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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충주 박씨(忠州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충주 박씨(忠州朴氏)의 연원

충주 박씨(忠州朴氏)는 부정(副正) 박영(朴英)을 시조이자 관조(貫祖)로 삼고 있다. 그러나 박씨(朴氏)의 기원인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박영(朴英)까지의 약 1200년간은 계보와 사적이 실전(失傳)되어 알기 어려우므로 충주(忠州) 본관을 얻은 것도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충주 박씨(忠州朴氏) 최초의 족보(族譜)인 ‘갑오보(甲午譜ㆍ1474년)’에 실린 첨정(僉正) 박원창(朴原昌)의 서문을 보면, “신라 탈해왕이 박씨의 친척으로서 주주(州主)ㆍ군주(郡主)를 삼아 국내주군(國內州郡)을 다스리게 하였고, 진흥왕 때에는 국원성(國原城ㆍ忠州)을 소경(小京)으로 하고 귀족 자제와 6부 호민(豪民)을 옮겨 살게 하고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니 충주토성(忠州土姓)은 동경(東京ㆍ慶州)으로부터 옮겨 온 후 충주(忠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고 본관(本貫)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외 자료가 없이 신라사(新羅史)의 기록에 의해 추론한 것 뿐인데, 충주 박씨(忠州朴氏)는 이 추론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다.



충주 박씨(忠州朴氏) 시조 박영(朴英)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혹은 다섯째 아들)인 사벌대군(沙筏大君) 박언창(朴彦昌)의 11세손으로서 ‘충주박씨세보(忠州朴氏世譜)’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신(臣)은 검교신호위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원숭(元崇)은 삼사우사(三思右使)를 역임했으며, 증손 득승(得升)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후손들이 동경(東京)에서 옮겨와 대를 이어 살면서 상주 박씨(忠州朴氏)에서 분관해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의정공파(參議公派)ㆍ강릉공파(江陵公派)ㆍ참판공파(參判公派)ㆍ제주공파(濟州公派)ㆍ집의공파(執義公派)ㆍ판서공파(判書公派)ㆍ함경도파(咸鏡道派)ㆍ평안도파(平安道派)ㆍ찬성공파(贊成公派)ㆍ영동공파(永同公派)ㆍ첨정공파(僉正公派)ㆍ문간공파(文簡公派)ㆍ의정공파(議政公派)로 분파되었다.
▲ (좌)개성에 있었던 시조(始祖) 박영(朴英)으로부터 8세 박광리(朴光理)까지의 묘는 고려가 망하자 모두 실전되어 새로 지은 대전광역시 서구 내동 영모재(永慕齋). 뒤쪽 높은 곳에는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드리는 추원사(追遠祠)가 있다.

충주 박씨(忠州朴氏)는 고려말 혼란할 때 송도(松都)에서 멀리 공주(公州)까지 거족적(擧族的)으로 이동한 탓인지 선대의 기록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시조 박영(朴英)으로부터 7세까지는 관직만 전할 뿐이고, 8세인 광리(光理)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광리(光理)는 고려말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세 번이나 역임하고 청렴(淸廉)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의 전횡(專橫)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러한 일이 있었던 탓인지 그의 아들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진해(鎭海)ㆍ직산(稷山) 감무(監務)를 지냈던 진(?)과 은산군사(殷山郡事)를 역임한 소(蘇) 형제도 고려가 어지럽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公州ㆍ지금의 대전시 도마동)으로 은거(隱居)하였으며, 그의 후손들이 충주 박씨(忠州朴氏)의 주종을 이루었다.

▲ (左)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에 자리한 시조 박영(朴英)으로부터 8세 박광리(朴光理)까지 8위(位) 단소. (右)대전광역시 수성구 문지동에 자리한 9세 박소(朴蘇) 묘.
▲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월평공원)에 자리한 9세 박진(朴?) 묘.


진(?)은 네 아들들이 아름다운 일을 지키게 하려는 뜻에서 이름에 효(孝)ㆍ제(悌)ㆍ충(忠)ㆍ신(信)이 들어 가도록 이름을 지었다. 세종 12년(1430년) 충청도 보령에 해적의 침입이 우려되어 조정에서 여러 번 이를 다스릴 사람을 찾았으나 적격자를 얻지 못하였는데, 장남 효함(孝?)이 청렴결백하고 행동이 지극하다 하여 천거되었다. 이에 효함(孝?)은 순찰사(巡察使) 최윤덕(崔閏德), 감사(監司) 박안신(朴安信)과 더불어 성의 동쪽 1리쯤에 당산의 양지바른 곳을 찾아 성을 쌓았다. 두 달이 안 되어 성이 완성되니 백성들은 적은 노력으로 도적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효함(孝?)은 이듬해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어 공적이 많아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고. 그 후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임명되어 나갔으나 1454년 관청에서 죽으니 향년 68세였다. 임금은 부음에 애도하였고 특별히 예장(禮葬)케 하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 박진(朴?)의 네 아들의 묘. (左上)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박효함(朴孝?). (右上)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 박충함(朴忠?). (左下)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박제함(朴悌?). (右下)박신함(朴臣?).

