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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연원
 

영해 박씨(寧海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婆娑王ㆍ재위 80∼112)의 5세손 파진찬(波珍飡) 박물품(朴物品)의 아들 제상(堤上)을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제상(堤上)의 26세손인 명천(命天)이 고려(高麗) 때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내고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ㆍ허리에 차던 장신구)를 하사받고 예원군(禮原君ㆍ예원은 영해의 옛 이름)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영해(寧海)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제상(堤上)을 시조로 하고 명천(命天)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시조 박제상(朴堤上)은 김제상(金堤上)이라고도 전하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인 파진찬(波珍飡) 물품(物品)의 아들로서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러한 그의 세계(世系)는 거의 신빙성이 없다.

박제상(朴堤上)은 눌지왕(訥祗王)의 두 동생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이 고구려와 왜국(倭國)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두 왕자를 구하고 자신은 왜국(倭國)에서 왜왕(倭王)에게 모진 고초를 당한 후 목도(木島)로 귀양보내져서 소살(燒殺)당하고 말았다.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박제상이 처형된 곳으로 비정되는 대마도 사스나와 대마도 미나토의 방파제 바로 앞에 서 있는 박제상 순국비.


왜왕(倭王)에게 모진 고초를 당하면서도 ‘계림(鷄林)의 개나 돼지는 될 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결코 되지 않겠다.’라고 한 그의 말은 충신으로서의 기백(氣魄)과 용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묘에는 ‘살아서는 계림의 신하요, 죽어서는 계림의 귀신이 되다(生爲鷄林臣死作鷄林魂)’라는 말이 씌여 있다.

눌지왕(訥祗王)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대아찬(大阿?)에 추증(追贈)하고 단양군(丹陽君ㆍ단양은 지금의 영해)에 추봉(追封)하였으며, 제상(堤上)의 둘째 딸을 미사흔(未斯欣)의 아내로 맞게 하여 은혜를 갚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다가 치술령(?述嶺)에서 망부석(望夫石)이 되어 버린 부인과 두 딸을 일컬어 호국삼신녀(護國三神女)라 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박제상(朴堤上)의 위패를 봉안한 충남 공주시 반포면 석봉리 동계사(東?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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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상(堤上)의 아들 문량(文良)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10세손이며, 파사왕(破娑王)의 6세손으로 5세 때 부모를 여의고 둘째 누이인 아영(阿榮ㆍ미사흔의 아내) 밑에서 자라나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결혼했다. 천성이 청렴결백하여 항시 가난한 속에서도 거문고를 즐겨 하면서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생활을 하였으며, 너무나 가난하여 온전한 옷이 없어 기운 누더기옷을 입었기 때문에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불렀다.


▲ 박문량(朴文良)이 충렬공(忠烈公) 박제상(朴堤上)의 아들로 기록된 영해 박씨 대동보.

야사(野史)와 ‘영해박씨대동보(寧海朴氏大同譜)’에 따르면 “박문량은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아들이고, 이름이 효원(孝元)이며, 호는 백결(百結)이다.”라고 전한다. 또한 “신라 실성왕 13년에 출생하여 5세 때 누님에 의하여 성장하였다.”고도 전한다. 또 “자비왕 때 이작찬예부시랑(伊勺飡禮部侍郞)에서 대령군(大寧君)으로 책봉되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 이를 사양하고 오직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빈곤하게 살았다.”고 전한다.

자비왕(慈悲王) 21년(478년) 그가 65세 때 왕이 이벌찬(伊伐?ㆍ신라 17관등 중에서 제1급인 최고 직책)을 제수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조정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음을 보고 천재(天災)ㆍ치폐(治弊)ㆍ처경(處境)ㆍ흥인(興人)ㆍ지인(知人)ㆍ화인(化人) 등 여섯 장의 상소문을 올린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운월재(雲月齋) 신문정(申文貞)은 ‘영웅호걸은 김유신(金庾信)을 따를 이가 없고, 공명정대는 김양(金陽)만한 자가 없으나, 백결선생(百結先生)은 양자(兩者)를 모두 겸비한 분이다.’라고 평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아들 박문량(朴文良)을 제향하는 경남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사(孝忠祠ㆍ경남기념물 제90호).

