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박)

순천 박씨(順天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순천 박씨(順天朴氏)의 연원

순천 박씨(順天朴氏)의 시조(始祖) 박영규(朴英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의 아들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사위로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創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좌승(左丞)에 올라 승주군(昇州君ㆍ승주는 순천의 고호)에 봉해졌다고 한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기록된 박영규전(朴英規傳)

‘고려사(高麗史)’ 열전 제5권에 의하면, 박영규(朴英規)는 승주(昇州ㆍ순천의 옛 이름) 사람으로 견훤(甄萱)의 딸에게 장가를 든 후 견훤(甄萱)의 장군(將軍)이 되었다. 그 후 신검(神劍)이 모역을 하자 견훤(甄萱)이 고려로 투항함으로 영규(英規)는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대왕이 40여 년 동안 고초를 겪으며 공업(功業)을 이루었으나 일조에 집안의 화(禍)로 인하여 사실 곳을 잃고 고려로 투항을 하였습니다. 곧은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왕을 놔두고 적(賊)을 섬기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를 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고려왕은 인후(仁厚)하고 근검(勤儉)하여 민심을 얻고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계도한 것이므로 반듯이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우리 왕에게 위안서신과 고려왕에게 은근한 뜻을 전하여 장래의 복(福)을 시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므로 그의 아내는 “당신의 말은 나의 뜻이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고려 태조(太祖) 19년 2월에 박영규(朴英規)는 사람을 보내어 서신(書信)을 전하고 또 “만일 의병(義兵)이 일어나면 내부에서 호응하여 왕의 병사를 맞이하겠습니다.”고 하자,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使者)에게 하사품(下賜品)을 후하게 주어 영규(英規)에게 돌아가 말하게 하기를 “만일 당신의 은혜를 입어 우리 병사가 가는 길에 아무 탈이 없으면 먼저 장군을 뵈옵고 또 마루로 올라가 부인에게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형(兄)으로 받들고 부인을 누나로 존경하여 반듯이 후한 보답을 하겠습니다. 천지귀신들도 모두 이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9월에 태조(太祖)는 신검(神劍)을 정벌하여 후백제를 정복한 후 박영규(朴英規)에게 말하기를, “견훤이 나라를 잃고 멀리 온 후 그 신하 중에서 한 사람도 위로를 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부부만 천리 길에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보이고 또 과인에게도 서신을 전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좌승(左丞ㆍ정1품의 벼슬)을 제수한 후 밭 일천경(一千頃ㆍ300만평)과 역마 35필을 하사하고 그 가족을 맞이하였으며, 그 두 아들에게 관직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세 딸은 왕건의 부인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고려 제3대왕인 정종의 비인 문공왕후(文恭王后)와 문성왕후(文成王后)이다. 그 후 박영규(朴英規)는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 전남 순천시 금곡동 난봉산(鸞鳳山)에 자리한 순천 박씨 득관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박난봉(朴蘭鳳) 장군의 묘와 두 묘비.?

전남 순천시 매곡동 뒷산을 중심으로 약 700m에 걸친 산성을 난봉산성(鸞鳳山城ㆍ매곡산성)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이 지역의 요새지로 이 산성은 도성 북문 밖의 외곽방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성이 자리한 난봉산(鸞鳳山)이란 이름은 순천 박씨 시조 박영규의 4대손으로 고려 정종 때의 인물인 박난봉(朴蘭鳳) 장군의 묘가 이 산의 동남쪽 기슭에 있어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난봉(蘭鳳)은 고려말 충열왕조(忠烈王朝)에서 대장군(大將軍)을 지냈으며, 정승(政丞)에 이르러 평양군(平陽君)에 봉군(封君)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는 그가 사후(死後)에 인제산신(麟蹄山神)이 되었다고 하며 “난봉이 영규의 증손이요, 숙정(淑貞)의 6대조다”고 하였으나, ‘순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는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박영규(朴英規)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순천(順天)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으나,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숙정(淑貞)을 일세조(一世組)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 시조 박영규(朴英規) 등 묘소가 실전된 선세조(先世祖) 8위(位)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북 청원군 강서면 비하리 원모단(遠慕壇)과 박영규와 1세조 박숙정(朴淑貞)의 단소.

