는 거역했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라고 하며 구명을 해서 살아났다고 한다. 그 후 1등 공신에 오르고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

조선조 해주최씨 연혁과 인물

조선조에서 해주최씨는 4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하지만, 고려 중기를 풍미했던 명문가 해주최씨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또 조선조 해주최씨의 인물로는 최만리가 있다. 그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완고한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세종이 믿고 의지할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한 청백리(淸白吏)로 평가받고 있다. 

 

안성시 원곡면에 있는 최만리와 중화양씨 합장묘. 위에 있는 묘는 최만리의 아버지 최하의 묘이다.
최만리 외에도 조선 중기 해주최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시인이자 풍류아였던 고죽(孤竹) 최경창이 있다. 그는 기생 홍랑과의 일화로 유명한데, 홍랑이 그에게 선사했다는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라는 시조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그는 선조 때 종성부사(鍾城府史)를 지냈는데, 시인이면서도 글씨를 잘 쓰고 피리를 잘 불며 활쏘기에도 명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고죽집(孤竹集)’으로 엮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숙종 때에는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충의공 최경회의 묘와 사당.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는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의 둘째 부인이다.
또 조선조의 해주최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국한 최경회(崔慶會)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해군수(寧海郡守) 등을 지내다 부모의 상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능주(綾州·전남 화순)에 돌아가 있던 중, 전쟁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錦山)·성주(星州) 등에서 왜군을 무찔러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됐고,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했다. 후에 좌찬성(左贊成)이 추증(追增)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촉성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論介)가 그의 둘째 부인(후실)이다.

최만리의 현손인 최황은 함경도 암행어사로 실적을 올렸으며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좌찬성을 지냈다. 그의 아들 최유원(崔有源)은 광해군 때 대사헌으로 인목대비 폐모를 극력 반대했다.

영조 때 영의정 최규서(崔奎瑞)는 최경창의 후손이다. 그는 대사간에 있을 때 장희빈을 왕비로 맞으려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대사헌·대제학과 이조판서를 거치고,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모두 역임했다. 그는 소론(少論)의 영수였다.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친필을 하사받았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고 영조묘정에 배향됐다. 문집으로 ‘간재집’이 전한다.

최운서(崔雲瑞)는 현종 때 문과·무과에 모두 급제,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연기자 최불암
해주최씨의 근현대 인물


해주최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3·1운동 33인 중 한 사람인 최린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메이지법과대학에 유학할 때 조선인유학생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동학에 귀의하고,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신민회에서도 활동하였다.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1933년 이후에는 대동방주의를 부르짖으며 친일로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가 되었으며, 매일신보사장을 역임하였다. 광복이 되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58년에 사망하였다.

현대인물로는 법조계와 정관계에 최명헌(전 노동부장관, 전 국회의원)·최윤모(대법관)가 있고, 학계에서는 최동(연세대 학장)·최애경(홍익대재단 이사장) 등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최수일(전 인천제철 사장), 최용주(삼양물산 회장)가 있고, 연예계에서는 탤런트 최불암씨가 있다.

 

 

 

 

 

 

------------------------------------------------------------------------------------------------

 

해주 최씨(海州崔氏)의 연원

 

해주 최씨(海州崔氏)는 신라(新羅)에서 고려(高麗) 초에 이르기까지 황해도(黃海道) 대녕군(大寧郡ㆍ해주)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호족(豪族)으로서 내려오다 마침내 시조(始祖) 온(溫)에 이르러 큰 재산을 이루었고 인근 고을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온(溫)은 선대(先代)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으며, 고려 제4대 광종(光宗ㆍ재위 949~975) 때인 960년을 전후하여 태어나 제6대 성종(成宗) 때에 향리(鄕吏)가 되었다가 현종(顯宗)과 덕종(德宗)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목사(牧使) 김흥조(金興祖)가 시조(始祖)의 호부함을 보고 문득 향호장(鄕戶長ㆍ고려 초 각 군현의 으뜸 가는 민간인을 호장이라 불렀는데, 조선의 호장과는 같은 직이 아니며 왕이 벼슬아치를 파견하여 그들을 감독하였다)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일째 되던 날 밤 큰 별이 동북쪽에서 떨어지고 밤새 수양산(首陽山)이 울었으며, 용수산(龍首山) 봉우리가 허물어졌다. 이내 산봉우리 위로 오색구름과 노을이 온 마을에 둘러싼 채 3일 동안이나 걷히지 않았으며, 수양산(首陽山) 남쪽 기슭의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 이에 목사(牧使) 김흥조(金興祖)가 기이하게 여겨 아전(衙前)으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였는데 아전이 돌아와 아뢰기를, “최호장(崔戶長) 댁에서 지난 밤에 아들 충(沖)을 낳았을 뿐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하니 내심 두려움을 느낀 김흥조(金興祖)가 시조(始祖)의 향리직(鄕吏職)을 면하고 후대하며 욕되지 않게 하였다. 뒷날 온(溫)이 해주(海州)의 목민관(牧民官ㆍ고을 향리. 고을 원)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푸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장자(長子)라 칭송하였으며, 훗날 벼슬이 판리부사(判吏部事)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해주(海州)로 삼고 문호(門戶)를 열었다.

▲ 1866년 발간된 해주 최씨 족보 병인보(丙寅譜).

