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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삼척 박씨(三陟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삼척 박씨(三陟朴氏)의 연원

삼척 박씨(三陟朴氏)의 시조(始祖) 원경(元鏡ㆍ1322~?)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8대군 중 셋째 아들인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의 14세손으로,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을 지낸 지문(之文)의 셋째 아들인 전리사총랑(典理司摠郞) 순(淳)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2년(1353년)에 과거에 급제, 권지교서정자(權知敎書正字)를 지내고 개성부윤(開城府尹)으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였다. 홍건적의 재침입 때(1361년) 복주(福州ㆍ안동)로 피난가는 왕을 호종(扈從)했고, 군사를 모집하여 개경(開京)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호종이등공신(扈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그후 공민왕 20년(1371년) 왕을 시해하려는 신돈(辛旽)을 제거한 공으로 보국삼중대광(輔國三重大匡)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삼척부원군(三陟府院君)에 봉해졌다.

말년에 관향지(貫鄕地)인 삼척(三陟)으로 낙향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의 등극으로 고려조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전 장군(前將軍) 장천영(張天永) 등과 공양왕(恭讓王) 복위 운동을 공모하다 관련자 수천 명과 함께 74세로 순절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지리산으로 은거하여 후학 육성에 진력해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는 기록도 전한다.

후손들은 고려조의 충신이나 조선에는 역신(逆臣)이므로 장례를 마친 후 구향(舊鄕)인 경남 함양군 수동면 가성(加省)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원경(元鏡)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삼척(三陟)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는 광해군(光海君) 때 척흥군(陟興君)에 봉해진 현좌(賢佐)를 시조로 적고 있다.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가성(加省)에 자리한 시조(始祖) 박원경(朴元鏡)의 묘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 과동마을 오류골[五柳洞] 뒷편 야산인 신라고분유적지에는 예로부터 세거주민들에 의해 ‘말무덤’ 또는 ‘큰무덤’으로 불리던 무덤이 있었다. 지방읍지인 ‘척주지(陟州誌)’ㆍ‘진주지(眞珠誌)’ㆍ‘삼척군지(三陟郡誌)’ 등의 기록에는 ‘과동고축(科洞古塚)’ㆍ‘용묘(龍墓)’ㆍ‘삼척군박원경묘(三陟君朴元慶墓)’로 전해져 오던 무덤으로 삼척 박씨 후손이 1980년대에 이 고분을 시조묘로 발견하였는데, 당시 무덤의 분구는 직경 6m, 높이 2m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였다고 한다. 1980년 말경에 삼척 박씨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개축하고 묘비 및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상석 등 석물들을 갖추어 관리해 오다 1991년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가성으로 이장하여 매년 10월 10일 향사한다.

원경(元鏡)의 아들 준제(準提)는 고려 때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손자 인린(仁麟)은 중직대부(中直大夫)를 지냈으며, 세종(世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방실(邦實ㆍ시조 원경의 증손)의 아들 3형제 대(代)에서 크게 세 계통으로 갈라졌다.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가성에 자리한 정헌공파(正憲公派)의 파조(派祖) 박염(朴廉)과 정부인 문화 유씨의 묘(左) 및 직산현령을 지낸 아들 박세영(朴世英)을 함께 제향하는 첨모재(瞻慕齋).

 

방실(邦實)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염(廉)은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정헌공파(正憲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세영(世英)은 직산현령(稷山縣令ㆍ지금의 천안시 직산읍)으로 청렴하게 선정하여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 경남 함양군 병곡면 옥계리 죽동마을에 자리한 성재공파(省齋公派) 파조 박자천(朴自?)의 묘와 유적비(함양군 백전면 소재) 및 1937년 건립한 재사인 영모재(永慕齋).

 

둘째 자천(自?)은 자는 공무(公茂), 호는 성재(省齋)로 성종 때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고종 27년(1890년)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후손들이 그의 아호(雅號)를 따서 성재공파(省齋公派)로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셋째 아들인 간(澗)은 자는 경보(敬甫)로 조선 성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참의공파(參議公派)의 파조(派祖)로 받들고 있다.

▲ 감수재(感樹齋) 박여랑(朴汝樑)의 아버지로 척흥군(陟興君)에 봉해진 박현좌(朴賢佐)의 묘.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청주병마절제사(淸州兵馬節制使)를 지낸 산두(山斗)와 중종(中宗) 때 과거에 급제하고 승사랑(承仕郞)으로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한 응성(應星)이 유명했으며, 현좌(賢佐)는 자는 신경(信卿)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순충보조공신(純忠補助功臣)에 책록(冊錄)되었으며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고 척흥군(陟興君)에 봉해졌다.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 감수재(感樹齋) 박여랑(朴汝樑)의 묘와 1827년 세운 재사인 영모재(永慕齋) 및 시문집인 ‘감수재집(感樹齋集)’.

 

현좌(賢佐)의 아들 여량(汝樑ㆍ1554~1611)은 자는 공간(公幹), 호는 감수재(感樹齋)로 노상(盧祥)의 문인이다.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으로 지내다가 선조 33년(160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예조ㆍ병조ㆍ형조의 낭관(郎官)과 북청판관(北靑判官)에 이어 1608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격문을 돌려 많은 지원을 하였고, 정유재란에는 의병으로 황석(黃石)에 들어가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군량을 조달하였다. 평생을 성리학과 ‘대학’의 무자기(毋自欺ㆍ자기자신을 속이지 말 것)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온(鄭蘊)ㆍ오장(吳長)ㆍ박이장(朴而章)ㆍ박성인(朴成仁) 등과 교유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으로 증직되어 척성군(陟城君)에 봉해졌으며, 저서로는 ‘감수재집(感樹齋集)’이 있다.

그밖의 인물로 윤종(胤宗)은 용양위 부호군(龍?衛副護軍)을 역임했고, 이백(而栢)은 인조(仁祖) 때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어 봉직랑(奉直郞)으로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을 지냈으며, 숙종(肅宗)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익진(翊震)과 직제학(直提學) 진경(震卿)이 유명했고, 창기(昌基)는 철종조(哲宗朝)에서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쳐, 한일합방(韓日合邦)을 통탄히 여기고 문 밖을 나오지 아니하여 주변사람들은 군자(君子)라고 입을 모았던 병택(炳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 (上)경남 함양군 백전면 경백리 능경(能敬)에 자리한 삼척 박씨 종택인 화석정(花石亭). (下)고종 28년(1891년) 경남 함양군 병곡면 옥계리 소현부락에 세워진 박자천(朴自?)을 비롯한 삼척 박씨 4효자 정려.

 

집성촌으로는 정헌공(正憲公) 염(廉)의 후손은 함양과 거창에 세거(世居)하나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가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성재공(省齋公) 자천(自?)의 후손은 함양 서쪽 일원인 백전면과 병곡면 축동과 소현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참의공(參議公) 간(澗)의 후손은 함창, 문경, 점촌 일원에 세거 번연(蕃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