순천 박씨(順天朴氏)는 문숙공파(文肅公派ㆍ朴錫命), 군수공파(郡守公派ㆍ朴肅命), 부정공파(副正公派ㆍ朴安命),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ㆍ朴柳星), 진사공파(進士公派ㆍ朴斗星), 승지공파(承旨公派ㆍ朴壽年), 경력공파(經歷公派ㆍ朴義蕃), 생원공파(生員公派ㆍ朴培源),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ㆍ朴增源), 판관공파(判官公派ㆍ朴壁源), 감사공파(監司公派ㆍ朴誠), 충정공파(忠正公派ㆍ朴彭年), 교리공파(校理公派ㆍ朴引年), 수찬공파(修撰公派ㆍ朴耆年), 박사공파(博士公派ㆍ朴大年), 검열공파(檢閱公派ㆍ朴永年), 전작공파(殿直公派ㆍ朴斯梯), 인의공파(引儀公派ㆍ朴得琴), 부위공파(副尉公派ㆍ朴成琴) 등 모두 19개의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숙정(淑貞)은 호는 죽계(竹溪)로 풍채와 위용(偉容)이 뛰어나 당세(當世)의 석학(碩學) 이제현(李齊賢)ㆍ안축(安軸)과 종유(從遊)하였다고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충숙왕 1년(1314년) 경상도 제찰사(慶尙道提察使)를 역임하였으며, 국자감 좨주(國子監祭主)로 천임되어 유생(儒生)들을 훈도(訓導)하다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로 나가서 1326년에 관동지방의 산수가 아름답고 경치 좋은 곳에 고성 사선정(四仙亭)ㆍ강릉의 경호정(鏡湖亭)ㆍ울진 취운루(翠雲樓)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다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는 추부학사(秋部學士)로 천임(遷任)되었다.

▲ 대전광역시 동구 대별동에 자리한 박원상(朴元象)의 묘(대전문화재자료 제42호).


숙정(淑貞)은 슬하에 아들 5형제를 두어 가문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였는데, 맏아들 원룡(元龍)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재주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근재(謹齋) 안축(安軸)에게 글을 배워 벼슬이 검교이부시랑(檢校吏部侍郞)을 역임하였으나,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벼슬을 버리고 영동(永同) 천마산 계곡으로 은거하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한편 막내 원상(元象)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고려시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으나 자세한 이력은 전하지 않으며,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의 증조부인 점으로 보아 고려 말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의 묘는 순천 박씨의 묘 중에서 후손에 의해 그 직계 선조의 묘임이 확인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원룡(元龍)의 아들 천상(天祥)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무과에 등제(登第)하고 벼슬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가흥(可興)과 함께 투옥되었으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적극 변호하여 참화(慘禍)를 모면하고 또 거짓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사건(眞僞事件)에 참여하여 이를 부인하다가 왕실무고죄로 죄좌(罪坐)되어 헌사(憲司)에서 극형에 처할 것을 청했는데 시중 이성계(李成桂)와 이림(李琳) 등이 적극 개입하여 석방되고 아들 가흥(可興)은 유배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조(太祖)가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경상도 가야산 죽백동(竹栢洞)에 은거하고 있는 셋째 아들 가권(可權)에게 한 때 의탁하고 있던 중 태조 6년(1397년) 헌사(憲司)에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지(李至)에게 가산몰수를 명하였으나 이지(李至)가 가산몰수를 사실대로 집행하지 않아 죄를 얻었으나 이듬해 태조(太祖)가 그를 사면하였다. 가흥(可興)ㆍ가실(可實)ㆍ가권(可權) 3형제를 두었다.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에 자리한 좌정승 박가흥(朴可興)의 묘.