 

 

해주 최씨(海州崔氏)는 사정공파(司正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대녕군파(大寧君派), 서운부정공파(書雲副正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현감공고파(縣監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전한공파(典翰公派), 판사복시공파(判司僕寺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사평공파(司評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해릉군파(海陵君派), 복야공파(僕射公派) 등의 지파가 있다.

▲ 1919년 발간된 해주 최씨 족보 기미보(己未譜).

 

 

원래 온(溫)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딸만 있어 둘째 아들 충(沖)에게 가업을 물렸다고 전하며, 충(沖ㆍ984~1068)은 동방유학(東方儒學)의 비조(鼻祖)이며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제(放晦齊)로 성종 5년(986년) 황해도 대령군(大寧郡)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목종 8년(1005년) 약관 20세의 나이로 갑과(甲科)에 장원급제하여 우습유(右拾遺ㆍ고려 때 문하중서성의 정6품 벼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현종 4년(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太祖)에서 목종(穆宗)까지의 실록편찬(實錄編纂)에 참여하였다.

?
▲ ‘고려사(高麗史)’ 명신전(名臣傳)에 수록된 문헌공전(文憲公傳)과 ‘고려사’ 95권 열전 8권에 수록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 열전.?

 

 

 

이때 거란(契丹)은 현종(顯宗)의 즉위를 문제 삼아 고려에 침략하였는데 충(沖)이 당시 예부시랑(禮剖侍郞) 강감찬(姜邯贊ㆍ금천 강씨 시조)으로 하여금 각 진의 항복의 뜻을 버리게 하였고 하공진(河拱辰ㆍ진주 하씨 시조)을 천거, 적을 기만하는 책략을 사용할 것을 권하여 국왕의 옥체를 보전케 하였다. 이에 뒷날 문정공(文貞公) 신현(申賢)이 말하기를 “위대하구나 강감찬 장군이여! 문헌공(文憲公ㆍ충)이 자신을 추천하는 것을 의심치 아니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버리고 현자(賢者)에게 순종하였으며 반드시 자문을 구하여 계책을 세웠으니 우리가 오랑캐가 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강감찬의 덕이다” 하였다. 그러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세상사람들은 거란병을 물리친 것에 대하여 최충(崔沖)의 숨은 공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왕이 강감찬을 찬양한 싯구만을 가지고 모두 그의 공(功)이라고 말하니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하면서 그 공적의 근원을 충(沖)에게 두었다.

▲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아들은 문화공(文和公) 최유선(崔惟善)과 문장공(文莊公) 최유길(崔惟吉)의 이름만 기록된 ‘고려사(高麗史)’와 최충 유묵.

 

현종 5년(1014년) 문관직인 대각(臺閣)직을 무관들도 겸직하도록 제도를 바꾸자 충(沖)이 앞장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스스로 사직하고 중학(中學)을 건립, 구재(九齋)를 열어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것이 곧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효시로서 충(沖)을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하는 계기가 되었다. 덕종 원년(1032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ㆍ정3품 벼슬)로 영전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육조지령(六條之令)을 여러 관청 벽에다 써 붙이게 하였다. 이어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고 정종 2년(1036년)에는 정상이 딱한 죄인에게는 교수와 도참을 금지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이로서 살아 남은 사람이 무려 160여 명이었다. 문종 1년(1047년) 4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침으로써 고려 형법(刑法)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농번기의 공역 금지와 국가재정 낭비를 금하도록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했다. 그후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 경계의 강경책을 쓰도록 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워 문종 7년(1053년) 12월 궤장(机杖ㆍ나라에 공이 있는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지팡이)을 하사받았다.

문종 9년(1055년)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ㆍ늙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남)한 뒤 사숙(私塾ㆍ글방)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자 다른 유학자들이 본떠 당시 11개의 사숙(私塾)이 개설되어 그의 사숙과 함께 12공도(公徒)로 불리웠고, 그의 제자들은 문헌공도(文憲公徒)라 칭했다. 그가 당시 서울인 개경(개성) 송악산 기슭에 문을 연 구재학당(九齋學堂)은 우리 나라 사학(私學)의 효시가 되었다. 문종 22년(1068년) 9월에 그가 죽으니 왕은 태의감(太醫監) 이염(李鹽)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게 하여 조위(弔慰)하고 시호를 문헌(文憲)으로 내려주며 정종(靖宗)의 묘정에 배향(配享케 하였다. 뒤에 선종(宣宗)의 묘정에 배향하고 해주(海州)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하였다.

▲ 1748년 해주 문헌서원의 영정을 모사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 영정(右)과 문화공(文和公) 최유선(崔惟善) 영정 및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1991년 경기도 오산시 내삼미동에 건립한 문헌서원(文憲書院).

