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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음성 박씨(陰城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음성 박씨(陰城朴氏)의 연원
 

음성 박씨(陰城朴氏)의 시조(始祖) 박서(朴犀)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11세손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박인석(朴仁碩)의 아들이다. 문헌에 의하면 고종 18년(1231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그해 9월 몽고의 장수 살리타이[撒禮塔]가 철주(鐵州)를 거쳐 구주(龜州)에 이르자, 삭주(朔州)의 분도장군(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靜州)의 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구주에 모여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몽고병이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자 기습작전을 써서 적을 물리쳤으며, 적이 인질을 성내로 보내어 항복을 권하기도 하고 정기(精騎)로써 성을 강습하기도 하였다. 또, 누거(樓車)와 목상(木床)을 만들어 거기에 병사를 태워 성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물리쳤고, 대포차로써 성을 맹렬히 공격하자 포차(砲車)를 쏘아 돌을 날려 적을 물리쳤다. 그리고 사람의 기름으로써 섶을 적셔 두텁게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자 물에 갠 진흙을 던져 불을 끄는 등 임기응변으로 분전함으로써, 1개월 동안 온갖 수단을 다하여 공격하던 적으로 하여금 “이 성은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니 하늘이 도우는 바요 인력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하였다.

▲ 시조가 박서(朴犀)가 아닌 아들 박재(朴梓)로 기록된 1792년 두 번째로 발간된 음성 박씨 세보.

?그해 12월 다시 몽고병이 구주성(龜州城)을 공격하자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적을 물리쳤다. 몽고 장수 살리타이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는 것을 거절하자 또다시 몽고군이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므로 대우포(大于浦:ㆍ大刀大兵)로써 맞아 쳐서 모두 깨뜨려 부수었다. 이때 몽고의 한 늙은 장수로 하여금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의 성지(城池)를 공전(攻戰)하는 것을 두루 보았으나, 일찍이 이렇게 공격을 당하고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보지를 못하였으니, 성중(城中)의 제장(諸將)은 후일에 반드시 모두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라고 감탄하게 하였다.

1232년 1월 후군지병마사(後軍知兵馬事) 최임수(崔林壽), 감찰어사(監察御史) 민희(閔曦)가 구주성에 이르러 “나라는 이미 회안공(淮安公)을 보내어 몽고병과 강화를 하였고, 우리 3군(軍)도 모두 몽고에 항복을 하였으니 너의 주(州)도 싸움을 그치고 항복하라.”라고 하므로 서너 차례 거절한 뒤 국법을 어길 수 없어 항복하였다. 그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죽주에 있다가 다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음성백(陰城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죽산 박씨(竹山朴氏) 철성백파(鐵城伯派)에서 분적(分籍)하여 박서(朴犀)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음성(陰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정승공파(政丞公派)ㆍ충민공파(忠愍公派)ㆍ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분파되었다.

▲ 충북 음성군 음성읍 삼생4리에 자리한 시조 박서(朴犀)의 묘.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박서(朴犀)의 아들 재(梓)가 고려조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역임했고, 손자 현계(玄桂)는 충숙왕(忠肅王) 때 전리총랑(典理摠郞)과 평해부사(平海府使)를 거쳐 정승 윤석(尹碩) 등과 함께 조적(曹 )의 난(亂)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공신(二等攻臣)에 책록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슬하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문서(文瑞)는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차남 문길(文吉)은 지군사(知郡事)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다. 조선 창업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던 순(淳)은 문길(文吉)의 아들이다.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사직리 이장산(利藏山)에 자리한 문하시랑(門下侍郞) 박문길(朴文吉)의 단소.??

순(淳ㆍ?~1402)은 우왕 14년(1388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종군,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우왕(禑王)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고양 황룡산 자락에는 그와 ‘함흥차사’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중 숙종 대에 좌의정을 지낸 문충공 민정중(閔鼎重)이 지은 문집 ‘노봉집(老峰集)’에 고양 황룡산 자락에 있는 용강서원(龍江書院)에서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순(淳)과 그의 부인 장흥 임씨의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 (上)시조 박서(朴犀)와 충민공(忠愍公) 박순(朴淳)을 모신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용강서원(龍江書院). (下)용강서원 뒤쪽에 자리한 박순의 단비와 장흥 임씨 묘.

골육상쟁의 피바람을 일으켜 여러 왕자(王子)를 죽이고 등극한 태종(太宗)의 패륜을 개탄하여 태조가 고향인 함흥(咸興)으로 내려가자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고 여러번 사자(使者)를 보냈으나 태조에게 보낸 문안사(問安使)가 한 사람도 돌아온 이가 없었다.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누가 갈 수 있는가” 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판승추부사(判承樞府使) 순(淳)이 자청해 갔는데, 하인도 딸리지 않고 스스로 새끼 달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 있는 곳을 바라보고 일부러 그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 어미 말을 타고 나아가니, 어미 말이 머뭇거리면서 뒤를 돌아보고 서로 부르며 울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태조를 뵈오매 태조는 말의 하는 짓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었더니, 그가 아뢰기를 “새끼 말이 길 가는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지친(至親)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 하고, 풍자하여 비유하니, 태조가 척연히 슬퍼하고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귄 옛 친구로서 머물러 있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하루는 태조가 순(淳)과 더불어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그 새끼를 껴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순(淳)이 다시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이에 서울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순(淳)이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허락을 듣고 곧 그 자리를 하직하고 떠나니 태조를 따라와 모시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극력으로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이미 건너갔으리라고 생각되므로 사자에게 칼을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미 강을 건넜거든 쫓지 말라” 했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병이 나서 중도에서 체류했다가, 이때에 겨우 강에 도달해 배에 오르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으므로 그 허리를 베였다. 그 때에 ‘반은 강속에 있고 반은 배속에 있다(半在江中半在船))’ 하는 시가 있었다.

