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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문의 박씨(文義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문의 박씨(文義朴氏)의 연원
 

문의(文義)는 충북 청원군(淸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 연산군(嚥山郡)으로 고쳤고, 고종 45년(1258년) 문의현(文義縣)으로 승격시켰다. 조선 선조때 청주(淸州)에 속했다가 그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고종 32년(1895년) 군(郡)으로 승격되고 청주군(淸州郡)에 통합되었다가 청원군(淸原郡) 문의면(文義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문의 박씨(文義朴氏)의 시조(始祖) 의중(宜中ㆍ1337~1403)은 초명(初名)은 실(實)이며, 자는 자허(子虛), 호는 정재(貞齋)로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17세손이다. ‘문의박씨대동보(文義朴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내침으로 왕과 조정이 복주(安東)에 파천하였다가 이듬해인 공민왕 11년(1362년) 10월에 송도(松都)로 돌아가는 길에 청주(淸州)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에서 33인중 26세의 나이로 대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전의직장(典儀直長)이 되고, 계속 벼슬이 올라가 헌납(獻納)을 거쳐 사예(司藝)에 이르고,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藝文館提學兼大司成)에 올랐다.

▲ 박의중(朴宜中)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임명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45권 공양왕 2년(1390년) 1월 12일 기록과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는 ‘고려사’ 135권 우왕 11년(1385년) 9월말 기록.

 

 

 

 

의중(宜中)은 관직에 있을 때 많은 업적과 공을 세웠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우왕(偶王) 14년(1388년) 2월에 명(明)나라에서 철령(鐵嶺) 북쪽 땅이 본시 원(元)나라의 땅이라 하여 철령에 동북면 국경감시소(東北面國境監視所)를 설치하려는 것을 알고, 그는 국서(國書)를 갖고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철령입위(鐵嶺立衛)의 부당성(不當性)을 주장하여 다시 고려판도(版圖)로 돌아오도록 대임(大任)을 완수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듬해인 창왕 원년(1389년)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에 책록(冊錄)하고 문의군(文義君)에 훈봉(勳封)하였다. 당시 그가 국서를 받들고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그의 조촐한 행장은 사절들이 공공연히 밀무역을 통해 이득을 추구하는 당대의 풍조와 대조를 이루어 귀감이 되어 명태조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고, 중국사람들이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칭송하고, 타고 간 선생의 말(馬)을 메었던 자리를 박주산(朴駐山)이라 불었다. 그의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54세인 공양왕 2년(1390년)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임명되어 임금에게 시강(侍講)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 왕이 서운관(書雲觀)에서 ‘도선비기(道詵密記)’를 인용하여 한양으로 천도(遷都)할 것을 청하자, 그는 음양지리의 허황됨을 논하고 이에 대한 천도반대상소(遷都反對上疏)를 올리고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藝文館提學兼大司成)이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4년(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충신열사(忠臣烈士)가 어찌 이씨(李氏)들의 신복(臣僕)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조복(朝服)을 벗어 걸고 평복(平服)으로 변장(變裝)하고 전라도로 내려와서 오늘날의 김제(金堤) 흥복동(興福洞)에서 은거(騷居)하였다.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한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태종 3년(1403년) 3월 16일 67세로 졸(卒)하니 태종이 어필(御筆)로 문경(文敬)이라 시호(諡號)하고 김제시 상동면 삼수리에 장원(葬原)하고 매년 향사(享祀)토록 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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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高麗史)’에서 발췌한 시조 박의중(朴宜中)의 열전(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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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후손들은 의중(宜中)을 시조로 받들고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하여 관향(貫鄕)을 문의(文義)로 삼게 되었다. 의중(宜中)은 처음에는 국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에게 장가들어 연(衍)ㆍ행(行) 두 아들을 두었고, 연안 이씨(延安李氏)가 26세로 졸하니 다음으로 국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 장가들어 경문(景文)ㆍ경무(景武)ㆍ경빈(景斌) 세 아들을 두어 모두 다섯 아들을 두었다. 연안 이씨의 두 아들 연(衍)과 행(行)은 문의 박씨(文義朴氏) 시조인 아버지를 따라 문의 2세를 승계하고, 청주 한씨의 세 아들 경문(景文·參議)ㆍ경무(景武·府使)ㆍ경빈(景斌·參議)은 밀양 박씨로 대를 이었다. 밀양 박씨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에서는 의중(宜中)의 아들 연(衍)과 행(行)을 문의 박씨 시조(始祖)로 보고 있다.

