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박)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함양 박씨(咸陽朴氏)의 시조 언신(彦信)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속함대군(速咸大郡)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였으나 그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중엽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선(善)을 1세조로 하고, 속함(速咸)이 함양(咸陽)의 고호이므로 함양(咸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선(善)을 시조로 적은 곳도 있다.

 ▲ 경남 함양군 함양읍 이은리 영명재에 자리한 시조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의 설단비와 2~6세까지의 10위(位) 단비. 

 

함양 박씨는 고려조에 와서 매우 번성을 누렸는데, 선(善) 이후로 의종(毅宗) 때 인정(仁挺), 명종(明宗) 때 신청(信淸)ㆍ윤정(允禎) 등 3대(三代)에 걸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배출하였으며, 무장(武將)으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신유(臣蕤) 등이 뛰어났다.
 

 ▲ 경남 함양군 함양읍 이은리에 자리한 1세조 박선(朴善)의 묘는 한때 실전되었으나, 1703년 후손이며 스님인 사흘(思屹)이 이 근처를 지나다 숲속에 몯혀 있는 비석(尙書朴公善之墓)을 발견하여 묘를 찾게 되었다.

 

신유(臣蕤)는 고려 고종(高宗) 때 김경손(金慶孫)과 더불어 나주(羅州)에서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고, 슬하에 아들 6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6파(派)로 갈라졌는데, 이를 육지파(六之派)라고 한다.

 ▲ 함양 박씨 육지파(六之派) 분파도

육지파(六之派)는 검교군기소감(檢交軍器少監) 지문(之文)을 파조(派祖)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와 지빈(之彬)의 문원공파(文元公派), 지량(之亮)의 함양군파(咸陽君派), 지수(之秀)의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지온(之溫)의 어사공파(御史公派), 지영(之潁)의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등으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 중에서 문원공파(文元公派)와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가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자리한 중조4대사적비(中祖四代事蹟碑)와 단비.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함양군파(咸陽君派) 파조(派祖)인 지량(之亮ㆍ1229~1292)은 고려 원종 12년(1272년) 수로방어사(水路防禦使)로서 경상도를 방비했으며, 충렬왕 1년(1274년)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이 일본을 정벌할 때 도독사(都督使) 김방경(金方慶) 휘하의 지중군 병마지사(知中軍兵馬知使)로 참전하여 쓰시마섬[對馬島]을 공략하고 이키섬[壹岐島]을 쳐서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 관군천호(武德將軍管軍千戶)의 벼슬을 받았다. 그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ㆍ좌익만호(左翼萬戶)를 거쳐 삼사판사(三司判事)에 오르고, 동북면 병마사ㆍ경상·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15년(1289년)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합단(哈丹)이 쳐들어오자 좌군만호(佐軍萬戶)로서 이천(伊川)에 진을 치고 이를 물리쳐 공을 세웠다. 1291년 4월 이후 경북 의성군 가음면으로 내려와 시거(始居)함으로 의성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 경남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에 자리한 문제공(文齊公) 박충좌(朴忠佐) 설단과 유묵 및 그를 주벽으로 박눌(朴訥)ㆍ박손경(朴孫慶)을 제향하는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곡서원(金谷書院).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 장(莊)의 아들 충좌(忠佐ㆍ1287~1349)는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제일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 충숙왕 복위 1년(1332년) 문과(文科)에 급제,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갔을 때 폐신(嬖臣) 박련(朴連)이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것을 막다가 그의 참소로 무고를 당하여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감찰(監察)ㆍ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제수되어 경상도 염세(鹽稅)를 감독하게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내서사인(內書舍人)ㆍ밀직제학(密直提學)ㆍ개성부윤 등을 거쳐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충혜왕 복위 5년(1344년)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충목왕이 즉위하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었고, 이어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시강(侍講)하여 상을 받았다. 충목왕 1년(1345년) 정방(政房)을 복치(復置)할 때 찬성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으며,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순성보덕협찬공신(純誠輔德協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성품이 온화하고 검약하며 일생동안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시호는 문제(文齊).

