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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월성 박씨(月城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월성 박씨(月城朴氏)의 연원
 

월성(月城)은 경북(慶北)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개국하여 사로국(斯盧國), 즉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新羅)로 불러오던 중 탈해왕 9년(65년)에 계림(鷄林)으로 개명되었고, 기림왕(基臨王) 때 다시 신라로 고쳤으나 고려 때 경주(慶州)로 개칭하였다. 성종 7년(987년)에는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목종(穆宗) 때 낙랑군(樂浪郡)으로 강등하였다가 현종(顯宗) 때 다시 경주라 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고쳐 불렀다. 태종 15년(1415년) 경주부로 다시 고치고, 고종 32년(1895년)에 경주군(慶州郡)이 되었으며, 1955년 8월 경주시를 설치하면서 종전의 경주군의 나머지 지역을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월성 박씨(月城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아들 8대군(大君)이 분적(分籍)할 때 막내 언의(彦儀)가 월성대군(月城大君)으로 봉군(封君)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월성(月城)으로 하게 되었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고려 때 대능직(戴陵直)을 지낸 인육(仁育)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 경주시 내남면 배동에 자리한 월성대군 박언의(朴彦儀)와 11위(位) 단비(壇碑) 및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의 단비.

 

월성 박씨(月城朴氏)의 시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박언의(朴彦儀)는 신라 경명왕의 막내로 월성대군(月城大君)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본관을 월성(月城)으로 하였기 때문에 박언의가 시조이다.’라는 것이다. 둘째, ‘박휘(朴徽)는 고려 초에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분으로 실제 월성에 정착하여 본관을 열었으므로, 박휘(朴徽)가 시조이다.’라는 것이다.

▲ 고려 때 대능직(戴陵直)을 지낸 중시조 박인육(朴仁育)과 아들인 공조전서(工曹典書) 박겸형(朴兼亨)의 단비.

 

박언의(朴彦儀)를 시조로 보는 설은, 월성 박씨(月城朴氏)도 도시조(都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후대에 덧붙여진 전승이다. 게다가 실제 월성(月城)에 정착하여 본관을 연 사람을 기준으로 볼 때 박휘(朴徽)를 시조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장아산에 안장된 고려 충신 박귀(朴龜)의 묘와 박귀(朴龜)가 개성(開城)을 바라보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전하는 망경대(望京臺).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 공조전서(工曹典書) 겸형(兼亨ㆍ월성대군의 10세손)의 손자 귀(龜ㆍ1337~1404)는 자(字)가 우길(于吉)로 고려말에 중군사정(中軍司正)과 부령을 지냈으나 고려가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인천(仁川)에 있는 산중(山中)에 은거(隱居)하여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장아산(藏我山)이라 불렀다. 그후 조선 태종(太宗)이 여러 차례에 걸쳐 벼슬을 하사하며 그를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고, 망경대(望京臺)에 올라 망국의 한을 통곡으로 달래다가 장아산에서 일생을 마쳤다.

▲ 경북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에 자리한 영남 의흥(義興) 입향조 박옹(朴雍)과 아들 박이문(朴以文) 단소.
▲ 무계(舞溪) 박민수(朴敏樹)의 문집인 ‘무계집(舞溪集)’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역임하고 영남 의흥(義興)으로 낙향했던 옹(雍)의 증손 민수(敏樹)는 자는 덕재(德載), 호는 무계(舞溪)로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다. 가세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나 부상(父喪)을 당하자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였으며, 병환 중인 어머니 김씨가 추운 겨울날에 송이버섯이 먹고 싶다고 하자 그것을 구하기 위해 팔공산을 헤매다가 범을 만났는데 범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사후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효성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880년 군위군 우보면 달산2리에 영우정(詠雩亭)을 건립하였다.

▲ 경북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에 자리한 무계(舞溪) 박민수(朴敏樹)의 묘와 그의 효행과 학덕을 기려 1880년 세운 영우정(詠雩亭) 및 우보면 봉산1리 경로당 앞에 세워진 유허비.

민수(敏樹)의 둘째 아들인 응상(應祥ㆍ1526~1592)은 자는 중수(仲綏), 호는 낙옹(樂翁)으로 명종 4년(1549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어 우후(虞候)ㆍ첨사(僉使)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4년(1572년) 대정현감 겸 병마절제도위(大靜縣監兼兵馬節制都尉)가 되어 제주도에 부임하여 4년간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들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낙옹정(樂翁亭)을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당하자 의병을 일으키려 하여도 늙어서 불가능함을 한탄하고는 스스로 곡기를 끊어 죽었다.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 수각정(水閣亭)은 선조 17년(1584) 응상(應祥)이 관직을 떠나 임천절경(林泉絶景)에 지은 것으로, 자적하면서 시서(詩書)를 강마(講磨)하고 효와 우애로 자제를 가르치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935년에 중건한 것이다.



