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박씨(高靈朴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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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박씨(高靈朴氏)는 신라왕족(新羅王族)의 후예(後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을 시조(始祖)로 한다. 고양(高陽)은 본래 대가야국으로 진흥왕 23년(562년) 신라(新羅)에 합병된 후 경덕왕 때 고양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다시 고령(高靈)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本貫)을 고령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내대어사(內臺御史)를 지낸 섬(暹)을 중조(中祖)로 하는 사인공파(舍人公派)와 환(還)을 중조(中祖)로 하는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연(連)을 중조(中祖)로 하는 주부공파(主簿公派) 등 3파로 나뉘어 세계를 잇고 있다.
▲ 고령 박씨 가문의 간찰 21건을 모아 첩(帖)으로 만든 ‘선세언적(先世諺蹟)’?. 문익공(文翼公) 박영원(朴永元)의 편저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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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3파는 교수공파(敎授公派), 영참판공파(嶺參判公派), 직강공파(直講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경참판공파(京參判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읍취헌공파(?翠軒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무숙공파(武肅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판관공판(判官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우윤공파(右尹公派)로 분파되어 각각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56명, 상신 1명, 청백리 4명, 호당 1명, 공신 1명을 배출하였다. 그중 사인공파(舍人公派)와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특히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세력을 떨친 반면, 사인공파(舍人公派)는 조선 후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밀양(密陽)ㆍ반남(潘南)에 이어 세번째로 손꼽힌다.
섬(暹)의 5세손 지(持)는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시작으로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일찍이 합포(合浦ㆍ현재의 마산시)의 병마도사(兵馬都使) 재직 때의 일화로 말 안장끈이 끊어지자 새끼로 안장을 고쳐 매고 다녔다고 하며, 또한 수렵해서 얻어진 수확물은 절도사와 도사가 나누어 가지는 것이 상례였지만 그는 이를 일체 취하지 아니하여 절도사가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지(持)는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인 효림(孝林)은 향파(鄕派)로, 차자(次子)인 수림(秀林)은 경파(京派)로 다시 나뉘어진다. 향파(鄕派) 후손들은 성주(星州)ㆍ고령(高靈)ㆍ대구(大邱)ㆍ현풍 지역에 산거(散居)하며 교수공파(敎授公派)ㆍ영참판공파(嶺參判公派)ㆍ직강공파直講公派) 등으로 분파되었고, 경파(京派) 후손들은 서울ㆍ경기ㆍ충청 지방에 주로 살고 있으며 승지공파(承旨公派)ㆍ부위공파(副尉公派)ㆍ진사공파(進士公派)ㆍ읍치헌공파(?翠軒公派) 등으로 분파되어 고령 박씨 15개 지파중 7개 지파의 도조상(都祖上)이 된다.
사인공파(舍人公派) 대표적인 인물로는 지(持)의 증손자 은(誾)이 유명했다. 은(誾ㆍ1479~1504)은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翠軒)으로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담손(聃孫)의 아들로 조선 500년에 걸쳐 으뜸가는 한시인(漢詩人)으로 일컬어진다. 15세에 이르러 문장에 능통하였으며,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申用漑)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연산군 1년(1495년)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그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선발에 뽑혔다. 그뒤 곧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正字)가 되고, 수찬(修撰)에 있으면서 경연관(經筵官)을 지냈다. 1498년 20세의 약관으로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함과 성준(成俊)이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탄하는 소를 올려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았으며, 평소 직언을 꺼린 연산군은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시켰다. 1501년 23세에 파직되어 경제적ㆍ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게 되자, 이때부터 스스로 세속 사람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과 시로써 세월을 보냈다. 1503년 어려운 가정을 힘겹게 꾸려가던 아내 신씨가 25세로 죽었고, 그 이듬해에 다시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갈 뜻이 없었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동래(東萊)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26세에 사형을 당하였다. 연산군은 그를 너무 미워하여 그가 죽은 지 4일 후엔 의금부로 하여금 그의 친구들을 색출하여 곤장을 치게 하고 유배를 보냈으며, 음력 8월에는 전교를 내려 그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게 한 다음 봉분 없이 묻게 했다. 1505년에는 음사해인(陰邪害人)이라는 죄목을 추가하였으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翠軒遺稿)’를 냈다. 시인 김춘택(金春澤)은 ‘동방의 시는 읍취헌(?翠軒ㆍ박은의 호)이 제일이며, 만약 그가 살았더라면 소동파(蘇東坡)를 능가했을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은(誾)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인량(寅亮)은 참판(參判)을 역임했고, 둘째 공량(公亮ㆍ?~1556)은 자는 명보(明甫)로 진사로 출사(出仕)하여 중종 33년(1538년) 별시문과(別試文)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자(正字), 1540년 박사(博士), 1543년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이듬해 우문학(右文學)이 되었다. 명종 2년(1547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 및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다. 1549년 집의(執義)가 되어 유생들의 분규를 막아야 된다고 상소하였으며, 이듬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곧 암행어사가 되어 8도를 순행하면서 수령들의 부정을 감찰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다시 황해도를 암행하고 돌아와서 155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1555년 참찬관(參贊官)ㆍ좌승지를 거쳐 특명으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이듬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많은 금석문(金石文)을 남겼고,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도 참여했다,