 

고려의 학자 이제현(李齊賢)과 조선의 학자 서거정(徐居正)이 “우리 나라의 문물이 더욱 성하고 이로부터 뛰어난 문사가 많이 나와 중국에서조차 시서(詩書)의 나라로 일컬어져 지금에 이른 것은 오로지 최충의 덕택이다”라고 극찬하였으며, ‘중경지(中京誌)’와 ‘해동야승(海東野乘)’에도 “신라와 고려시대는 중국의 풍속이 아직 물들지 않은 때였는데 최충은 성리학의 대가(주염계와 정자 형제)들보다 이른 시기에 태어나 외로이 성리학(性理學)을 천명하고 그 설을 제창하였으며 구재(九齋)를 설립하고 학도들을 가르쳤다. 그러니 충은 우리 동방 성리학의 시조이다” 하였다. 또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상촌(象村) 신흠(申欽) 등이 말하기를 “우리가 본래 문명한 나라라 일컬어졌지만 기자(箕子) 이후에 학문에 있어서는 끊어져 없어졌다. 비록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문묘에 배향되기는 하였으나 한낱 문한의 선비에 지나지 않는다. 비로서 고려에 이르러 훌륭한 선비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문헌공 최충이 가장 뛰어나다. 또한 우리 나라 성리학의 계통이 기자(箕子)로부터 최충에게로 이어졌으니 충은 마땅히 우리 나라 학문의 사표(師表)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과 아들 문화공(文和公) 최유선(崔惟善)을 배향한 강원도 홍천군 서면 어유포리 노동서원(魯東書院ㆍ강원도유형문화재 제99호).

 

‘가전(家傳)’에 의하면 문헌공(文憲公) 충(沖)은 생전에 네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문화공(文和公) 유선(惟善)이고, 둘째가 문장공(文莊公) 유길(惟吉)이며, 셋째는 시랑(侍郞) 유거(惟擧)이고, 넷째가 병부상서(兵部尙書) 유정(惟正)이다 하였다. 그러나 충(沖)의 7세손인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과 ‘고려사(高麗史)’에선 유선(惟善)과 유길(惟吉)만을 기록하고 있어 서로 맞지 않는다.

▲ 문화공(文和公) 최유선(崔惟善)이 죽었다는 ‘고려사(高麗史)’ 9권 세가 9권 문종 29년(1075년) 1월 9일 기록과 왼쪽의 ‘고려사’ 95권의 최유선 열전(列傳)

 

유선(惟善ㆍ1010~1075)은 자는 낙부(樂夫), 호는 송탄(松灘) 또는 낙진와(樂眞窩)로 현종 21년(1030년)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ㆍ고려 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 들어가 문종 1년(1047년) 어사잡단(御史雜端)에 올랐고, 문종 9년(1055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있을 때 공부시랑(工部侍郞) 이득로(李得路)와 함께 조상회장사(弔喪會葬使ㆍ장례에 조문으로 참배하는 사신)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문종 21년(1067년) 9월 중양절(重陽節)에 왕은 송악정(松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뭇 신하들에게 시부를 짓게 하고 유선(惟善)이 지은 것이 최고라 하며 자신이 타던 말을 하사하였고, 문종 22년(1068년) 1월에 판상서 이부사(判尙書吏部事)를 거쳐 추충찬화 강정수제공신(推忠贊化康靖綏濟功臣)의 호(號)를 받고 개부의동삼사 삼중대광(開府儀同三司三重大匡)을 가자(加資)받았다. 이어 문종 25년(1071년) 1월에 수사도 태사 중서령 판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守司徒太師中書令判吏部事監修國史上柱國)이 되고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문종 29년(1075년) 1월에 죽으니 시호를 문화(文和)라 하였으며, 문종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
▲ 문장공(文莊公) 최유길(崔惟吉)이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임명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9권 세가 9권 문종 27년(1073년) 12월 27일 기록과 수사공판삼사사(守司空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는 문종 31년(1077년) 11월 9일 기록.

 

유선(惟善)의 동생 유길(惟吉ㆍ?~1094)은 호는 월계(月溪)ㆍ청곡(淸谷)으로 고려 덕종 2년(1033년)에 을과(乙科)에 장원급제하여 호부상서 태자빈객 상서우복야(戶部尙書太子賓客尙書右僕射)를 거쳐 문종 31년(1077년) 수사공 섭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에 올랐다. 시호는 문장(文莊).

‘고려사(高麗史)’ 95권 열전 8권에 기록된 양평공(良平公) 최사제(崔思齊) 열전과 그가 죽었다는 ‘고려사’ 10권 세가 10권 선종 8년(1091년) 8월 기록.

 

유선(惟善)의 아들 사제(思齊ㆍ1037~1091)는 초명은 사제(思濟)로 문종 8년(1054년) 4월에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고 문종 35년(1081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전임되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다녀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ㆍ정3품)ㆍ중추원사(中樞院使ㆍ종2품)ㆍ참지정사(參知政事ㆍ종2품)를 역임, 선종 6년(1089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선종 8년(1091년) 판이부사 상주국(判吏?部事上柱國)에 올랐다. 시호는 양평(良平).

‘고려사(高麗史)’ 95권 열전 8권의 강경공(康敬公) 최사량(崔思諒) 열전.

 

유길(惟吉)은 강경공(康敬公) 사량(思諒), 충경공(忠景公) 사추(思諏), 문과(文科) 급제한 사묵(思默)의 세 아들을 두었다. 사량(思諒)은 18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30년(1076년)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다녀오고 선종 1년(1084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했다. 선종 3년(1086년) 중추원사 참지정사 겸 서경유수사(中樞院事參知政事兼西京留守使)를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로서 수국사(修國史)를 겸임,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이에 왕은 전례를 깨고 치사(致仕)한 자의 예(禮)에 따라 녹봉의 절반을 평생토록 지급케 하였다. 시호는 강경(康敬)으로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 암단(岩壇)에 배향(配享)되었다.

