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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창원 박씨(昌原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창원 박씨(昌原朴氏)의 연원

창원 박씨(昌原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ㆍ재위 917∼924)의 세자로 밀양 박씨(密陽朴氏)의 시조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의 17세손인 영(齡)을 시조(始祖)로 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고려의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유화(有華)의 증손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그를 일세조(一世組)로 받들고 창원(昌原)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유화(有華)를 일세조로 표시한 곳도 있다.

영(齡ㆍ?∼1434)은 자는 호부(浩夫), 시호는 양정(襄靖)으로 근검하고 무예에도 능통하였다. 조선 개국 초 여러 관직을 거쳐, 판사재(判司宰)ㆍ호조전서(戶曹典書)ㆍ판통례(判通禮)ㆍ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태조 7년(1398년) 강주진첨절제사 겸 강화부사(江州鎭僉節制使兼江華府使)가 된 뒤 강계절제사ㆍ경원삭주병마사ㆍ홍주목사 등을 거쳐 세종 1년(1419년) 황해도 도절제사 겸 판해주목사(判海州牧事)가 되었다. 그후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로 임명되고 사은사(謝恩使)로 명(明)을 다녀왔다. 세종 16년(1434년) 영(齡)이 죽자 하룻동안 정조시(停朝市)하고 조부(弔賻)하였으며, 중궁(中宮)도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황촉(黃燭) 10정(丁)을 하사하였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영(齡)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다.

▲ 양정공(襄靖公) 박영(朴齡)의 졸기(卒記)가 기록된 세종실록 66권 세종 16년(1434년) 12월 24일 기록.

세종 16년 12/24 (정묘) 전 좌군 도총제 박영의 졸기

 

“전 좌군 도총제 박영(朴齡)이 죽었다. 영(齡)의 자(字)는 호부(浩夫)이니 경상도 의창 사람이다. 여러 번 판사재(判司宰)ㆍ호조전서(戶曹典書)ㆍ판통례(判通禮)ㆍ병조참의로 옮기고, 나가서는 강주진 첨절제사ㆍ강화부사ㆍ강계절제사ㆍ경원삭주 병마사ㆍ홍주목사ㆍ황해도 도절제사 겸 판해주목사가 되었다. 그 때에 태종과 임금께서 해주 등처에 거둥하였는데 박영이 감사 이숙묘(李叔畝)와 더불어 들에서 영접하였는데, 서차가 감사의 밑에 있었다. 태종이 말하기를, “영은 어째서 감사의 밑에 있는가.” 하니,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감사는 비록 가선(嘉善)이나 사신이고, 판목사는 비록 가정(嘉靖)이나 수령 (守令)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영은 구신(舊臣)이다.” 하고, 감사의 위에 앉히고 어의(御衣)를 주고, 환궁한 뒤에 자헌(資憲)을 제수하고, 신축년에 좌군 도총제를 제수하였다. 영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무예가 있었다. 죽으매 조회와 저자를 하루 동안 정지하고, 조의를 표하고 부의(賻儀)를 보내었다. 시호(諡號)를 양정(襄靖)이라 하였는데, 갑주(甲胄)로 공로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너그럽게 즐거워서 아름답게 좇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 중궁도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황촉(黃燭) 열 자루를 내려 주었으니, 연척(連戚)인 때문이다. 세 아들이 있으니 박홍간(朴弘幹)·박홍신(朴弘信)·박홍지(朴弘智)이다.”

▲ 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1435년) 2월 26일조에 기록된 양정공(襄靖公) 박영(朴齡)의 치제문(致祭文).

세종 17년 02/26 (무진) 박영에게 치제하다

 