한편 은(誾)의 증손(曾孫) 경업(慶業ㆍ1568~?)은 자는 응휴(應休), 호는 암수(巖수)ㆍ추탄(秋灘)으로 선조 27년(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장령(掌令)ㆍ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광해군 5년(1613년) 강릉부사에 서임되었는데 강원도시(江原道試)에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이듬해 장령에 서임되고 다시 동래부사로 나갔는데 무고에 관련되어 계속적인 탄핵을 받았다. 그는 광해군(光海君) 때 청주목사(淸州牧使)를 거쳐 대간(臺諫)에 재직중 부정한 관리를 엄중히 탄핵하기로 유명해 하루에 10여 명씩을 삭직(削職)시켰다고 하며,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앞서 그에 의해 삭직당했던 공신들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었다.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있던 이기(李?)의 아들이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있으면서 악정(惡政)이 있었으나 배경에 눌려 아무도 말을 못했는데 그가 탄핵하여 파직시켰고, 심지어는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있는 그의 아버지가 군내의 원망을 사자 아버지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까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쌓아온 것이 오래여서 벼슬이 통달하지 못하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여 선치(善治)로 명성이 났는데도 매사에 비방을 받았다고 ‘죽창한화(竹窓閒話)’에 기록되어 있다.
장원(長遠ㆍ1612~1671)은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ㆍ습천(?川)으로 직장(直長)을 지낸 훤(?)의 아들이다. 인조 5년(1627년) 생원이 되고 163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그 해에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외할아버지를 따라 강화도에 피난하였다.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1640년 정언으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효종 4년(1653년) 승지로 있을 때 남인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났다. 1658년 상주목사에 이어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현종 5년(1664년) 이조판서가 되고 공조판서에 이어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ㆍ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뒤 자청하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부임, 재직 중에 죽었다. 저서로 ‘구당집(久堂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
장원(長遠)의 증손 문수(文秀ㆍ1691~1756)는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으로 경종 3년172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고, 이듬해 설서(說書)ㆍ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영조 즉위년(1724년) 노론(老論)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으며, 영조 3년(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암행어사(嶺南暗行御史)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攻臣) 2등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49년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재직시에는 원칙도 없이 마음대로 쓰던 궁중경비를 일정한 원칙에 따라 지출하도록 ‘도지정례(度支定例)’를 만들어 국가재정과 왕실의 재정을 분리하는 예산회계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 임금과 조의(朝儀)를 할 때 허리만 굽힐 뿐 고개를 들고 임금을 바라보았는데 이러한 행동이 여러 대신들에게 탄핵(彈劾)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왕에게 ‘군부(君父)는 일체인데 우러러 마주하는 것이 옳습니다, 근래 아첨하는 무리들이 엎드려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영조(英祖)도 ‘영성군(靈城君ㆍ박문수의 시호)의 말이 옳다. 군신간(君臣間)에 너무 어렵게 대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 앞으로는 고개를 들고 바라보라.’라고 했다. 이와같이 영조(英祖)는 문수(文秀)의 재능을 익히 알고 강한 고집과 개성 때문에 벌어지는 마찰을 감싸고, 그 재주와 능력을 최대한 펴도록 후원을 하였다. 1750년 수어사(守禦使)를 거쳐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고, 1752년 왕세손(王世孫)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濟州)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강직한 성품으로 백성의 편에 서서 바른말을 잘 하였기에 벼슬길은 그리 평탄하지 않아 끝내 정승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것은 너무 흑백이 분명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 때문이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
▲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자리한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 묘(충남문화재자료 제261호)와 그의 영정과 유품 등을 보관하기 위해 1932년 건립하여 1999년 새로 지은 고령 박씨 종중재실 및 영정이 봉안된 충헌사(忠憲祠).