천상(天祥)의 아들 가흥(可興ㆍ1347~1427)은 우왕(禑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으나, 우왕 14년(1388년) 이인임(李仁任)이 숙청당하여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되자 그에 연루되어 순천으로 귀양갔다. 공양왕 때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연루된 김종연(金宗衍)을 숨겨 주는 등, 이성계 제거에 협력하다가 붙잡혀 유배당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태종(太宗)의 지우(知遇)를 받아 평양군(平陽君)에 봉군되고 검교의정부 우찬성(檢校議政府右贊成)에 제수되었으며, 이어서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后司留后)로 세종(世宗)은 그를 검교의정부 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으로 높이었으나 치사(致仕)하였다. 세종 9년(1427년) 그가 죽자 조정은 철조(輟朝)하고 세종(世宗)은 예장(禮葬)을 명하고, 치제문(致祭文)에 지조(志操)를 지킨 누대(累代)의 원로(元老)로써 백성이 우러러본다고 애도하였다.

 

 

▲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에 자리한 성주 입향조 박가권(朴可權)의 청풍비와 가야산 동북쪽 태평동(봉양리와 만수리 경계) 계곡 상류 바위에 새긴 ‘不二門’.

가흥(可興)의 동생 가실(可實)은 계림병마절제사(鷄林兵馬節制使) 계림윤을 거쳐 판한성윤(判漢城尹)에 이르렀다. 우왕 14년(1388년) 요동정벌 때는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회군(回軍)에 참여하였고, 공양왕 때는 사직을 안전히 한 공로로 포상되었다. 또한 가선대부 판개성윤(嘉善大夫判開城尹)을 지낸 가권(可權)은 성주(星州) 입향조(入鄕祖)로, 아들 유성(柳星)은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낸 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민통선 안에 자리한 박가흥(朴可興)의 아들 문숙공(文肅公) 박석명(朴錫命)의 묘.

조선조에 와서는 가흥(可興)의 아들 석명(錫命ㆍ1370~1406)이 유명하다. 석명(錫命)은 호는 이헌(?軒)으로 우왕 11년(1385년) 문과(文科)에 급제, 공양왕 2년(1390년) 우부대언(右副代言)ㆍ병조판서를 지내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ㆍ공양왕의 아우)의 사위이기 때문에 화를 피하기 위해 7년간 은거했다. 정종 1년(1399년) 고려의 구신들이 등용되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기용, 안주목사(安州牧使)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禪位)하자 그 교서(敎書)를 가져가서 태종을 옹립했으며, 젊었을 때부터 태종과의 교분이 두터워 태종 1년(140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이 되어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그후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태종 5년(1405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듬해 함경도 선위사(咸鏡道宣慰使)ㆍ전라도 도체찰사(全羅道都體察使) 등을 역임하고 다시 지의정부사로 대사헌을 겸직했다. 평소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깊었는데, 특히 태종에게 황희(黃喜)를 승지로 천거한 것 등이 유명하다. 시호는 문숙(文肅).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에 자리한 양소공(襄昭公) 박중선(朴仲善)의 묘와 신도비.

석명(錫命)의 손자 중선(仲善ㆍ1435~1481)은 자는 자숙(子淑)으로 부지돈령부사(副知敦寧府事) 거소(去疎)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에 들어갔다가 부호군(副護軍)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임하고, 세조 6년(1460년) 무과(武科)에 장원해 훈련원 부사(訓鍊院副使)가 되었다. 이어 지훈련관사(知訓鍊觀事)ㆍ예빈시 소윤(禮賓寺少尹)ㆍ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ㆍ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ㆍ지병조사(知兵曹事)를 역임하고, 세조 9년(1463년) 병조참의(兵曹參議), 1466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구성군(龜城君) 준(浚)의 휘하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서 황해도 관군을 인솔하여 난을 진압한 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후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이어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재임되고, 예종 즉위년(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 성종 2년(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 되었다. 1477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79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소(襄昭).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송정리에 자리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의 아버지 박안생(朴安生)의 묘.

