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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무안 박씨(務安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무안 박씨(務安朴氏)의 시조(始祖) 진승(進昇)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인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의 5세손이다. 그는 고려(高麗) 초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지냈으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무안(務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정착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전주 박씨(全州朴氏)에서 분적(分籍), 그를 시조로 하고 무안(務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의 묘는 실전(失傳)되어 전남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에 경기묘(景基廟)를 세워 시조 진승(進昇) 이하 15위(位)의 제향을 드리고 있다.

 ▲ 시조 진승(進昇)을 주벽으로 12세까지 15위(位)를 제향하기 위해 1965년 건립해 1979년 중건한 전남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 경기묘(景基廟).

무안 박씨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문과급제자 21명과 공신 1명을 배출했는데 문과급제자 21명은 박씨 중에서 본관별로 일곱 번째 가는 숫자이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 진승(進昇)의 아들 섬(暹)이 고려 현종(顯宗) 초에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냈으며, 현종 2년(1011년)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로 있을 때 거란병이 침입하여 청수강(淸水江ㆍ지금의 淸川江)에 이르자 성을 버리고 도망한 관계로 주민이 모두 흩어졌다. 다음해 안북(安北)으로부터 개경에 돌아와서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인 무안현으로 돌아가던 중, 거란의 침입으로 피난길에 오른 왕의 행차를 만나 나주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왕을 하직하고 무안으로 돌아갔다가 거란군사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와서 왕을 알현하자, 사재경(司宰卿)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장작감(將作監)이 되었으며, 뒤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올랐다. 거란 침입 때 왕을 호종한 공로가 현저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동안 변함없는 절개로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이유로 문종 6년(1052년) 초상이 능연각(凌煙閣)에 게상(揭上)되었다.


 

섬(暹)의 증손(曾孫) 승중(昇中)은 자는 자천(子千)으로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 상안부 녹사(常安府錄事)를 거쳐 중서주서(中書注書)가 되었다. 예종(睿宗) 때 한림시독 학사(翰林侍讀學士)가 되었다가 이재(李載)ㆍ박경작(朴景綽)ㆍ김황원(金黃元) 등과 함께 상정관(詳定官)으로 예식(禮式)을 정했고, 예종을 도와 청연각(淸燕閣)ㆍ보문각(寶文閣) 등에서 학문을 연구해 이재(李載) 등과 함께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찬진(撰進)했다. 1122년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권신(權臣) 이자겸(李資謙)에게 아부하여 일약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인종 4년(1126년) 이자겸(李資謙)이 죽자 울진(鬱珍)으로 유배되었으나, 문명(文名)이 높고 공이 컸으므로 무안현(務安縣)에 양이(量移),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 박문오(朴文晤)가 낙향하여 지은 전남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 유산정(遊山亭)은 정유재란 떄 소실되어 1879년 후손 사간(司諫) 박기종(朴淇鍾)이 중건하였으며, 유산정 유적비(전남문화재자료 제253호)는 1896년 세웠다. 

 

 

 

 

섬(暹)의 6세손 문오(文晤ㆍ1258~1358)는 호는 면남(綿南)으로 ‘면성읍지(綿城邑誌)’에 “박문오는 고려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승(政丞)에 이르렀고 적을 토벌한 공으로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무안읍에 정자를 지어 유산정(遊山亭)이라 하였고, 못을 파서 생선지(生鮮池)라 하여 그곳에서 소요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안의 병산사(柄山祠)에 제향되었으며, 그 자손들은 한동안 면성 박씨(綿城朴氏)라 하기도 했다. 그의 아우 문정(文正ㆍ1270~1370)은 국자감 중시에 61인 중 장원급제로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라 고려팔만대장경창제공신(高麗八萬大藏經創製功臣)이 되었다.

 ▲ 1778년 풍정(楓亭) 박의룡(朴義龍)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전남 무안군 무안읍 고절리 병산사(柄山祠)는 1868년 훼철되어 1946년 복설했으나 1987년 현위치에서 약간 남쪽에 콘크리트 건물로 중건해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 박문오(朴文晤)를 주벽으로 박의룡ㆍ박익경ㆍ박증 등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문오(文晤)의 증손인 의룡(義龍ㆍ1330~1430)은 호는 풍정(楓亭), 우왕 14년(1388년)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냈으며, 이성계와는 왕이 되기 전부터 친교가 있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開國功臣)에 녹훈(錄勳), 호조(戶曹)ㆍ병조(兵曹)ㆍ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태조 7년(1398년) ‘개국공신 수충입공(開國定社輸忠立功)’이라는 8자의 어제(御題)를 하사받았으며, ‘국조실록(國朝實錄)’에 “개국공신에 등록된 사람이 39명이다. 박의룡 등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주어 대대로 녹이 끊기지 않게 하며, 병이 나면 약을 보내어 구호하며 죽으면 예절로써 후히 장사지내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증조부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이 살았던 무안에서 살았으며, 선비들의 발의로 1778년 무안(務安) 병산사(柄山祠)에 제향되었다. 


