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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반남 박씨(潘南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반남 박씨(潘南朴氏)의 연원
 

반남 박씨 족보인 2차 계해보(癸亥譜ㆍ1683년)
▲ 반남 박씨 족보인 을유보(乙酉譜ㆍ1825년).

반남 박씨(潘南朴氏)의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혈손(血孫)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는 고려 고종(高宗) 때 반남현(潘南縣)의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6세손 은(?)이 조선 태종(太宗) 때 왕자(王子)의 난(亂) 때 태종(太宗)을 도와 공을 세우고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同德佐命功臣) 3등에 올라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된 연유로 해서 후손들은 누대(累代)에 세거(世居)해 온 반남(潘南)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반남 박씨 1세~5세조를 제향하는 상로재(霜露齋)와 상로재에서 바라본 시조(始祖) 박응주(朴應珠)와 손자 박윤무(朴允武)의 묘.

시조 박응주(朴應珠)의 묘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 박응주의 아들은 의(宜)는 효심이 깊었던지 아버지가 죽자 이웃마을 박씨 성을 가진 지관을 데려다가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박지관은 고개 넘어 자미산의 허리를 둘러보고는 묘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러나 의(宜)가 보기에는 자리가 조금 아래쪽이 더 좋을 듯 싶었다. 하지만 유명한 지관의 말이라 우선 표시를 해두고 미심쩍어 지관의 뒤를 밟았다. 지관이 그의 집에 이르러 방으로 들어가자 의(宜)는 마루 밑으로 숨어 들어가 지관부부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래 묘 자리는 괜찮은데 잡아 드렸는가요?” “기막힌 자리가 한 곳 있긴 했는데, 자리가 너무 좋아 내가 그 자리를 잡아주었다가는 아무래도 천기를 누설하는 일이 되어 화를 입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소.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해 좀 왼쪽으로 잡아 주었지만 그 자리도 괜찮은 자리였소.”

▲ 전남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에 자리한 시조 박응주(朴應珠)의 묘. 뒤는 손자 박윤무(朴允武)의 묘.

의(宜)는 쾌재를 부르며 그 집을 빠져 나왔다. 이튿날 선친의 묘소를 지관이 말해준 자리에서 10m쯤 내려가 일을 시작했다. 오후 늦게 감독하러 나온 박지관은 그 모양을 보고 깜짝 놀라 의(宜)를 꾸짖듯 까닭을 물었다. 의(宜)는 “지관 어른이 정해주신 자리는 저나 제 후손의 묘로 쓰기로 하고 좀 더 아래쪽이 양지바르고 좋을 것 같아서 뜻을 어겼습니다.”하고 능청을 떨었다. 지관은 사색이 되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내었다.



“이것이 모두 천운일세. 사실 자리는 자네가 파고 있는 자리가 분명 명당이네. 그러나 그 자리를 내가 정해주게 되면 내가 천기를 누설하는 하는 것이 되어 화를 입게 되므로 말하지 않은 것인데. 자네가 이를 알아내었으니 자네 가문의 복일세. 아무래도 화는 내가 입을 것이니 일은 계속하되, 내가 이 고개를 넘은 뒤에 시작하길 부탁하네.”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의(宜)는 지관의 부탁이 있어 인부들을 한참 동안 쉬게 한 후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관이 미처 고개를 넘지 못했던지 묘 자리에서 새만큼 커다란 벌이 나와 고개로 날아가 박지관의 뒤통수를 쏘아 죽이고 말았다. 그때부터 이 고개는 벌고개라 부르게 되었으며, 반남 박씨들은 이 고개에 봉현(蜂峴)이란 표석을 세웠다.

 

 

▲ 벌 명당 전설이 전하는 벌고개에는 봉현(蜂峴) 표지석이 서 있다.

반남 박씨들은 이 명당의 기운 덕이었던지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해 “반남 박씨 벌 명당에 묘쓰고 벌떼처럼 일어났다.”라는 말을 남겼다. 지관의 말을 엿들어 명당을 잡은 의(宜)는 그의 성급한 욕심이 지관을 죽인 것이 후회되어 석천리라는 곳에 지관을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냈는데, 오늘날까지도 매년 10월 보름날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고 한다.

▲ 시조 박응주(朴應珠)의 아들 박의(朴宜)의 묘는 실전하여 단소(壇所)를 세웠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상충(尙衷ㆍ1332~1375)은 자는 성부(誠夫)로 공민왕 2년(1353년) 문과(文科)에 급제해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했고,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능통하고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우왕 초 전교령(典校令)이 되어 신진 유학파(儒學派)로서 친명책(親明策)을 주장,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親元派)에 대항했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라 북원의 사신이 왔을 때 간관(諫官) 이첨(李詹)ㆍ전백영(全伯英) 등 친명파와 함께 북원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건의, 이인임 등의 사형을 주장하다가 도리어 장류(杖流)되는 도중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 문정공(文正公) 박상충(朴尙衷)을 제향하기 위해 1730년 건립하였으나 1777년 화재로 소실되고, 1798년 중건하였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1904년 중건한 전북 완주군 봉동읍 구미리 구호서원(龜湖書院).