▲ 전북 김제시 상동면 삼수리에 세워진 시조 박의중(朴宜中)의 신도비와 묘.


▲ 박의중(朴宜中)이 졸하자 이를 슬퍼한 나머지 먹지도 않고 시름하다 동구밖 다리 밑에 가서 죽었다는 사슴의 묘인 녹총(鹿塚). ???

 

 

 

 

 

 

 

구전(口傳)에 의하면, 의중(宜中)이 전북 김제시 벽골제(碧骨堤) 북쪽 흥복동(지금 전북 김제군 백산면 흥복리)에 은거하고 있을 때 흰사슴 한 마리를 만나 길들여 아끼고 사랑하며 록마(鹿馬)라 이름하고 출입할 때면 항상 말처럼 타고 다니며 유한정정(幽閑貞靜)한 생활을 하였다. 날마다 동쪽 숲속에서 놓아 주면 해가 저물 때 스스로 우리로 돌아오곤 하였으며, 밤에 동구밖에 이를 타고 다니면 두 눈에서 서광이 비쳐 밤 길을 밝히기도 하였다. 의중(宜中)이 수를 다하자 사슴은 이를 슬퍼한 나머지 먹지도 않고 시름하다 묘 주위를 하염없이 몇바퀴를 배회하다가 끝내는 동구밖 다리 밑에 가서 죽었다고 한다. 그 정성을 어여삐 여겨 그의 묘 발치에 묻어 주고 녹총(鹿塚)이라 이름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은 동구밖 다리는 없어졌지만 사슴이 죽은 다리는 녹각교(鹿角橋), 사슴이 놀던 숲은 녹각동(鹿角洞)이란 지명으로 전해져 온다

의중(宜中)의 맏아들 연(衍)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공민왕 때 등과(登科)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후손들이 성주(星州)ㆍ상주(尙州)ㆍ영암(靈岩)ㆍ구미(龜尾) 등지에 세거(世居)하였다. 둘째 행(行)은 고려 때 우상(右相)을 역임했고, 후손들이 관서지방(關西地方)과 해주(海州)ㆍ신천(信川)ㆍ재령(載寧) 등지에 집중세거하여 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행(行)의 맏아들 영(寧)이 고려 말에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던 72현(賢)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칭송을 받았으며,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詞)와 개성의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에 제향(祭享)하였다.


문덕(文德)은 자는 경수, 호는 용암(龍庵)으로 연(衍)의 현손(玄孫)이자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태준(台俊)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한 후 조선 세조(世祖) 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에 이르러 간신의 모함을 받아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다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이대원(李大源)과 정운(鄭運)을 배향한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쌍충사(雙忠詞)와 정원에 세워진 임란공신 박란(朴蘭)의 신도비. 신도비는 밀양 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박란(朴蘭)은 문의 박씨다.

 

한편 임진왜란 때 해서(海西)에서 절묘한 지략(智略)으로 왜적 600여 명을 수양산성(首陽山城)으로 유인해 수양산폭포에 모두 추락케 하여 수장시킨 현민(顯民), 선조조에 훈련원판관 겸 주부(訓練院判官兼主簿)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린(璘), 선조(宣祖) 때 군수(郡守)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령(鳥嶺ㆍ문경새재)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인정(仁定), 의병(義兵)으로 활약하여 많은 적함을 불질러 침몰시키고 녹두 앞바다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어 고흥 쌍충사(雙忠詞)에 제향(祭享)된 난(蘭)이 이름을 날렸다.

그외 영조(英祖)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성순(性淳)이 찰방(察訪)을 역임했고, 판관(判官) 무환(武煥)은 군수(郡守) 한필(漢弼), 감찰(監察)을 지낸 기태(基泰), 호조좌랑(戶曹佐郞) 계운(啓運)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효자(孝子)로 이름난 민식(敏植)은 독립운동가로 구국(救國)의 대열에 앞장섰던 은석(殷錫)ㆍ진석(晋錫)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근세 인물로는 1907년 정미7조약(丁米七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해주와 신천 등지에서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다가 문화의 구월산에서 전사한 기로(基魯), 3·1운동 때 해주에서 독립 만세를 주도하고 독립군에게 많은 군자금(軍資金)을 제공한 기주(基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