 

 ▲ 경기도 양주시 진접읍 팔야리 박이(朴頤)의 묘. 그의 아들 5형제가 함양파(咸陽派)ㆍ개부파(開府派)ㆍ노성파(魯城派)ㆍ무안파(務安派)ㆍ군수공파(郡守公派)ㆍ경파(京派)로 분파되어 무안 박씨의 대종을 이룬다.

 

 

 

 

이(頤ㆍ1402~1478)의 아들 5형제는 함양파(咸陽派)ㆍ개부파(開府派)ㆍ노성파(魯城派)ㆍ무안파(務安派)ㆍ군수공파(郡守公派)ㆍ경파(京派)로 분파되어 무안 박씨의 대종을 이룬다. 그중 무안파(務安派)의 파조(派祖)인 익경(益卿)은 자는 필보(弼甫), 호는 애한정(愛閒亭)으로 문장(文章)과 경학(經學)에 뛰어났다. 장인인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유응부(兪應孚) 등과 도의적인 교우(交友)로 효행이 출중하여 단종(端宗) 때 정릉참봉(定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세조 원년(1456년) 단종복위사건이 실패로 끝나자 사육신의 시신을 김시습(金時習) 등과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어 주고 무안으로 내려와 은거했으며, 세조가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카인 정간공(貞簡公) 호(壕)가 전라도백(全羅道伯)으로 있을 때 찾아뵙고자 했으나 ‘그대는 조정 고관으로 있고 나는 하향에 사는 미천한 사람이니 출처가 같지 않다’라 하고 거절하며 접견하지 않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그 절개를 찬양하여 그 동네 이름을 고절리(高節里)라 불렀다. 매일 시골 제자들과 같이 경전(經典)의 뜻을 강의하고, 풍정공(楓亭公) 의룡(義龍)이 옛날 노닐던 유산정(遊山亭)과 생선지(生鮮池)에서 풍월을 읊었으며, 마을에 정자를 짓고 애한정(愛閒亭)이라 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 무안의 병산사(柄山祠)에 배향되었다.

 ▲ 박이(朴頤)의 아들로 무안파(務安派)의 파조(派祖)인 애한정(愛閒亭) 박익경(朴益卿)의 묘와 재사인 영모재(永慕齋).

익경(益卿)의 아들 증(增ㆍ1461~1517)은 호는 암천(巖川)으로 성삼문의 딸인 어머니 창녕 성씨가 친정일로 홧병을 얻어 긴 세월을 자리에 누운 일로 인해 세상에 뜻을 접은 뒤 처사(處士)로 일관하다 148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경기도 양주에서 계룡산 아래 충남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 바우내로 옮겨와 은거하였다. 광해군 14년(1622년) 형조참의, 인조 7년(1627년) 호조참판 겸 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문중에서 1992년 암천사(巖川祠)를 창건하여 배향하고 있다.
 

 ▲ 충남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에 자리한 암천(巖川) 박증(朴增)의 묘와 그를 제향하는 암천사(巖川祠).

조선 중기 일본어 역관(譯官) 대근(大根)은 자는 현구(玄久)로 임진왜란 때 적군의 동정을 정찰한 공으로 서부참봉(西部參奉)이 되었고, 이때부터 왕명으로 도요또미(豊臣秀吉)의 사신을 자주 만나 능(陵)을 범한 적을 색출케 하는 등의 공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특진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사신을 따라 일본에 갔으며, 또 선위사(宣慰使)를 따라 부산에 가서 포로로 잡힌 수천 명의 남녀를 쇄환(刷還)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무안 박씨 영해파 입향조인 박지몽(朴之夢)의 아들 경수당(慶壽堂) 박세순(朴世淳)이 1570년 99칸 규모로 건립한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경수당종택(慶壽堂宗宅ㆍ경북유형문화재 제 297호)은 장증손 박문약의 실화로 1668년 소실되어 1713년 현 규모로 중건된 것이다.