상충(尙衷)은 아들 3형제와 더불어 가문의 발상(發祥)을 이루어 오늘날 후손들이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조밥을 먹고 살았으리만큼 청빈(淸貧)하였고, 하직(下職)에 있었을 당시 그를 무척 구박했던 계림군(鷄林君) 류양(柳亮)이 후에 국법(國法)을 어겨 이를 다스리면서도 복수는 커녕 오히려 구명(救命)해 주었을 정도로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그의 아우 상진(尙眞-판서를 역임)ㆍ상경(尙?-사은직장을 역임)ㆍ천두(天斗-여의 아들)ㆍ상질(尙質-생원 계의 아들)의 아들 대(代)에서 참판공파(參判公派-예조참판 규)ㆍ세양공파(世襄公派-금천군 강)ㆍ경주공파(慶州公派-경주부윤 훤)ㆍ지후공파(祗侯公派-예문지후 인)ㆍ교위공파(校尉公派-창신교위 귀근)ㆍ감찰공파(監察公派-감찰 여해)ㆍ군사공파(郡事公派-군사 진창)ㆍ정자공파(正字公派-교서정자 충)ㆍ사정공파(司正公派-영사정 문부)ㆍ동정공파(同正公派-영동정 상질)ㆍ직장공파(直長公派-직장 송생) 등 11개 파(派)로 크게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지파(支派)로 나뉘어졌다.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동리에 자리한 박상충(朴尙衷)의 아들 평도공(平度公) 박은(朴?)의 묘.

반남 박씨(潘南朴氏)가 배출한 8명의 상신(相臣) 가운데 최초로 명문의 기초를 세운 은(?ㆍ1370~1422)은 상충(尙衷)의 아들로 자는 앙지(仰止), 호는 조은(釣隱)으로 이색(李穡)의 매부이다. 우왕 11년(1385년)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386년 개성부 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지금주사(知錦州事)ㆍ좌보궐(左輔闕)ㆍ지영주사(知永州事)ㆍ사헌시사(司憲侍史)ㆍ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 등을 지냈다. 태종의 잠저(潛邸) 시절에 서로 의기가 통하여 태조 7년(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정종 2년(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에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우고, 이 해 태종이 즉위하자 형조ㆍ호조ㆍ병조ㆍ이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12년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ㆍ이조판서ㆍ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를 거쳐 태종 16년(1416년) 우의정 겸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 이어 좌의정 겸 판이조사(判吏曹事)를 지낸 뒤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

▲ 평도공(平度公) 박은(朴?)과 맏아들 박규(朴葵)의 공동문집인 ‘반양세고(潘陽世稿)’와 박세채(朴世采)가 1669년 출간한 박상충(朴尙衷)과 문강공(文康共) 박소(朴紹)의 문집인 ‘반양이선생유고(潘陽二先生遺稿)’.

은(?)의 장남 규(葵ㆍ?~1437)는 음보(蔭補)로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7년(1425년) 판통례원사(判通禮院事)가 되고 형조ㆍ이조의 참의를 지낸 후 1429년 황해도 관찰사ㆍ예조참판(禮曹參判),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1433년 평안도 관찰사로서 재직중 야인(野人)들의 약탈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함열(咸悅)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세종 18년(1436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치사(致仕)했다.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에 자리한 세양공(世襄公) 박강(朴薑)의 묘(하남시향토유적 제11호).

은(?)의 차남 강(薑ㆍ?~1460)은 처음 벼슬한 이래 계속 군기감정(軍器監正)을 맡았다. 그뒤 이조참의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455년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다. 1457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듬해 황해도 도순찰사가 되었다. 세조(世祖) 때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아우 훤(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시호는 세양(世襄).

▲ 박은(朴?)의 막내아들로 영의정에 추증된 박훤(朴萱)의 묘.

강(薑)의 아우 훤(萱)은 아홉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인 숭질(崇質ㆍ?~1507)은 자는 중소(仲素)로 세조 2년(145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내외직을 거쳐 성종 21년(1490년) 대사헌,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3년 형조판서로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사퇴했다가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연산군 8년(1502년) 삼도입거도순찰사(三道入居都巡察使), 1504년 우의정을 거쳐 연산군 12년(1506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연산군 폭정 밑에서의 벼슬을 버리고자 일부러 낙마(落馬), 100여 일 동안 등청하지 않아 추국(推鞫)을 받은 뒤 면직되었다. 중종 2년(1507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으며, 시호는 공순(恭順).