태조가 크게 놀라 애석하게 여겨 이르기를, “순(淳)은 좋은 친구다. 내가 마침내 전날에 그에게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드디어 서울에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태종은 순(淳)의 죽음을 듣고 곧 그의 공을 생각하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고 또 화공에게 명하여 그 반신을 그려서 그의 공(功)을 치하했으며, 관직(官職)과 토지를 내리는 한편 자손을 벼슬에 등용하였다.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任氏ㆍ대사헌 임헌의 딸)에게는 열녀(烈女)의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 박순(朴淳)의 충절과 부인 장흥 임씨의 열행, 박호원(朴浩遠)과 박정규(朴廷珪)의 효행 등 음성 박씨 4인을 기리기 위해 1686년 세워 1910년 현위로 이건한 충북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 충민묘(忠愍廟ㆍ음성군향토유적 제12호).

 

 

한편 순(淳)의 아우 정(淨)은 세종(世宗) 때 직제학(直提學)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시호(諡號)는 문익(文翼)이며, 순(淳)의 아들 소(昭)는 좌승지(左承旨)로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했다가 형을 받았다. 순(淳)의 손자로 병조참판 흔(昕)의 아들인 숙진(叔秦)은 대사헌(大司憲)을, 숙무(叔楙)는 세종 때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숙달(叔達)은 성종(成宗) 때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에 자리한 충민공(忠愍公) 박순(朴淳)의 장남 박소(朴昭)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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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에 자리한 충민공(忠愍公) 박순(朴淳)의 차남 박흔(朴昕)의 묘.

숙진(叔?ㆍ1424~1481)은 자는 정지(挺之)로 순(淳)의 손자이며, 흔(昕)의 아들이다. 세종 29년(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단종 1년(145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조 1년(1455년) 권지정자(權知正字)로 벼슬에 나아가 12월에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오위사용(五衛司勇)을 거쳤다. 세조 11년(1465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세조 13년(1467년)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있다가 성종 원년(1470년) 사은사 서장관(謝恩使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와 듣고 본 사안을 복명하였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9년(1478년) 좌승지(左承旨), 9월에 도승지에 승직되어, 11월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랐다. 성종 10년(1479년) 5월 대사헌(大司憲)으로 폐비 문제를 거론하여 추국당하고 체직(遞職)되었다가 복직되었으며, 8월에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는데 성종 12년(1481년)에 임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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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음성군 삼성면 상곡리에 자리한 목사공파 파조 박숙무(朴叔楙)의 묘.

숙진(叔?)의 동생 숙무(叔楙)는 세조 8년(1462년) 추장문과(秋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1465년 사관으로 경연에서 ‘논어(論語)’를 강하였다. 세조 13년(1467년) 12월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한 공로로 1469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고, 성종 2년(1471년)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를 지냈다. 성종 4년(1473년) 고양군수(高陽郡守)로 진휼(賑恤)을 잘 하여 우등으로 체임되었으며, 그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 1481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그후 성종 23년(1492년) 사도시 부정(司導寺副正), 성종 25년(1494년)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을 제향하는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 운리사(雲裏祠)와 이곳에 보관된 회재집(懷齋集) 목판.

참봉(參奉) 자회(子回)의 손자인 광옥(光玉ㆍ1526∼1593)은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로 명종 1년(54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나주(羅州)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고 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 등과 교유하였다. 선조 1년(156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고, 157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예조정랑ㆍ지평 등을 거쳐 밀양부사를 지냈으며, 1589년에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가 일어났을 때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죄로 삭탈관직당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무능을 탄핵했으며, 새로 감사에 부임한 권율(權慄)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재임하다가 죽었으며, 세칭 삼옥(三玉ㆍ얼굴·용모·이름)으로 일컬어져서 호남(湖南)의 선비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선조 35년(1602년) 나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의열사(義烈祠)와 운봉(雲峰)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고(懷齋遺稿)’로 전한다.

▲ 운봉현감 박광옥(朴光玉)이 1577년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을 기리는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세웠으나, 1945년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광복 후에 재건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자는 몽여(夢與), 호는 일소옹(一笑翁)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이이첨 일당의 전횡을 탄핵했던 지성(至誠)과 영조(英祖) 때 효행(孝行)으로 이름난 호원(浩遠)이 뛰어났으며, 호원(造遠)의 손자로 아산현감(牙山縣監)을 지낸 정규(廷珪)와 영조(英祖) 때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한 종언(宗彦ㆍ1716~?)은 순조조(純祖朝)의 정언(正言) 내양(來陽ㆍ1770~?)을 비롯한 ‘목도서설(木圖書說)’의 저자(著者) 준흠(俊欽)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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