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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죽산 박씨(竹山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죽산 박씨(竹山朴氏)의 연원
 

죽산(竹山)은 경기도 용인군(龍仁郡)과 안성군(安城郡) 일부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다가 고려(高麗) 초에 죽주(竹州)로 고치고, 성종 14년(995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음평(陰平) 또는 연창(延昌)이라 하였으며 현종(顯宗)때 광주(廣州)로 속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 죽산(竹山)으로 개칭하여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32년(1895년) 군(郡)이 되었다가 1913년 원일면(遠一面)과 근삼면(近三面) 일부는 용인군(龍仁郡)에 합해지고 나머지 지역은 안성군(安城郡)에 합해졌다.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신라(新羅) 왕족의 후예(後裔)로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왕자(王子)인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으로부터 문호가 열리게 되었다. ‘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아들 기오(奇悟)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高麗) 창업에 공을 세우고 태조(太祖)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러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가, 후에 죽주백(竹州伯)으로 개봉(改封)되고 죽주(竹州ㆍ죽산의 옛 이름)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죽산(竹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뿌리를 찾아서’에 의하면, 죽산 박씨는 철성백파(鐵城伯派)ㆍ찬성공파(贊成公派)ㆍ태복경파(太僕卿派)ㆍ문광공파(文匡公派) 등 크게 4파로 나뉘고, 다시 문광공파(文匡公派)에서 죽산군파(竹山君派)ㆍ문충공파(文忠公派)ㆍ판서파(判書派)ㆍ제학파(提學派)ㆍ충현공파(忠顯公派) 등으로 분파되었다. 그러나 ‘姓氏의 고향’에는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ㆍ문헌공파(文憲公派)ㆍ문정공파(文靖公派)ㆍ전서공파(典書公派)ㆍ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ㆍ제학공파(提學公派)ㆍ충현공파(忠顯公派)ㆍ목사공파(牧使公派)ㆍ총제공파(摠制公派)ㆍ찬성공파(贊成公派)로 나뉘어져 있다.

음성 박씨(陰城朴氏)와 고성 박씨(固城朴氏)는 죽산 박씨에서 분적되었다. 고성 박씨 족보는 죽산 박씨(충질공파) 족보에 합본하여 죽산박씨 충질공파보를 발행하고 있으며, 음성 박씨 족보도 죽산박씨족보(충질공파보)에 합본하여 발행하기 위하여 협의 중이다.

▲ 1650년 작성된 죽산 박씨 세보. 클릭!

죽주백(竹州伯) 기오(奇悟)의 손자 충숙(忠叔ㆍ?∼1037)은 고려 현종 1년(1010년) 거란(契丹)이 침입해 왔을 때 예빈경(禮賓卿)으로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통주(通州ㆍ宣川)에서 싸우다 패하였다. 다음해에 서경부 유수로 나갔으며, 그 다음해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다. 이후 재추의 반열에 올랐고, 현종 13년(1022년)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있으면서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신(貞愼).



7세손 정유(挺?ㆍ1089~1145)는 영후(永侯)의 아들로 예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경원판관(慶源判官)을 거쳐 인종(仁宗) 때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인종 10년(1132년)에 합문(閤門)에 엎드려 상소하여 3일 동안이나 시사(時事)를 말하는 등 왕의 뜻에 거슬려 지인주사(知仁州事)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당시 공과(功課)가 최상이 되므로 발탁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며, 그 뒤 20여 년 동안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일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1138년에 잡단(雜端)으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최관(崔灌), 시어사 인의(印儀) 등과 함께 추밀사(樞密使) 진숙(陳淑)이 묘청(妙淸)의 난으로 서경을 칠 때, 남의 노비와 보대(寶帶)를 뇌물로 받은 것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질(忠質).

정유(挺)?)의 아들 육화(育和)는 의종 10년(1156년) 춘주도안찰사(春州道按察使)를 지내고, 1157년에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61년 급사중(給事中)으로 왕이 궁인 무비(無比)의 사위인 김광균(金光均)의 고신(告身)에 서명하도록 하자 그 부당함을 알면서도 그대로 서명하였으며, 1163년에는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를 겸임하였다. 좌정언(左正言) 문극겸(文克謙)이 환관 백선연(白善淵)ㆍ무비 등을 탄핵할 때 연서(連書)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문극겸이 좌천되어도 자신의 직위를 지키는 데만 급급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명종 3년(1173년)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올랐다.