목사(牧使) 안생(安生ㆍ공조전서 원상의 아들)의 아들 중림(仲林ㆍ?∼1456)은 호는 한석당(閑碩堂)으로 세종 5년(142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이어 중시(重試)에 급제하고 집현전 학자(集賢殿學者)로 선임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특히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문종(文宗)이 세자로 있을 때 작은 실수라도 극간(極諫)하였고, 단종(端宗) 때 공조참판(工曺參判)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자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 팽년(彭年)ㆍ인년(引年)ㆍ기년(耆年)ㆍ대년(大年)ㆍ영년(永年) 5형제와 손자 헌(憲)ㆍ순(珣) 등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

세조(世祖)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던 세조 2년(1456년) 아버지 중림(仲林)과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도모했던 팽년(彭年)의 형제들은 형(刑)에 임하여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매 효에 어긋납니다’ 하니 중림(仲林)은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하지 못한 것은 효가 아니다’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

▲ (上)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유묵과 그를 제향하는 충남 논산군 연산면 청동리 충곡서원(忠谷書院). (中)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박팽년유허비(대전광역시기념물 제1호)와 충주시 신리면 신청리 박팽년 사우(충북기념물 제27호). (下)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묘역에 안장된 박팽년(朴彭年)의 묘.

중림(仲林)의 아들 팽년(彭年ㆍ1417~1456)은 자는 인수(仁수), 호는 취금헌(醉琴軒)으로 세종 16년(14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 29년(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臣)이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이듬해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서 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사형당했다. 뒤에 아버지와 동생들, 아들 헌(憲)도 사형당했다. 과천(果川)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

▲ 1775년 정려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과 1831년 정려된 아들 박순(朴珣), 손자 박일산(朴一珊) 등 3세가 정려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김양순(金陽淳)이 71주(州)의 수령들에게 경비를 거두어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삼충각(三忠閣).

한편 팽년(彭年)의 일가가 멸족될 때 둘째 아들 순(珣)의 아내 성주 이씨(星州李氏)가 임신 중이었는데, 나라에서는 이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아들일 경우 죽이라는 선고를 내렸다. 교동현감(喬洞縣監) 이질근(李?根)의 딸인 이씨 부인은 친정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사동(일명 못골)에 내려가 살다가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유일한 이 혈손을 보존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 충비(忠婢)가 딸을 낳자 서로 바꿔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자라났다. 이 아이가 장성한 후인 성종(成宗) 때 순(珣)과 동서지간이던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감사(慶尙道監司)로 내려와 울면서 자수를 권고시키자 16세의 소년은 한양(漢陽)으로 달려가서 왕에게 팽년(彭年)의 자손임을 고했다. 성종은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고 이름도 일산(壹珊)으로 고쳐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가문은 멸족(滅族)을 면하게 되었고, 그 후손이 오늘날의 묫골[妙洞] 박씨이다.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안골에 자리한 무열공(武烈公) 박원종(朴元宗)의 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주역인 원종(元宗ㆍ1467~1510)은 중선(中善)의 아들로 자는 백윤(伯胤)으로 무술에 뛰어나 음보(蔭補)로 무관직(武官職)에 기용되었고, 1486년(성종17)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무과(武科)에 급제해 선전내승(宣傳內乘)으로 오랫동안 왕을 측근에서 모셨다. 1492년 성종(成宗)의 특지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된 후 공조ㆍ병조의 참의(參議) 등을 거쳐 연산군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이어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도총부 도총관을 겸했다. 1506년 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이룩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이 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進封)이 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중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무열(武烈).

원종(元宗)은 무과(武科)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기는 신경진(申景色ㆍ평산 신씨 신립 장군의 아들)과 함께 역사상 두 사람뿐이다. 그는 신장이 9척이며 풍채가 의젓하였고,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윤여필(尹汝弼)의 처남으로 구속됨이 없었고 영웅 기질이 짙은 무인(武人)이었다고 한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의하면 그는 호방하였고 위선(僞善)을 하려고도 않았으며, 항상 공부하면서 겸손하였고, 중종은 대사(大事) 때마다 그의 의견을 꼭 물었다고 한다.