 ▲ 2006년 대구에서 발견된  문제공(文齊公) 박충좌(朴忠佐)의 묘지명. 

 

인계(仁桂ㆍ?∼1376)는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에 침입하여 개경(開京)을 점령하였을 때, 전지문주사(前知文州事)로서 이듬해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에 수복경성1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그후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우왕 1년(1375년) 양광도 안무사(楊廣道按撫使)를 역임하였다. 1376년 왜구가 부여와 공주에 침입하니 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싸워 패전하자 양광도원수로 회덕감무(懷德監務) 서천부(徐天富)로 하여금 이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원조하지 않자 서천부를 처단하고, 연산(連山ㆍ지금의 논산) 개태사(開泰寺)에서 왜구와 싸우다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였다. 충의열사(忠義烈士)로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평소에 인심을 얻어 현장(賢將)이라 불리었다 한다.

 ▲ 경남 함양군 서상면에 자리한 함양군(咸陽君) 박인계(朴仁桂)의 설단(設壇)과 충남 연산에 자리한 박인계순국기적비.

습(習ㆍ?~1418)은 고려 우왕(禑王) 9년(1383년) 등과하여 조선 태조 원년(1392년) 의령현감(宜寧縣監), 정종 2년(1400년) 좌간의(左諫議)를 거쳐 태종 9년(1409년) 우간의(右諫議)를 지냈다. 1411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강원감사를 지내고, 이듬해 인녕부윤(仁寧府尹) 재직 당시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종 13년(1413년) 강원감사 재직시의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을 만들고 패를 지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장(杖) 70대에 처하여졌으며, 1415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1416년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로 임명되어 민무질사건(閔無疾事件)과 관련된 이지성(李之誠)을 심문하여 이에 연루된 하륜(河崙)을 국문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호조참판을 거쳐 1417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어 방간(芳幹) 등을 치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고, 1418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사(兵事)를 상왕(上王ㆍ太宗)에게 품의하지 않고 처리한 죄로 인하여 참수당하였다. 문종(文宗) 원년(1451년) 좌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찬성 김종서 등이 주청하여 곤남현(昆南縣) 관노(官奴)로 있으며 원망과 분을 품었다가 참형에 처해진 아들 의손(義孫)과 함께 신원(伸寃)되고 직첩도 환급받았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자리한 박습(朴習)의 설단(設壇).

 

▲ 토헌(土軒) 박초(朴礎) 유묵.  

 

초(礎ㆍ1367~1454)는 자는 자허(子虛), 호는 토헌(土軒)으로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공양왕 3년(1391년) 김자수(金子粹)ㆍ김초(金貂)ㆍ윤향(尹向) 등 척불론자(斥佛論者)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불교 배척의 상소를 올려 공양왕의 미움을 받아 김초와 함께 순군옥(巡軍獄)에 갇혀 사형받게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ㆍ정탁(鄭擢)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둥과(登科)하여 태종 4년(1404년) 좌헌납(左獻納)으로 있다가, 앞서 선공감승(繕工監丞) 재직시 관철(官鐵) 300근을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 장형(杖刑)을 받았다. 1413년 전라도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로 갔다가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417년 제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관물(官物)을 축재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하였다가 이어 의주목사가 되고, 1418년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이듬해 좌군절제사ㆍ전라도 수군도절제사ㆍ경상우도 수군처치사(慶尙右道水軍處置使)ㆍ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등을 지냈다.