▲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동에 자리한 10세 박지흥(朴智興)의 묘.

 

충주 박씨는 조선시대에 20명의 문과 급제자, 1명의 상신과 대제학, 1명의 청백리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인 소(蘇)의 아들 지흥(智興ㆍ1411~?)은 호는 회암(懷庵)으로 이름난 학자(學者)로서 명성을 떨쳤다. 일찍 진사(進士)가 된 뒤에 단종(端宗) 때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권람(權擥)이 수차례 벼슬에 천거하였으나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에 개탄하여 이를 거절하고 광주(光州)에 피하여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하촌(荷村) 정(禎)은 생원(生員)으로 지내며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동생 상(祥)과 우(祐)를 훈육하여 대성시켰으나 요절하였으며, 이들 4부자를 송(宋)나라 소동파(蘇東坡)의 부자삼소(父子三蘇)에 견주어 ‘동국삼박(東國三朴)’이라 하였다.

지흥(智興)의 2남 상(祥ㆍ1474~1530)은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로 연산군 2년(1496년) 진사(進士)가 되고, 150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ㆍ박사(博士)를 역임했다. 1506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중종 초기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 되어 종친(宗親)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상소로 풀려난 뒤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좌천, 후에 종묘서령(宗廟署令)ㆍ소격서령(昭格署令)을 거쳐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감(臨陂縣監)을 지낸 뒤 사직하였다. 중종 6년(1511년) 수찬(修撰), 이어 교리(校理)ㆍ응교(應敎)를 거쳐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어 1515년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과 함께 앞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여 중종의 진노(震怒)를 사서 오림역(烏林驛)에 유배되었다. 1516년 풀려나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ㆍ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역임하고, 이듬해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으나 이 해 겨울 모친상(母親喪)으로 사직했다. 1519년 복을 벗고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ㆍ선공감정(繕工監正), 1521년 상주(尙州)와 충주(忠州)의 목사(牧使), 이어 사도시 부정(司導寺副正) 등을 지냈다. 152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1527년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좌천되었으나 1529년 병으로 낙향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문장가(文章家)로 이름 높았으며, 성현(成俔)ㆍ신광한(申光漢)ㆍ황정옥(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4가(家)로 칭송되며 저서로는 ‘눌재집(訥齋集)’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

▲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의 영정과 유뮥 및 ‘눌재집(訥齋集)’


일찍이 이퇴계(李退溪)가 ‘고풍탁식(高風卓識)의 완인(完人)’이라고 극찬했던 상(祥)은 성격이 간략하고 높아서 악(惡)을 미워함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고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여러 번 외직으로 나갔다. 당대의 권신(權臣)이었던 심정(沈貞)이 양천(陽川)에다 소요당(逍遙堂)을 짓고 글 잘하는 사람을 청하여 현판을 쓰는데 상(祥)이 ‘반산(半山)에 음식상을 차렸고 가을 구렁 추학(秋壑)에 술잔을 열었도다’라고 시를 지어 풍자했다. 반산(半山)은 중국 송대(宋代)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왕안석(王安石)의 호(號)요 추학(秋壑)은 가사도(賈似道)의 호인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송(宋)나라를 망친 대신이었다. 심정은 뒤에 이 싯귀의 풍자함을 알고 떼어 불태우고 상(祥)에게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특히 상은 성격이 활달하여 고결한 선비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일을 일생의 신조로 삼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자 충주(忠州) 집에 불러다가 보살펴 주었으며, 김안국(金安國)과 김세필(金世弼)이 여주(驪州)에 있을 때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어 매년 봄에 찾아가 여주목사 이희보(李希輔)에게 관의 조곡 200석을 빌어 두 선생과 학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을이 되면 다시 쌀을 몸소 싣고 가서 그 조곡 갚기를 해마다 했다고 한다.



▲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과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기 위해 1728년 후손들이 건립한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송호영당(松湖影堂).