한편 강(薑)의 손자인 용(墉ㆍ1468∼1524)은 초명은 호(壕), 자는 중보(仲保)로 인종의 장인이다. 연산군 1년(149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누차 문과(文科)에 실패하여 음보(蔭補)로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를 거쳐 의금부도사ㆍ공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그 뒤 내직으로 한성부 판관ㆍ선공감 판관(繕工監判官)을 거쳤고, 외직으로 울진현령ㆍ은율현감(殷栗縣監)을 지냈다. 은율현감으로 있을 때 한 소녀를 끼고 용을 탄 채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딸이 세자빈(世子嬪ㆍ仁宗妃, 仁聖王后)으로 간택되자,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이 되고 돈령부 부정(敦寧府副正)을 거쳐 병이 위중하자 절충장군 겸 중추원첨지사(折衝將軍兼中樞院僉知事)에 특진되었다. 서예에도 능하여 특히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 (上)경북 안동시 와룡면 태2리(덕동)에 자리한 박병균(朴秉鈞)의 묘. (中)박병균의 아들 박숙의 묘. (下)박숙 교지와 박병균과 박숙의 묘를 수호하는 재사.

 

 

 

 

은(?)의 손자로 규(葵)의 둘째 아들인 병균(秉鈞)은 판관공파(判官公派)의 파조로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홍주판관(洪州判官) 재임시 부부가 일시에 죽었으며, 아들 숙(孰+石ㆍ1444~1526)은 자는 지주(支柱)로 1458년 나이 15세 때 안동으로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부임하던 존 고모부(尊姑母夫) 이중(李重)를 따라 낙남(落南)하면서 반남 박씨(潘南朴氏) 낙남선조(落南先祖)가 되었다.

▲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자리한 문강공(文康共) 박소(朴紹)의 묘와 신도비(경남유형문화재 제301호).


은(?)의 6세손인 소(紹ㆍ1493~1534)는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治川), 이조정랑(吏曹正郞) 조년(兆年)의 아들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중종 14년(151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수찬(修撰)ㆍ사서(司書)ㆍ필선(弼善)ㆍ설서(說書) 등을 역임하여 조광조 등 신진사류(新進士類)와 함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후에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 등 훈구파(勳舊派)의 탄핵으로 사성(司成)에 좌천, 후에 파면되어 합천(陝川)에 내려가 학문을 닦았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나주(羅州) 반계서원(潘溪書院)과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

 

 

▲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의 아들 ‘5응(應)’과 손자 ‘17동(東)’.

 

 

소(紹)는 슬하에 아들 5형제를 훌륭하게 키움으로써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아들 5 명과 손자 17 명을 두었는데, 아들의 돌림자는 ‘응(應)’자이고, 손자의 돌림자는 ‘동(東)’자이다. 이로 인해 야천(治川) 집안을 ‘5應 17東’이라고 부른다.

▲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의 장남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의 묘.

 

 

 

 

소(紹)의 장남 응천(應川ㆍ?~1581)은 자는 혼중(渾仲)으로 중종 38년(1543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이어 태인현감(泰仁縣監)ㆍ호조정랑(戶曹正郞)ㆍ대구부사(大丘府使)ㆍ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ㆍ사재감정(司宰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의 차남 형조참판 박응복(朴應福)의 묘.

소(紹)의 차남 응복(應福ㆍ1525~1598)은 자는 경중(慶仲), 호는 졸헌(拙軒)으로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유조순(柳祖詢) 등에게서 배웠다. 명종 4년(154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6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ㆍ예조좌랑ㆍ병조좌랑ㆍ정언ㆍ성균관 사성 등을 지냈다. 당쟁에 회의를 느끼고 한때 초야에 묻혀 있다가 다시 관계에 나와 선조 22년(1589년)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복직, 이듬해 대사헌ㆍ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로 전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판 겸 부총관으로서 왕을 호종하였고,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대사간ㆍ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1595년 왕비를 호종하여 환도한 뒤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왕비를 호종하고 수안(遂安)까지 간 뒤,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의 3남 정의공(靖懿公) 박응순(朴應順)의 묘.

소(紹)의 3남 응순(應順ㆍ1526~1580)은 자는 건중(健仲)으로 명종 10년(1555년) 진사가 되고,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어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ㆍ감찰(監察)을 지낸 후 안음현감(安蔭縣監)ㆍ용인현령(龍仁縣令) 등으로 나가 잘 다스렸다. 선조 1년(1568년) 딸이 선조의 비(妃ㆍ懿仁王后)로 책봉되자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임했다. 그러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청렴결백하게 생활하여 사람들은 그가 국구(國舅)인 줄 모를 정도였으며, 1578년 부인이 죽자 양주에서 여막을 지키다가 병사하였다. 시호는 정의(靖懿).
▲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에 자리한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의 4남 문정공(文貞公) 박응남(朴應男)의 묘.