▲ 경북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에 자리한 낙옹(樂翁) 박응상(朴應祥)과 배위 창녕 조씨ㆍ일선 김씨 묘 및 그를 기려 1584년 건립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935년 중건한 우보면 봉산리 수각정(水閣亭).


 

한편 응상(應祥)의 조카 종남(從男)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공을 세워 병조정랑(兵曹正郞)과 평안도절제사(平安道節制使) 겸 순무사(巡撫使)가 되었고, 민수(敏樹)의 현손(玄孫)인 종석(宗碩ㆍ1607~1660)은 자는 태백(太白), 호는 만취당(晩翠堂)으로 유복자로 태어나서 어머니 도씨(都氏)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여 이를 기리기 위하여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에 ‘만취당월성박공효행비(晩翠堂月城朴公孝行碑)’가 세워졌다.

▲ 만취당(晩翠堂) 박종석(朴宗碩)의 효행을 기려 경북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에 세운 효행비.

 

판관(判官) 호겸(好兼)의 증손(曾孫) 홍미(弘美ㆍ1571∼1642)는 초명은 경립(敬立), 자는 직재(直哉)ㆍ군언(君彦), 호는 관포(灌圃)로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宣祖) 36년(160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0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1611년 병조좌랑(兵曹佐郞), 1614년 대동찰방(大同察訪)을 지냈고, 그 뒤 정언(正言)ㆍ지평ㆍ수찬(修撰)ㆍ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한 옥사와 인목대비유폐사건 등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벼슬길에 나와 첨정(僉正)ㆍ장례원 판결사(掌?院判決事)ㆍ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지냈다. 인조 2년(1624년)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임명되어서는 청렴과 덕정으로 6번이나 포상이 내려졌으며, 1629년 승지(承)를 거쳐 1635년 이조참판ㆍ양양부사(襄陽府使)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로 ‘관포집(灌圃集)’이 있다.

▲ 충남 서산시 인지면 산동리 도비산에 자리한 관포(灌圃) 박홍미(朴弘美)의 묘.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매산리 달기산에 안장된 추산(秋山) 박홍중(朴弘中)의 아버지 박희룡(朴姬龍)의 묘.


 

문장(文章)이 뛰어나 당대의 명인(名人)과 석학(碩學)들의 신망을 받았던 홍중(弘中ㆍ1582∼1646)은 자는 자건(子建), 호는 추산(秋山)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조 32년(1599년) 진사시에 급제, 광해군 1년(1609년) 참봉ㆍ사산현감(四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 洗馬)에 제수되었고,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김제남(金悌男)ㆍ이원익(李元翼)ㆍ남이공(南以恭) 등을 변호하고 페모의 논을 일으킨 이이첨(李爾瞻)ㆍ윤인(尹?)ㆍ정조(鄭造)ㆍ이위경(李偉卿) 등을 탄핵했으며, 억울하게 서궁(西宮)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양식을 바쳤다가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정구(李廷龜)ㆍ이식(李植)ㆍ이항복(李恒福)ㆍ서성(徐省)ㆍ김상헌(金尙憲) 등 당시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었다. 저서로는 ‘추산집(秋山集)’이 있다.

▲ 광해군 12년(1620년) 북방 군영으로 부임하는 이영백(李榮佰)을 송별하는 추산(秋山) 박홍중(朴弘中)의 시.

 

능일(能一ㆍ1857~1917)은 호는 무호(无號)로 우보면 나호동(지금의 군위군 우보면 호포리)에서 임란공신(壬亂功臣) 종남(從男)의 후예(後裔)로 태어나 향리(鄕里)에서 서당을 차려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있던 중, 1910년 일본이 국권을 빼앗자 근심과 의분을 참을 길이 없었으나 한낱 초라한 선비로서 기울어져 가는 대세(大勢)를 막을 길이 없음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워 일제(日帝)에 항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죽음을 택할 곳을 어디로 할 것인가 생각한 끝에 그 옛날 그의 조상인 신라가 월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 때 그 많은 왜구(倭寇)에 시달리며 지키던 동해바다로 결정하고, 1917년 7월 20일 영일(迎日) 앞 바닷가의 큰 바위에 큰 글씨로 “擧其事而生 不若 蹈海而死 朝鮮逸民 朴能一”(원수의 나라를 섬기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벼슬하지 않고 파묻혀 지내온 조선 선비 박능일)이라고 써놓고 바다에 투신하였다.

▲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우목리에 서 있는 박능일(朴能一) 도해비(蹈海碑).

 

며칠 후 그의 시체가 물결에 따라 바닷가에로 밀려 왔었는데 곧게 정좌(正座)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고 하며, 일본 경찰은 이 사실을 알고 세상에 여론이 퍼질까봐 두려워 극비에 붙여 버렸으므로 그 당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광복 후 도내(道內)의 뜻있는 사림(士林)이 그의 애국심을 길이 찬양하기 위해 그 자리인 흥해읍 우목리 소재 죽천초등학교 동편 바닷가 언덕에 ‘朝鮮逸民無號 朴能一蹈海碑’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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