 

1431년 강계절도사로 재직 중 침범해온 야인들과 싸우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직첩(職牒)을 삭탈당하였고, 전옥유사(典獄有司)에게 검거되지 않으려 하다 왕의 엄명으로 고신(告身)을 추탈당하였다가 뒤에 복관(復官)되었고. 이조판서(吏曹判書)ㆍ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중국ㆍ일본과의 외교활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인 박습(朴習)과 함께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여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힘을 다했다. 시문(詩文)과 필법(筆法)에도 뛰어났고, 특히 세종(世宗) 때 북변에 여진(女眞)의 잦은 침입으로 경원부(慶源府)를 남쪽 용성(龍城)으로 옮기려 하자 이를 단호히 반대하여 국토가 좁아드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



 

성양(成陽)은 호는 금은(琴殷), 중랑장 윤후(允厚)의 아들로 정몽주(鄭夢周)의 문인(門人)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서 문소현(聞韶縣ㆍ지금의 경북 의성) 봉두산(鳳頭山)에 은거하여 세상에서는 28은(隱)의 한 사람으로 칭하였다. 태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남쪽 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조정에서 그를 원수(元帥)로 천거하자 배명(拜命)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뒤 보덕(輔德)ㆍ좌장사(左長史)ㆍ우장사(右長史) 등에 임명되었고, 태종이 즉위하자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ㆍ함경도 북영병마사(咸鏡道北營兵馬使)를 역임하였다. 세종 1년(1419년) 왜구들이 다시 출몰하자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가 되어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한 공으로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승진되었고, 그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참판과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등을 지냈다. 의성 명곡서원(明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금은실기(琴殷實記)’ 1책이 있다. 시호는 정헌(正憲).



 

 ▲ 정헌공(正憲公) 박성양(朴成陽)을 제향하기 위해 1818년 창건했으나 1868년 훼철되어 1975년 복원한 경북 의성군 가음면 양지리 명곡서원(明谷書院).

안(安)은 중추원사(中樞院事) 신(信)의 아들로, 고려말 왜구를 수 차례 격퇴한 공으로 경기도 연해절제사(京畿道沿海節制使)가 되었으며, 창왕 1년(1389년) 원수(元帥)로서 박위(朴葳)와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포로가 된 고려인 100여 명을 구출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종 2년(1400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태종 8년(1408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서 전라·충청·경기도 수군도체찰사(水軍都體察使)를 겸하였다.



 

안(安)의 아들 실(實ㆍ?∼1431)은 초명(初名)은 의중(宜中)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실(實)이 어릴 때 그의 아버지 안(安)이 전라도의 도안무사(都按撫使)로서 항복한 왜적들을 처리하였는데 그때 왜인에게 군사기밀을 알리는 말을 하였다고 하여 태조(太祖)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斬刑)을 받게 되었다. 이때 실(實)이 경비가 삼엄한 궁궐 안에 잠행하여 태조(太祖)의 대전 앞에서 뒹굴며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태조는 실(實)의 효행에 감동하여 구명사절을 보내어 형이 집행되는 순간에 안(安)이 구명되었고, 태종이 그를 금려(琴旅ㆍ近衛兵)로 채용해 벼슬길에 올라 태종 2년(1402년) 전농시정(典農寺正)이 되고, 1414년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1417년 경상도 수군도절제사에 임명되고, 뒤에 대마도정벌에 좌군 도절제사로 참가하였다. 세종 6년(1424년) 도총제(都摠制)가 되어 그 해 하정사(賀正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26년 전라도 수군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가 되어 황해안에 출몰한 왜선을 격파하고 왜적 17급(級)을 베어 어의(御衣) 한 벌을 하사받았다. 1428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가 죽자 세종은 2일간의 철시를 명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



 

 ▲ 경북 예천군 용문면 대저리 미산재(未山齋)에 소장된 함양 박씨 5대의 한문초서일기인 ‘저상일월(渚上日月ㆍ보물 제1008호)’은 1834년 박득령(朴得寧)이 시필한 이후 아들ㆍ손자ㆍ증손ㆍ고손을 거쳐 1950년 끝을 맺었다.

충좌(忠左)의 6세손 영문(永文ㆍ?∼1513)은 전한(典翰) 휘(輝)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해 처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무과에 급제, 무관으로 진출해 연산군 때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냈다. 중종반정 때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킨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며,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總府都總管)ㆍ평시서제조(平市署提調)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중종 5년(1506년) 경상도 도순찰사(慶尙道都巡察使)로 있다가 유순정(柳順汀)을 따라 부원수(副元帥)로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평정한 공으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간관(諫官)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문신들에게 원한을 품고 신윤무(允武)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을 비방했다. 이를 의정부(議政府)의 종 정막개(鄭莫介)가 엿듣고 반역을 모의한다고 고발, 1513년 대역죄로 사형되고 아들들도 모두 교살당했다.