 

 

 

 

세순(世淳ㆍ1539~1612)은 자는 공검(公儉), 호는 경수당(慶壽堂)으로 1599년 무과(武科)에 급제, 내섬시 봉사(內瞻寺奉事)를 역임하였다.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판관(慶州判官)인 조카 의장(毅長)에게 사재(私財) 양곡 800석을 주어 군량미와 전란에 고충을 겪는 난민 구휼에 충당하게 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선되었고, 이후 절위장군(折衛將軍)ㆍ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 이르렀다. 용양위부호군(龍陽衛副護軍)의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공조참의(工曹參議)의 추증되었다.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무의공 종택에 보관된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의 실기(實記)인 ‘관감록(觀感錄)’과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816년 화강암으로 만든 경북 경주시 황성공원 박무의공비(朴武毅公碑).

의장(毅長ㆍ1555∼1615)은 자는 사강(士剛), 현감(縣監) 세렴(世廉)의 아들로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인이다. 선조 10년(1577년) 무과(武科)에 급제, 주부(主簿)ㆍ진해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慶州判官)이 되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박진(朴晋)과 함께 경주성 탈환작전에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1593년에는 대구와 울산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당상관으로 특진되면서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고, 안강(安康)ㆍ양산(梁山)ㆍ임랑포(林浪浦)ㆍ기장(機張)ㆍ경주ㆍ영천 등지에서 왜병을 무찔렀다. 1600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1601년 인동부사(仁同府使), 1602년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公洪道水使)를 거쳐 경상수사를 지냈다. 그는 50여 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으며,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추증(追贈)되었다. 영해(寧海) 정충사(貞忠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무의(武毅). 


 

 ▲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을 제향하는 경북 영덕군 창수면 수리 무안 박씨 영덕종택(경북유형문화재 제234호)과 신도비각.

의장(毅長)의 아들 선(璿ㆍ1596~1669)은 자는 계헌(季獻), 호는 도와(陶窩)로 어려서부터 문명을 날렸으며 유진(柳袗)ㆍ장현광(張顯光)을 사사하였다. 의지가 강직하여 벽에는 ‘궁불실의(窮不失義)’라는 자경문 4자를 써두고 경성(警省)하였으며, 인조 7년(1629년) 도백(道伯)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죽은 뒤 후인들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계사우(陶溪祠宇)를 창건하여 향선생(鄕先生)으로 봉향하였다.  


 

 ▲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의 4남 박선(朴瑄)이 맏형 박유(朴鍮)를 위해 1644년 건립한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무안 박씨 무의공파 종택(경북민속자료 제74호)에는 박의장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이 있다.

 

의장(毅長)의 아우 홍장(弘長ㆍ1558∼1598)은 자는 사임(士任)으로 본시 무관이었으며 일찍이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쳐 선조 29년(1596년)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있을 때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 황신(黃愼)과 더불어 강화의 중책을 띠고 일본에 갔다.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조선 사절을 멸시, 국서에 답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굴함이 없이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돌아온 뒤 가자(加資)되었다. 그해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임명된 기록이 보이나 부임한 사실이 없고, 사후에 형 의장(毅長)과 함께 영해(寧海) 구봉정사(九峰精舍)에 제향되었다.

 ▲ 경북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에 자리한 박홍장(朴弘長)이 살던 목사공 종택(牧使公宗宅ㆍ경북문화재자료 제320호)은 1570년 세워졌으나 1720년 건물 일부가 소실되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만 남아 있다.

선장(善長ㆍ1555~1616)은 자는 여인(汝仁), 호는 수서(水西)로 아버지는 북평사(北評事) 전(全)이다.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 때 어머니를 따라 경상도 영주에 있는 외가에 내려가 그의 사부이자 장인이기도 한 남몽오(南夢鰲)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38년(1605년) 50세의 늦은 나이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광해군 즉위년(1608년)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다. 광해군 6년(1614년)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다음해 노모 봉양차 고향에 돌아와 후진교육과 저술에 힘썼다. 죽은 뒤 봉화군의 구만서원(龜灣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수서(水西) 박선장(朴善長)의 어머니 신안 주씨가 자제교육에 대해 열성을 가지고 가문을 번성시켰음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경북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몽화각(夢花閣ㆍ경북문화재자료 제155호)과 박선장의 시문집.

 ▲ 수서(水西) 박선장(朴善長) 등 4현(賢)을 제향하기 위해 1676년 세운 경북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구만서원(龜彎書院ㆍ경북문화재자료 제154호)은 1868년 훼철되어 1967년 복원하였다.

 

▲ 무령군(務寧君) 박상(朴瑺) 영정.  

