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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의흥 박씨(義興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의흥 박씨(義興朴氏)의 연원 
 

의흥(義興)은 경북 군위군(軍威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의흥군(義興郡)을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안동부(安東府)에 속하게 하였고,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 태종(太宗) 때 현(縣)이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년)에 군(郡)으로 승격되고, 1914년에 군위군(軍威郡)에 속한 의흥면(義興面)이 되었다.

▲ 임호(林湖) 박수검(朴守儉)이 초를 잡은 후 1819년 발간된 의흥 박씨의 최초 족보.

 

의흥 박씨(義興朴氏)의 시조(始祖) 박을규(朴乙規)는 본성(本姓)이 왕씨(王氏)로 고려의 왕족(王族)이었다.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에 의하면 고려 말에 그의 형 왕갑규(王甲規)는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자신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왕씨(王氏)들은 모두 주살되거나 잡혀가게 되어 혹시 함께 해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나누어 피신하기로 했다. 그래서 형은 중국으로 갔고, 아우인 을규(乙規)는 춘성(春城ㆍ충북 단양군 영춘면) 거의동(車衣洞)에 둔거하였다가 태종(太宗) 때 외가(外家)의 성(姓)인 박씨(朴氏)로 따랐다고 한다.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 서문에 의하면 시조 박을규(朴乙規)가 처음에 지금의 단양군 영춘면 거의동(車衣洞)에 은거하였고, 4세 근(瑾) 이후부터 지금의 충북 제천시 금성면ㆍ청풍면 등지로 옮겨 많은 후손들이 살면서 세거지로 지켜왔고, 11세 이후 일부 자손들이 강원도 영월군 등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경북 군위군 의흥면과는 하등의 연고가 없는데 어찌하여 의흥(義興)으로 관적(貫籍)하였는 지는 알 수 없다. 또 후손들이 의흥(義興)으로 세거지를 옮긴 사실도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는데,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충북 제천시 금성면에 40호, 경북 군위군 부계면ㆍ의흥면 등지에 170호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시조 박을규(朴乙規)가 왕씨(王氏) 성을 감추기 위해 외가의 성(姓)인 박씨를 따랐다는 족보 서문에 미루어 외가의 성이 의흥 박씨(義興朴氏)였고, 따라서 경북 군위군에서 살아 온 의흥 박씨(義興朴氏)는 박을규(朴乙規)를 외가의 후손으로 등재한 후에 새 족보를 만들어 박을규(朴乙規)를 다른 의흥 박씨(義興朴氏) 계통을 만들어 준 것으로 짐작된다.

▲ 신변에 불안을 느낀 4세 박근(朴瑾)이 충북 제천시 송학면 무도2리(음지만지실) 마을로 이거한 뒤 마을 뒤 이름없던 산은 왕박산(王朴山)이라 불렸다.

 

3대를 살아온 영춘(永春)에는 현청이 있고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어서 신변에 불안함을 느끼자 4세 근(瑾)부터 오늘날 제천시 송학면 무도리(務道里) 속칭 음지만지실이라 불리는 마을에 은거하여 살게 되었다. 이 마을 뒤에는 ‘왕박산(王朴山)'이라고 하는 산이 있는데, 원래 이름 없던 산이었으나 고려 왕족이 이 산에 숨어 들어와 살게 된 뒤로 왕박산 또는 왕박시루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들을 동네 사람들은 왕박씨(王朴氏)라 불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금도 이 동네로 들어오려면 철로 밑 작은 굴다리로만 들어올 수 있어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마을에는 왕박씨들이 서당을 차리고 공부했던 곳이었다고 전하는 ‘서당댕이'가 있고, 승지벼슬을 한 왕박씨가 병자호란 중에 식구들과 음지만지실 뒤 재넘어로 피난하였다 하여 ‘승지골'이라 불리는 마을과 왕박산 중턱에 그들이 피난했던 자리였다고 전하는 병풍처럼 생긴 ‘북바위'가 있다. 또 이 지역 이름을 삼박(三朴)고을이라 한 것도 그들의 자취로 전하고 있다.