영해 박씨(寧海朴氏)는 신라와 고려 때에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용문(龍文)은 무열왕(武烈王) 때 김유신과 함께 탁월한 외교솜씨로써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격파하는데 수훈을 세웠고,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賓貢科ㆍ당나라 과거제의 1과로 외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것)에 급제하고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친 인범(仁範)은 신라의 대문장가로 귀국 뒤 한림학사ㆍ수예부시랑(守禮部侍郞) 등을 지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찬문(贊文) 2편과 칠언율시 10수가 있다.

고려 때 인물로 효자로 이름난 광렴(光廉)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산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생활하였는데, 그의 지극한 효성에 탄복한 산신령이 범을 보내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정(朝廷)에서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ㆍ정4품)를 제수하는 한편, 많은 상품을 내렸지만 이를 거절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한편 평주 박씨(平州朴氏)에서는 광렴(光廉)을 일세조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있다.

▲ 박감(朴?)이 할아버지 박세통(朴世通)과 아버지 박홍무(朴洪茂)를 추모하기 위해 1339년 창건했으나 후일 안동 예안으로 이건, 2007년 재건된 봉송정(鳳松亭).

특히 영해 박씨는 3대 문하시중(三代門下侍中)을 배출하여 후대에 길이 남을 장랑이 되었으니, 고려 말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세통(世通ㆍ1187∼1263)과 그의 아들 홍무(洪茂ㆍ1227∼1285), 그의 손자 감(?)이 그 인물들이다. 특히 세통(世通)의 출생지인 경북 영해에서는 아래와 같은 구전설화가 전승되고 있으며,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饑翁稗說)‘과 ‘영해군읍지’와 ‘교남지(嶠南誌)’에도 실려 있다.

고려 원종(元宗) 때 안렴사(按廉使) 세통(世通)이 열읍(列邑)을 순행하는 도중 예주부(禮州府)에 이르렀을 때 한 어부가 거북이 한 마리를 잡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거북이에게 짖궂은 장난을 계속하였다. 세통(世通)이 자세히 보니 거북등에 분명히 ‘王’자가 새겨져 있기에 그 거북이를 잡은 어부에게 후하게 곡식을 주고 거북이를 사서 바다로 보내 주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동해용왕으로 오늘 내 아들이 나들이 나갔다가 뭇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죽을 뻔한 것을 공이 살려 주었으니 무엇이라 감사함을 말할 수 없오. 내가 용궁(龍宮)에 있으므로 공을 직접 도울 수는 없지만은 공의 집안에 대대로 영광을 베풀도록 하겠소’ 하고 사라졌다. 원래 덕망이 있고 풍채가 좋기는 했지만 그날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가 드디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라는 최고 벼슬에 올랐다. 아들 홍무(洪武) 또한 밀직사(密直使)에 이르고, 손자 감(?)은 벼슬이 복야(僕射)의 중직(重職)에 올랐다. 3대가 모두 중직에 올랐음은 예주부의 큰 경사로, 부(府)에서는 그 뒤부터 이 마을에 부역을 없앴다 하여 거무역(居無役)이라 했다 한다. 그 뒤 영조(英祖) 때 정언(正言) 남기만(南基萬)이 이 마을에 살면서 자호(自號)인 묵산(默山)의 묵자를 따서 거묵리(居默里)라 하다가 다시 거무역(居無役)으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좌)경북 영덕군 병곡면 영삼동에 자리한 박세통(朴世通)과 아들 박홍무(朴洪茂)의 묘역. (우)박감(朴?)의 묘.

 

중시조(中始祖) 명천(命天)의 아들 윤(論)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주국(上柱國)에 올라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달유(達儒)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ㆍ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역임하였고, 달유(達儒)의 아들 선(宣)은 문종(文宗) 때 진국공신(鎭國功臣)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내고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양(文襄)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선(宣)의 아들 태고(太古)는 문과에 급제한 후 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경창공주(慶昌公主)와 결혼하여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지고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의 아들 용재(用才)와 용량(用良) 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가문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는데, 맏아들 용재는 예빈경(禮賓傾)에 증직(贈職)되고 차남 용량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

 

 

 

한편 관(琯)의 아들 원계(元桂ㆍ1282~1348)는 안향(安珦)의 제자인 부원군(府院君) 권보(權溥)의 문인으로 충렬왕 27년(1301년) 문과에 이제현(李齊賢) 등과 같이 급제하였다.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兼掌書記)를 거쳐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으며,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을 때는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서 보좌하였다. 충숙왕 복위 4년(1335년)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전법(銓法ㆍ인사행정)이 어지러웠는데 대관(臺官) 신군평(申君平)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여 파직되었던 고신(告身ㆍ임명장)에 서명하여 사람들로부터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집의(執義)와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를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냈으며, 충목왕 4년(1348년) 이학도감판사(吏學都監判事)가 되었다.

