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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경주 박씨(慶州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경주 박씨(慶州朴氏)의 연원
 

경주 박씨(慶州朴氏)는 관적지(貫籍地)는 경주(慶州)지만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으로 옮겨 대대로 높은 벼슬과 충신ㆍ효자를 배출한 고려조의 명문으로 제5대 파사왕(婆娑王)의 26대손이며 신라의 충신 관설당(觀雪堂) 제상(堤上)의 21대손인 문효공(文孝公) 도덕(度德)을 중조(中祖)로 하고, 단종조(端宗朝)에서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으로 관직에 있을 때 왕위를 찬탈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김시습(金時習) 등과 함께 수양산(首陽山ㆍ황해남도 벽성군 동쪽과 해주시 북쪽 경계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 절개를 지키고 말년에 함안(咸安)으로 복거(卜居)한 앙(?ㆍ시조 박혁거세의 41세손)을 1세조로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따라서 경주 박씨(慶州朴氏)는 영해(寧海)ㆍ면천(沔川)ㆍ강릉(江陵) 등 박씨와 함께 상고세계에서 분적한 파사왕(婆娑王) 계통으로,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덟째 왕자인 언의(彦儀)가 월성대군(城大君)에 봉해져 관적(貫籍)한 월성 박씨(月城朴氏ㆍ월성은 지금의 慶州)와 신라 제2대 유리왕(儒理王)의 21세손 적도후공(赤島侯公) 니수(尼秀)의 후손 대무신공파(大武臣公派ㆍ慶州朴氏), 제55대 경애왕계(景哀王系)의 계림대군파(慶州朴氏)와는 계통을 달리한다.

▲ 경주박씨파보(慶州朴氏派譜)

경주 박씨(慶州朴氏)의 세계(世系)를 보면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4세 파사왕(婆娑王)과 5세 지마왕(祗摩王), 8세인 신라 충신 제상(提上)을 받든다. 그리고 고려에 이르러 30세 도덕(度德)은 자는 수겸(?謙), 호는 만취헌(晩翠軒)으로 목종(穆宗) 11년(1008년) 출생하여 덕종 2년(1033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정당문학 이부상서 문하시중(政堂文學 吏部尙書 門下侍中)을 지냈고 금자광록(金紫光錄)에 올랐다. 나라에 이바지한 충성과 공훈도 컸으려니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그가 죽으매 왕명으로 정려(旌閭)를 명하였고, 시호(諡號)를 문효(文孝)라 시사(諡賜)하였다.


 

 

33세 황(璜)은 도덕(度德)의 증손으로 숙종(肅宗) 7년(1102년)에 출생하여 인종(仁宗) 4년(112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부시랑(史部侍郞)ㆍ간의대부(諫議大夫)ㆍ중서시랑(中書侍郞)에 임명되었다. 인종 13년(1135년) 사신(使臣)으로 금(金)나라에 가니 금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임금이 주색에 빠져 인도(人道)를 돌보지 않아 짐(朕)이 폐하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기로 황(璜)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하늘과 땅과 같은 것이니 신(臣)은 비록 죽을지언정 명령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금나라 임금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속국의 배신(陪臣)으로서 천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고는 곧 형벌을 가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금나라도 그 충성에 감동하여 호상(護喪)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니 왕이 분개하고 추모하면서 말하기를, “박모는 살아서는 된서리를 맞아도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졌고 죽어서는 해를 꿰뚫는 충신이 되었으니 이는 그 선조 충렬공(忠烈公 朴提上)이 남긴 가르침과 절개가 백대(百代)에 흘러 내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포상을 내리고 예관(禮官) 김부식(金富軾)에 명하여 제문(祭文)을 내리기를, “마음속에 오로지 곧은 절개를 지녀 죽음을 당해도 변하지 않고 인륜(人倫)을 밝히고 도리를 다했으니 영원토록 그 의(義)를 기억하리라” 하고 왕례(王禮)로 장사지냈다. 또,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명령하고 개부의 동삼사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에 추증(追贈)하고 문렬(文烈)이라 시호를 내렸다.

▲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평천서원(坪川書院)이 훼철된 후 후손들이 뜻모아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광리 추모재追慕齋)와 원래 서원이 있던 곳은 저수지로 변해 추모재 앞에 세워둔 평천서원유허비.