“박영(朴齡)에게 치제(致祭)를 내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경은 풍채(風采)가 크고 훌륭하며 성행(性行)이 질박 정직하였고, 침중(沈重)한 가운데 용기가 있고 그 재능이 뛰어났으며, 장수로서의 지략이 있고 행정에도 능통하여 일찍부터 사적(仕籍)에 올라 열성(列聖)께 크게 인정 받고 특별히 발탁되어 중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아름다운 명성이 일세에 빛났도다. 두어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서는 힘써 백성을 애호하여 위엄과 은덕이 아울러 나타났고, 여러 진(鎭)의 장수로 나가서는 호령이 엄숙하고 임기(臨機)하여 적을 제어하여 누차 큰 공적을 세웠으므로, 내가 이를 가상하게 여기고 또 격려하기 위하여 이에 영화로운 품질(品秩)에 승진시켰던 것이며, 명나라에 사절로 보낼 때에도 진달함이 역시 상실(詳悉) 명백하였으니 참으로 희대의 양장(良將)이며 여러 왕조(王朝)의 덕 높은 원로가 아니었던가. 근래 병세의 깊음으로 인하여 한지(閑地)로 옮겨 요양해 오던 터이라 건강을 회복하여 길이 이 나라의 교목(喬木)이 되어 주리라 믿었더니, 어찌하여 하루 저녁에 덧없이 떠났단 말인가. 부음(訃音)이 이르니 실로 몹시 슬픈 마음 누를 길이 없도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나를 대신하여 변변치 못한 것을 베풀었으니, 영령(英靈)이여 감동함이 있거든 흠향하기 바라노라.” 하였다. 이에 앞서 대관들에게 치제할 때는 모두 교서를 사용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비로소 제문(祭文)을 쓰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세 아들이 있으니 박홍간(朴弘幹), 박홍신(朴弘信), 박홍지(朴弘智)이다”라고 적혀 있지만 박영의 아들은 박손(朴蓀)이며, 이들은 모두 박손(朴蓀)의 아들인데 잘못 기재된 것이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영(齡)의 아들 손(蓀)은 고려 때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고 공양왕 때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지냈으며, 조선조에서 태종 때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세종 때 내금위 선전관과 동래부산첨사를 지낸 홍간(弘幹)은 포천파(抱川派),, 세종 때 단천도호부사를 지낸 홍직(弘直)은 정평파(定平派), 태종 때 철산군수를 지내고 세종 때 대마도 원정 중에 전사한 홍신(弘信)은 장단파(長湍派), 그리고 진사를 지낸 동지(東智)는 고흥파(高興派)로 분파되었다. 그러나 홍간(弘幹)ㆍ홍직(弘直)ㆍ홍신(弘信)의 후손들은 북한땅에 거주하여 연락이 닿지 않고, 동지(東智)의 후손들이 전남 고흥군 동강면과 대서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홍신(弘信ㆍ1363∼1419)은 12세부터 활을 잘 쏘았고, 장성하여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이 되었다. 산원(散員)에 올라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 휘하에 예속되었으며, 고려 우왕 10년(1084년) 별장이 되었으나 향리로 내려왔다. 조선이 건국되자 갑사(甲士)가 되어 금군(禁軍)에 소속되었는데, 사직(司直)을 거쳐 호군(護軍)에 올랐다. 태종 14년(1414년) 제물량(濟物梁)ㆍ병산포(竝山浦) 만호 등을 거쳐 1418년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었다. 세종 1년(1419년) 이종무(李從茂) 등으로 하여금 대마도를 토벌하게 하였을 때 좌군병마사가 되어 절도사 박실(朴實)에 예속되었으며, 대마도에 이르러 이망군(尼忘郡)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경(璟)은 성종대에 사간원 정언(行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경(璟)의 아들 여명(汝明)은 중종반정 공신으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 전남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자리한 창원 박씨 고흥(高興) 입향조 박동지(朴東智)의 유허비각과 그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1984년 건립한 대서면 화산리 염수재(念修齋).

 

창원 박씨(昌原朴氏)는 의창 박씨(義昌朴氏)라고도 하는데, 관적지인 창원(昌原)보다 전남 고흥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다. 그 까닭은 영(齡)의 손자인 진사(進士) 동지(東智)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세 아들과 함께 지금의 고흥의 속면인 흥양으로 낙향하여 세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흥 일대의 창원 박씨 후손들은 그를 입향 중조(中祖)로 삼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사(進士) 동지(東智)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유원(由元)이 자는 원서(元瑞), 호는 방유정(放遊亭)으로 태종조에 문과하여 참의(參議)를, 둘째 유정(由貞)은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막내 유창(由昌)은 승지(承旨)에 이르러 이들이 창원 박씨(昌原朴氏)의 3대산맥(三代山脈)을 이루었다.

▲ 전남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자리한 박동지(朴東智)의 장남으로 참의(參議)를 지낸 박유원(朴由元) 기적비.

 

유원(由元)의 아들 태수(泰首)와 유창(由昌)의 아들 태계(泰桂)는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언석(彦碩ㆍ태수의 아들)은 대사헌(大司憲)에 올라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유엽(有燁)ㆍ숭엽(崇燁)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 임란공신 박이장(朴而章)ㆍ박응오(朴應鰲)ㆍ박이화(朴而華)ㆍ박대련(朴大連)을 제향하기 위해 1988년 세운 전남 고흥군 대서면 금마리 경모재(景慕齋).
▲ 전남 고흥군 동강면 죽산마을에 자리한 박사문실적비(朴師文實蹟碑).


 

그밖의 인물로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경(璟)과 부사(府使) 이장(而章)이 유명했고, 참찬관(參贊官) 상신(尙臣)은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한 성은(聖殷)ㆍ상희(尙希), 승문원판교 겸 대사간(承文院判校兼大司諫) 사문(師文)과 더불어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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