고령 박씨가 낳은 유일한 상신(相臣)인 영원(永元ㆍ1791~1854)은 자는 성기(聖氣), 호는 오서(梧墅)로 예조참의 종순(鍾淳)의 아들이다. 순조 13년(1813년) 사마시를 거쳐 181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주서(假注書)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고, 다음해에 승문원에 보임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1824년에는 김정희(金正喜) 등과 함께 삭직을 당하였다가, 헌종 3년(1837년) 김홍근(金弘根)과 함께 실록교수 당상(實錄校讐堂上)의 직을 맡았다. 이어 1844년에 호조판서ㆍ이조판서 등을 거쳐 이듬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846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11월에는 김흥근(金興根)과 함께 국조보감찬집청교정당상(國朝寶鑑纂輯廳校正堂上)을 제수받았다. 1848년 양선(洋船)의 출몰로 동해안 지방의 민심이 소란해지자 함경도 관찰사로 특임되었으며, 그뒤 철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라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4월에 소를 올려 그 직을 사임하였으며, 철종 5년(1854년) 12월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다가 죽었다. 시호는 문익(文翼).
▲ 고려삼한삼중공신 박동신(朴東臣) 아들로 금오위산원동정(金吾衛散員同正)을 지낸 박세영(朴世英) 묘.
부창정공파(副倉正公派) 중조 환(還)의 후손에서는 고려조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공신(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진 광순(光純ㆍ찬성사 守堅의 아들)과 문하시중(門下侍中ㆍ종1품)을 지낸 광우(光佑) 형제가 유명했다. 특히 광순(光純)은 아들 우생(雨生ㆍ문하시중으로 찬화공신에 책록)과 손자 임종(林宗ㆍ우왕 때 상호군 문하평리로 익대보조공신에 책록)과 함께 3대(代)가 공신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임종(林宗ㆍ?~1392)은 고려 우왕 6년(1380년) 진포(鎭浦ㆍ충남 서천)에 침입해 각지를 횡행하면서 만행을 저지르던 왜구가 선주(善州ㆍ경북 구미)에 이르렀을 때,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원수(元帥)가 되어 이를 무찔러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서경도순문사(西京都巡問使)가 되어 여러 차례 왜구를 방어하였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임종(林宗)의 아들 만(蔓)은 태조 1년(1392년) 자헌병판(資憲兵判)으로 북쪽의 오랑캐를 진압하였고, 정종 2년(1399년) 제2차 왕자의 난(일명 朴苞의 난)이 일어났을 때 회안대군 방간(芳幹)측에 속해 있던 장군이었음으로 난이 평정될 때 수감되었으나 죄 없음이 인정되어 방면되었다. 이후 예조판서(禮曹判書)와 상의의정부사(商議議政府事)를 거쳐 태종 원년(1401년)에는 병조판서로 북비(北鄙ㆍ북쪽 지방으로 달아난 군졸)를 진정시킬 때 도원수(都元帥)로 발탁되었다. 그후 태종을 잘 받들지 않는다는 참소를 받고 귀양을 가서 22년의 유배생활 후 세종 5년(1423년) 62세로 사망하였다. 그후 누명을 벗어 관직에 다시 복귀되고 무숙공(武肅公)의 시호가 내렸졌으며, 무숙공파(武肅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광우(光佑)의 증손인 처륜(處綸ㆍ1445~1502)은 자는 거경(巨卿)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란(思欄)의 아들이다. 성종 1년(1470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경연전경(經筵典經)ㆍ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역임하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수찬관으로 ‘세종실록’ㆍ‘예종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89년 왕이 장차 중용할 목적으로 남양부사로 보냈을 때는 선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권농과 학교를 일으킴으로써 남양고을에 많은 선비가 배출되는 등 치적을 올렸다. 과만(瓜滿)후에 봉사시 부정 및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는데, 남양고을 백성들이 남양부사 때의 치적을 들어 진정하므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성종 25년(1494년) 관압사(管押使)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홍문관 부제학ㆍ형조참의를 거쳐 전라관찰사로 임명되어 선정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다음해 신병으로 돌아와 첨지중추부사로 있다가 대부(大夫)가 되었으나 가산을 돌보지 않았고, 효우(孝友)가 돈독하였으며, 감사공파(監司公派)의 파조이다.