육화(育和)의 아들 인석(仁碩ㆍ1143~1213)은 자는 수산(壽山), 호는 회곡(檜谷)으로 기사(騎射)에 능하고 글 읽기를 즐겨 8세에 세자의 학우(學友)가 되었다. 뒤에 음보(蔭補)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에 이르러 우군녹사(右軍錄事)를 겸했고, 사재감 주부(司宰監注簿)를 지냈다. 명종 초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북원(北原)에 은거했을 때 여러 번 모함을 받아 생명이 위험했으나, 구해주는 자가 있어 죽주(竹州)에 귀양가는 것으로 그쳤다. 24년 간 시골에 묻혀 있다가 명종 27년(1197년)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등용되고, 신종이 즉위한 뒤 통사사인(通事舍人)ㆍ감찰어사(監察御史)ㆍ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역임, 경주(慶州)에서 초적(草賊)의 반란이 있자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어 어사집단(御史雜端)이 되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삼사부사(三司副使)를 겸했고,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당시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던 유승단(兪升旦)이 극찬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 분적하여 음성 박씨의 시조가 된 충남 음성군 음성읍 삼생4리 박산소골(무두골) 박서(朴犀) 묘.

인석(仁碩)의 아들 서(犀)는 고종 18년(1231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을 때 몽고장수 살리타이(撤禮塔)가 쳐들어와 철주(鐵州ㆍ지금의 鐵山)를 함락하고 이어 귀주(龜州ㆍ지금의 龜城)를 공격하자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귀주(龜州)에 모여 성을 사수(死守), 누차(樓車)ㆍ대포차(大砲車)ㆍ운제(雲梯) 등 온갖 무기로 공격해 오는 몽고군과 한 달 동안이나 격전 끝에 마침내 이를 물리쳤다. 귀주를 버리고 개성을 먼저 함락, 고종의 군세를 가다듬어 귀로(歸路)에 다시 귀주를 공격하는 몽고군을 또다시 대파,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때 그에게 왕명으로 후군지병마사(後軍知兵馬使) 최임수(崔林壽),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 등이 와서 나라의 항복을 알리고 구주성을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거부하다가 끝내 왕명을 어기지 못해 항복했다. 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서(犀)는 분적하여 음성 박씨(陰城朴氏)의 시조가 되었다.



문광공파(文匡公派)의 파조(派祖) 전지(全之ㆍ1250~1325)는 호는 행산(杏山)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 휘(暉)의 아들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해 사국(史局)ㆍ한림원(翰林院) 벼슬을 역임하고, 충렬왕 5년(1297년) 원나라 세조(世祖)가 고려 양반들의 자제를 뽑아 입시(入侍)시킬 때 선발되어 원나라의 명사들과 사귀어 명성을 떨치고 정동성 도사(征東省都事)가 되었다. 귀국 후 이부(吏部)ㆍ병부(兵部)의 시랑(侍郞)에 임명되었으나, 어린 나이에 비하여 높은 벼슬이라 하여 사양하고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 왕에게 재주가 인정되어 전중윤 지제교(殿中尹知製敎)에 발탁, 세자(世子ㆍ忠宣王)의 시강(侍講)을 맡았다. 1298년 충선왕이 한 때 즉위하자 삼사 좌사 사림 학사승지(三司左使詞林學士承旨)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중경유수(中京留守)가 되고, 이 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무고로 파직되었다. 1308년 충선왕 복위 후 복직되어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으며, 충숙왕 8년(1321년)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로서 치사(致仕)했다. 고려조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문장가로 인품이 온화했으며, 결단력이 없었다. 시호는 문광(文匡).
▲ 충현공(忠顯公) 박문수(朴門壽)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전북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의 남원 죽산 박씨 종가(전북유형문화재 제180호).

전지(全之)의 아들 원(遠ㆍ?~1341)은 초명은 원(瑗)으로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 충숙왕 11년(1324년)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2년 뒤 전선(銓選)을 담당, 앞서 충숙왕을 원나라에서 시종한 공으로 1327년 2등공신이 되었다.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했다. 시호는 문강(文康)으로 죽산군(竹山君) 문보(文珤), 문충공(文忠公) 덕룡(德龍), 판서(判書) 수룡(壽龍), 제학(提學) 문화(文和), 충현공(忠顯公) 문수(門壽)는 모두 그의 아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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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현공(忠顯公) 박문수(朴門壽)에 관계된 글들을 모아 놓은 ‘송암실기(松菴實記)’.

