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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비안 박씨(比安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비안 박씨(比安朴氏)의 연원

비안(比安)은 경북 의성군 비안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비옥(比屋)과 안정(安貞) 2개 현을 합명한 것이다. 세종 3년(1421년) 2개 현을 합하여 안비현(安比縣)으로 불렀다가 1423년에 비안현(比安縣)으로 바꾸었으며, 병산(幷山)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고종 32년(188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대구부 비안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경북 소속이 되었다. 그 후 1914년에는 군면 폐합으로 현서면(縣西面)은 예천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의성군에 병합되어 비안군은 폐지되고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으로 편입되었다.

▲ 비안 박씨(比安朴氏) 족보와 병산정(屛山亭) 관련 문집.

 

비안 박씨(比安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破娑王)의 후손에서 갈려진 계통(系統)으로, 시조 우(瑀)는 신라 박혁거세의 9세손인 제상(堤上)의 아우 지상(池上)의 25세손으로 고려조에 상서를 지낸 영주 (英柱)의 증손이며,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병산군(屛山君)에 봉해져 병산(屛山ㆍ현 비안)을 식읍으로 받아 경주에서 이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영해 박씨(寧海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비안(比安)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병산군(屛山君)은 병산사(屛山祠)에 향사(享祀)되었는데, 지금도 경북 의성군 비안면 동부동 병산(屛山) 절벽에는 거대한 글씨로 병산벽(屛山壁)이라고 암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병산군(屛山君)의 묘가 병산(屛山)에 있었다는 가승(家乘)에 따라 후손들이 병산(屛山)에 단(壇)을 설치하고 매년 5월 5일에 제향(祭享)을 드리고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때 장상(將相)을 지낸 박지생(朴池生)의 20세손으로 고려조에서 사온직장(司?直長)을 지낸 종주(宗柱)를 시조로 보고 있다.

▲ 박서생(朴瑞生)을 주향(主享)한 구천서원(龜川書院)과 박충인(朴忠仁)ㆍ박효순(朴孝純) 부자가 함께 향사받던 병호충렬사(屛湖忠烈祠)가 훼철되자 1935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 동부리 망북정(望北亭ㆍ일명 屛山亭) 옛터에 중건한 병산정과 박우단비(朴瑀壇碑).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우(瑀)의 아들 일(逸)이 고려조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증손(曾孫) 징(徵)은 공부전서(工部典書)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어 그중 맏아들 원(遠)이 대제학(大提學)을, 둘째 규(逵)는 현감(縣監)을 지냈다.

고려 말에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에 올랐던 점(漸)은 대제학(大提學) 원(遠)의 현손(玄孫)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의 아들 서생(瑞生)은 자는 여상(汝祥), 호는 율정(栗亭)으로 세칭(世稱) 율정선생(栗亭先生)이라고 부르며, 길재(吉再)의 문인으로 음보(蔭補)로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 태종 1년(140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향이 상주의 속현(屬縣)이기 때문에 상주의 관리로부터 받는 극심한 민폐를 제거하려고 조정에 극력 청원하여 태종 3년(1403년)에 안정(安貞)과 비옥(比屋)을 합해서 비안현(比安縣)이 되었다. 초대현감 유양(兪讓)과 함께 현의 모든 제도를 정비하거나 재정하여 자치현의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흥학교(興學校)와 양인재(養人材)를 강조하며 자신이 살던 집을 값을 받지 않고 향교의 터로 희사하여 향교를 세웠다. 비안 최초의 향교는 비안읍 서쪽 1리(里) 지점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불타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비안읍의 서쪽에 있는 박소[朴淵]는 서생(瑞生)과 그 후손 병산 박씨(屛山朴氏)들이 살던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추정된다.

▲ 청백리 율정(栗亭) 박서생(朴瑞生)의 묘.

 

서생(瑞生)은 태종 7년(1407년)에 조선조 최초의 친시(親試)인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변수량ㆍ조미생과 함께 1등으로 급제하여 홍패(紅牌)ㆍ꽃ㆍ일산(日傘)을 하사받고 3일간을 한양시가를 행진하는 영광을 누리고, 전답 20결(結)과 노비를 하사받음과 동시에 정8품인 성균학정(成均學正)에서 4품계(品階)를 뛰어 올라 정6품의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는 파격적 선례를 남겼다.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반차(班次)를 무시한 것이라는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세종 1년(1419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고, 1426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428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1429년 귀국하였으며, 1429년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 1430년 집현전 부제학, 1431년 공조참의ㆍ병조참의, 1432년 병조좌참의ㆍ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使)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세종 5년(1423년) 6월에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가 계(啓)하기를 “도내의 안정(安貞)과 비옥(比屋)이 모여 비안현(比安縣)이 되었는데, 안정(安貞)은 인물이 적고 관사가 없으며 비옥(比屋)은 인물이 족(足)하고 관사도 구비되어 있사오니 청컨대 호칭을 비안(比安)으로 고치고 비옥(比屋)을 본 현으로 하도록 하소서.” 하여 병산 박씨(屛山朴氏)의 공부상(公簿上)의 본관이 비안(比安)이란 호칭으로 되었다.