▲ (上) ‘고려사(高麗史)’ 96권 열전 9권의 충경공(忠景公) 최사추(崔思諏) 열전. (下)최사추가 죽었다는 ‘고려사’ 64권 지(志) 18권 예종 10년(1115년) 2월 기록과 숙종묘(肅宗廟)에 배향되었다는 세가 14권 예종 11년(1116년) 4월 4일 기록.


 

둘째 아들 사추(思諏ㆍ1034~1115)는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해 내시(內侍)가 되고, 전중소감(殿中小監)ㆍ지상서호부사(知尙書戶部事)를 역임한 후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한 뒤 서경유수(西京留守)가 되었다. 현종 즉위년(1094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비롯한 여러 관직에 종사하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승진하여 보정공신(輔正功臣)이 되었고, 예종(睿宗) 때 수태사 중서령(守太師中書令)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예종 10년(1115년) 2월에 그가 죽으니 왕이 연등회에 나가 풍악을 보다가 부고를 듣고는 슬퍼하며 부의(賻儀)를 보냈다. 이자겸(李資謙)ㆍ문공미(文公美)ㆍ유인저(柳仁著) 등이 사추(思諏)의 사위들로서 권세를 누렸고, 이자겸(李資謙)의 딸이 예종왕비 순덕왕후(順德王后)가 되어 태자를 낳자 추성봉국공신(推誠奉國功臣)에 대령군 개국후(大寧郡 開國侯)가 되었다. 죽은 뒤 숙종(肅宗)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

예종 10년(1115년) 사망한 충경공(忠景公) 최사추(崔思諏)의 묘지석. 서울대박물관 소장.

 

사제(思齊)의 아들 약(?)은 유선(惟善)의 큰 손자로 선종 원년(1084년) 5월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종 11년(1116년) 4월 지제고(知制誥ㆍ조서나 교서 등의 글을 짓는 관직)로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대동강(大同江)에서 연유(宴遊)만 즐기는 예종(睿宗)에게 간(諫)하여 중지케 하였으나 후에 이 일로 무고를 받아 춘주부사(春州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예부상서(禮部尙書)ㆍ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후에 삼중대광태사 문하시중 판리부사(三重大匡太士門下侍中判吏部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로는 영렬공(英烈公) 윤의(允儀)와 감찰어사(監察御史) 윤인(允仁)이 있다.

‘고려사(高麗史)’ 95권 열전 8권에 기록된 최약(崔?) 열전.

 

사추(思諏)의 아들 원(源)은 고려 때 우복야(右僕射)를 지냈고, 관(灌)은 인종 7년(1129년)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 금(金)나라에 다녀와 인종 19년(1141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서 다시 금나라에 다녀왔다. 인종 23년(1145년) 추밀원사(樞密院使)ㆍ판삼사사(判三司事)ㆍ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거쳐 의종(毅宗) 초에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사추(思諏)의 아들 주(湊)는 인종 15년(1137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ㆍ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ㆍ태자빈객(太子賓客)ㆍ병부상서ㆍ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ㆍ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후 인종 18년(1140년) 판형부사(判刑部事)로 있으며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時幣ㆍ시대의 폐습)의 시정책을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후 평장사(平章事)ㆍ태자대부(太子大傅)를 거쳐 인종 23년(1145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고려사(高麗史)’ 95권 열전 8권에 기록된 영렬공(英烈公) 최윤의(崔允儀) 열전.

▲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사직리에 자리한 11세 전리총랑(典理摠郞) 최득전(崔得全)의 묘는 해주 최씨 중 남한에서 가장 윗대 선조 묘이다. ?

 

 

 

 

충(沖)의 5대손이고 약(?)의 아들인 윤의(允儀ㆍ1102~1162)는 초명은 천우(天祐)로 인종 6년(1128년) 문과에 급제해 인종 11년(1133년)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ㆍ종6품)ㆍ태학박사(太學博士)를 거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가 되었고, 인종 14년(1136년) 조제사(弔祭使)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시예부시랑(試禮部侍郎)ㆍ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를 거쳐 1151년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同知樞密院事), 이듬해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 등을 역임, 1154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권판상서병부사(權判尙書兵部事), 동북면병마판사 겸 판중군병마사가 된 다음에 의종 16년(1162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ㆍ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학문에 뛰어났고 문장에 능했으며, 그의 저서 ‘상정고금례문(詳定古今禮文)’은 고종(高宗) 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후에 의종(毅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영렬(英烈).

(上)영렬공(英烈公) 최윤의(崔允儀) 묘지석. (下)광양군부인(光陽郡夫人) 김씨가 2남3녀를 낳고 1151년(42세) 죽자 그의 남편인 최윤의(崔允儀)가 직접 적은 묘지(墓誌).

약(?)의 아들로, 윤의(允儀)의 동생인 윤인(允仁ㆍ1112~1161)은 공부상서 지추밀원사(工部尙書知樞密院事)를 지낸 외할아버지 이자덕(李資德)의 음덕으로 상서호부 영사동정(尙書戶部令史同正)이 되었다. 그 뒤 진사시에 급제하기도 했으나 본래 천성이 학문이나 벼슬길에 큰 욕망이 없었으므로 관직은 성주통판(成州通判)을 거쳐 지홍주사 시전중내급사(知洪州事試殿中內給事)에 이르러 죽었다.