 

영문(永文)의 형 영창(永昌)은 연산군 9년(1503년) 감찰(監察)로 있으면서 종친계후노비(宗親繼後奴婢ㆍ종친에 소속된 노비의 자손)의 속공(屬公ㆍ국가에 귀속됨)에 반대하였고, 1505년 김포현령(金浦縣令)으로 있다가 내관(內官)과 족친(族親)으로서 궐내의 소문을 퍼뜨렸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중종반정이 일어남에 반정주동자의 한 사람이던 동생 영문(永文)의 권유에 따라 반정군(反正軍)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천령군(天嶺君)에 책봉되어, 관직이 목사(牧使)에까지 이르렀다. 중종 8년(1513년) 동생 영문(永文)이 역모에 관련되어 죽음을 당하자 여기에 연좌, 중죄인으로 몰려 훈적(勳籍)에서 삭제되어 유배되었다. 1522년 아들 생원 유(瑜)의 호소로 죄가 풀려 났으며, 왕이 공신녹권(功臣錄券)까지 환급하고자 하였으나 대간(臺諫)의 반대로 삭훈(削勳)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 경기도 고양시 오금동에 합장된 생원(生員) 박중검(朴仲儉)의 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자리한 돈령부정(敦寧府正) 박세영의 묘와 신도비.

 

습(習)의 현손으로 생원(生員) 중검(仲儉)의 장남인 세영(世榮ㆍ1479~1552)은 호는 구당(九堂)으로 사헌부 감찰ㆍ공조좌랑ㆍ형조좌랑ㆍ예빈사 판관ㆍ형조정랑ㆍ돈녕부정(敦寧府正)을 지냈으며, 아들의 명성으로 인하여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자리한 소요당(逍遼堂) 박세무(朴世茂)의 합장묘와 그가 서당에 처음 입학한 아동을 위해 지은 ‘동몽선습(童蒙先習)’.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1759년 간행된 중간본만 전한다.

중검(仲儉)의 차남 세무(世茂ㆍ1487~1554)는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逍遼堂)으로 중종 11년(1516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중종 26년(15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기용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헌납(獻納)이 되었다. 중종 34년(1539년)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을 지내고 마전군수(麻田郡守)로 나가서 잘 다스렸으며,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ㆍ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ㆍ안변부사(安邊府使)ㆍ내자시정(內資寺正)ㆍ내섬시정(內贍寺正)ㆍ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당시 국정을 전단(專斷)하던 이기(李芑)가 불렀을 때 응하지 않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어 제자 가르치기를 즐겼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예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자리한 명헌(明軒) 박세옹(朴世蓊)과 숙부인 남양 홍씨 합장묘.

 

중검(仲儉)의 3남 세옹(世蓊ㆍ1493~1541)은 자는 경운(景雲), 호는 명헌(明軒)으로 성종 14년(151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되었다. 그 뒤 사학(史學)의 재능을 인정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봉교(奉敎)가 된 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내고 정언(正言)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ㆍ수찬(修撰)을 지내고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으며, 1533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가 1536년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거쳐 지평(持平)이 된 뒤 장령(掌令)에 승진하였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ㆍ사인(舍人)ㆍ응교(應敎)ㆍ필선(弼善)ㆍ보덕(輔德)ㆍ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ㆍ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539년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듬해 병조참의를 지내고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으며, 후에 둘째 아들 명립(明立)이 임진왜란에 선조(宣祖)를 의주로 호종한 공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資憲大夫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자리한 무위당(無違堂) 박대립(朴大立)의 묘(고양시향토유적 제20호).

