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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울산 박씨(蔚山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울산 박씨(蔚山朴氏) 시조(始祖) 윤웅(允雄)은 신라(新羅) 제52대 효공왕 5년(901년) 지금의 울산(蔚山) 학성(鶴城ㆍ당시 하곡현 신두산)에 정착하여, 신학성장군(神鶴城將軍)이 되어 이 지역을 통치하는 호족장(豪族長)으로서 세력을 확장하여 번창하였다. 918년 고려(高麗) 태조(太祖) 개국시에 보좌(補佐)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오르고, 후삼국(後三國) 통일 시에는 사신(使臣) 최환(崔奐)을 고려에 견사(遣使)하여 하곡현(河曲縣)을 귀부(歸附)하였다. 이 공을 가상히 여긴 태조(太祖)는 하곡(河曲)ㆍ동진(東津)ㆍ우풍(虞風) 3현(縣)을 합하여 흥려부(興麗府)로 격상하고, 그에게 흥려백(興麗伯)을 봉작(封爵)하여 대장군(大將軍)에 배명(拜命)하고 통치하던 전 지역을 사채지(賜采地)로 하사(下賜)하였다. 여기서 ‘흥려(興麗)’는 말 그대로 ‘高麗를 興하게 했다’는 뜻이다.

아직도 그 당시 사채지(賜采地) 일부인 울산 북구 구유동(舊柳洞) 곽암(藿巖ㆍ미역바위) 1구(區)가 보존되어 매년(每年) 수세(收稅)하여 용강사(龍岡祠) 제향(祭享) 때 제수(祭需)로 제공되고 있으며, 미역바위는 2001년 12월20일자 울산광역시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울산 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울산 박씨 시조 장무공(壯武公) 박윤웅(朴允雄)이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곽암(미역바위)와 판지마을 바닷가에 세워진 곽암(藿巖)의 유래와 소유권을 새겨 놓은 비석.

 

 

 

 

 

 

 

 

 

 

 

 

그런데 1959년 간행된 울산박씨파보(蔚山朴氏派譜ㆍ하양합문지후공파<河陽閤門祗侯公派>)에 시조 윤웅(允雄)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ㆍ재위 917∼924)의 막내아들 국상공(國相公) 교순(交舜)의 7세손으로 고려 숙종 때 평무(平武)가 되었고, 숙종 4년(1099년) 동여진(東女眞)의 장수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공하자 4개월만에 이를 평정하였다. 예종(睿宗) 때 재침한 여진족을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장군과 더불어 격퇴시켜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익찬공신(翊贊功臣)이 되어 흥려백(興麗伯ㆍ흥려는 울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蔚山)을 울산으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 시조 장무공(壯武公) 박윤웅(朴允雄)이 고려 숙종 때 인물로 잘못 기록된 1959년 간행 울산 박씨 파보.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면 “태조 경진 3년(920년) 봄 정월에 신라가 처음으로 사절을 파견하여 교빙하는 의식을 치르었다. 강주(康州ㆍ진주) 장군 윤웅(閏雄)이 아들 일강(一康)을 인질로 보내었다. 왕이 일강(一康)에게 아찬(阿湌) 품계를 주고 경(卿ㆍ벼슬의 명칭)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그리고 낭중(郎中) 춘양(春讓)을 강주(康州)에 보내 귀순한 자들을 위로하고 설복하였다.”(原文:高麗史1卷-世家1-太祖1 康州將軍閏雄遣其子一康爲質拜一康阿粲以卿行訓之妹妻之遣郞中春讓於康州慰諭歸附)라고 기록되어 있다.


 

울산 박씨(蔚山朴氏)는 울산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후대로 내려와 종파(宗派)인 용당파(龍塘派)를 비롯하여 초산부사공파(楚山府使公派)ㆍ기장통덕랑공파(機張通德郞公派)ㆍ송경파산공파(松京坡山公派)ㆍ말응부위공파(秣應副尉公派)ㆍ연암가선공파(蓮巖嘉善公派)ㆍ명곡군수공파(椧谷郡守公派)ㆍ평해남계공파(平海南溪公派)ㆍ제내군수공파(堤內郡守公派)ㆍ유곡판관공파(裕谷判官公派)ㆍ강화참판공파(江華參判公派)ㆍ부내불항신공파(府內不降臣公派)ㆍ옥련참판공파(玉輦參判公派)ㆍ보령현령공파(保寧縣令公派)ㆍ경주현감공파(慶州縣監公派)ㆍ부령강릉백파(富寧江陵伯派)ㆍ대흥찬성공파(大興贊成公派)ㆍ대흥판서공파(大興判書公派)ㆍ대흥부사공파(大興府使公派)ㆍ부여진사공파(扶餘進士公派)ㆍ풍암좌랑공파(楓巖佐郞公派)ㆍ영동전서공파(永同典書公派)ㆍ옥천도사공파(沃川都事公派)ㆍ하양합문지후공파(河陽閤門祗侯公派)의 20여 개의 파로 갈라졌다.