비안(比安) 사람들은 서생(瑞生)이 현(縣)에 끼친 은택(恩澤)을 기리어 구천서원(龜川書院)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는데, 1868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다만 ‘육선생매판소(六先生埋板所)’라는 유허비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구천서원(龜川書院)의 주벽(主壁)이 서생(瑞生)임에도 불구하고 배향(配享)된 분들의 후손들이 각기 자기 선조의 이름을 앞에 기록하려고 싸움을 벌이다가 마침내 이름을 새기지 않고 위패 여섯을 묻은 장소라는 해괴한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현재는 구천면 용천2리에 ‘有明朝鮮朝嘉善大夫吏曹參判栗亭朴先生事蹟碑’가 남아 있다.

▲ 박서생(朴瑞生)의 손자로 풍기군수를 지낸 박신원(朴信元)의 묘.

 

 

 

서생(瑞生)의 손자 효원(孝元)은 자는 백인(伯仁)으로 천(泉)의 아들이다. 세조 11년(146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예종 1년(1469년) 수찬(修撰)으로 검토관(檢討官)ㆍ교검(校檢) 등을 겸직했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 뒤에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천문학관(天文學官)이 되었다. 성종 2년(1471년) 병조좌랑(兵曹佐郞), 1476년 장령(掌令), 이듬해 사간(司諫)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 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했다. 성종 9년(1478년) 사간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ㆍ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종친 서원군(西原君)의 사위인 현석규(玄碩圭)를 탄핵했다가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 성종대에 유자광ㆍ임사홍과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정치를 어지럽힐 인물로 인식되어 요직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성종 17년(1486년) 임사홍과 함께 직첩이 환급되었다.

준(峻ㆍ1559~1625)은 자는 자첨(子瞻)으로 부사(府使) 희성(希聖)의 아들이다. 선조 37년(1604년) 병중의 아버지를 지성으로 간호 봉양하여 완쾌시켰으며, 임진왜란 때는 앓는 계모를 업고 피란하느라 처자를 돌보지 못하여 부인을 잃었다. 이러한 효행으로 추천되어, 헌릉참봉(獻陵參奉)에 기용되었다. 광해군 3년(1611년) 청백리(淸白使)의 자손으로서 동부주부(東部主簿)에 특진,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다. 1613년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있을 때 관찰사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 인조 1년(1623년) 비안현감(比安縣監)이 되었다. 한편 효행으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그 행실이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 수록됐다. 아들 종악(宗岳)은 이천찰방(利川察訪)을 거쳐 숙종(肅宗)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박충인(朴忠仁)과 박효순(朴孝純)을 배향했던 의성군 비안면 용천2리 병호충렬사유지비(屛湖忠烈祠遺址碑).

 

충인(忠仁)은 호가 병애(屛崖)로 임진왜란에 출전하여 군공(軍功)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는데 당시 80노부(八十老父)가 있어 군역(軍役)을 면할 수 있었으나, 노부(老父)가 “이런 국란(國亂)을 당하여 사사로운 일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너의 어미에게 맡기고 싸우러 가라.”고 권고하였다. 이에 충인(忠仁)은 “사나이가 난세에 났기에 충성과 효도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남녘 오랑케 왜적을 섬멸한 뒤에 북궐의 임금님께 사직하고 돌아오겠습니다.”라는 사친시(辭親詩)를 남기고 출전하였다. 그후 절제사(節制使)를 지내고 48세의 졸(卒)하였으며, 뒤에 아들 효순(孝純)과 함께 용천2리 마을 앞 병호충열사(屛湖忠烈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충인(忠仁)의 아들 효순(孝純)은 호가 북촌(北村)으로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영변의 부원수 신경발(申景拔)의 예하에 배속되어 있던 중 병자호란을 당하여 일선 지휘관으로 적과 육박전을 직접 치르며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병난일기(兵難日記)’를 남겼다. 인조(仁祖)가 친견(親見)해 상작(賞爵)을 내렸으나 충인(忠仁)은 선조(先祖)가 일으킨 비안(比安)이 군대의 주둔으로 인한 과다한 군비 부담 때문에 민생고가 극심함을 아뢰고 상작(賞爵) 대신에 비안(比安)에 군비부담을 감해 줄 것을 청원하여 주둔 군대를 절반으로 줄이게 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부사맹(副司猛) 혼(琿)의 맏아들 형종(亨宗)이 개천군수(价川郡守)를 지냈으며, 선교랑(宣敎郞)에 오른 계인(繼仁ㆍ병절교위 형성의 손자)과 함께 충효(忠孝)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병호충열사(屛湖忠烈祠)를 병호서원(屛湖書院)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 마을을 약칭 선마(서원마을)라고 불렀다. 병호충렬사와 충인(忠仁)의 묘가 있는 이 마을을 중심으로 서방(西方) 5리 내에 산들은 거의가 비안 박씨(比安朴氏) 소유인 것을 보면 대를 이은 공신(功臣)을 배출한 가문에 하사한 것이라고 추정되며, 조선조에선 문과 급제자를 7인이나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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