 

상(瑺ㆍ1582~1634)은 자는 중헌(仲獻)으로 선조 28년(1600년) 무과에 급제하여 경주판관(慶州判官)ㆍ철산군수(鐵山郡守)ㆍ훈련원 도정(訓練院都正)을 거쳐 광해군 때 길주목사를 지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무령군(務寧君)에 봉해졌다. 충청ㆍ전라ㆍ경상좌·우도ㆍ함경도 등 6도 병마사(兵馬使)와 정주목사(定州牧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상병마사 때는 염초(焰硝ㆍ화약) 굽는 기술을 널리 보급하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염초를 비축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병자호란 때에는 장만(張晩)의 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인조 6년(1628년)에는 관직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이르렀고 사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인(璘)은 자는 중온(仲溫), 호는 남촌(南村)으로 현령(縣令) 인호(仁豪)의 아들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음보(蔭補)로 익위(翊衛)가 되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평양(平壤)에 호종(扈從)하여 검찰종사관(檢察從事官)이 되었다. 평양이 함락된 뒤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이 되었으며, 군사를 따라 개성(開城)에 이르러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가 되어 전시의 격무에 시달리다가 병사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숙종(肅宗) 때 시인(詩人)으로 학명(學名)이 높았던 창하(昌夏ㆍ1623∼1702)는 자는 하경(夏卿), 호는 여락당(余樂堂)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명성이 있었고,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대과(大科) 준비를 하다가 부모가 죽은 후에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숙종 18년(1692년) 나이 70이 되어 노인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동강(桐江)의 산수를 좋아하여 집을 짓고 여락당(余樂堂)이라 하였으며, 시에 능해 고율시(古律詩) 500여 편을 남겼다. 벼슬은 용양위부호군(行龍衛副護軍)에 이르렀고,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경기도 양주시 진접읍 진평에 자리한 무령군(務寧君) 박상(朴瑺)의 묘.

창하(昌夏)의 아들 징(澄ㆍ1648~1731)은 자는 징지(澄之)로 숙종 7년( 168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90년 정언(正言)을 거쳐, 1692년 장령(掌令)을 역임한 뒤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이르렀다.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 취죽헌(翠竹軒) 박백응(朴伯凝)을 비롯한 해남 선비 여섯 분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전남 해남읍 해리 해촌서원(海村書院)은 1868년 훼철되어 1997년 이축하였다.

그밖의 인물로 백응(伯凝)은 자는 혼원(混元), 호는 취죽헌(翠竹軒)으로 명종(明宗) 때 진원현감(珍原縣監)을 역임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부춘동(富春洞)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도욱(道郁ㆍ1681년∼?)은 자는 비연(斐然), 호는 치암(痴菴)으로 주부(主簿) 성서(星瑞)의 아들이다. 숙종 28년(1702년)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67위로 합격하였고, 영조 4년(1728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로 급제하여 벼슬이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 남포(南浦) 박정걸(朴廷杰)의 시문집인 ‘남포집(南浦集)’

정걸(廷杰ㆍ1683∼1746)은 자는 회영(懷英), 호는 남포(南浦)로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이현일(李玄逸)과 그의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栽)를 사사하여 학업을 쌓았으니, 판서 오시복(吳始復)이 ‘덕기(德器)’라고 칭찬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힘써서 향리(鄕里)에서 후진을 지도하며, 교화에 힘썼다. 효우(孝友)와 유행(儒行)이 있었으며, ‘남포집(南浦集)’이 있다.

 

 

 

 



 

 ▲ ‘맹인의 세종대왕’으로 일컬어지는 박두성(朴斗星)과 훈맹정음(訓盲正音).

 

 

 

 

근대에 와서는 맹인들을 위해 한글점자(點字)를 연구에 전생을 다바쳐 심혈을 기울인 두성(斗星ㆍ1888~1963)이 있는데, 그는 1906년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敎)를 졸업하고 어의동(於義洞) 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3년 제생원 맹아부(濟生院盲啞部ㆍ서울맹아학교의 전신) 교사에 취임, 맹인교육에 나섰다. 1920년 점자(點字) 연구에 착수하여 1926년 완성했고, 1935년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 한글 점자투표를 인정받았으며,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도 승인을 얻었다. 1941년 ‘신약성서(新約聖書)’를 완성, 1935년 제생원 교사에서 정년퇴직해 1936년 인천영화학교(仁川永化學敎) 교장으로 취임하여 1939년 사임했다. 한국전쟁으로 신약의 점자 아연판(亞鉛版)이 소실되자 다시 그 제작에 착수하여 1957년 성경 전서의 점역(點譯)을 완성했으며, 또한 기독교 신자로서 맹인들에게 전도와 교육을 시켜 ‘맹인의 은인’ㆍ‘맹인의 세종대왕’으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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