소(紹)의 4남 응남(應男ㆍ1527~1572)은 자는 유중(柔仲), 호는 남일(南逸)ㆍ간재(艮齋)ㆍ퇴암(退庵)으로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명종 8년(155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ㆍ수찬(修撰), 6조(曹)의 참의(參議)와 참판(參判) 등을 역임, 대사헌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러 죽었다. 선조 초에 바른말 잘하기로 제일 가는 간관(諫官)으로 알려졌다. 선조(宣祖)는 ‘정치솜씨가 조선의 으뜸이다’라고 극찬했다고 하며, 강직한 성품으로 불의나 부정에는 인간관계를 초월하여 공박하였으므로 그가 죽자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

▲ 사재감정(司宰監正) 박응천(朴應川)의 아들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의 묘.

응천(應川)의 아들 동현(東賢ㆍ1544~1594)은 자는 학기(學起), 호는 활당(活塘)으로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인이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구품직(九品職)에 올랐으나 사퇴, 후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고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ㆍ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냈다. 선조 21년(1588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ㆍ지제교(知製敎)ㆍ수찬(修撰)ㆍ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내고 통신사(通信使)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와서 홍문관(弘文館)에 보직되었다. 선조 24년(1591년)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오르고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했다. 1593년 장령(掌令)ㆍ부응교(副應敎)ㆍ교리(校理)ㆍ사간(司諫)을 역임, 이듬해 응교(應敎)ㆍ보덕(輔德)에 이르렀다. 김장생(金長生)과 교유하여 학문에도 통달했다.

▲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의 동생 정헌공(貞憲公) 박동선(朴東善)의 묘.

동현(東賢)의 동생 동선(東善ㆍ1562~1640)은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로 선조 22년(1589년)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재되었다가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96년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이민(吏民)을 잘 피란시켰고, 전적(典籍)ㆍ직강(直講)에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쳐 광해군 즉위년(1608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시골에 내려가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사간이 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서 인조를 공주(公州)에 호종(扈從)했고 난이 평정된 후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인조를 강화(江華)에 호종, 형조판서ㆍ좌참찬(左參贊)ㆍ우참찬(右參贊)ㆍ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ㆍ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知中樞府事兼知經筵事)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왕손(王孫)을 호종하여 피란하여 난이 끝난 후 좌참찬(左參贊)을 지냈으며, 정사공신으로 금주군(錦州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헌(貞憲). 

 

 

▲ 정헌공(貞憲公) 박동선(朴東善)의 선무원종공신녹권(左)과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의 선무원종공신녹권(右).

응복(應福)의 장남 동열(東說ㆍ1564~1622)은 자는 열지(說之), 호는 봉촌(鳳村)으로 선조 18년(1585년) 진사(進士)가 되고, 159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해 전적(典籍)ㆍ정언(正言)ㆍ병조좌랑(兵曹佐郞)ㆍ사서(司書) 등을 지냈다. 1601년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 이 해 가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의주(義州)에 다녀왔다. 선조 36년(1603년) 검상(檢詳)ㆍ사성(司成) 등을 역임, 뒤에 황주목사(黃州牧使)로서 부역을 고르게 하여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어사의 추천으로 품계가 올랐다. 선조 39년(1606년) 동부승지(同副承旨)ㆍ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고 예조참의(禮曹參議)와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 충주목사(忠州牧使), 1611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다시 예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이 이황(李滉)의 문묘(文廟) 배향을 부당하다고 상소하여 이에 격분한 유생들이 정인홍의 유적(儒籍)을 깎아 버리자, 광해군이 대노하여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정에 있기를 꺼려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 광해군 5년(1613년) 이이첨(李爾瞻)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키자 아우 동량(東亮)과 함께 투옥되었으나 중풍(中風)으로 석방되었다.

▲ 전남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 자리한 봉촌(鳳村) 박동열(朴東說)의 묘와 신도비각.

응복(應福)의 차남 동망(東望ㆍ1566~1615)은 자는 자진(子眞)으로 선조 27년(159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ㆍ대교(待敎)ㆍ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어 평산부사ㆍ신촌군수(新川郡守)ㆍ강화부사(江華府使) 등을 지내고, 직강(直講)으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광해군 5년(1613년) 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 등의 추천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오르고, 길주목사(吉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뒤에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전임, 그 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던 중 안주(安州)의 공관(公館)에서 병사했다.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에 자리한 영흥부사(永興府使) 박동망(朴東望)의 묘.

응복(應福)의 막내아들 동량(東亮ㆍ1569~?)은 자는 자룡(子龍), 호는 오창(梧窓)ㆍ기재(寄齋)ㆍ봉주(鳳洲)로 선조 22년(1589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ㆍ검열(檢閱)ㆍ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扈從), 그 공으로 이듬해 승지(承旨)에 승진, 1596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지고, 형조판서를 지낸 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 1611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자리한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묘(시흥시향토유적 제12호).