 

 ▲ 시조 박윤웅(朴允雄)과 사은(沙隱) 박추(朴諏)를 제향하고 있는 경남 양산시 웅상읍 용당리 용강사(龍岡祠).


시조 윤웅(允雄)의 배위(配位)는 양산 이씨(楊山李氏)로 아들 식(息)은 태조가 불러 광종조(光宗朝)에 상장군(上將軍)과 경종조(景宗朝)에 국상(國相)이 되었고, 손자 원일(元逸)은 성종조에 평장사(平章事)와 목종조에 국상(國相)을 지냈다. 그후 고려조에는 가문이 흥성ㆍ발전하였으나 봉상시정(奉常寺正) 길우(吉佑)의 아들로 고려 말 감무(監務)를 지내고 한림(翰林)의 벼슬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던 유(愈)는 후에 충남 예산군 대흥(大興)으로 옮겨 살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에 자리한 고려의 절신(節臣) 유은(柳隱) 박유(朴愈)의 묘.

조선조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합천(陜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이문(而文)과 전쟁에서 순절한 영정(英挺ㆍ선전관을 지냄)이 유명했고, 홍(泓ㆍ1534~1593)은 자는 청원(淸源)으로 명종 11년(155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ㆍ강계부 판관(江界府判官)ㆍ종성부사(鍾城府使)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佐道水軍節都使)로 문경새재ㆍ평양(平壤)ㆍ평산(平山) 등지에서 적의 선봉을 맞아 싸워 패했으나 집요하게 저항하였으며, 선조(宣祖)를 평양으로 호종(扈從)하고 성천(成川)에서 우위대장(右衛大將)ㆍ의용도대장(義勇都大將)이 되었다가 이듬해 전사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맞서 싸운 울산지역 공신들과 무명 의사들의 위패를 모신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충의사(忠義祠)와 학수당(鶴睡堂) 박홍춘(朴弘春)의 위패와 함께 소장되어 있는 박홍춘의 환도(앞쪽)

 

홍춘(弘春)은 자는 경인(景仁), 호는 학수당(鶴睡堂), 추(諏)의 4세손으로 일찍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ㆍ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ㆍ수군의 감포만호(甘浦萬戶)와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역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의 관군은 모두 달아나고 빈 성을 왜군이 짓밟았으나 세찬 의병운동이 일어나서 한동안 고을을 수복하매,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이 전 밀양부사 김태허(金太虛)와 홍춘(弘春)의 인망이 높음을 알고 김태허(金太虛)를 가군수(假郡守)로 홍춘(弘春)을 지금의 웅촌ㆍ웅상 지방인 서면장(西面將)으로 임명하여 기장과 동래로부터 오는 왜적을 막게 하였다. 이로부터 열아홉 장사(壯士)들과 더불어 7년 동안 왜군과 싸워 선무원종일등(宣武原從一等)에 녹훈되고 많은 식읍지(食邑地)를 하사받았으며, 또한 기장현감(機張縣監)에 제수되었다.

홍춘(弘春)의 아들 계숙(繼叔ㆍ1569~1646)은 자는 승윤(丞胤), 호는 반어헌(伴禦軒)으로 무과에 급제한 것은 선조 27년(1594년)으로 임진왜란 중이던 26세 때였고, 아버지와 더불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公臣)에 책록되었다. 그가 부방(赴防ㆍ조선시대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방위 임무를 맡은 일)에 오른 것은 선조 38년(1605년) 37세 때의 일이었으며, 그후 선전관(宣傳官)ㆍ훈련원 부정(訓練院 副正)의 관직을 거쳤다. 그의 아들 취문(就文ㆍ1617∼1690)은 인조 22년(1644년) 무과에 급제한 후, 그 해 겨울 신출신(新出身) 자격으로 부방하였다. 그후 그는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경상좌도 병영과 수영의 우후(虞侯)ㆍ훈련원 부정(訓練院 副正)을 지냈으며, 지방관으로 인동ㆍ갑산ㆍ김해 등지의 수령도 역임하였다.

