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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최)

화순 최씨(和順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화순 최씨(和順崔氏) 시조(始祖) 최세기(崔世基)는 최씨(崔氏)의 득성조(得姓祖)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중엽 효행으로 천거되어 관계(官界)에 나가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남도안렴사(南道按廉使)가 되어 호남지방에서 몽고군(蒙古軍)을 몰아내고 민심을 안정시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오산군(烏山君ㆍ오산은 화순의 별호)에 봉해졌다. 시호(諡號)는 평장(平莊)으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화순(和順)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명가보(名家譜)’ 화순편(和順編)에 이르기를, 화순(和順)에 한 묘가 있으니 예로부터 최정승(崔政丞) 묘로 전해왔다. 표석(表石)은 없고 단지 사대석(莎臺石)만 남아 있는데 한쪽에는 ‘崔氏墓孝子世基’라고 쓰여 있고 관직은 쓰지 않았으나, 또 한쪽에는 ‘封烏山君’이라고 쓰여져 있다고 하였다.

 ▲ 전남 화순군 화순읍 만호산(萬湖山) 기슭 평택 임씨(平澤 林氏) 묘역에 자리한 시조 오산군(烏山君) 최세기(崔世基)의 묘.
 

 

화순고사(和順故事)에 무등산(無等山) 지맥(支脈)인 만연산(萬淵山) 밑에 팔판동(八判洞)과 갱래정(更來井)이 있는데, 이는 화순 최씨(和順崔氏) 문중에서 삼정승(三政丞) 팔판서(八判書)가 배출되어 팔판동(八判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에도 계속 벼슬 따라 상경(上京)하는 화순 최씨들이 고향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와 이 우물물을 마실 것을 기약하고 떠나므로 이 우물을 갱래정(更來井), 최씨우물 또는 한림정(翰林井)이라 한다. 오늘날에도 그 마을을 ‘최정승 못골’이라 부르고 있다.

한편 최세기(崔世基)와 같이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부(崔溥)를 함께 시조로 삼기도 한다. 최부(崔溥)는 고종 10년(1223년) 6월에 왕실의 보첩(譜牒)을 맡아보는 전중감(殿中監)으로 과거(科擧)의 시험관인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였다. 몽고의 침입으로 왕실이 강화(江華)로 난을 피하게 되자 안렴(按廉)의 사명을 띠고 전라도로 내려가 몽고군의 예봉을 꺾고 민심을 안무(按撫)하니 조정에서는 그 공을 찬양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제수하였다. 최씨(崔氏) 무신정치(武臣政治)의 요직에 참여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몽고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하여지니 화순군(和順君)에 봉(封)하고 전라도의 안무사(按撫使)로 파견하였다. 임지(任地)에서 순국(殉國)하니 시호(諡號)를 문헌(文憲)이라 내렸으며, 전라도 무등산 간방(艮方=동북방)에 묘가 있었다고 하나 홍건적의 난 이후 실전(失傳)하였다고 전한다.

 

 ▲ 저자 미상의 ‘화순최씨세고(和順崔氏世稿)’에 기록된 오산군(烏山君) 최세기(崔世基) 사실(事實).

 

 

 

그러나 최세기(崔世基)와 최부(崔溥) 이후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계(桂)의 아들로 서북면 도감판관(西北面都監判官)을 지낸 언(堰)를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윤의(允儀)를 기세조로 삼는 계통도 있다.

화순 최씨(和順崔氏)는 5세에 이르러 감찰공(監察公) 덕윤(德潤)ㆍ밀양공(密陽公) 자해(自海)ㆍ부정공(副正公) 자하(自河)ㆍ문정공(文貞公) 자강(自江)ㆍ대사성(大司成) 자빈(自濱)으로부터 5형제파가 분파되었으며, 그 외에 시정공파(寺正公派)ㆍ유수공파(留守公派)ㆍ도사공파(都事公派)ㆍ승지공파(承旨公派)ㆍ첨사공파(僉使公派)ㆍ지평공파(持平公派)ㆍ진사공파(進士公派) 등으로 분파(分派)되었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언(堰)의 아들 계신(繼臣)이 고려 때 봉상대부(奉常大夫ㆍ정4품의 문관의 품계)를 지냈으며, 그의 두 아들 영호(永浩)와 영유(永濡)에서 두 파(派)로 갈라진다.

 ▲  ‘화순최씨세고(和順崔氏世稿)’에 기록된 충절공(忠節公) 최영유(崔永濡)의 문집.

 

 

 

계신(繼臣)의 장자(長子) 영호(永浩)는 충렬왕(忠烈王) 때 좌우위 보승산원(左右衛保勝散員)을 지냈으며, 아들 서지(湑之)는 방어사, 손자 덕윤(德潤)은 감찰을 지냈고, 증손 신손(信孫)은 방어사를 역임했다. 윤(德潤)의 아우로 숭록대부(崇錄大夫)를 지낸 수(繡)의 아들 승순(承順)은 연산군 때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다가 조정의 어지러움을 개탄하고 벼슬을 사퇴한 후 평안도(무주 천수향)로 은거하였다.