원(遠)의 아들 문수(門壽)는 호는 송암(松菴)으로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과 더불어 국사를 논해 세칭 삼로(三老)로 일컬어졌으며, 고려 말 우정승(右政丞)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문생(門生) 30여 인, 조사(朝士) 40여 인과 더불어 괘관현(掛冠峴)에 관(冠)을 걸고 부조현(不朝峴)을 넘어 개성 부근 만수산(萬壽山)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였으며, 원명 문주(門柱)를 만수산(萬壽山)에서 두문(杜門)한다 하여 문수(門壽)로 개명하였다. 순조 11년(1811년) 두문동72현을 기리는 표절사(表節祠)에 제향(追享)되었으며, 헌종 2년(1836년) 충현(忠顯)의 시호가 내려졌고 철종 7년(1856년) 남원 석봉원(石峯院)에 제향되었다.


 

 

 

▲ 전북 남원시 수지면 신평리에 자리한 충현공(忠顯公) 박문수(朴門壽)의 단소와 송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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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門壽)의 아들 포(苞ㆍ?∼1400)는 호는 호곡(壺谷)으로 일찍이 이성계(李成桂)를 좇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데 참여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이듬해 사헌중승(司憲中丞)을 거쳐 황주목사(黃州牧使)로 나갔다. 태조 7년(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의 편에 서서 정도전(鄭道傳) 일파의 동정을 방원에게 밀고하여 난이 성공하게 하여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책록(冊錄)되었으며,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러나 그 논공(論功)에서 2등이 되고 이무(李茂)는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된 것을 비방하였다가 방원의 미움을 사서 죽주(竹州ㆍ永同)에 유배되었으나 곧 소환되었다. 그는 회안군(懷安君) 방간(芳幹)의 집에서 먼저 선수를 써서 정안군(靖安君ㆍ방원)을 쳐부수는 것이 낫다고 그를 부추긴 뒤, 정종 2년(1400년)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제2차 왕자의 난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공신 중에서 다만 포(苞)와 장사길(張思吉)만이 따르고, 나머지는 모두 방원(芳遠)을 좇았다. 방간(芳幹)의 군사가 패하자 방간(芳幹)은 토산(兎山)으로 귀양가고, 포(苞)는 방간(芳幹)을 꾀어 난을 일으킨 죄목으로 이산(尼山)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영충(永忠)은 호는 국재(菊齋)로 왕 6년(1380) 우상시(右常侍)에서 공주도 병마사(公州道兵馬使)가 되고, 우왕 14년(1388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원수로서 이성계(李成桂)의 우군(右軍)이 되어 출전했다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였다. 공양왕 2년(1390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재직시 회군(回軍)의 공으로 회군공신(回軍功臣)에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한양부윤(漢陽府尹)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듬해 강화절제사(江華節制使)ㆍ동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으며, 지난 날의 공로가 인정되어 개국공신 2등에 추록되었다. 같은 해 천추진하사(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가던 중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렀다가 명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돌아왔으며, 죽성부원군(竹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죽산 박씨(竹山朴氏) 는 조선조에 들어 39명의 문과 급제자와 영의정 원형(元亨)ㆍ홍구(弘?) 등 2명의 상신(相臣)을 냈다. 이들은 전지(全之)의 후손들로서 원형(元亨)은 6세손으로 세조(世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원형(元亨)의 6세손 홍구(弘?)는 광해군(光海君)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한 집안에서 두 명의 상신(相臣)이 나왔다는 것은 큰 영광임에 틀림없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에 자리한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의 신도비와 경북 김천시 감천면 도평2리에 자리한 불천지위(不遷之位) 사당인 청현사(淸顯祠).


원형(元亨ㆍ1411~1469)은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 고(?)의 아들이다. 세종 14년(143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ㆍ도염서령(都染署令)ㆍ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1450년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좌승지 겸 지형조사(左承旨兼知刑曹事)를 지내고 문종 1년(1451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되고, 세조 5년(1459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고, 호조ㆍ형조ㆍ이조ㆍ예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뒤 1466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해 좌의정에 오르고, 1468년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과문(科文)에 특히 뛰어났으며,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

그는 사체(事體)에 명달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외교(外交)의 일인자로 손꼽혔다. 일찍이 중국 사신(使臣) 장영(張寧)이 그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대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더라도 숙향(叔向)과 자언(子彦)의 밑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특히 그는 영상(領相)에까지 올랐으면서도 일평생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임금에게 바른말을 잘 해 세종은 그를 가리켜 급암(汲?ㆍ직언을 잘 한 한나라의 충신)이라 불렀다. 그의 아들 안성(安性)이 벼슬이 높아지기도 전에 그의 생일에 술상을 차려 올리니 그는 받아 마시며 아들을 앞에 앉혀 놓고 아래와 같은 계명시(戒命詩)를 내렸다.