황(璜)의 아들 소(?)는 인종 19년(1341년) 등과하여 예문관 수찬(藝文館修撰)이 되고,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옮긴 후 한림(翰林)을 거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후 이부시랑(吏部侍?)에 승진되었다. 의종(毅宗) 때 대장군 박지순(朴之順), 병마사 김영석(金永錫) 등과 함께 강서의 도적을 토벌하고 돌아와서 정당문학 겸 간관(政堂文學兼揀官)이 되었다. 그 때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이 무고에 의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자 성재대관(省宰臺官) 14인과 함께 조서를 받들지 않고 북을 울린 후 물러났다.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고 월산군(月山君)에 봉(封)해졌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39세 원계(元桂)는 자는 순규(舜圭), 호는 석뢰(石?)로 충숙왕 17년(133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합문지후(閤門祗侯)를 거쳐 개성부윤(開城府尹)ㆍ이부상서(史部尙書)를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자인(自仁·左司議)ㆍ자의(自義·文科應校)ㆍ자례(自禮·蔭補判官)ㆍ자지(自知·文科典書)ㆍ자신(自信·國子直學, 贈 右贊成)이다.



원계(元桂)의 막내아들 자신(自信ㆍ1358~1419)은 자는 현가(賢可)로 공양왕 1년(13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밀직(密直)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校)ㆍ국자직학(國子直學)을 지냈으며, 우찬성(右贊成)에 추증되었다. 앙(?ㆍ경주 박씨 1세조)과 근무(根茂ㆍ강진을 거쳐 진도로 이거함) 두 아들을 두었다.
▲ 1세조 박앙(朴?)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광리에 건립한 쌍학정(雙鶴亭).

 

41세 앙(?)은 ‘경주박씨세보(慶州朴氏世譜)’에 의하면, 호는 추호(秋湖)로 세종 29년(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문종 1년(1451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단종1년(1453)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을 지냈다. 그러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더불어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교분이 두터운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門) 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하며 관리에 등용하려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말년에 함안(咸安) 서쪽 평광리(平廣里)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앙(?)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선조(先祖)의 원향지(原鄕地)인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앙(?)의 맏아들 명기(命基)는 자는 대로(大老)로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신천군수(信川郡守)로 재임시 정사(政事)는 청백(淸白)을 숭상하며 세금을 낮추고 부역을 줄였으며, 춘궁기에는 구호미를 행하여 읍양(揖讓)의 풍속을 크게 이룩하는 등 치적을 세웠다. 그 치적이 조정에 알려져 왕이 불러 왕의 도장이 찍힌 문서로 표리(表裏ㆍ옷의 겉감과 안집) 일습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특히 청백리라고 칭찬하고 다시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임명해 청백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둘째 아들 여회(麗檜)는 가솔을 데리고 신풍현(新豊縣)으로 이거(移居)한 후 소식이 불명(不明)하며, 막내 여귀(麗?)는 경북 경주 지방으로 옮겨 살아 이들 3형제가 경주 박씨(慶州朴氏)의 3대 산맥(三代山脈)을 이루었다.

조선조에서는 앙(?)의 4대손 희삼(希參ㆍ1486~1570)과 그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다. 희삼(希參)은 자는 노경(魯卿), 호는 모암(茅庵)으로 어려서부터 총명이 출중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어졌다. 실지(實地)의 학문에 뛰어났으며, 성리학의 서적을 깊이 탐구하고 정주(程朱)의 학문에 침잠(沈潛)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덕릉(德陵)ㆍ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으며 평천서원(坪川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연구하며 사귄 친구는 당대의 명현들로 특히 남명(南冥) 조식(曺植ㆍ1501∼1572) 선생과 친히 아는 사이로 인해 두 아들(齊賢ㆍ齊仁)을 그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였다.

▲ 송암(松?) 박제현(朴齊賢)의 문집인 송암집(松?集)과 송암집판각(板刻) 25매(가로 20㎝X세로 31.5㎝).

 

 

희삼(希參)의 맏아들 제현(齊賢ㆍ1521∼1575)은 자는 맹사(孟思), 호는 송암(松?)으로 중종 16년(1521년)에 태어나서 명종(明宗) 때 학문과 덕행으로 공중(公衆)의 천거를 받아 내금위 선공감(內禁衛繕工監)을 역임하였다. 특히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일찍이 아버님의 명령에 따라 아우 황암(篁?)과 함께 남명 조식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문학과 덕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학문이 깊고 행동이 독실하여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 책에서 자기를 찾고 책을 스승으로 삼았다. 뒤에 평천서원(坪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암집(松?集)’ 2권이 있다.