대북(大北)파의 계속적인 탄핵을 받던 중 폐지된 호패법(號牌法)이 양법(良法)이라 했다는 구실로 문외송출(門外黜送)당했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앞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ㆍ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을 묵인한 것과 김제남(金悌南)과 함께 반역을 모의한 죄목으로 투옥되자 모역사건은 부인하고 대북파가 조작한 유릉 저주사건은 시인, 폐모(廢母)의 구실을 삼게 하여 감형되고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앞서 계축옥사 때 유릉 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 시인하여 폐모의 구실을 삼게 한 죄로 부안(扶安)에 유배, 1627년 충원(忠原)에 양이((量移)되고, 인조 10년(1632년) 전리에 방귀되었다. 1635년 아들 미(?)의 상소로 복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 

▲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선무원종공신녹권(左)과 아들 문정공(文貞公) 박미(朴?)의 선무원종공신녹권(右).

동량(東亮)의 아들 미(?ㆍ1592~1645)는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 선조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하여 선조 36년(1603년)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문예(文藝)에 능했으며 이항복(李恒福)에게 수학, 장유(張維)ㆍ정홍명(鄭弘溟) 등과 사귀었다. 인조 16년(1638년)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뒤에 금양군(錦陽君)에 개봉(改封)되었다. 서도에도 능하여 많은 유필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

▲ 선조(宣祖)의 부마 금양군(錦陽君) 박미가 엮은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된 부친 박동량(朴東亮)의 무고함을 해명한 ‘백세록(百世綠)’과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자리한 박미의 묘. 뒤는 아버지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묘.

금양군(錦陽君) 미(?)의 아우 의(?)는 인조조에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교리(校理)ㆍ장령(掌令)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어, 광해군의 폭정을 시(詩)로 풍자했던 아우 유(?)와 더불어 명문(名門)이 가통(家統)을 지켰다.

▲ 평양 대동문(大同門) 1층 현판의 글씨는 양사언(楊士彦)의 초서이고, 2층은 국창(菊窓) 박엽(朴燁)의 해서이다.

엽(燁ㆍ1570~1623)은 자는 숙야(叔夜), 호는 국창(菊窓)으로 참봉(參奉) 동호(東豪)의 아들이다. 선조 30년(159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 이어 병조좌랑(兵曹正郞)ㆍ직강(直講)ㆍ해남현감(海南縣監)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때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성지(城地)를 구축해 방비를 굳게 했고,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규율을 확립, 국방을 튼튼히 함으로써 재직 6년간 외침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응천일록(凝川日錄)’과 ‘속잡록(續雜錄)’에 따르면 가렴주구를 일삼고 향략을 즐겨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한다.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모욕하고도 무사할 만큼 명성을 떨쳤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부인이 세자빈의 인척이었다는 이유로 훈신(勳臣)들에 의해 학정(虐政)의 죄로 평양 임지에서 처형되었다.

▲ 남계(南溪) 박세채의 초상화 2폭은 관복 차림의 상(93㎝X175㎝)과 유학복식 차림의 상(104㎝X180㎝)으로 그가 우찬성이 된 60세 전후에 그려 놓은 것으로 추정되며, 경기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巨頭)인 세채(世采ㆍ1631~1695)는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南溪(남계)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의(?)의 아들이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을 공격하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받고는 과거 공부를 포기, 김상헌(金尙憲) 문하에서 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고 송시열(宋時烈)과도 학문 교류를 했다. 28세에 천거로써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1659년 효종이 별세하여 자의대부(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南人)으로 송시열과 함께 이를 기년(朞年ㆍ만1년)으로 정하게 했다.

숙종 즉위년(1674년) 남인(南人)들이 집권하고 서인들이 제거됨에 따라 삭관(削官)되었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사업(司業)에 기용, 이어 집의(執義)ㆍ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으며 1683년 서인이 노론(老論)ㆍ소론(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 후 정권은 또 남인의 손에 들어갔으나 숙종 20년(1694년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소론이 집권하자 좌의정에 올랐다. 당쟁에는 가담했으나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해 당쟁의 근절에 노력했고, 당대의 유종(儒宗)으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글씨를 잘 썼으며, 문묘(文廟)와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

▲ 문정공(文貞公) 박세당(朴世堂)의 유묵과 1690년경 조세걸(曺世傑)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와 1660년 박세당이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받은 홍패 및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에 자리한 박세당과 두 부인의 묘역.