 


경(經ㆍ1350~1414)은 시중(侍中) 함(?)의 의 후손으로 처음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우왕 5년(1379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조선 건국 후 태조 4년(1395년) 대사헌으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하 4품 이상으로 첨직을 받은 자는 모두 그 전직을 기록하게 하여 벼슬의 위람(僞濫)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1398년 경기우도 도관찰사(京畿右道都觀察使)로 기선군역(騎船軍役)의 고통과 폐단을 상주하였고, 태종 2년(1402년) 총제(摠制)로 있을 때 사신을 영접하지 않은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통진(通津)으로 유배되었다. 1405년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의 부유후로 다시 등용되어 1411년 대사헌으로 토목역사의 중지를 간청하였으며, 같은 해 손흥종(孫興宗) 사건을 가볍게 처리하였다는 사헌부의 논핵(論劾)을 받았다. 1412년 완산부윤(完山府尹)이 되고 다음해 물러났다. 시호는 양정(良靖)

자청(子靑ㆍ1357∼1423)은 내시(內侍)로 출사하여 낭장(郎將)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입직군사(入直軍士)로 궁문(宮門)을 지킬 때에 왕제(王弟) 의안대군(義安大君)이 부름받은 일도 없이 들어가려 하매 왕명이 없다고 거절하자 의안대군이 발길로 차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太祖)가 이 사실을 알고 은대(銀帶)를 하사하여 내상직(內上直)에 임명하고 어전 밖을 지키도록 하였다. 철야로 직무에 충실하여 선공소감(繕工少監)이 되고, 태조 5년(1396년) 호익사 대장군(虎翼司大將軍)으로 동북면 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오랑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불러 타일렀다. 태종 2년(1402년) 공조ㆍ예조전서, 1406년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中軍摠制兼繕工監事)가 되는 등 주로 영선(營繕)을 맡았다. 1408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ㆍ공조판서를 역임할 때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의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1413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경성수보도감제조(京城修補都監提調)를 맡아 도성을 수축하였다. 그뒤 좌우군도총제(左右軍都摠制)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ㆍ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지내고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이해 인정문(仁政門) 밖의 행랑축조를 감독하였으나 측량 실수로 기울어지자 직무태만으로 하옥되기도 하였으며,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적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익위(翼魏).


▲ 구은사(九隱祠)에 배향된 7의사(義士)를 배출한 박창령(朴昌齡)의 묘와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에 자리한 파괴된 신도비와 새로 세운 신도비.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曺參判)에 추증되어 숭례사(崇禮祠)에 배향(配享)된 창령(昌齡)의 둘째 아들 도(渡)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낼 때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양도하자 아들 인손(璘孫)ㆍ계손(季孫), 도(渡)의 형인 랑(浪)의 아들 규손(奎孫)과 효손(孝孫)ㆍ천손(千孫), 그리고 도(渡)의 동생 제(濟) 등 한 집안에서 7명이 매월당 김시습(金時習)ㆍ정재 조상치(曺尙治) 등과 함께 함경도 금화군 초막동(草幕洞)에 은둔하여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실패하여 7의사(義士)들은 구은사(九隱祠)에 배향되었다.

▲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산간으로 은거해 일생을 마친 박도(朴渡)의 아들 박인손(朴璘孫)ㆍ박계손(朴季孫), 박도의 형인 박랑(朴浪)의 아들 박규손(朴奎孫)과 박효손(朴孝孫)ㆍ박천손(朴千孫), 그리고 박도의 동생 박제(朴濟) 등 한 집안 7명과 다른 2명 등 아홉 선비를 제향하기 위해 1818년 창건된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구은사(九隱祠)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77년 재건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영해 박씨의 일문(一門)은 그늘이 시작되었으며, 세조(世祖)의 탄압이 극심하여 후손들은 선조(先祖)의 비석(碑石)을 땅에 파묻고 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