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沔川)은 충남 당진군(唐津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 때에는 혜군 또는 지비(智非)라 부르던 것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으로 개칭하였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운주(運州ㆍ홍주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 태종(太宗) 때 와서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으나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唐津郡)에 속한 면천면(沔川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면천 박씨(沔川朴氏)는 신라 제5대 파사왕(婆娑王ㆍ재위기간 80∼112)의 원손(遠孫)인 득의(得宜)가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ㆍ대승(大丞)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술희(述熙)는 고려 초에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으로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득의(得宜)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면천(沔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면천군(沔川君) 박술희(朴述熙)의 묘는 실전되어 단비가 세워진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면천대(沔川臺).
‘박씨원류사보(朴氏原流史譜)’에 의하면 술희(述熙ㆍ?∼945)는 일명 술희(述希)로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이며, 용감하고 육식을 좋아하여 비록 두꺼비ㆍ개미라도 모두 먹었다고 한다. 18세에 궁예(弓裔)의 호위병으로 있다가 뒤에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창업(創業)에 공을 세웠으며, 태조 19년(936년) 후백제 정벌(征伐) 때는 보기(步騎ㆍ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진격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태조 4년(921년) 태조가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소생인 맏아들 무(武)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 어머니 집안의 세력이 미약하여 태자 책봉이 어려울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沸黃袍ㆍ태자가 입는 옷)를 담아서 왕후에게 주었다. 왕후가 이것을 술희에게 보여 태조의 뜻을 알게 하였다. 이에 술희는 군신회의에 나아가 태조의 맏아들 무(武)를 태자로 삼을 것을 청하였고, 여러 군신들은 그의 덕망에 눌리어 반대하지 못하니 왕이 태자로 책봉하였다. 후계자 지명의 일을 그에게 맡긴 것은 후일의 왕위쟁탈전 같은 혼란을 미연에 막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려 주며, 더욱이 936년 후백제(後百濟)의 신검(神劍)을 공격하러 갈 때에 태조가 태자 무(武)와 함께 가도록 배려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같이 그는 혜종(惠宗)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후일에 혜종(惠宗)의 묘정에 배향될 수 있었다. ▲ (左)태조는 승하할 때 박술희(朴述熙)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히 주며, 태자를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태조 26년(943년) ‘고려사(高麗史)’의 기록. (右)‘고려사(高麗史)’ 60권의 박술희가 혜종(惠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기록.
태조 26년(943년) 태조는 승하할 때 그를 내전(內殿)으로 불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히 주며 태자(太子ㆍ혜종)를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하며, 혜종(惠宗)이 병으로 눕자 당시 광주(廣州) 지방의 호족 출신인 왕규(王規)가 역모를 품어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 그래서 왕규(王規)와 적대관계에 있어 신변보호를 위해 호위병 약 100여 명을 거느리고 있다가 새로 즉위한 정종(定宗)의 의심으로 갑곶(甲串ㆍ江華)에 유배되었다. ‘고려사(高麗史)’ <박술희전>에 의하면, 왕규(王規)가 왕명이라고 속여 그를 죽였다고 되어 있으나 당시 왕규(王規) 자신도 갑곶에 유배되었다가 곧 살해되었으므로 그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려우며, 정종(定宗)이 그를 죽이고 비난을 피하기 위해 왕규(王規)가 죽인 것처럼 쓴 것으로 후세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그후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엄의(嚴毅). ▲ ‘고려사(高麗史)’ 92권 박술희 열전(列傳)에는 왕규(王規)가 그를 죽인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정종(定宗)이 그를 죽이고 비난을 피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후세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 두문동 72현인 박심(朴諶)의 충절을 그린 일배송경조알도(日拜松京朝謁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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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은 술희(述熙)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신기(神騎)ㆍ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주(住)를 중조(中祖)로 하고 있으나, 다른 문헌에서는 주(住)의 손자 계(桂)를 중조(中祖)로 하기도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서는 술희를, ‘한국인의 족보(韓國人의 族譜)’에서는 득의(得宜)를 시조로 되어 있다.
그후 면천 박씨(沔川朴氏)는 16세손인 윤장(允莊)ㆍ윤성(允成) 형제에 이르러 번성하기 시작하였으며, 22세손에 이르러 학생공파(學生公派)ㆍ사복공파(司僕公派)ㆍ사직공파(司直公派)ㆍ참의공파(參議公派)ㆍ학생공여익파(學生公汝益派)ㆍ생원공여익파(生員公汝益派)ㆍ생원공정파(生員公挺派)ㆍ소위공파(昭威公派)ㆍ어모공파(禦侮公派)ㆍ중화파(中和派)ㆍ진사공파(進士公派)ㆍ첨추공파(僉樞公派) 등 14지파(支派)로 나뉘어져 세계(世系)를 이루게 되었다.