세당(世堂ㆍ1629~1703)은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로 참판(參判) 정(炡)의 아들이다. 현종 1년(166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1664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고, 1667년 수찬(修撰)을 거쳐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나 취임치 않아 장형(杖刑)을 받고, 이 해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예조ㆍ형조의 참의(參議)를 지낸 후 숙종 20년(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에 소론(少論)이 중용(重用)되자 승지(承旨)에 특진했다. 이듬해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ㆍ형조의 판서를 역임, 1703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가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함으로써 반주자(反朱子)라 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관직을 삭탈(削奪),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즉시 사직(司直)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으며, 이중환(李重煥)ㆍ안정복(安鼎福) 등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實學派)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문정(文貞).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에 자리한 백석(白石) 박태유(朴泰維)의 묘와 1684년 쓴 어부사(漁父詞).

세당(世堂)의 아들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형제가 뛰어났다. 태유(泰維ㆍ1648~1746)는 자는 사안(士安), 호는 백석(白石)으로 숙종 7년(168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되었다. 이 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검열(檢閱)이 되고, 1683년 지평(持平)을 거쳐 정언(正言)에 재직 중 같은 서인(西人)이던 어영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이 과격한 방법으로 남인(南人)을 숙청하는데 반발하여 이를 탄핵하다가 거제현령(巨濟縣令)에 좌천되었으나, 소론(少論) 대신들의 상소로 지평(持平)에 복직했다. 후에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이 되어 병마절도사 이하 상급관리도 잘못을 저지른 자는 모두 규탄했으며, 영조 21년(1745년) 병으로 사직했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에 자리한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의 묘와 그를 제향하기 위해 1695 세운 노강서원(鷺江書院)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중에 하나다.

태유(泰維)의 동생 태보(泰輔ㆍ1654~1689)는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로 세후(世煦)에게 입양(入養)되었다. 숙종 1년(167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생원(生員)으로서 숙종 3년(16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ㆍ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 때 시관(試官)이 되어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선천(宣川)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 나와 1680년 수찬(修撰)을 지냈다. 168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나서 교리(校理)ㆍ이조좌랑(吏曹佐郞)ㆍ암행어사(暗行御史) 등을 역임했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서인(西人)으로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鷺梁津)에서 죽었으며, 학문과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풍계사(豊溪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

▲ 백석(白石) 박태유(朴泰維)와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 형제의 필첩인 ‘가장유묵(家藏遺墨)’.

 

 

 

 

필모(弼謨ㆍ1683~1751)는 자는 명중(明仲)으로 세당(世堂)의 손자로 세당(世堂)의 형 세후(世煦)가 후손이 없이 일찍 세상을 뜨자 세당의 차남 태보(泰輔)를 후사로 삼았고, 태보의 아들 둘이 요절하여 태보의 형인 태유(泰維)의 차남인 그를 후사로 정하였다. 충신의 자손이라 천거되어 정릉참봉(貞陵參奉)ㆍ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ㆍ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ㆍ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ㆍ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ㆍ금성현령(金城縣令)ㆍ전주팜관(全州判官)ㆍ청주목사(淸州牧使)ㆍ양천현령(陽川縣令)ㆍ무주부사(茂朱府使) 등을 지냈다.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 묘 아래 자리한 무주부사(茂朱府使) 박필모(朴弼謨)의 묘.

조선 실학파(實學派)의 대가(大家)인 지원(趾源ㆍ1737~1805)은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필균(弼均)의 손자이며, 사유(師愈)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했으며,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 30세에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지구의 자전설(自轉說)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다. 정조 1년(1777년) 권신(權臣)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심하다 정조 4년(1780년) 진하사(進賀使) 박명원(朴明源ㆍ3종형)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중국인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실행활을 보고 실학(實學)에 뜻을 두었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ㆍ제릉령(齊陵令), 정조 15년(1791년)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 후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으로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순조 즉위년(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했다. 그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당시 보수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ㆍ경제ㆍ병사ㆍ천문ㆍ지리ㆍ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그곳의 실학사상을 소개했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써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제를 구사하여 문체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 손자 박주수(朴珠壽)가 그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초상. 오른쪽 위는 원본.

지원(趾源)의 손자 규수(珪壽ㆍ1807~1876)는 자는 환경(桓卿), 호는 환재(桓齋)로 종채(宗采)의 아들이다. 지원(趾源)의 영향으로 가학(家學)인 실학사상을 계승하였으며,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한의사 유대치(劉大致),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 등과 교유하였다. 1826년 경부터 그보다 2세 연하인 순조(純祖)의 세자 익종(翼宗)과 교유하기 시작하였으며, 1827년 순조가 익종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을 때에는 익종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하고 서로 국사를 의논하였다. 1830년 익종이 서거하자 이후로 18년간을 조부의 저술과 사상을 연구하는 등 학문에 전념하였다.