▲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광리에 건립된 황암정(篁巖亭). 건물 오른쪽에 ‘御筆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일찍이 석학(碩學) 정구(鄭逑)가 ‘은덕군자(隱德君子)’라 극찬했던 둘째 제인(齊仁ㆍ1536∼1618)은 자는 중사(仲思), 호는 황암(篁巖)으로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고제(高弟)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조(宣祖) 28년(1594년) 태릉참봉(泰陵參奉)에 임명되고, 이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선조 32년(1599년) 송라도 찰방(松蘿道察訪)이 되었고, 70세(1605년)에는 형조좌랑(刑曹佐郞)과 군위현감(軍威縣監)을 거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세자(世子)에게 ‘대학(大學)’을 강론했고,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으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특히 왕자사부로 있을 적에는 선조(宣祖)의 아낌을 받아 명사(明師)라고 일컬어졌고, 군위현감 시절에는 백성을 자식처럼 정성껏 돌보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황암집(篁巖集)’을 남겼으며, 함안 도림서원(道林書院)에 제향되었다가 이후 평천서원(坪川書院)으로 옮겨졌다

▲ 1586년 부임한 정구(鄭逑)를 향사하면서 그후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과 이칭(李稱)ㆍ이정(李瀞)을 향사한 도림서원(道林書院)은 현존치 않고 경남 함안군 함안읍 대사리 도림마을 입구에 추애비(追哀碑)만 남아 있다.

 

황(潢ㆍ1709~1775)은 자는 탁천(卓天), 호는 수은(睡隱)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효자로 유명했으며, ‘회귤의 효성(懷橘之誠)’이라 칭찬하였다. 형편이 어려워 국, 밥그릇이 자주 비는 것을 걱정하여 손수 그물을 짜서 아침에는 상천(上川)에서 저녁에는 하천(下川)에서 고기를 잡아 아침저녁 식사를 받들며 비바람을 피하지 않으니, 고기잡이 하는 사람들이 서로 그물을 거두어 자리를 양보하였다. 아버지가 평일에 산약(山藥)을 좋아했으므로 기제사 날을 당할 때마다 비록 눈 속에서라도 캐어서 쓰니 마을 사람들이 감복하여 가만히 엿보니까, 가을에 잎이 떨어질 때 나무를 꺾어서 그 산약이 있는 곳을 표시를 해 두었고 그것을 캘 때에는 땅도 그를 위해 얼지 않았다. 암행어사가 이 고을에 들어오면 먼저 박효자 집을 묻고는 친히 조사한 후에 쌀과 고기를 내려 봉양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광리에 자리한 박황(朴潢)의 효도비.

1세조 앙(?)의 동생 근무(根茂ㆍ1405~1467)는 호는 춘파(春坡)로 경남 함안에서 전남 강진으로 이거했다 다시 전남 진도로 옮겨 영재교육에 힘쓰니 이웃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군의 규모를 설정하는데 참여해 공을 세웠다. 2남을 두었으며 1남 숭지(崇地)는 강진파(康津派)로 지금의 충열공파(忠烈公派)이며 전남 강진군 작천면에, 차남 형손(亨孫)은 옥주파(沃州派)로 지금의 춘파공파(春坡公派)로 전남 진도군 진도읍 북상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집안은 주로 진도읍내 북상리를 중심으로 살면서 사당 제사 때면 참례자들에게 팥죽을 나눠주는 관습이 있어서 ‘북상리 팥죽박씨’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진도읍 북상리에 유방사라는 사당이 있으며, 개화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두 파에서 합보한 ‘경주박씨세보’(1961년)에 의하면 근무(根茂)가 백부인 자인(自仁)에게 출계(出系)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함안문중에서는 인정치 아니하고 있다.

 

▲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된 박희령(朴希齡)을 배향한 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진도향교.

 

근무(根茂)의 차남 형손(亨孫)은 자는 달원(達遠), 호는 부곡(富谷)으로 일령(一齡)ㆍ억령(億齡)ㆍ희령(希齡) 3남을 두었으며, 이중 3남 희령(希齡ㆍ1537~1597)은 1590년 무과에 급제하여 다음해 10월에 순영중군(巡營中軍)을 지내다 1597년 9월 16일 명량대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진도향교(珍島鄕校)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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