▲ 고려 고종 때 최자(崔滋)가 엮은 시화집(詩話集)인 보한집(補閑集).
▲ ‘고려사(高麗史)’ 102권 열전 15권에 기록된 문청공(文淸公) 최자(崔滋) 열전.

 

윤의(允儀)의 손자이며 약(?)의 증손인 자(滋ㆍ1188∼1260)는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로 강종(康宗) 1년(121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국자감(國子監)의 학유(學諭) 때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이규보(李奎報)의 추천으로 문한(文翰)을 맡았다. 이어 급전도감록사(給田都監錄事) 때는 근면하게 일을 하여 권신 최우(崔瑀)의 신임을 얻었으며, 고종 37년(1250년) 사신으로 몽고에 다녀온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이르렀다. 학식과 행정력을 겸비하여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고종 43년(1256년)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역임하고 수태사(守太師) 등을 거쳐 1259년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그러나 고종 46년(1259년) 몽고의 침입 당시 고종(高宗)에게 몽고(蒙古)에 항복하기를 권하였으며, 최충헌(崔忠獻)의 노속(奴屬)인 김준(金俊)이 최우(崔瑀)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고 김준(金俊)의 아들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어 세인의 조소를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당대에 문명을 떨쳤고, 저서에 ‘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과 ‘보한집(補閑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

▲ 최홍윤(崔洪胤)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21권 세가 21권 강종 원년(1212년) 12월 22일 기록과 그가 죽었다는 ‘고려사’ 22권 세가 22권 고종 16년(1229년) 9월 4일 기록.

 

사추(思諏)의 손자 홍윤(洪胤)은 고려의 이름있는 정치가로 희종(熙宗) 초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고, 희종 6년(1210년) 전선(銓選)을 관장한 후 강종 1년(1212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고종 때에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 ‘고려사(高麗史)’ 110권 열전 23권의 최유엄(崔有?) 열전. 클릭!

 

이렇게 고려 왕조에 공헌한 해주 최씨(海州崔氏) 일가를 더욱 빛낸 인물은 유엄(有?ㆍ1239~1331)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자(滋)의 셋째 아들로 출생한 그는 성품이 담박하고 겸손하여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벼슬을 하면서도 10년 동안이나 지위를 옮기지 않으니 당시의 이론은 오히려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충렬왕(忠烈王)이 그 명성을 일찍부터 들었다가 1274년 즉위하자 감찰잡단(監察雜端ㆍ사헌부에 속해 있는 종5품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4대(四代)의 왕조에 걸쳐 벼슬하여 국가의 원로가 되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의 노비법(奴婢法)을 개정하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하여 중지시킨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었고, 원나라에서 심양왕(瀋陽王)이 충숙왕(忠肅王)의 폐위를 책동하다 실패한 뒤 고려를 원나라의 내지(內地ㆍ외국에서 자기 본국을 일컫는 말)로 편입시키도록 책동하자 85세의 노령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이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행성(行省)의 설치를 중지하게 했다.

▲ ‘고려사(高麗史)’ 103권 열전 16권에기록된 최춘명(崔椿命) 열전. 클릭!

 

고려조에서 해주 최씨(海州崔氏) 가문을 빛낸 후손들 중에서 춘명(椿命)을 빼놓을 수 없다. 춘명(椿命ㆍ?~1250)은 충(沖)의 후손으로 고종 18년(1231년) 자주부사(慈州副使)로서 관민을 이끌고 몽고군에 포위된 성(城)을 고수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그 뒤 화의를 맺게 되자 조정에서는 몽고원수 살리타이(撤禮塔)의 힐책을 받아 내시낭중(內侍郎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항복을 설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어 삼군장수가 항복하게 되자 살리타이(撤禮塔)는 회안공(淮安公) 정에게 자주(慈州)의 항복을 독촉하였다. 이에 정은 후군진주(後軍陳主) 대집성(大集成)과 몽고 관리를 보내어 조정과 삼군이 항복한 사실을 알리고 속히 항복하라 하였으나 조지(朝旨)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몽고 관리가 대집성(大集成)으로 하여금 성안에 들어가 권유하게 하였으나 여러 차례 거부하였다. 이에 처형하라는 몽고 관리들의 압력으로 서경(西京)에 투옥되자 왕이 재추(宰樞)에게 물으니 모두 감형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집성(大集成)이 최우(崔瑀)를 움직여 처형하게 하였다. 재추(宰樞)들이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하였으나 유승단(兪升旦)이 홀로 반대하였다. 최우(崔瑀)가 거듭 내시(內侍) 이백전(李白全)을 보내어 처형하려고 하였을 때도 사색(辭色)은 태연하였다. 이를 본 몽고 관리는 비록 그가 몽고에는 명을 거역하였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니 살려주라는 청을 하여 석방되었다. 뒤에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에 올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발탁되었다.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한 양무공(襄武公( 최영지(崔永沚)가 평양성을 쌓을 때 선대(先代) 군왕(君王) 능묘의 돌을 파낸 탓으로 해주로 귀양갔다는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1400년) 7월 25일 기록과 그가 죽었다는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1403년) 2월 10일 기록.