 

세영(世榮)의 장남 대립(大立ㆍ1512~1584)은 자는 수백(守伯), 호는 무환(無患)ㆍ무위당(無違堂)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ㆍ양주교수(楊州敎授)ㆍ봉상시 참봉(奉常寺參奉)을 거쳐 형조좌랑에 승진하였다. 이 때 정실관계로 수십 년 묵은 송사(訟事)를 판서에게 항변하여 종결지음으로써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추천으로 지평(持平)이 되었고, 선조 즉위년(1567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그 뒤 대사간ㆍ함경도 관찰사ㆍ대사헌ㆍ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ㆍ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12년(1579년) 이조참판에서 형조판서에 특진, 이조판서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우참찬ㆍ호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선조 15년(1582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고, 이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뒤 다시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그는 기품이 장중하고 의지가 확고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고 가법이 엄정하였다. 또한 검소하여 청빈하게 살았으나 남을 돕기에 힘썼다.

 ▲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에 자리한 우승지(右承旨) 박사립(朴思立)의 묘.

세영(世榮)의 차남 사립(思立ㆍ1518~1545)은 우승지(右承旨)를 지내다 28세에 병으로 죽었으며, 세영(世榮)의 3남 희립(希立ㆍ1523~?)은 자는 양백(養伯)으로 명종(明宗) 13년(1558년) 대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ㆍ예문관 봉교(藝文官奉敎)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ㆍ예조정랑(禮曹正郞)ㆍ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있을 때 성절사로 명나라를 다녀온 공으로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판곡리에 자리한 박희립(朴希立)의 묘.

 

세무(世茂)의 장남 소립(素立ㆍ1514~1582)은 자는 예숙(豫叔)으로 명종 10년(155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556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된 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ㆍ수찬(修撰)ㆍ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563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며, 당시 명종(明宗)의 총애를 받던 척신 이량(李樑)이 술책을 써서 자기 아들을 전랑(銓郎)으로 추천한 일을 반대하다가 이량(李樑)과 친근한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복직되었다. 1567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재직하던 중 명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원상(院相) 이준경(李浚慶), 도승지 이양원(李陽元) 등과 함께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선조(宣祖)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선조 4년(157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자리한 박소립(朴素立)의 묘.

세무(世茂)의 차남 응립(應立ㆍ1517~1583)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ㆍ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ㆍ군기사 주부(軍器寺主簿)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호조좌랑(戶曹佐郞)ㆍ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ㆍ호조정랑(戶曹正郞) 등을 지내고 수안군수(遂安郡守)로 재임중 죽었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자리한 박응립(朴應立)의 묘.

세옹(世翁)의 차남 명립(名立ㆍ1531~1606)은 41세에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으로 출임하여, 감찰(監察)ㆍ판관ㆍ신천군수(信川郡守) 등을 거쳐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선조(宣祖)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선조 39년(1605년)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후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자리한 좌승지(左承旨) 박명립(朴名立)의 묘.

영창(永昌)의 손자 민헌(民獻ㆍ1516~1586)은 자는 희정(希正), 호는 정암(正菴)·슬한재(瑟?齋)·의속헌(醫俗軒)·저헌(樗軒)으로 좌랑(佐郞) 유(瑜)의 아들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종 1년(1546년) 사마시를 거쳐 같은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기용되었다. 곧 이어 예조좌랑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공조좌랑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뒤 병조좌랑ㆍ수찬을 지냈고, 155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해남현감(海南縣監)이 되었으나 1년만에 삭탈관직을 당하였다가 2년 뒤 다시 기용되어 지평(持平)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그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ㆍ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병조정랑ㆍ종경청도감(鍾磬廳都監) 등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서 삭탈관직당하였다. 10년 뒤 다시 기용되어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충주목사로 옮겼다. 선조 3년(1570년) 다시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고, 그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상호군(上護軍)ㆍ동지첨지부사 등을 지냈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기질 때문에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 등의 미움을 사서 여러 번 배척을 당하였고, 변방의 수령이 되었을 때 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낡은 병기를 보수하고 군대를 조련하는 등 무비에 힘썼다.