今夜燈前酒數巡 / 오늘밤 등불 앞에 두어 순배 술을 드니
汝年三十二靑春 / 너의 나이 헤어보매 서른 둘 청춘이라
吾家舊物惟淸白 / 우리 집 가보로는 청백 그뿐이니
好把相傳無限人 / 이걸 잘 지녀서 무한히 전해 내려라

▲ 광주광역시 임곡동 용진산에 자리한 가학정(駕鶴亭)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도 은거생활을 한 박경(朴璟)의 충의를 기념하기 위해 유림들이 세웠다.

원형(元亨)의 아우 원정(元貞)의 7세손인 경(璟)은 한평생 벼슬을 마다 하고 학문에 심취하며 충효를 실천한 인물이다.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한가함을 즐기며 수고스러움을 싫어하고 조용함을 즐김이 내 뜻하는 바이다(惡煩樂閒惡勞樂靜所吾志也)’고 고집한 그였지만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위태롭자 창의대장(倡義大將)이 되어 의병 수천과 군량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을 제수하면서 환로(宦路)에 나서기를 권했으나 그는 정중히 거절했으며, 이에 왕은 궤장(?杖)과 죽림처사(竹林處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경(璟)은 난이 끝난 후 전남 광산군 임곡면 불당곡에 은거하니 인근 향당, 유림들이 그의 충의를 기념하고 그가 여생을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가학정(駕鶴亭)을 지어주었다.



홍구(弘耉ㆍ1552~1624)는 초명은 홍로(弘老), 자는 응소(應邵)로 도정(都正) 난영(蘭英)의 아들이다. 선조 15년(158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고, 정언(正言)을 거쳐 1593년 교리(校理)로 전라도 어사(全羅道御史)가 되어 임진왜란 중의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1595년 응교(應敎)로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했다. 1597년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ㆍ대사성ㆍ도승지(都承旨)ㆍ병조참판(兵曹參判), 다음해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601년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진하부사(進賀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대사간ㆍ대사헌ㆍ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선조 40년(1607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지낸 후 광해군 10년(1618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삭직(削職),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광해군 복위를 음모했다는 윤장(允章)의 사건에 연좌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살했다. 숙종 17년(1691년) 신원(伸寃)되었다.
▲ 인조 때의 무신 택수(澤?) 박신룡(朴信龍) 장군에게 하사된 것으로 전하는 유의(遺衣ㆍ중요민속자료 제110호).

홍구(弘?)와 동기간인 신룡(信龍)은 자는 이택(而澤), 호는 택수(澤?)로 광해군 10년(1618년) 무과(武科)에 급제, 인조 4년(1626년) 선전관으로서 병졸을 거느리고 의주군문에 부임하였다. 부윤(府尹) 이완(李莞)이 계청(啓請)하여 중군(中軍)을 삼았으며, 인조 5년(1627년) 정월(正月) 14일 밤에 노기(虜騎)가 쳐들어옴으로 선두에 나가서 수백 인을 격살(擊殺)하는 등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11년(1685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가증되고 영조(英祖) 때 왕명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그의 아들 상현(商賢)과 손자 순(諄)은 효행이 돋보여 후세에 귀감이 됐다.

▲ 택수(澤?) 박신룡(朴信龍) 장군의 유의(遺衣)를 보관하기 위해 1885년 후손들이 건립한 충북 청양군 윤곡면 위라리 유의각(遺衣閣ㆍ충북문화재자료 제153호).