 

영지(永沚ㆍ1331∼1403)는 아버지는 대호군 종(淙)으로 한미한 집안에 태어나 군졸을 거쳐 고려 말에 여러 벼슬을 지내고 우왕 14년(1388년) 요동정벌군의 장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들어가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등 이성계(李成桂)와 행동을 같이 했다. 태조 1년(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서북면 안무사(西北面安撫使)가 되었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어 이해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에 올랐다. 이듬해 2월부터 6월에 걸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앞서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때의 공으로 다시 회군공신 1등에 책록되면서 수양군(首陽君)에 봉군되었으며, 다시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개수(改授)되었다. 1394년 안주ㆍ의주ㆍ이성ㆍ강계 등의 병마도절제사 겸 안주목사(兵馬都節制使兼安州牧使)로 파견되어 북변을 방어했으며,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로 입조(入朝)하였다. 같은 해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자 분도평의사사사(分都評議使司事)가 되어 개성에 잔류하면서 천도 후의 민심을 위무하고 행정을 맡았다. 1397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에 걸쳐 서북면 도안무찰리사(西北面道安撫察理使)와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겸 평양윤(西北面都巡問察理使兼平壤尹)으로 북변 방어를 위한 평양성의 축조를 감독했고, 돌아와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정종 2년(1400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치사(致仕)했으나, 사헌부( 司憲府)로부터 “평양성 축조 감독시에 역도(役徒)들이 상대(上代)의 묘석(墓石)을 발굴하여 축성한 일을 묵인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논죄되었으나 정종(定宗)의 비호로 해주(海州)에 유배됨에 그쳤고, 곧 방환되었다. 천성이 강직하여 세도에 굴하지 ?않았고, 비록 학문을 익히지는 못했으나 오성(悟性)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무 처리시에는 막료에게 문서를 읽게 한 뒤 사리를 분별하여 명쾌히 처결하였다. 시호는 양무(襄武).

전(前) 한성부윤(漢城府尹) 최관(崔關)이 졸(卒)하니 부의를 보냈다는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년) 3월 11일 기록.

 

관(關ㆍ?∼1424)은 자는 자고(子固)로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공양왕 4년(1392년) 예조총랑(禮曹摠郎)이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의 일당으로 몰려 직첩(職牒)을 빼앗기고 곤장 70도를 맞은 뒤에 원지(遠地)로 유배되었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풀려났다. 태종 2년(1402년) 서북면 경차관(西北面敬差官)과 예빈시윤(禮賓寺尹)을 지내고, 1404년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있을 때 사건을 잘못 판결한 죄로 다시 울주(蔚州)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406년 의용순금사 대호군(義勇巡禁司大護軍)으로 있으면서 유좌(柳佐) 등의 노비치사사건을 처결할 때, 그가 동료인 유량(柳亮)의 아들이므로 처(妻)의 병을 핑계로 이를 기피하여 개령현(開寧縣)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서 순금사(巡禁司)에 복직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가 되었다. 세종 3년(1421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승진되고 이듬해에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자리한 최만리(崔萬理)의 아버지 소윤(少尹) 최하(崔荷)의 묘.

 

고려의 역사를 수놓았던 해주 최씨(海州崔氏)는 조선에 와서도 명문의 대를 이어 왔는데, 세종 때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된 만리(萬理ㆍ?~1445)를 꼽을 수 있다. 만리(萬理)는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고려시대 해동공자로 불리던 충(沖)의 12대손이며 하(荷)의 아들이다. 세종 1년(14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기용되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겸임했다. 세종 19년(1437년)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를 거쳐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종 26년(1444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자 6조목의 이유를 들어 반대했으므로 한때 세종의 노여움을 샀으며, 즉일 친국(親鞫)을 받고 다음날 석방, 복직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되었다.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 그는 집현전(集賢殿)의 실무책임자인 부제학(副提學)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불교배척상소가 6회, 첨사원(詹事院) 설치반대상소가 3회로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 진사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한 것과 사직상소 및 한글반대상소가 있다. 불교배척상소의 대부분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慶讚會)의 혁파를 청하는 것이었고, 첨사원(詹事院) 설치를 반대한 상소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섭정(攝政)시키려 하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그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완성될 때까지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다.

▲ (上)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아버지 최하(崔荷)의 묘 아래 안장된 최만리(崔萬理)와 중화 양씨 합장묘(향토유적 제32호) 및 사당인 강호재(江湖齋).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궁중의 의사청(議事廳)에 최항(崔恒) 이하 집현전(集賢殿) 소장학사와 동궁(東宮)ㆍ진평대군(晋平大君) 등을 참가시켜 원나라의 웅충(熊忠)이 엮은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의 자음(字音)을 한글로 달아 일대 자음의 개변운동을 하려 하였다. 세종은 당시 우리 나라의 한자음이 체계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韻書)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집현전(集賢殿)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한글반대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學士)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이 된다. 즉, 세종의 만리(萬理)에 대한 친국(親鞫) 내용을 보면, “내가 만일 이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한 것을 보면 만리(萬理) 등의 상소는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의 번역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의 번역사업은 뒤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홍무정운(洪武正韻)’이 실패작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동국정운(東國正韻)’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 번역사업의 반대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가 지휘한 ‘골자부대’ 깃발과 1592년 10월 우치현전투에서 왜장으로부터 노획한 언월도(偃月刀) 및 유묵.