 ▲ 박계숙(朴繼叔)과 박취문(朴就文) 부자가 부방(赴防)하였을 때의 일기인 ‘부북일기(赴北日記)’.

 

 

 

 

 

 

 

 

 

 

 

 

계숙(繼叔)과 취문(就文) 부자는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변방지역에 1년간 부방(赴防)하였을 때를 당하여 써놓은 ‘부북일기(赴北日記ㆍ울산시유형문화재 제14호)’를 남겼다. 계숙(繼叔)의 일기는 선조 38년(1605년) 10월 15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간 함경도 회령(會寧) 등지에서의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선조 40년(1607년) 1월 1일까지의 일기이다. 그리고 취문(就文)의 일기는 인조 22년(1644년) 12월 9일 울산에서 출발한 때부터 1년간 함경도 회령부(會寧府)와 경성(鏡城)의 병영(兵營)에서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인조 24년(1646년) 4월 4일까지의 일기이다. 이 일기는 울산 충의사(忠義祠)에 보관되어 있으며, 세 부자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효종조(孝宗朝)에서 문과에 급제한 율(繘ㆍ1621~1668)은 자는 자명(子明), 호는 오리(梧里)로 인조 20년(1642년)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효종 5년(165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현종(顯宗) 때 은산현감(殷山縣監)을 거쳐 숙종 때 장령(掌令)에 이르렀으며, 저서에 ‘주학본원(籌學本源)’이 있다. 

 ▲ 박두세(朴斗世)가 1702년 편찬에 착수해 3년만에 완성한 ‘삼운보유(三韻補遺)’는 가장 뛰어난 운서(한문사전)의 하나다.


율(繘)의 아들 규세(奎世)ㆍ두세(斗世) 형제는 숙종 때 문과에 함께 급제해 형은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아우인 두세(斗世ㆍ1650∼1733)는 자는 사앙(士仰)으로 숙종 8년(168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직을 제수받았으며, 1686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권대운(權大運)을 압송할 때 편의를 제공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남인에 속하였으며, 그 뒤 진주목사(晉州牧使)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나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운학(韻學)에도 매우 밝았다. 작품으로는 당시 사회의 실정을 폭로하고 정치제도에 대한 불만을 풍자적으로 서술한 문답형식의 수필집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가 있으며, 운학에 관한 저술로 ‘삼운보유(三韻補遺)’와 그것을 증보한 ‘증보삼운통고(增補三韻通考)’가 있다.

 

 

 

 

 

 

 

 

 

 

 

 

 ▲ (左)박두세(朴斗世)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수필 형식의 필사본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右)신암(新庵) 박응한(朴應漢)의 시문집인 ‘신암집(新庵集)’은 아들 박경문(朴景聞)이 1919년 간행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문오(文五ㆍ1835~1899)는 자는 대화(大化), 호는 성암(誠庵)으로 도정(道精)의 아들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경학(經學) 연구에 전심하는 한편,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다. 고종 때 판서 남정철(南廷哲)이 기자묘수호소(箕子墓守護所)를 설치하여 도내에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인사를 뽑을 때, 입직수호생(入直守護生)과 주학교수(州學敎授)로 임명되자 사퇴하였다가 주위의 권유로 보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다. 뒤에 덕천군수(德川郡守)를 지냈으며, 관서지방에서 당시 으뜸가는 학자라고 찬양을 받았다. 저서로는 ‘성암문집(誠庵文集)’이 있다.

고종(高宗) 때의 석학(碩學) 임헌회(任憲晦)의 학통(學統)을 따랐던 응한(應漢ㆍ1835~1904)은 자는 원칠(元七), 호는 신암(新庵)으로 음보(蔭補)로 경릉령(敬陵令)에 이르렀다. 학행(學行)이 고명한 학자로 이름을 떨쳤고, 저서로 ‘신암집(新庵集)’을 남겨 충절(忠節)의 가문에 학맥(學脈)의 전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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