▲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 먹방골에 자리한 최영유(崔永濡)의 아들로 입향조인 최원지(崔元之)의 신도비 .

 

 

 

 

계신(繼臣)의 차자(次子) 영유(永濡ㆍ?~1361)는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보문각 지제고(寶文閣知制誥)ㆍ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을 역임하고, 공민왕 10년(1361년) 해주목사(海州牧使)로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포위된 수양성(首陽城)을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바위에 혈서(血書)를 남기고 관인(官印)을 안고 깊은 못에 투신 자결했다. 이를 본 관리 공생(貢生)과 애견(愛犬)도 따라 죽으니 해주읍(海州邑)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장례를 지내고 그 묘 아래에 관리와 개의 무덤도 마련하였다. 화순백(和順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절(忠節)로 훗날 못가에 충절비(忠節碑)가 세워지고 못 이름을 투인담(投印潭)이라 불렀다.

영유(永濡)의 아들 원지(元之)는 조선이 개국되자 금산(金山)의 절에 은거(隱居)했는데, 뒤에 절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기니 하노리(賀老里)라 불렀다.

원지(元之)의 큰 아들 자해(自海ㆍ1363~1421)는 우왕 8년(138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진사시에도 합격한 뒤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올라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때 선공소감(繕工少監) 재직시 이졸(吏卒)들을 시켜 백성의 재물을 강제 징수하여 국용으로 삼았다는 죄로 일시 파직당하였으나, 다시 등용되어 종부시 부령(宗簿寺副令) 등을 거쳐 원평ㆍ밀양의 도호부사(都護府使)에 이르렀다. 딸이 정종(定宗)의 아들 장천군(長川君)과 혼인하였다.

 ▲ ‘화순최씨세고(和順崔氏世稿)’에 기록된 두곡(豆谷) 최선복(崔善復) 사실(事實). 클릭!

 

 

 

자해(自海)의 아들 선복(善復)은 자는 자초(子初), 호는 두곡(豆谷)으로 세종 20년(143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한 후에 정자(正字)에 제수되고 이어 부수찬에 올랐다. 단종 1년(1453년)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된 후 이듬해 궁내의 불당(佛堂)을 철거할 것을 상소하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1455년에는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얼마 후 지평에 제수되었다. 세조 5년(1459년) 보덕(輔德)을 거쳐 1463년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어 왕명으로 ‘오월춘추(吳越春秋)’를 교정하였다. 세조 10년(1464년) 흥복사(興福寺)를 원각사(圓覺寺)로 이름을 바꾸고 중건할 때 부제조(副提調)가 되어 실무를 맡아본 후 공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 ‘화순최씨세고(和順崔氏世稿)’에 기록된 문혜공(文惠公) 최선문(崔善門) 행적(行蹟)과 경북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에 자리한 묘.

 

 

 

그외 인물로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선문(善門ㆍ?~1455)이 유명하다. 자는 경부(慶夫), 호는 동대(東臺)로 아버지는 중부령(中部令) 자강(自江)이며, 지조가 높고 행동이 고결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같은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금릉(金陵) 하로리(賀老里)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과급제 여부와 시기에 대하여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의 문과급제자 명단에는 없다. 세종 3년(1421년) 처음으로 지평(持平)에 등용된 뒤 문종 때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뒤에 공조판서를 지냈으나 문종의 뒤를 이은 단종(端宗)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양위하자 사직하였다. 세조 1년(1455년) 좌찬성(左贊成)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혜(文惠).

▲ ‘화순최씨세고(和順崔氏世稿)’에 기록된 최중홍(崔重洪)의 묘갈(墓碣)과 아버지 최한정(崔漢禎)과 함께 위패가 봉안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도암리 참판공재실(충남문화재자료 제357호ㆍ일명 모인당).

 

중홍(重洪ㆍ1466~1533)은 자는 자부(子溥)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사로(士老)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 한정(漢禎)이다. 연산군 2년(149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지낸 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재직 중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당하여 삭직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사섬시정(司贍寺正)에 복직되었으며, 형조참의(形曹參議)를 거쳐 중종 5년(1510년)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참의(兵曹參議), 1516년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이 때 염근수령(廉謹守令)으로 뽑혀 가자(加資)되었고, 1519년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판결사(判決事)를 겸하였다. 1523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돌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1531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도민들에게 해채(海菜) 수집을 독려하여 익사자가 많아지자 파직 탄핵을 받았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1533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 계당(溪堂) 최흥림(崔興霖)의 시문집인 ‘계당유고(溪堂遺稿)’는 1804년 11대손 최학수(崔學洙)가 편집ㆍ간행했다.

