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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강릉 박씨(江陵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강릉 박씨(江陵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婆娑王)의 35세손 박순(朴純)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강릉박씨세보(江陵朴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호가 석탄(石灘),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고려 명종 4년(117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보문각시어(寶文閣侍御)ㆍ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좌승선(左承宣)ㆍ한림학사(翰林學士)ㆍ중추원사(中樞院事)ㆍ남경유수(南京留守)를 지낸 뒤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명종 17년(1187년) 남경유수(南京留守)로 병부상서(兵部尙書) 조원정(曺元正)과 상장군(上將軍) 석린(石隣)의 모반(謀反)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보정정국공신(保定靖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과 검교태부(檢校太傅)에 특제되었다. 신종(神宗) 때는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후에 치사(致仕)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니,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강릉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병오보(丙午譜)’에 보면, 강릉 박씨(江陵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婆娑王)에서 계출(系出)되어 5세손인 대아찬(大阿湌) 박제상(朴堤上)이 중조(中祖)가 되고, 900여 년 동안 실전(失傳)되어 박순(朴純)을 기세조로 한다고 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시조를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라 주장하면서 박제상(朴堤上)을 중조(中祖)로 하는 세보(世譜)도 있다. ‘계묘보(癸卯譜)’에서는 강릉 박씨(江陵朴氏)의 수보(修譜)는 숙종 42년(1716년)부터 220년 동안 7회에 걸쳐 모두 박순(朴純)을 1세로 삼아왔으니 의심스런 일은 의심스런대로 전한다고 하였다. 또 ‘정미보(丁未譜)’에는 ‘강릉읍지(江陵邑誌)’의 기사를 소개하면서 박씨는 모두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라 하였고, 김주원(金周元)이 신라가 망하고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올 때 박씨도 따라와 토사(土賜)로 하사받은 것이 득관(得貫) 유래라고 하였다.



 

 ▲ ‘병오보(丙午譜)’에 중조(中祖)로 기록된 박제상(朴堤上)을 제사지내기 위해 강릉 박씨 종친들이 1900년경 세운 강원도 강릉시 정동 경양사(鏡陽祠ㆍ강원도유형문화재 제59호)

 

그후 강릉 박씨(江陵朴氏)는 병사공파(兵使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이판공파(吏判公派), 사휴공파(四休公派), 평해공파(平海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삼가공파(三可公派), 농헌공파(聾軒公派), 가선공파(嘉善公派), 습독공파(習讀公派), 이정공파(梨亭公派), 사련공파(司鍊公派), 우산공파(愚山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박순(朴純)의 아들 희(希)가 고종(高宗) 때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내고 원종조(元宗朝)에서는 종성부사(鍾城府使)와 남경유수(南京留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그가 죽은 후 장사지낼 때 고을 백성들이 소복을 입고 함께 슬퍼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종태(從台)는 고종(高宗) 때 장사감무(長沙監務)와 남경판관(南京判官)을 거쳐 충렬왕 때 민부전서(民部典書)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 강릉지방의 인물 중 지방민들의 존경받는 분들을 모시기 위해 1645년 세운 강릉시 교동 향현사(鄕賢祠ㆍ강원도유형문화재 제8호)에는 박수량(朴遂良)ㆍ박공달(朴公達)ㆍ박억추(朴億秋) 세 분도 모셔져 있다. 창건 당시 건물은 1867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1995년 다시 지은 것이다.

한편 순(純)의 현손(玄孫) 지계(之桂)는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해 예부시랑(禮部侍郞)ㆍ서운관 부정(書雲館副正)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공민왕(恭愍王)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박상충(朴尙衷) 등과 함께 정사(政事)를 의논했으며, 공민왕이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 등에게 살해당한 후 9년간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정몽주(鄭夢周)의 천거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은거했다.



 

지계(之桂)의 아들 5형제 중 넷째 자검(自儉)은 1364년에 태어나 8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태조 1년(1392년) 문과에 합격하여 태종 때에는 지여연군사(知閭延郡事)와 권농병마단련사(勸農兵馬團練使), 세종(世宗) 때는 지단천군사(知端川郡事) 겸 안렴사(按廉使) 등을 지내면서 백성들에게는 덕을 세우는 데에 힘써서 백성들이 그의 송공(頌功)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자검(自儉)의 장남 중실(中實)은 군위현감을 지냈으며, 관직에 있으면서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자자했으나 후사가 없으며, 그의 아우 중신(中信ㆍ1360~1452)은 자는 숙립(叔立)으로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태종 17년(14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천ㆍ정선ㆍ단천ㆍ양양 교도(敎導)를 지냈으며, 세종 20년(1438년) 식년문과시(式年文科試)에 정과(丁科)로 합격한 후 흡곡현령(歙谷縣令)ㆍ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ㆍ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ㆍ사헌부 감찰ㆍ영흥판관(永興判官)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여묘살이를 하였고, 어머니가 연로하시자 강릉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 박중실(朴中實)의 아우 박중신(朴中信)이 1438년 문과에 합격한 통지서인 홍패(紅牌)교지(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6호).