원(遠)의 10대손 명현(名賢)과 11대손 명룡(命龍)은 무장으로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명현(命賢)은 선조(宣祖) 29년(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켜 홍주(洪州)를 위협하자 목사(牧使) 홍가신(洪可臣) 휘하에서 임득의(林得義)와 함께 성을 지키며 반군을 청양(靑陽)까지 추격, 섬멸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토포사(討捕使)ㆍ충청도방어사(忠淸道防禦使)ㆍ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 선조(宣祖) 37년(1604년)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오르고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다. 위계(位階)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광해군(光海君) 때 무과에 급제한 명룡(命龍ㆍ1588~1627)은 자는 견숙(見叔)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광해군 8년(1616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ㆍ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ㆍ조산만호(造山萬戶)를 거쳐 소근진 수군첨절제사(所斤鎭水軍僉節制使) 등을 지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 형 성룡(成龍)과 함께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의 군중에서 공을 세워 원종공훈일등(原從功勳一等)에 녹훈되었다. 고부군수(古阜郡守)로 있다가 변방으로 자원, 평안병마우후(平安兵馬虞候)로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의 막하에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맞았다. 명룡(命龍)은 오랑캐에게 투항한 정난영(鄭蘭英)이 그에게도 항복하라고 권하자 ‘난(亂)에 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은 신하의 직분인데 어찌 너희들의 짓을 본받으라 하느냐’며 거절하고, 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홀로 성위에 서서 화살을 옆에 쌓아 두고 수백 명을 활로 쏘아 죽였다. 활을 당기는 엄지손가락이 끊어지자 칼을 빼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7년(1681년) 안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

 

▲ 전북 남원시 수지면 월평리에 자리한 초곡(草谷) 박계성(朴繼成)의 묘와 사적비.

계성(繼成)은 자는 이술(而述), 호는 초곡(草谷)으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捿)에 훈공을 세웠으며,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구례(求禮)에서 전사하니 그의 부인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또한 아우 승성(承成), 사촌 동생인 언정(彦貞)도 순국하니 최익현(崔益鉉)이 그의 비문(碑文)을 지으며 ‘한 집안에서 삼충(三忠)이 났음은 고경명(高敬命)과 비교가 되나 효열(孝烈)이 더 있으니 장한 일’이라고 칭송했다.

경신(慶新ㆍ1560∼1626)은 자는 중길(仲吉), 호는 한천(寒泉)ㆍ삼곡(三谷)으로 장령 사공(思恭)의 아들이다. 선조 15년(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청도조전장(淸都助戰將)으로 참전하고 순변사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하였다. 선조 27년(1594년)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하여 관민을 소집, 훈련시켜 전시태세를 갖추고 전공을 세워 정부의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전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성을 버리고 달아나 파직당하였다. 전란이 평정된 뒤 다시 서흥부사(瑞興府使)로 기용되었고, 뒤이어 동래부사ㆍ삼척부사ㆍ형조참의 등 내외 관직을 지냈다. 광해군 때 광주목사(光州牧使)ㆍ양주목사ㆍ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1622년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가 되었다. 판결사로 있을 때는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에 동조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 때의 행적에 대한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한 인조의 파천을 호종하지 않은 죄목으로 문외출송당하였으며, 시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 1964년 간행된 송곡(松谷) 박주현(朴周鉉)의 유고시집인 ‘송곡유고(松谷遺稿)’.

근세 인물로는 주현(周鉉ㆍ1844~1910)은 초명은 일현(一鉉), 자는 내수(內壽), 호는 송곡(松谷)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 규찬(奎燦)의 아들로 뒤에 큰아버지 규장(奎張)에게 입양되었다. 약관에 서울에 올라가 김병학(金炳學)에게 수학하였으며, 고종 13년(1876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1883년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여 이듬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1885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言)과 헌납(獻納)을 거쳐 사헌부 지평ㆍ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신병으로 일시 사직하였다가 1901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이 되고,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1904년 비서원승(비書院丞)에 이르렀다. 러일전쟁 후 국권이 날로 침탈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송병선(宋秉璿)을 찾아가 나라의 앞날을 함께 의논하였으며, 일본의 세력을 반대하기 위하여 민회(民會)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뒤 배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 끝에 풀려났으나, 그 여독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저서로 ‘송곡유고(松谷遺稿)’가 있다.



치조(治祚ㆍ1890∼1956)는 자는 사윤(仕胤), 호는 아탁(啞鐸)으로 평북 선천(宣川) 출생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1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미국 국회의원단의 내한을 기회로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밀파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결사대원들과 만나 거사를 계획하였으며, 그해 9월 1일 아우 치의(治毅)와 함께 평북 선천군청(宣川君廳)과 선천경찰서에 투탄하고 유인물을 살포하였다. 9월 7일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며, 1977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외 건채(健采)는 호는 고은(高隱)으로 치조(治祚)ㆍ치의(治毅) 형제와 같이 선천군청과 경찰서를 파괴하다 체포되어 6년형 선고를 받았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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