 

중홍(重洪)의 손자 흥림(興霖ㆍ1506~1581)은 자는 현좌(賢佐), 호는 계당(溪堂)으로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인이다. 위기지학(爲己之學ㆍ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두고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5촌 조카인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밤낮으로 학문을 닦았다. 명종이 즉위한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에서 많은 사림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보은(報恩) 금적산(金積山)에 은거한다. 이때 대곡(大谷) 성운(成運)은 종산(鍾山)에 살았고,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은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내려왔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지리산(智異山)에서 왔다. 이들은 서로 뜻을 함께 하고 도를 합하여 밤새도록 학문을 토론하곤 하였다. 저서로 ‘계당유고(溪堂遺稿)’가 있다.
 

 ▲ 계당(溪堂) 최흥림(崔興霖) 등 4명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758년 건립한 충북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 금화서원(金華書院)은 1967년 복원하였다.

 

화순 최씨(和順崔氏)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명망이 높았던 영경(永慶ㆍ1529~1590)은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으로 전라도 관찰사 중홍(重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하현감 훈(壎)이고, 아버지는 병조좌랑 세준(世俊)이다. 일찍이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였으며, 여러 번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서 실패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선조 5년(1572년) 경주참봉(慶州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연이어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안민학(安敏學)이 자주 찾아와 정철(鄭澈)을 칭찬하고 만나 볼 것을 권했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575년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 도동(道洞)으로 은거하였으며, 마침 나라에서 사축(司畜)에 제수하고 그를 부르자 잠시 나가 취임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이듬해에는 외아들 홍렴(弘濂)이 죽는 불행을 겪었으며, 1581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붕당의 폐단을 논한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선조 17년(1584년) 교정청 낭관(校正廳郎官)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校正)에 참여한 후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선조 22년(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그 배후자로 길삼봉(吉三峯)이란 의문의 인물이 등장하자 강해(姜海)ㆍ양천경(梁千頃)에 의해 그가 길삼봉(吉三峯)이라는 무고를 받고 투옥당했다. 한때 선조(宣祖)의 특사로 석방되었다가 다시 투옥되어 정적인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국문(鞫問)을 받다가 옥사(獄死)하였는데, 당시 정적 정철(鄭澈)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1591년 신원(伸寃)되어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고, 사제(賜祭)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광해군 3년(1611년) 산청(山淸) 덕천서원(德川書院)에 배향되었다.

 ▲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의 문집인 수우당집(守愚堂集)과 경남 진주시 상대동 도강서당(道江書堂) 내에 위치한 선조사제문비(宣祖賜祭文碑ㆍ경남유형문화재 제378호)는 선조가 최영경(崔永慶)에게 내린 제문을 돌에 새긴 것이다.

 

 

 

일(逸ㆍ1615∼1686)은 자는 일지(逸之), 호는 석헌(石軒), 아버지는 좌참찬 상현(象玄)으로 장유(張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10년(163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6년 음보(蔭補)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고, 이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ㆍ교리(校理)ㆍ정언(正言)을 거쳐 효종 4년(1653년) 홍천현감(洪川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충청우도 추쇄어사(忠淸右道推刷御史)가 되어 당시 노비 등이 주인을 배반하고 내수사(內需司)에 소속되어 있던 것을 모두 추쇄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노비와 주인간의 분규를 거국적으로 해결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듬해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고, 1659년 한산군수(韓山郡守)를 거쳐 현종 1년(1660년) 장성부사가 되어서는 기민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1665년 헌납(獻納)으로 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注管)이 되어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뒤 장령(掌令)ㆍ집의(執義) 등을 거쳐 1672년 호조참의(戶曹參議), 숙종 3년(1677년) 좌승지(左承旨)ㆍ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뒤에 병조ㆍ호조의 참판을 지냈다.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숙종(肅宗)을 시강(侍講)할 때, 숙종은 그의 청빈함을 가상히 여겨 초모(貂帽)를 하사한 바 있다.

 ▲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어 가문을 복권시키고 교육사업가로 일생을 바친 최송설당(崔松雪堂).

 

 

 

송설당(松雪堂ㆍ1855∼1939)은 본명은 미상이며 송설당(松雪堂)은 호이다. 경북 김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창환(昌煥)이다. 외가쪽이 홍경래(洪景來)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어려서부터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누명을 벗게 할 것을 맹세하였다. 고종 23년(1886년) 아버지가 죽고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39세 때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였다. 그뒤 서울에 올라와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英親王)의 보모가 되었으며, 엄비(嚴妃)의 도움으로 귀비(貴妃)에 봉하여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松雪堂)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후부터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금릉학원(金陵學園)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2월 2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전국 일간지에 학교 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희사할 취지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고, 1931년 2월 5일 전 재산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시문에 능해 200여 수의 한시와 60여 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최송설당문집’ 3권(1922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