▲ 양부 박원종(朴元宗)에 의해 중종의 후궁이 된 경빈 박씨(敬嬪朴氏) 묘. 1509년 복성군(福城君)을 낳아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527년 김안로(金安老)가 조작한 ‘작서(灼鼠)의 변(變)’에 연루되어 1528년 복성군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사실이 밝혀져 신원(伸寃)되었으며, 바로 아래에 복성군의 묘가 있다.

▲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의 시문집인 ‘용담집(龍潭集)’.?

 

이장(而章ㆍ1540~1622)은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ㆍ도천(道川)으로 승지(承旨) 양좌(良佐)의 아들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선조 6년(1573년) 생원(生員)이 되고, 성균관(成均館)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1586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ㆍ예문관(藝文館)에 보직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계청으로 도사(都事)가 되어 활약, 이듬해 지평(持平)ㆍ지제교(知製敎)ㆍ이조정랑(吏曹正郞)ㆍ이조참판(吏曹參判)ㆍ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즉위년(1608년) 정인홍(鄭仁弘)의 배척으로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대사간으로 임명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樞館事)ㆍ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615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어 성주(星州)에서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마쳤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시(詩)에 뛰어났으며, 성주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술로는 ‘용담집(龍潭集)’ㆍ‘정서절요(程書節要)’ 등이 있다.



이장(而章)의 아들 공구(?衢ㆍ1587~1658)는 자는 자룡(子龍),호는 기옹(畸翁)으로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광해군 4년(161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15년에 봉사(封事)를 올렸다가 향리(鄕里)로 방축(放逐)되었으며, 이후로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로 등용되었으나 아버지와 형의 상을 계속해서 치르는 중이라 나아가지 않았으며, 뒤에 학행(學行)으로 교수관(敎授官)에 선발되어 시강원(侍講院)에 나아갔으나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인조가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대한 교수(敎授)를 위해 각 도에 문행(文行)을 구비한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을 때 추천을 받아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얼마 후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후 병자호란 때 국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낙동강가에 은거하였으며, 문집으로 ‘기옹집(畸翁集)’이 있다.

▲ 기옹(畸翁) 박공구(朴?衢)의 시문집인 ‘기옹집(畸翁集)’.

광일(光一ㆍ1655~1723)은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상현(尙玄)의 아들이다. 23세 때 아버지와 친교(親交)가 있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유배지로 찾아가서 성현(聖賢)의 길을 배웠는데, 우암은 그를 가리켜 치수불루(置水不漏ㆍ물을 두 어도 새지 않는다. 즉 치밀하고 반듯하다)라고 극찬하였다. 30대에 기사사화(己巳士禍) 등이 일어난 난세(亂世)가 싫어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을 시골에 살면서 학문과 도의를 넓히는데 힘썼다. 숙종 27년(1701년) 송시열의 천거로 내시교관(內侍敎官)ㆍ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ㆍ왕자사부(王子師傅)ㆍ시강원 자의(侍講院 諮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숙종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광주(光州) 진천사(眞泉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



이현(而絢ㆍ1544~1592)은 자는 여수(汝粹)로 참봉(參奉) 대영(大榮)의 아들이다. 조식(曺植)과 오건(吳健)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며, 1592년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합세해 성주(星州)의 가천(伽川)과 무주(茂州)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대교평(大橋坪)에 이르러 전사하니, 후에 공조판서에 가증(加贈)되고 성주(星州) 덕봉사(德峰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
▲ 의민공(毅愍) 박이현(朴而絢)과 아들 충장공(忠壯公) 박영서(朴永緖) 부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충남 논산시 광석면 왕전리 정려각(上)과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동 충신문(忠臣門).

이현(而絢)의 아들 영서(永緖ㆍ?~1624)는 무신으로 자는 효원(孝源)이며, 무과 급제 후 광해군 12년(1620년) 옥구현감(沃溝縣監)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선봉장으로 남이흥(南以興)ㆍ정충신(鄭忠信)등과 함께 난을 토벌하게 되었는데, 황주(黃州) 신교(新橋)에서 반군과 싸우다가 말이 넘어져 포로가 되었다. 그는 이괄을 보고 “조정이 너를 부원군에 봉하고 부원수를 시켰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배반하였느냐.”고 꾸짖었으며,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은 그의 용기를 아껴 백방으로 회유하였으나 굴하지 않다가 살해되었다. 인조(仁祖)는 그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하였고, 정려(旌閭)를 세워 주었다. 시호는 충장(忠壯).