▲ 3대(1세~3세)의 묘가 실전되어 충북 제천시 장락동 뒷산 4세 박근(朴瑾)의 묘 옆에 마련된 제단(祭壇).

 

의흥 박씨(義興朴氏)는 을규(乙規)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의흥(義興)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으나 56년간의 중간 계대(繼代)가 실전되어 운산유학교도(雲山儒學敎導)를 지낸 후손 득서(得瑞)로부터 대(代)를 이었다. 의흥 박씨가 관로를 트기 시작한 것은 3세 득서(得瑞)부터이며, 그의 아들 근(瑾)은 관계에서 크게 활약하여 의흥 박씨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흥 박씨의 시조가 득서(得瑞)로 되어 있고 또 ‘의흥박씨세보(義興朴氏世譜)’에 근(瑾)을 ‘기복종덕지조(基福種德之祖)’라 하여 받들고 있다.

▲ 충북 제천시 장락동에 자리한 박득서(朴得瑞)의 아들 4세 박근(朴瑾)의 묘.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득서(得瑞)의 아들 근(瑾)이 세종 29년(1447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단종(端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조 원년(1455년) 주부(主簿)에 올라 한확(韓確)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황수신(黃守身) 등과 더불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었다. 세조 10년(1464년) 충주판관(忠州判官)을 거쳐 성종 때 교하현감(交河縣監)과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내고 영암군수(靈岩郡守)로 나갔으며, 그의 아들 지홍(之洪)은 성종(成宗)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사과(司果)를 지냈다.

한편 중종(中宗) 때 충좌위부사직(忠佐尉副司直)을 지낸 언성(彦誠ㆍ교위 질의 아들)의 아들 승종(承宗)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학문과 효성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때는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다.

▲ 충북 제천시 천남동 남산사 동쪽 기슭에 자리한 임호(林湖) 박수검(朴守儉)의 묘와 제천 의림지(義林池) 솔밭공원에 세워진 임호(林湖) 박수검(朴守儉)의 자랑비 및 1812년 후손에 의해 간행된 그의 문집인 임호집(林湖集).

 

경심(景諶)의 아들 수검(守儉ㆍ1629∼1698)은 자는 양백(養伯), 호는 임호(林湖), 조석윤(趙錫胤)의 문인으로 그에게서 배운 바가 커 문명을 떨쳤다. 그 뒤 송시열(宋時烈)을 사사하여 사서ㆍ육경과 정주학설을 두루 섭렵하였다. 현종 3년(166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7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ㆍ학록(學錄) 등을 거쳐 예조좌랑과 호조정랑을 지냈다. 인현왕후의 폐출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제천의 임호(林湖)로 내려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다가 복위와 더불어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하급관원에 머물렀고, 숙종 24년(1698년) 69세로 서거하여 제천시 천남동 남산사 동쪽 기슭에 묻혔다. 순조 27년(1827년) 3월 이 고장 사람들이 의림지 호반에 의호사(義湖祠)를 창건하고 제향하였는데 고종 8년(1871년) 철폐되었다고 하며, 저서로 ‘절위여편(絶韋餘編)’과 ‘진사통고(震史通考)’ 등이 있다.

수검(守儉)은 아들 5형제를 두었다. 장남 양욱(良旭)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ㆍ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追贈)되었고, 2남 양후(良后)는 학문과 덕행(德行)이 높았던 학자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3남 양한(良漢)은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의병장으로 안무사(按撫使)를 제수받아 공을 세우고 정려(旌閭)가 명해졌다.

이렇게 조선조 초기부터 한창 번성해 오던 의흥 박씨는 영조조를 고비로 인물을 내지 못하고 오늘날 희성(稀姓)의 반열을 면치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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