 

 

상(祥)의 아우 우(祐ㆍ1476~1546)는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으로 중종 2년(1507년) 진사가 되고, 중종 5년(151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어 곧 전적(典籍)이 되었고, 그 뒤 어머니의 삼년상이 끝나고 복직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뒤에 병조정랑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 등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된 뒤 검약한 생활을 하여 모범을 보였다. 뒤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허항(許沆)이 모함하여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당하였다. 2년 뒤 병조참의(兵曹參議)로 복직되었으나, 또다시 허항의 모함으로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왕이 표리(表裡)를 내려 포상하였다. 인종(仁宗) 때에는 한성부 좌윤 겸 동지춘추관사(漢城府左尹兼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곧은 성정으로 아첨을 하지 않아 권세가들의 박해를 받았으나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문장(文章)과 학덕(學德)으로 세인(世人)의 추앙을 받았다

▲ (上)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의 영정과 ‘사암집(思菴集)’. (中)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자리한 박순(朴淳)과 부인 고씨의 묘 및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은 박순신도비. (下)박순을 제향하기 위해 1649년 묘 아래 세운 옥병서원(玉屛書院ㆍ경기도향토유적 제26호)은 1868년 훼철되어 1981년 복원하였다.

 

 

우(祐)의 아들 순(淳ㆍ1523∼1589)은 충주 박씨의 유일한 상신(相臣)으로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으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종 8년(1553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한 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교리(校理) 등을 거쳐 1561년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제정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었다. 1562년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ㆍ홍문관 직제학 등을 지내고 1565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신 윤원형(尹元衡)과 요승 보우(普雨)을 탄핵하여 꺾음으로서 백성들이 길에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선조 5년(1572년) 영의정에 올라 14년간이나 재직했으며, 동서당쟁(東西黨爭)이 격심할 무렵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을 편들다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영평(永平)의 백운산(白雲山)에 은거했다.

그는 풍신(風神)이 시원하고 명랑하며 항상 몸가짐이 조용하고, 경서(經書)의 깊은 뜻을 해석하여 응대(應對)함이 정민(精敏)하였다. 명종(明宗)이 이르기를 ‘박순은 송죽(松竹)같은 절조와 지조가 있고, 수월(水月)같은 정신이 있다.’고 했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박순과 상대하면 한 덩이의 맑은 얼음과 같아서 정신이 갑자기 시원해짐을 느낀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우의정(右議政)에 있을 때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등극을 하례하는 사신(使臣)으로 갔었는데, 외국사절은 대궐의 옆문으로 들어가게끔 관례가 되어 있었으나 순(淳)은 정문으로 들어가면서 ‘배신(陪臣)이 출입할 때에 혹 표문(表文)을 받들고 왔다면 황제에게 바칠 것인데 어찌 옆문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하니 예부(禮部)에서 변론하지 못하고 정문으로 들어오라고 허락하여, 그 후부터는 우리나라 사신(使臣)이 정식으로 정문출입을 하였다고 한다. 시(詩)ㆍ문(文)ㆍ서(書)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시는 당시(唐詩)의 풍을 따랐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썼다. 성리학에 박통하고 특히 ‘주역(周易)’에 연구가 깊었으며,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하였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王屛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 경북 금릉군 대항면 덕전리에 자리한 학촌(學村) 박이룡(朴以龍)과 부인 밀양 박씨 합장묘와 박이룡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1998년 완공한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 황의사(黃義祠ㆍ영동군향토유적 제61호).

▲ 경북 김천시 금릉군 대항면 덕전리 묘 아래 자리한 학촌(學村) 박이룡(朴以龍) 신도비. ?

 

이룡(以龍ㆍ1533∼1595)은 자는 시윤(施允), 호는 학촌(鶴村)으로 어려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종 16년(1561년) 진사시를 거쳐 선조 10년(15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ㆍ예조정랑(禮曺正郞)ㆍ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선조 13년(1580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선조 16년(1583년) 모친상을 당하여 동생과 더불어 5년간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밤낮으로 지켜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효성과 높은 학문이 알려져 각계의 추천으로 선조가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선조 24년(1591년) 해서순찰사(海西巡察使)라는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무고로 인해 1592년 원주로 유배를 당했으나, 이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면을 받고 향리인 황간(黃澗)으로 돌아와 친척과 마을의 장정 500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해 수많은 전투를 벌여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능성현령(陵城縣令)을 제수받았고 1595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봉해졌으나, 전투에서의 부상이 재발하여 능성현 관아에서 죽자 전라감사가 관군을 동원해 영동군 원평으로 시신을 운구해 반장했다고 한다. 순조 12년(1812)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직(增職)되었다.

▲ (우)학촌(學村) 박이룡(朴以龍)의 동생인 오촌(梧村) 박응훈(朴應勳)은 효자로 호랑이가 부모 묘소를 정해주었다는 호점산소(虎点山所)에서 시묘하는 동안 그를 지켜준 호랑이의 무덤인 호총(虎塚). (좌)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에 자리한 박응훈(朴應勳) 효자문과 일선 김씨(一善金氏)의 열녀문이 함께 있는 쌍정려(雙旌閭ㆍ영동군향토유적 제54호).