 

경회(慶會ㆍ1532∼1593)는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으로 선조 1년(15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군수(寧海郡守) 등을 지내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ㆍ무주(茂朱)ㆍ창원(昌原)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승진하였다. 그 뒤 제2차 진주성(晋州城) 전투에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9일 동안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투신자살하였다. ‘화순현읍지(和順縣邑誌)’에 ‘투강시(投江詩)’가 실려 전한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진주 창렬사(彰裂祠)와 능주(陵州) 포충사(褒忠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

▲ 전남 화순군 화순읍 금전리에 자리한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묘 및 순조 때 세웠으나 1963년 현위치인 화순군 한천면 다지로 이건한 사당(전남문화재자료 제64호).

▲ 화암(花巖) 최유원(崔有源)의 유묵. ?

 

 

 

 

황(滉ㆍ1529~1603)은 자는 언명(彦溟), 호는 월담(月潭)으로 아버지는 재령군수(載寧郡守) 여주(汝舟)이며 어머니는 청주(淸州) 한씨(韓氏)이다. 한양(漢陽) 출신으로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으로 명종 13년(155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명종 21년(156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고, 1572년 학유(學諭)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고, 1579년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아가 지방의 기한(饑寒ㆍ춥고 배고픔) 및 방어(防禦) 대책 8조를 상소하였다. 그후 정언(正言)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ㆍ사간(司諫)을 거쳐 대사간(大司諫)ㆍ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성절사(聖節使) 및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溟)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90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과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어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비(王妃)와 세자빈(世子嬪)을 배종하고 이듬해 검찰사(檢察使)가 되어 왕과 함께 환도하였으며, 1597년 좌찬성 겸 세자이사(贊成子世左貳師)에 이르렀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황(滉)의 아들 유원(有源ㆍ1561~1614)은 자는 백진(伯進), 호는 추봉(秋峰)·화암(花巖)으로 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정구(鄭逑)와 교유하였다. 선조 12년(157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1년 음보(蔭補)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이 해 5월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이 된 뒤 형조좌랑(刑曹佐郞)과 아산현감(牙山縣監)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1602년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에 올라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로부터 청현직(淸顯職)에 올라 사서(司書)ㆍ장령(掌令)ㆍ정언(正言)ㆍ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4년(1612년)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형조참의(刑曹參議)ㆍ이조참의(吏曹參議)ㆍ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해천군(海川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이위향(李偉鄕)ㆍ정조(鄭造)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는데 뜻이 관철되지 않자 사임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효행(孝行)으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간(忠簡).

▲ (上)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유묵과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자리한 묘. 아래는 연인 홍랑(洪娘)의 묘.

 

경창(慶昌ㆍ1539∼1583)은 자는 가운(嘉雲), 호는 고죽(孤竹)으로 선조 1년(156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ㆍ종성부사(鐘城府使)를 지냈다.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문장과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ㆍ송익필(宋翼弼) 등과 함께 8문장가로 불렸으며,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시ㆍ서ㆍ화(詩書畵)에 뛰어났고 특히 퉁소를 잘 불었는데, 영암(靈巖) 해변에 살 때 왜구(倭寇)를 만났으나 퉁소를 구슬피 불자 왜구들이 향수에 젖어 흩어져 갔으므로 위기를 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숙종(肅宗) 때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저서로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아 고문을 받고 옥사한 뒤 부관참시를 당한 쌍백당(雙柏堂) 최기(崔沂)의 묘.

 

기(沂ㆍ1553∼1616)는 자는 청원(淸源), 호는 서촌(西村)·쌍백당(雙柏堂)으로 선전관(宣傳官) 여개(汝漑)의 아들이다. 선조 18년(1585년) 사마시(司馬試)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군사들로부터 창고 곡식을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하여 선조(宣祖)의 신임을 얻었으며, 그 뒤 정주목사(定州牧使)ㆍ형조참의(刑曹參議)ㆍ호조참의(戶曹參議)ㆍ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등을 거쳐 1607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내고 광해군(光海君) 8년(1616년)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을 때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와 관련,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ㆍ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함으로써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아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하였다. 뒤에 다시 대역죄(大逆罪)로 몰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전(澱ㆍ1567∼1588)은 자는 언침(彦沈), 호는 양포(楊浦), 군수(郡守) 여우(汝雨)의 아들로 9세부터 이이(李珥)의 문인이 되었다. 14세에 사마시(司馬試)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뛰어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18세 때인 선조 18년(158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박학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요절하였다. 시문(詩文)이 뛰어나고 매화(梅花)ㆍ조류(鳥類)를 잘 그렸으며, 글씨는 예서(隸書)ㆍ초서(草書)에 능했다.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하며, 특히 그의 시문유집(詩文遺集)을 명나라에서 간행하여 절찬을 받았다.

▲ 묵수당(默守堂) 최유해(崔有海)의 영정과 유묵.