 ▲ 전남 영암의 죽정서원(竹亭書院)은 1681년 박성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61년 지방유림들에 의하여 복설되면서 설파(雪坡) 박승원(朴承源)이 추가 배향되었다.

 

승원(承源ㆍ1562~?)은 자는 계유(季悠), 호는 설파(雪坡)로 직장(直長) 대기(大器)의 아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함께 의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도 또다시 의병을 일으켜 임환(林懽)과 함께 적을 격파, 이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계원도유사(繼援都有司)가 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뒤 대북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자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 다시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75세의 노령으로 고향의 지사 조행립(曺行立)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였는데, 이흥발(李興浡) 등을 그 휘하에 거느렸다. 그러나 청나라와의 화친이 이루어지자 군사를 해산하고 영암(靈巖)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으며, 덕행(德行)이 보고되어 참봉(參奉)을 제수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영암 죽정서원(竹亭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충남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에 자리한 문목공(文穆公) 박지계(朴知誡)의 묘와 1766년 전라도 관찰사 원경순(元景淳)이 간행한 박지계의 시문집인 ‘잠야집(潛冶集)’.

지계(知誡ㆍ1573~1635)는 자는 인지(仁之), 호는 잠야(潛冶), 세무(世茂)의 손자로 군수 응립(應立)의 아들이다.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제천으로 피난하였다가 정유재란 때는 괴산에 우거하면서 어머니의 병환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선조 39년(1606년) 이조판서 허성(許筬)이 그를 왕자사부(王子師傅)로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광해군 1년(1609년) 옥당(玉堂)의 최현(崔晛)이 좌세마 겸 서연관(左洗馬兼書筵官)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뒤 정신(廷臣) 가운데 광해군의 생모에게 비호(妃號)를 올리자는 주장이 있자 호서(湖西)로 거처를 옮기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인조 1년(1623년) 인조반정 후 왕의 부름으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받았으며, 조정의 중신들과 예론에 관한 의견이 대립되어 남양(南陽)에 우거하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내려가 왕을 호종하였다. 수복 후 김장생(金長生)과 같이 서울로 돌아와서 양민치병(養民治兵)의 계책을 상소하였으며, 또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수창(首唱)하기도 하였다. 아산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



 

 ▲ 평상복 차림에 머리에는 검은색 와룡관을 쓰고 푸른색 학창의 입은 만오(晩悟) 박경후(朴慶後)의 원래의 영정(향토유적 제30호)과 복원된 영정 및 유묵.

 

경후(慶後ㆍ1644~?)는 자는 휴경(休卿), 호는 취옹(醉翁)ㆍ만오(晩悟)로 현종 10년(1669년) 생원시에 합격, 숙종 1년(1675년) 통덕랑(通德郎)으로서 숙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ㆍ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82년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뒤 1690년 승지(承旨)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숙종 18년(1692년) 청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으며, 이어 병조참판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서 당대에 이름이 있었고, 양주(楊州)의 좌찬성 박대립비(左贊成朴大立碑)와 하양(河陽)의 통제사 김시성비(統制使金是聲碑) 등의 유필(遺筆)이 남아 있다.

그밖의 인물로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올랐던 내정(乃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득겸(得謙),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승운(承運) 등이 뛰어났다.

 ▲ (上·中)경북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에 자리한 박종린(朴從麟)과 부인 감천 문씨 합장묘와 그를 제향하기 위해 1650년 증손 박영(朴瑛)이 건립한 용문면 상금곡리 추원재(追遠齋ㆍ경북민속자료 제82호). (下)함창에서 예천으로 이거한 박종린(朴從麟)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그의 현손 박정시(朴廷蒔)와 박정설(朴廷薛)이 1600년대 건립한 감로루(感露樓ㆍ경북유형문화재 제292호).