주(柱)의 9세손 심(諶)은 공조전서(工曹典書)로 있을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당한 것을 보고 뜻을 같이 하던 71분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조선이 개국(開國)되고 이성계의 출사(出仕)에 끝내 불응하자 이방원(李芳遠ㆍ후에 3대 태종)이 초막에 불을 놓아 두문동을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는 채귀하(蔡貴河), 이맹운(李孟芸)과 함께 벽란진(碧瀾津)에서 배를 타고 서쪽의 해주(海州)로 향하던 중 고산 임암촌(高山立岩村)에 이르다 보니 산머리에 우뚝 서 있는 선바위의 모습이 굽힐줄 모르는 충신의 기상과 같으므로 그곳을 은거지로 삼고 조석으로 송도(松都)쪽을 향하여 옛 고려 임금을 배알하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이에 조선에서도 감복하여 만인을 위한 충절의 표상으로 그 모습을 그려 일배송경조알도(日拜松京朝謁圖)로 남기게 하였다. 진본은 전남 장성군 경현사(景賢祠)에 봉안되어 왔으나,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서 우리 백성들의 충의사상을 말살코자 경현사를 폐쇄할 때 이 그림도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다행히 ‘성인록(成仁錄)’에 ‘海隱先生朝謁圖’가 흑백사진 1장으로 수록되어 있음이 발견되어 이를 복원하게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심(諶)의 맏아들 수생(秀生)이 승의교위(丞義校尉)로 부사정(副司正)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거신(居信)은 벽동군수(碧潼郡守)를 거쳐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상의원판사(尙衣院判事)를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유(攸ㆍ찬성사 여의 증손)의 아들 효순(孝順)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효순(孝順)의 장남인 삼길(三吉ㆍ1442~1509)은 자는 동리(東利)로 효순(孝順)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비범하고 힘이 장사여서 송아지를 옆에 끼고 몇 길의 담을 뛰어넘었고, 달리는 말을 뒤쫓을 정도로 빨랐다. 그의 아버지가 보고 장수감이라 하며 곧 그에게 글을 배울 것을 권하였다. 낮에는 사냥하고 밤에는 독서하되 천 번을 한도로 삼아 제자백가(諸家百家)에 두루 통달하였다. 성종 6년(1474년) 진사(進士)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성종 16년(1485년) 예조좌랑(禮曹佐郞)ㆍ정언(正言)을 역임하고 1488년 헌납(獻納), 1492년 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여 폐비의 일로 추죄(追罪)를 하였으나, 그는 당시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면하였다. 연산군이 단상(短喪)의 제도를 정하였는데 이 때 모략으로 좌천당하여 회양부사(淮陽府使)로 갈 때 연산군이 내관을 가만히 보내서 행장을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쌀 1말과 간장 1병과 조복 1벌 뿐이었다고 한다. 임기가 만료되어 떠나갈 때 이민(吏民)이 모두 아쉬워하였고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연산군 10년(1504년) 대사간ㆍ병조참의(兵曹參議)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난정에 신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여 후배를 가르쳤으므로 사람들이 기로개(耆老皆) 선생이라 일컬었다. ▲ 1846년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 문온공(文溫
거신(居信)의 증손 여룡(汝龍ㆍ1541~1611)은 자는 순경(舜卿), 호는 송애(松厓)로 부호군(副護軍) 수의(守義)의 아들이다. 5대조인 감사 담(湛) 때부터 해주 입암촌(立巖村)에서 살았는데, 이이(李珥)가 선조 3년(1570년) 교리직을 그만두고 해주 야두촌(野頭村)에 거처를 잡자 나아가 수학하게 되었다. 1573년에 생원ㆍ진사 양시험에 합격하고, 1581년에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왕이 의주로 파천함을 듣고 해주에서 의병 500명을 모아 대가(大駕)를 호위함으로써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으로 특진되었으며,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거쳐 1594년에 해서생곡사(海西生穀使)로 파견된 뒤 청양현감에 올랐다가 이듬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598년 논공행상에서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책록된 뒤 다시 벼슬에 나가 호조좌랑(戶曹佐郞)ㆍ평시서령(平市署令)을 거쳐 1601년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사직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향리로 돌아와서는 스승 이이의 문집 간행에 앞장서 1610년(70세) 동문계(同門契)를 만들어 이듬해 문집의 간행을 완성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문집으로 ‘송애집(松厓集)’이 있다. 시호는 문온(文溫).
그외 인물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던 성렬(成烈)과 참찬관(參贊官) 치기(致岐)가 유명했고, 좌승지(左承旨) 처용(處庸)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한 태제(泰齊), 소위장군(昭威將軍) 의용(義容)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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