 

전(澱)의 아들 유해(有海ㆍ1588∼1641)는 자는 대용(大容), 호는 묵수당(默守堂)으로 김현성(金玄成)ㆍ조수륜(趙守倫)ㆍ최립(崔笠)ㆍ정구(鄭逑)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광해군 5년(1613년) 생원(生員)이 되고, 이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서 훈련도감 낭청(訓鍊都監郎廳)이 되었으며, 1617년에는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가 되었으나 대북파(大北派)에 의하여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되었으며, 이듬해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어 함경도관향사(咸鏡道管餉使)를 겸하였다. 이 때 철산군 백량면(柏梁面)의 가도(假島)에 주둔하고 있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나라 군대에게 군량을 공급하였다. 그 뒤 군부시정(軍簿寺正)ㆍ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고, 1629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이어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정주목사(定州牧使)ㆍ길주목사(吉州牧使)를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천문ㆍ지리(地理) 등 모든 면에 정통했고, 여러 곳의 지방관으로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서 곳곳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묵수당문집(默守堂文集)’ㆍ‘서명천견록(西銘淺見錄)’ㆍ‘길주사적기(吉州史蹟記)’가 남아 있다.

▲ 충정공(忠貞公) 최규서(崔奎瑞)의 유묵.

 

규서(奎瑞ㆍ1650∼1735)는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으로 숙종 6년(1680년) 문과에 급제, 지평(持平)ㆍ이조좌랑(吏曹佐郞)ㆍ수찬(修撰) 등을 지낸 뒤 숙종 15년(1689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이듬해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왕비 책봉을 반대하였다. 1694년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1699년 대사헌(大司憲)ㆍ형조판서(刑曹判書)ㆍ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경종 1년(1721년) 우의정(右議政)이 된 뒤 연잉군(延?君ㆍ뒤의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두고 노론(老論)과 대립, 이를 철회시키는 등 소론정권의 주역을 맡았다. 경종 3년(1723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이듬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영조 4년(1728년) 용인(龍仁)에 은거하다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서울로 올라와 고변(告變)하므로 난을 토평케 하여 왕으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서찰을 받았으며, 영조(英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으로 저서에 ‘간재집(艮齋集)‘’이 있다.

▲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자리한 충정공(忠貞公) 최규서(崔奎瑞)의 묘와 영조(英祖)가 내린 어서(御書)와 영정을 봉안한 어서각(御書閣ㆍ향토유적 제6호).

 

치륜(致倫ㆍ?∼1812)은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전 첨사(僉使)로서 의병에 참가하여 할아버지 무숭(茂崇)과 함께 의주성을 지켰다. 뒤에 의병장 허항(許沆)의 휘하에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농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용주(龍州)를 수복하였고, 철산유진장(鐵山留陣將)이 되어 농민군 청북도지휘(淸北都指揮) 정경행(鄭敬行)과 휘하 군관인 정대성(鄭大成)ㆍ김윤대(金允大) 등을 생포하였다. 또한, 농민군으로서 용천부사(龍川府使)를 자처하고 있던 정성한(鄭聖翰)과 그의 무리인 장성명(張成明)ㆍ최유천(崔維天) 등을 사로잡아 압송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인정하여 자품을 올려 나주영장(羅州營將)에 임명하였으나 1812년 정주성을 공격하다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의주 학봉사(鶴峰祠)에 배향되었다.

▲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의 연보(年譜)인 ‘간재연보(艮齋年譜)’. 편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나, 5대손 최황(崔璜)이 철종(哲宗) 때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활자본 7권3책.

 

황(璜ㆍ1783∼1874)은 자는 국보(國輔), 호는 구암(苟菴)으로 아버지는 군수 언헌(言憲)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사서를 읽고 제가(諸家)의 주석을 변정(辨正)하였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20세에 반시(泮試)에 합격하여 순조 23년(1823년)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처음 임명되고, 이어 사재봉사(司宰奉事)에 승진되었다. 1834년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를 거쳐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이 되었으며, 그 해 11월에 헌종(憲宗)이 즉위하자 계방참하관(桂坊參下官)에 임명되었다. 헌종 1년(1835년) 산릉도감 낭청(山陵都監郎廳)이 되었으며, 이어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道事)를 역임한 뒤에 산청현감에 임명되었다. 그 뒤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1844년 다시 거창부사 등을 거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성품이 결백하고 지조가 강건하며,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 경사에 통달하고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는 집에 국화를 심고 은일하며 시작(詩作)과 저술에 힘썼다. 저서로는 ‘구암부묵(苟菴副墨)’ㆍ‘제자초략(諸子抄略)’ㆍ‘시총(詩叢)’ㆍ‘역예초록(易禮抄錄)’ㆍ‘간재연보(艮齋年譜)’ 등이 있다고 전하나 그 소장처를 확인할 수 없다.

▲ 민족대표 33인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최린(崔麟).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린(麟ㆍ1878~?)은 함경남도 함흥(咸興) 출생으로 고종 33년(1896년) 함경남도 관찰부 집사가 되었고, 190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 모임인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해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에 피신하였다. 귀국 후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고 1904년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 보성고등보통학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는 등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3·1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3년 동안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매진하여 도령(道領)ㆍ대도정(大道正)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 뒤 친일파로 변절하여 1934년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 1937년 매일신보사장을 지내고 광복 때까지 임전보국단장(臨戰報國團長)으로 활동하는 등 친일행위로 일관하였다. 1949년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기소 수감되었다가 출감하였으며, 한국동란 때 납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