 

함양 박씨는 조선 중기의 인재로 ‘향오린(鄕五麟)’과 ‘경팔립(京八立)’을 자랑하는데, 향오린(鄕五麟)이란 충좌(忠佐)의 후손인 눌(訥)의 아들 거린(拒麟·장령)ㆍ형린(亨麟·이조참의)ㆍ홍린(洪麟·대사헌)ㆍ붕린(鵬麟·한림사서)ㆍ종린(從麟·이조정랑) 등 5형제를 말하는 것이다. 또 경팔립(京八立)은 세영(世榮)의 네 아들인 대립(大立·좌찬성)ㆍ사립(思立·선무랑)ㆍ희립(希立·전서)ㆍ춘립(春立)과 세무(世茂)의 두 아들 소립(素立·지중추)ㆍ응립(應立·군수) 및 세옹(世蓊)의 두 아들 정립(挺立·목사)ㆍ명립(名立·판관)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촌(四寸) 이내의 천척간인 이들이 거의 동시(중종~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은, 작게는 개인의 영광이면서 크게는 가문 전체의 광영(光榮)이기도 하였다.

특히 종린(從鱗ㆍ1496~1553)은 자는 자룡(子龍)으로 눌(訥)의 다섯째 아들이며, 금당실 사람 문숙손(文叔孫)의 사위이다. 중종 11년(1516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중종 27년(153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벼슬을 시작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정자(正字)ㆍ저작(著作)ㆍ박사(博士)ㆍ수찬(修撰)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 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서 세자시강원 사서 겸 문학(世子侍講院司書兼文學)을 겸직하면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郎)에까지 벼슬이 이르는 동안 경연의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여 중종 임금의 정치 자문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세가 김안로(金安老)의 횡포가 심하여 벼슬에 뜻이 없던 차에 김안로가 사형되자 1538년 벼슬을 그만 두고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 숨어서 정신 수양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으며, 함양 박씨 예천 입향조(入鄕祖)이며 정랑공파(正郞公派)의 파조(派祖)로 추원재(追遠齋)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 묵재(默齋) 박사희(朴士憙)의 시문집인 ‘묵재일고(默齋逸稿)’.

사희(士憙ㆍ1508~1588)는 자는 덕명(德明), 호는 묵재(默齋), 훈도(訓導) 형(馨)의 아들로 효성이 극진하였다. 반룡산(盤龍山) 아래 우거하며 반계(盤溪)라 자호하고 성리학에 침잠, 실천궁행에 힘썼다. 그뒤 이황이 도산(陶山)에서 도학을 강론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집도 그곳에 가까운 가야촌(佳野村)으로 이사하였다. 이황이 그를 높게 평가하여 묵재(默齋)라는 호를 주었다. 중종 34년(1539년) 충청도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551년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정시(庭試)에 낙방하였다. 1548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장사랑(將仕郎)ㆍ의흥훈도(義興訓導)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종사랑(從仕郎)ㆍ승사랑(承仕郎), 1559년 무공랑(務功郎), 그 이듬해 선무랑(宣務郎)ㆍ신령훈도(新寧訓導)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 ‘묵재일고(默齋逸稿)’ 2권이 있고 마곡정사(磨谷精舍)에 제향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앞장 섰다가 함북 안변(安邊)에서 순절한 기봉(基鳳)과 학자(學者) 의병장(義兵將)으로 유명했던 기대(基大)가 뛰어났으며, 봉천감옥(奉天監獄)에서 순절한 찬희(燦熙)는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 박종린(朴從麟)의 14대손 박열(朴烈) 생가와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샘골) 선산에 안장된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묘.

 

1923년 일본 천황 히로이또(裕仁)를 살해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열(烈ㆍ일명 爀)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고, 경성고보 재학 중에 3·1 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의혈단, 흑우회 등을 조직했다. 박열은 1923년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그해 관동대지진 이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체포되었다. 불령사가 일본 천황과 왕세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으나, 사건 자체가 과장ㆍ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몇달 뒤 감옥 안에서 자결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박열은 22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수감 생활을 하고 살아 남았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뒤 풀려나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전신)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했다가 한국전쟁 때 피납되었다. 1974년 사망 당시에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월ㆍ납북 정치인 모임인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