중신(中信)의 아들은 무과에 급제한 후 승지가 된 시원(始元)과 무과에 급제한 후 승지와 북병사(北兵使)를 지낸 시창(始昌), 홍문박사(弘文博士)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한 시형(始亨),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ㆍ승정원 동부승지 부제학(承政院同副承旨副提學)ㆍ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시행(始行), 문과에 급제하고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지낸 시문(始文) 등 5형제가 중신(中信)과 함께 강릉시 운정동 모선재(慕先齋)에서 제향하고 있다.



 

 ▲ 박중신(朴中信)과 아들 5형제 및 박공달(朴公達)등 여덟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1993년 중수한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모선재(慕先齋).

 

 

 

 

자검(自儉)의 증손 공달(公達ㆍ1470~1546)은 자는 대관(大觀), 호는 사유당(四休堂)ㆍ사지(四止)로 아버지는 시행(始行)이다. 연산군 1년(1495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수신(修身)과 독서에만 힘썼다. 중종 11년(1516년) 충암(沖庵) 김정(金淨)이 금강산을 유람할 때 공달(公達)과 수량(遂良)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와서 만나 보고 그 사람됨에 탄복하여 조정에 적극 천거해 벼슬길에 올라 병조좌량(兵曹佐郞)과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를 각각 지내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림들에게 화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돌아와 경학강의를 하며 쌍한정(雙閒亭)에서 여생을 보냈다.

 ▲ 1794년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 박수량(朴遂良)의 시문집인 삼가집(三可集)에는 저자의 당숙 박공달(朴公達)과 저자의 조카 박억추(朴億秋)의 글도 수록되어 있다.

 

 

 

 

수량(遂良ㆍ1475∼1546)은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으로 승휴(承休)의 아들이다. 연산군 10년(150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연산군 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하였으나 그는 모친상을 당하자 선왕(先王)의 제도를 어길 수 없다 하여 3년 동안 최복(衰服)으로 여막에 살았으며, 중종반정 후에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중종 11년(1516년) 김정(金淨)이 풍악산(楓嶽山)에서 오는 길에 그의 집을 방문하여 며칠을 머물다가 작별할 때 척촉장(躑躅杖ㆍ철쭉나무의 지팡이)을 선물하며 시를 지어 “깊은 산 층암절벽에 찬 서리 흰 눈을 겪은 가지일세. 가지고 와서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 이 마음 간직하게나.”라 하니, “참뜻을 잃을까 의심스러워 궁촌에 살고 있으나 곧은 성품 남몰래 간직했으니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리.”라고 화답하였다. 뒤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된 그는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용궁고을에는 송사가 많았으나 판단을 명석하고 빠르게 하여 적체된 송사가 없었다. 이어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지내고 중종 14년(1519년) 겨울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어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당숙인 공달(公達)과 쌍한정(雙閑亭)에서 시와 술과 담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 ‘삼가집(三可集)’이 있다.

 ▲ (上)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에 자리한 삼가정(三可亭) 박수량(朴遂良)의 묘. (下)1520년 박수량(朴遂良)과 당숙 박공달(朴公達)이 강릉시 사천면 방동리에 세운 쌍한정(雙閑亭)과 1508년 생시정문(生時旌門)으로 세워진 효자 박수량비(左).

 

수량(遂良)의 조카인 선무랑(宣務郞) 구량(久良)의 아들인 억추(億秋ㆍ1523~1590)는 ‘삼강행실’에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7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지낼 때 야생오리가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지성으로 구했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두 마리의 오리가 우물가 얼음에 내려 앉기에 돌을 던져 잡아 부친에게 올려 병을 고쳤다. 뒤에 또 다시 기절했을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 소생시켰고, 명종대(明宗代)에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명종 18년(1563년) 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되어 사옹원 참봉(司甕院參奉)이 되었다. 명종 21년(1566년)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있다가 영평군수(永平郡守)ㆍ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냈으며, 선조 13년(1580년)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 3개 군현의 관리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순조 8년(1808년)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 강원도 강릉시 박월동에 자리한 효자 박억추 정려각과 정려비.

 

 

 

 

그외 갑산부사(甲山府使)를 지낸 공수(公遂ㆍ평해군수 시문의 아들)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시룡(時龍ㆍ공수의 6세손)이 유명했고, 인순(仁淳ㆍ수량의 증손)은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여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당(棠)ㆍ종리(宗利ㆍ청풍부사 억추의 증손)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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