▲ 박팽년(朴彭年)의 아우 박인년(朴引年)의 후손인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1791년 정조의 어명으로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端宗祭)를 올리는 한식 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한 영천(靈泉). 보통 때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지만 매년 한식날 제사를 지낼 때는 물이 많이 솟아 올랐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기정(基正ㆍ1748~?)은 자는 일여(一如), 호는 벽오(碧梧)로 사육신 팽년(彭年)의 아우인 인년(引年)의 8세손으로 음보(蔭補)로 현감(縣監)을 지내다가 정조 8년(1784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교리(校理)ㆍ승지(承旨)를 거쳐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으며, 앞서 정조 20년(1796년) 왕명으로 이의준(李義駿)ㆍ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장릉지(莊陵志)’를 교정하여 ‘장릉사보(莊陵史補)’를 편찬하였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칙수미(勅需米) 관리소홀로 파면당하였다.

▲ (좌)민양공(愍襄公) 박춘무(朴春武)의 공적을 기리는 박춘무전장기념비. (우)박춘무(朴春武)와 아들 박동명(朴東命), 손자 박홍원(朴弘遠) 3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세운 박춘무삼대창의사적비.

기정(箕精)의 넷째 아들인 춘무(春武)는 호는 화천당(花遷堂)으로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에게서 배웠으며, 청주 읍성 탈환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옥천의 조헌(趙憲)도 박춘무(朴春武)와 함께 이지함에게서 배운 문인(門人)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趙憲)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하였으며, 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다. 뒤에는 지방관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임천군수(林川郡守)ㆍ인천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하고, 이듬해는 부평부사(富平府使) 등을 지낸 바 있어 관계(官階)가 가선(嘉善)까지 이르렀다. 참찬(參贊)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화천당집(花遷堂集)’이 있다. 시호는 민양(愍襄).



 

 

 

▲ (上)충북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충경공(忠景公) 박동명의 묘(의복을 묻었음)와 앞쪽의 의마총(義馬塚). (下)충북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박동명 충신각.

춘무(春武)의 아들 동명(東命ㆍ?~1636)은 자는 시응(時應), 호는 매은당(梅隱堂)으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참전, 항상 선봉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 40년(1607년) 선전관(宣傳官)으로 재직 중 패망(悖妄)하여 동료들을 욕되게 했다는 탄핵으로 파직, 뒤에 태안군수(泰安郡守)ㆍ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扈從)하던 중 무계(茂溪)에서 청나라의 군사를 만나 분전하다가 죽었다. 고향에 충신(忠臣)의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

충북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 의마총(義馬塚)은 병자호란 때 전사한 박동명(朴東命)이 타고 다녔던 말의 무덤이다. 기록에 따르면 박동명이 청나라군의 화살에 맞아 숨지자 말이 그의 저고리를 입으로 물어 뜯어 안장에 올려놓았다 한다. 시신을 찾아 헤매던 휘하의 김득성(金得成)이 말을 발견하고 박동명의 혼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박동명의 혼이 구천으로 돌아가자 말이 그 자리에서 7일을 서 있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 말무덤을 만들고, 그때부터 이곳을 ‘말굽이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뜻으로 ‘접지고개’ 또는 ‘접지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 충경공(忠景公) 박동명(朴東命)의 묘 아래 자리한 의마총(義馬塚).

그외에 선조(宣祖)의 특혜로 소격서 참봉(昭格書參奉)에 등용된 계창(繼昌ㆍ일산의 후손)과 임진왜란에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른 충후(忠後),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功)을 세운 민웅(敏雄ㆍ1674~1732)은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인 순천 박씨(順天朴氏)를 더욱 빛냈다.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