정번(廷?ㆍ1550~1611)은 자는 군신(君臣), 호는 학암(鶴巖), 택(澤)의 아들로 판관(判官) 일(溢)에게 입양되었다. 선조 때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가를 거쳐 군수(郡守)에 이르렀으며, 유학(儒學)에 뛰어나 명현(名賢)들과 교유했다. 임진왜란 때는 형 정완(廷琬)과 더불어 왜구와 대항하여 싸웠으며, 왜란이 끝나고 공을 논할 때 자신의 공적은 드러내지 않고 형만을 내세우는 덕성이 있었다. 1605년부터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등과 더불어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한때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지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의 공으로 인조 14년(1636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 고령 문연서원(文淵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주부공파(主簿公派) 연(連)의 후손에서는 충렬왕(忠烈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이(理)가 유명했고, 진남(震男)은 자는 응원(應元), 호는 회암(悔巖)으로 고창군(高昌君) 시(是)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과 역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를 도승지(都承旨) 강찬(姜燦)이 듣고 조정에 보고하니 그를 1등공신에 치부(置付)하여 후일에 대비하라 전교(傳敎)하고 진보류양마(眞寶留養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성주(星州)의 성현(星峴)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벼슬은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이르렀고, 선무원종공이등(宣武原從功二等)에 녹훈되었다. 철종(哲宗) 11년(1860년) 지당(芝塘)에 지고사(芝皐祠)를 세워 제사를 받들어 왔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그외에 난영(蘭英ㆍ1575~1636)은 자는 형백(馨伯)으로 선조 때 면천군수(沔川郡守)ㆍ중군(中軍) 등을 지냈으며, 1617년 10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명(明)나라 원병으로 출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청(淸)나라와 화의하기 위하여 능봉군(綾峯君)과 심집(沈輯)을 왕자(王子)와 대신(大臣)으로 변장시켜 보냈으며, 청나라에서는 그에게 이들이 정말로 왕자와 대신이냐고 물었다. 그는 왕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사실이라고 말했으나, 병자호란시 통역관으로 만행을 저지른 정명수(鄭命壽)가 주장하기를, “거짓말 같으니 조선에 다시 확인하여 보자” 하여 마침내 거짓말이 탄로났다. 청(淸)이 대노하면서도 비록 적국의 신하이지만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살고져 하면 그대로 앉아 있고, 죽고자 하면 일어나라” 하니 그는 일어나 남한산성쪽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의젓이 참형(慘刑)을 받았다. 그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75년 왕명으로 충신 정려(旌閭)를 세웠다. 시호는 충숙(忠肅).
▲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매곡리(돈의실)에 자리한 충숙공(忠肅公) 박난영(朴蘭英)의 정려각과 사당.
근대 인물로서는 제3ㆍ4공화국(共和國)의 대통령이었던 정희(正熙)로, 사인공파(舍人公派)의 경파(京派) 중 셋째집인 직강공파(直講公派)의 뿌리를 이어받아 고령 박씨 가문의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그는 1917년 직강공(直講公) 숙동(叔童)의 후손이자 한말(韓末)에 사과(司果)를 지낸 성빈(成彬)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관학교(滿洲軍官學校)와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수료, 국군창설(國軍創設)에 참여하여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졸업한 뒤 군의 주요 지휘관을 거쳐 육군소장으로 혁명(革命)을 주도하여 대통령에 올랐다.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민족중흥에 이바지한 공이 컸으나 18년간이라는 장기집권으로 거센 비판과 저항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고, 끝내 부인과 자신이 총격으로 생을 마치는 불행을 맞았으나 신라 55대 경애왕(景哀王) 이후에 민족의 중흥을 주도한 대통령으로서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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