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박씨(春川朴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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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박씨(春川朴氏)의 시조 박항(朴恒ㆍ1227∼1281)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의 10세손으로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으며, 충렬왕 때 승선(承宣)을 거쳐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에 올라 왕을 호종하고 원(元)에 다녀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ㆍ춘성은 춘천의 옛지명)에 봉해졌으며, 이후 후손들이 춘천(春川)에 세거하면서 그를 시조로 하고 춘천(春川)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춘천 박씨(春川朴氏)는 박항(朴恒)의 아들인 평장사(平章事) 원굉(元宏)과 판사(判事) 원비(元庇)의 손에서 장본파(張本派)ㆍ월교파(月橋派)ㆍ고탄파(古呑派)ㆍ평천파(平川派)ㆍ경주파(慶州派)ㆍ노일파(魯日派)ㆍ예천파(醴泉派)ㆍ의성파(義城派)ㆍ상주파(尙州派)ㆍ평해파(平海派)ㆍ영해파(寧海派)ㆍ건금파(乾金派)ㆍ약사파(藥司派)ㆍ봉산파(鳳山派)의 14파로 분파되었다.
▲ 시조 박항(朴恒)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된 ‘고려사(高麗史)’ 28권 충렬왕 3년(1277년) 1월 8일 기록(左)과 졸(卒)하였다는 충렬왕 7년(1281년) 8월 22일 기록.
▲ 춘천시 신북면 발산리에 자리한 박정승묘라 불리는 춘천 박씨(春川朴氏)의 시조 박항(朴恒)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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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박씨(春川朴氏)의 시조 항(恒)은 초명은 동보(東甫), 자는 혁지(革之)로 원래 총혜(聰慧)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한다. 고려 고종조 내직(內職)으로 왕경(王京)에 있다가 몽골군이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ㆍ춘천)를 급습하여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는 급히 고향에 돌아와보니 성은 함락되어 성 아래에는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였고, 그는 부모의 시체를 백방으로 찾아봤으나 끝내 찾을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부모의 모습과 비슷한 300여 구를 거두어 장례를 지냈다. 그 후 그는 어머니가 연경(燕京)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까지 찾아갔으나 끝내 찾지 못했으며,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보면 온나라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8세에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다가 충주 지방관,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안찰(按察)하여 치적에 명성이 있었다. 원종 10년(1269년)에 우사간(右司諫), 1270년 하정사(賀正使)로 몽골에 다녀왔고, 1277년 밀직부사(密直副使), 1278년 동지밀직사로 원(元)나라에 갔다가 참문학사(參文學事)가 되었다. 평소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공명정대함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성품이 관대하고 효심이 지극했던 인물이다. 원나라가 2차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1만명의 군사와 군수품을 강요할 때 원나라 황제를 직접 설득해 고려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결과를 얻었고, 원나라 감독관으로 온 이들의 행패가 심하자 충렬왕에게 건의하여 원나라 세조에게 국서를 보내 그들의 횡포를 견제하는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문장을 잘하고 마음이 너그러워 사람들을 잘 접대하고 부지런히 봉공(奉公)하여 이치(吏治)에 뛰어났으나, 고집이 강하여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고려 공민왕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이 그의 충효와 애국의 치적을 나라에 상소하여 내리게 한 것으로, 조선에 들어와서 춘천시 동면 감정리 구봉산(九峰山) 아래에 구봉서원(九峰書院)을 지어 제향해 오다 서원(書院)은 고종 때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당했다. 박정승묘(朴政丞墓ㆍ속칭 머굴터 산소)로 불리는 그의 산소는 지금도 춘천시 신북면 발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묘비와 재실(齋室)은 한국전쟁 때 없어졌다.
▲ “박항(朴恒)은 자는 초지(草之), 초명(初名)은 동보(東甫)로 춘주(春州) 아전 출신이며, 총혜(聰慧)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한다…”로 시작되는 ‘고려사(高麗史)’ 106권 열전 19권 박항전(朴恒傳).
인제군 기린면사무소 뒤쪽 태봉산(泰峰山)에는 박대감(朴大監)이라고 부르는 시조 항(恒)의 맏아들 원굉(元宏)의 묘가 있다. 이 일대는 높은 산과 좁은 계곡으로 이루어져 항상 구름과 안개에 뒤덮여 본래는 ‘운무동(雲霧洞)’이라 불렸으나, 원굉(元宏)의 묘가 이곳에 자리잡은 뒤부터는 산천이 청명해지고 동네 사람들이 더욱 평안해졌다 하여 ‘청평(淸平)골’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 자리한 시조 박항(朴恒)의 맏아들 박원굉(朴元宏)의 묘.
인제 현감이 새로 부임할 때의 일이었다. 신임 현감은 심산유곡(深山幽谷) 호젓한 벽지에 꺼릴 것이 무엇이랴 싶어서 나귀 등에 높이 올라 앉아 오만하게 원굉(元宏)의 묘 앞을 지나려고 했다. 그때 묘 앞까지 온 나귀의 발굽이 갑자기 땅에 못 박힌듯 붙어서 꼼짝을 못하게 되었다. 놀란 현감은 금새 얼굴 빛이 질려 ‘이 어찌된 연고일고 뉘 까닭을 아는 자 없겠느냐?’ 현감이 안타깝게 주위를 돌아보며 물어 보았다. 현아(縣衙)에 전부터 있던 벼슬아치가 현감 앞으로 나와 읍하며, ‘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여기는 승마고좌(乘馬高座)하고는 지나가지 못하는 곳이옵니다. 간좌원(員坐原)에 평장공(平章公)이 현영하시옵기로 하마보행해야만 비로소 통과할 수 있나이다.’ 그제야 현감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얼른 나귀 등에서 내렸다. ‘옳도다. 평장공(平章公)께서 예 계신줄 미처 몰랐었노라.’ 현감은 깊이 깨우치고 이곳을 걸어서 지나갔다. 현감은 다음날 이곳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놓았고, 이로부터 누구나 이 길을 지날 때는 반드시 나귀에서 내려 걷게 되어 하마로(下馬路)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동에 자리한 박원굉(朴元宏)의 동생 판서(判書) 박원비(朴元庇)의 묘.
춘천 박씨 후손 가운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별로 없다. 그 까닭은 춘천 박씨가 고려에 벼슬했던 사람의 후손이라는 데서 조선조에서 기피했고, 또 후손들도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싫어한 때문이라고 후손들은 말한다.
14세 익(益)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옮길 때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 화살끝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위급함을 알려 구국의 충성을 다하였고, 그의 조부 영(英)은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 그의 아버지 언광(彦光)은 삼척진영병마절제사(三陟鎭營兵馬節制使)로서 3대가 국란에 봉사하고 전공이 뚜렷하다.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문의공(文懿公) 항(恒)의 5대손인 치(治)의 외손자다. 그래서 퇴계(退溪)는 가끔 외가가 있는 춘천에 와서 머물렀고, 그곳이 지금의 퇴계동 부근으로 ‘퇴계(退溪)’라는 동네 이름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퇴계(退溪)가 춘천에 머무르는 동안 항상 밥상에는 ‘공지’(고기이름)가 반찬으로 올랐는데 ‘공지’라는 고기는 지금 남춘천(南春川)과 춘천(春川)시내 사이를 흐르는 냇물(지금의 공지천)에서 잡혔는데 ‘공지천(孔之川)’이란 이름도 이에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이 ‘공지’라는 고기는 성인이 있는 곳에서만 사는 것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지금은 멸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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