 

희수(希壽)는 자는 덕노(德老), 호는 매헌(梅軒)으로 상(祥)의 손자이며 부사(府使) 민제(敏齊)의 아들로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문인(門人)이다. 선조 10년(1577년)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고경명(高敬命)ㆍ류사경(柳思敬) 등과 함께 광주(光州)에 의병청(義兵廳)을 창설하여 가동(家童) 64명, 쌀 80석을 내고 향병(鄕兵) 천여 인을 모집하여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소(義兵所)에 보내고 스승 박광옥(朴光玉)의 상소문을 가지고 의주(義州)에 이르니 형조좌랑(刑曺佐郞)으로 임명하였다.

지효(之孝ㆍ1553~?)는 자는 자경(子敬), 지흥(智興)의 현손(玄孫)으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문인(門人)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거의할 것을 약속했으나 고경명(高敬命)은 그에게 노친(老親)이 있음을 걱정하여 만류하였다. 때마침 남평수와 한순(韓楯)이 군대를 거느리고 광주(光州)에 이르러 적에게 피화(被禍)하자 감사(監司) 이시백(李時白)이 조정에 아뢰어 남평수로 서이(署理)하게 하니 지효(之孝)는 임소(任所)에 이르러 성을 지키다가 난이 끝난 뒤에 본관(本官)으로 임명되고 사복정(司僕正)을 지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호소사(號召使)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부름을 받아 의병을 모집하여 전주(全州)에 이르러 화의가 이루어짐을 듣고 돌아왔다.



▲ 임진왜란 때 회령으로 피난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그곳 관리에게 붙잡혀 왜적에게 인도되어 함북 종성군 용성면에 이르렀을 때, 이 마을의 박유일(朴惟一)이 두 왕자를 구원했다는 내력에 따라 1865년 조정에서 박유일의 집 서쪽에 세운 유명조선양왕자기적비(有明朝鮮兩王子紀蹟碑)의 탁본(일본 금택대학 소장).


유일(惟一)은 자는 경지(敬之)로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 경성(鏡城)에 살았는데 마침 그곳에 피난온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이 모반자 국경인(鞠景仁)의 계략에 빠져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걸고 이를 구출하고자 했으나 끝내 왜군에 넘겨졌다. 그는 그후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의 휘하에 들어가 국경인(鞠景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사진(士振ㆍ1554~1592)은 자는 경용(敬用), 호는 삼락정(三樂亭)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전투에서 스승 조헌(趙憲)을 따라 의거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전사하였다. 금산(錦山) 칠백의사(七百義士)의 한 사람으로 숙종(肅宗) 때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에서 순절한 삼락정(三樂亭) 박사진 순의비(朴士振殉義碑).

 

 

▲ 충효공(忠孝公) 박동형(朴東亨) 영정. ?

 

세화(世華)는 일찍이 학문을 닦아 진사(進士)가 되고 문과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등용,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을 때 아들 동형(東亨)이 박필현(朴弼顯) 부자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자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세화(世華)의 아들 동형(東亨)은 자는 수부(秀夫), 호는 뫼촌(巒村)으로 경종 4년(1724년) 이인좌(李麟佐)ㆍ박희량(朴希亮)ㆍ박필현(朴弼顯) 등이 난을 일으켜 서울로 올라가다가 관군을 맞아 안성(安城)에서 패하고 사태를 수습하고 있을 때, 기습으로 박필현(朴弼顯) 부자를 사로 잡아 난을 평정하는 데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幾效力奮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충원군(忠原君)에 봉해졌다. 순천부사(順天府使)에 이르렀고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충효(忠孝).



그밖에 진영(震英)은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사원(思遠)은 벼슬에 오르지 않고 처사(處士)로 자처하다가 병자호란 때 조수성(曺守誠)과 함께 활약하였고 강화 후에는 평생토록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홍우(弘祐)는 무과에 급제한 후 은율현감(殷栗縣監)으로 있을 때 류탁(柳濯)이 인조 24년(1646년) 모반을 꾀하니 공주진(公州鎭)에서 이를 진압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었고 호조판서(戶曺判書)에 추증되었다.

또한 응훈(應勳)은 자는 공윤(功允), 호는 오촌(梧村)으로 조선 때 지극한 효자로 주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조정(朝廷)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주었으며, 문과에 급제한 후 사로당(四老堂)을 지어 후진양성에 진력했던 수근(守謹), 학자(學者)로 유명한 경운(慶運)ㆍ세원(世元)ㆍ준번(俊蕃) 등과 함께 충절(忠節)과 문벌(文伐)의 가문(家門)인 충주 박씨를 더욱 빛냈다.

▲ 현감 박수근(朴守謹)이 1710년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에 세운 사로당(四老堂ㆍ충북유형문화재 제151호)은 그의 세 아우들과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4명의 노인이 모였던 곳이라 하여 이름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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