헌종 14년(1848년) 과거에 급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거쳐, 철종 11년(1860년)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862년 진주민란(晋州民亂) 때에는 안핵사(按使)가 되어 백성의 편에 서서 사태 수습에 힘썼으며, 도승지ㆍ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고 1866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자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불살랐다. 1875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이 수교(修交)를 요구해 오자 최익현(崔益鉉) 등의 강력한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수교을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 뒤 고희(古稀)를 넘기고 수원유수(水原留守)를 지내다가 죽어 고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개화사상은 후에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시호는 문익(文翼).
▲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영정과 직접 제작한 별자리도인 평혼의(平渾儀) 및 헌법재판소 건물 왼쪽에 자리한 박규수 집터 표지석과 유묵.

준원(準源ㆍ1739~1807)은 자는 평숙(平叔), 호는 금석(錦石), 김양행(金亮行)의 문인이다. 정조 10년(178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주부(主簿)가 되고 이듬해 셋째 딸이 후궁으로 들어가 정조(正祖)의 수빈(綏嬪)이 되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거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올랐다. 그 위세가 드세었고 정사도 엄정하게 처리하였다. 정조 14년(1790년) 수빈(綏嬪)이 원자(元子ㆍ순조)를 낳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이어서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어 궁중에서 순조를 보도(輔導)하고 1800년 원자가 순조(純祖)로 즉위하자 즉위한 후 수렴청정(垂廉聽政)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해 공조의 참판(參判)ㆍ판서를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고, 총융사(摠戎使)ㆍ어영대장(御營大將)ㆍ형조판서를 역임하고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되어 이후 8년간 병권을 장악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덕행이 내외에 드높았다. 시호는 충헌(忠獻).

▲ 경기도 여주시 여주군 여주읍 가업리에 자리한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의 묘(여주시향토유적 제9호).

준원(準源)의 아들 종경(宗慶ㆍ1765~1817)은 자는 여회(汝會), 호는 돈암(敦巖)으로 순조의 외숙(外叔)이다. 정조 14년(179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동몽교관(童蒙 敎官)을 거쳐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내다가 사임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자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으로 기용되고, 이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교리(校理)로 승진했다. 승지(承旨)ㆍ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ㆍ총융사(摠戎使)를 거쳐 1809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고 훈련대장(訓鍊大將)을 거쳐 1812년 호조판서로 있을 때 대사헌 조득영(趙得永)으로부터 왕의 인척으로 위복(威福)을 누리면서 음탕하며 뇌물만 탐내고 사감(私憾)으로 살인을 하는 등 행패가 많다는 탄핵을 받아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좌천되었다. 어영대장(御營大將)ㆍ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순조와 순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군국기무(軍國 機務)에서부터 공부(貢賦)까지도 장악, 권세를 부렸다. 시호는 문숙(文肅).

▲ 문숙공(文肅公) 박종경(朴宗慶)의 시문집인 ‘돈암집(敦巖集)’과 1816년 박종경이 사재로 만든 20만 자의 동활자로 1822년 찍은 남공철(南公轍)의 시문집인 ‘영옹속고(潁翁續藁)’.

종훈(宗薰ㆍ1773~1841)은 자는 순가(舜可), 호는 두계(荳溪)로 군수(郡守) 참원(參源)의 아들이다. 정조 22년(179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순조 2년(180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ㆍ장령(掌令) 등 여러 청요직을 거쳐 1812년 보덕(輔德)ㆍ대사성, 1814년 경기도 관찰사, 이듬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거쳐 대사헌ㆍ대사성ㆍ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ㆍ전라도 관찰사ㆍ평안도 관찰사ㆍ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ㆍ이조판서 등을 거쳐 1834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 해 순조가 죽자 순조의 행장(行狀)을 지었고, 이어 고부 겸 주청사(告訃兼秦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헌종 3년(1837년) 좌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 풍양 조씨(豊壤趙氏) 세도의 압력으로 사직,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경서經書)ㆍ예악(禮樂)ㆍ율령(律令) 등 학문에 정통했고, 서예(書藝)ㆍ시문에 모두 능했다. 시호는 문정(文貞).

▲ 문정공(文貞公) 종훈(朴宗薰)의 간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종우(宗羽)의 아들 회수(晦壽ㆍ1786~1861)는 자는 자목(子木), 호는 호곡(

谷)으로 순조 16년(181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순조 33년(1833년) 진향부사(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헌종 1년(1835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후 이 해 동지사(冬至使)로서 다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45년 우의정이 되었다. 1849년 순조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철종 2년(1851년)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었다. 1855년 왕이 파주(坡州)에 갈 때 병을 핑계로 호종(扈從)하지 않아 삭직(削)되었다가 다시 우의정을 거쳐 1859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시호는 숙헌(肅憲).
▲ 숙헌공(肅憲公) 박회수(朴晦壽) 영정 및 유묵.

▲ 경남 거창군 거창읍 김천리에 자리한 죽계(竹溪) 박운수(朴雲壽) 부사비.?

 

기수(岐壽ㆍ1792~1847)는 자는 봉래(鳳來)로 호조판서 종보(宗輔)의 아들이며, 숙부 좌참찬(左參贊) 종경(宗慶)에게 입양되었다. 순조 10년(1810년) 생원(生員)이 되고, 181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거쳐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공조ㆍ예조ㆍ병조ㆍ이조의 판서, 지경연사(知經筵事)ㆍ도총관(都摠管)ㆍ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ㆍ좌참찬(左參贊) 등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냈다.



운수(雲壽ㆍ1797~1841)는 자는 경룡(景龍), 호는 덕은(德隱)ㆍ죽계(竹溪)로 서흥부사(瑞興府使) 종여(宗輿)의 아들이다. 한성(漢城) 출신으로 누차 과거를 보았으나 실패, 음보(蔭補)로 군읍(郡邑)의 벼슬을 거쳐 순조 22년(1822년)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장례 때 종척집사(宗戚執事)를 지냈고, 순흥부사(順興府使)에 이르렀다.

호수(鎬壽ㆍ1798~1848)는 자는 미경(美京)으로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준원(準源)의 손자이며, 호조판서 종보(宗輔)의 아들로 숙부인 종익(宗翊)에게 입양되었다. 이병원(李秉源)의 문인으로 음보(蔭補)로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이 되고,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이르렀다. 고모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입궁(入宮) 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곧 이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올랐다. 뒤에 다시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않았다.
▲ 문익공(文翼公) 박정양(朴定陽) 간찰.

한말(韓末)에 와서는 정양(定陽ㆍ1841~1904)은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으로 고종 3년(186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참판(參判) 등을 지냈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일본문물을 시찰한 뒤 이용사 당상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어 미국에 파견되었으나 원세개(袁世凱)의 압력으로 1889년 소환되었다. 1894년 호조판서ㆍ교정청 당상(校正廳堂上)ㆍ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그해 제2차 김홍집내각의 학무대신이 되고, 1895년 김홍집내각이 붕괴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7월 내각총리대신을 사임하고 제3차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고, 1896년 김홍집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총리대신서리ㆍ궁내부대신서리를 겸임했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서 시정개혁을 약속하였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조선 말기의 온건중립파로서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 인사들을 후원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

▲ 1882년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에 수신사로 갔을 때 동판화에 새겨진 초상화.

 

영효(泳孝ㆍ1861~1939)는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로 고종 9년(1872년) 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별하였다. 오경석(吳慶錫)ㆍ유대치(劉大致)ㆍ이동인(李東仁) 등 북학파(北學派) 개화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 김옥균(金玉均)ㆍ서광범(徐光範) 등과 개화당(開化黨)을 조직하였다. 1882년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였는데, 이 때 최초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883년 초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개화시책을 폈으나 민태호(閔台鎬) 등 수구파의 반대로 실패하고 광주유수 겸 수어사(廣州留守兼守禦使)로 좌천되었다. 1884년 우정총국(郵政總局) 청사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혁신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을 맡았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김홍집(金弘集)내각에 내무대신으로 입각했다. 1895년 3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김홍집파를 퇴진시키고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왕실과 일본공사로부터 배척당하고 고종 폐위음모 혐의를 받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비공식으로 귀국해 사면되었고, 이완용(李完用)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지만 정부대신 암살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국권피탈 뒤 일본으로부터 후작(侯爵) 작위를 받고 1911년 조선귀족회 회장, 1918년 조선은행 이사를 지냈다.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중추원 의장ㆍ일본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다.
▲ (좌)박영효(朴泳孝). (중)박기양(朴箕陽). (우)박찬익(朴贊翊).


기양(箕陽ㆍ1856~1932)은 자는 범오(範五), 호는 석운(石雲)으로 고종 25년(188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설서(說書)ㆍ검열(檢閱)ㆍ문학(文學)ㆍ대사성ㆍ이조참의(吏曹參議)ㆍ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경기도ㆍ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ㆍ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ㆍ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ㆍ태의원경 겸 승례원경(太醫院卿兼承禮院卿) 등을 역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을 지내다가 한일합방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男爵)이 되고, 1921년에 경학원 부제학(經學院副提學), 1925년에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다. 금(琴)ㆍ기(棋)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능했으며, 글은 행서(行書), 그림은 묵죽(墨竹)에 뛰어났고 여러 번 조선미술전람회 평의원(評議員)을 지냈다.



찬익(贊翊ㆍ1884~1949)은 자는 정일(精一), 호는 남파(南坡)로 광무 12년(1906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민족운동을 벌이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만주에 망명했다. 대종교(大倧敎)의 정교(政敎)로 있으면서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한인학교(韓人學校)를 세워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요직을 역임하고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1920년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원이 되고 이듬해 임시정부 대표로 광동(廣東) 정부에 파견되었다가 1940년 임시정부 법무부장이 되었다. 1948년에 귀국했으나 이듬해 서울에서 병사,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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