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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진원 박씨(珍原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진원(珍原)은 전남 장성군(長城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었는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진원현(珍原縣)으로 고쳐서 갑성군(岬城郡ㆍ장성군의 옛 지명)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 나주(羅州)에 이속되어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장성(長城)에 속하여 진원면(珍原面)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구진 박씨(丘珍朴氏)라고도 하며,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인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沈)의 13세손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42세손으로 알려진 박진문(朴進文)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 전남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 기산마을에 자리한 묘가 실전된 진원 박씨 1세~6세의 제단(祭壇).

 

 

오늘날 전하는 진원 박씨의 족보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세 광전(光前)의 손자인 동계(東溪) 춘장(春長)이 1657년에 간행한 ‘정유보(丁酉譜)’이다. 여기에는 시조를 진문(進文)으로 기록하면서 ‘시조 진문공(進文公)은 신라 박혁거세의 왕손으로 고려조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고, 그 이상은 문적(文籍)이 없어 가고(可考)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 춘장(春長)은 그 보서(譜序)에서 ‘진원(珍原)에 유형(有亨)을 보내어 구보(舊譜)를 가져다가 자손의 지파(支派)를 찾고 장흥(長興)에 편지하여 그 지파(支派)를 조사하고서 이렇게 간행한다.’고 하였으니 이미 그 훨씬 전에 족보가 있었음이 분명하며, 동시에 시조 진문(進文)에 관한 것도 오랜 문적(文籍)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전남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에 자리한 7세 구례감무(求禮監務) 박온(朴溫)의 묘와 재사인 용원재(龍原齋).

 

 

시조 진문(進文)과 2세 효대(孝大)는 각기 대장군(大將軍)과 대상(大相)이었다는 관작(官爵)만 기록되어 있을 뿐 배위(配位)조차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3세인 검교장군(檢校將軍) 빈(贇)이 금오위장군(金吾衛將軍)을 지낸 진원 오씨(珍原吳氏) 시조 오존석(吳存石)의 사위가 되었고, 4세인 판군기감(判軍器監) 성량(成亮)이 전주 전씨(全州全氏)의 시조인 전원려(全元呂)의 사위가 되었으며, 5세인 문하시중(文下侍中)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첨(瞻)이 진원 오씨 오익(吳益)의 사위가 된데다 또 6세인 전라도병마수군절도사(全羅道兵馬水軍節度使) 홍서(洪瑞)가 전주 최씨 최송(崔松)의 사위이며, 7세 구례감무(求禮監務) 온(溫)은 진원 전씨(현 담양 전씨) 대사헌(大司憲) 전의의 사위가 되었다.

 ▲ 박온(朴溫)의 아들로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진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의 유묵.

 

 

구례감무(求禮監務) 온(溫)의 아들인 8세 희중(熙中ㆍ1368~1446)은 초명이 희종(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으로 태조 2년(1393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태종 1년(140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06년 군자감승(軍資監丞)으로 전라도 경차관(全羅道敬差官)을 수임, 이어 세자부 좌정자((世子府左正字), 이듬해 이조정랑이 되고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의 은전을 입었다. 1410년 점마별감(點馬別監)에 차정되어 헌마(獻馬)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1414년 하륜(河崙)이 발의한 통진고양포(通津高楊浦) 제방수축에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서 참여하였으나 폐단이 일어 일시 파직되었다가 곧 복관되었다. 1415년 전라도 경차관으로 관찰사 박습(朴習) 등과 김제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였으며, 1416년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ㆍ예문관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藝文館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의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하고 1421년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냈다.

1422년 회례사(回禮使)로 금구(禁寇)ㆍ포로쇄환의 실효를 거두었으며, 명(明)나라에 조선 건국의 승인을 받으려고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으로 있으면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세종 5년(1423년)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낸 후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으며, 이 때문에 후손들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하여 진문(進文)을 시조로 받들고 진원(珍原)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다. 1426년 남원부사(南原府使) 재직 중 관곡(官穀)을 횡령하고 관기(官妓) 등과 음탕한 짓을 자행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1429년 진원(珍原) 땅에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해동필원(海東筆苑)’에 이름이 오른 명필로 장성 학림사(鶴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전남 장성군 진원면 학림리 학림마을에 자리한 위남(葦南) 박희중(朴熙中)의 묘와 재사인 학림사(鶴林祠).

 

 

희중(熙中)의 세 아들은 휘생(暉生)ㆍ곤생(坤生)ㆍ진생(進生)인데, 휘생(暉生)은 성균관(成均館) 생원으로 시거(始居)하여 보성종파(寶城宗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차자(次子)인 곤생(坤生)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장성중파(長城中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삼자(三子)인 진생(進生)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郞)을 지냈으며 장성계파(長城季派)의 파조가 되었다. 보성종파(寶城宗派)에서는 휘생(暉生)의 아들인 문기(文基)의 세 아들이 11세손으로 흥원(興原)ㆍ계원(繼原)ㆍ윤원(胤原)인데, 장자(長子)인 진사(進士) 흥원(興原)은 장종파(長宗派), 차자(次子)인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인 계원(繼原)은 장중파(長中派), 삼자(三子) 생원(生員) 윤원(胤原)이 장계파(長季派)의 파조가 되어 오늘날 5개 파로 모든 종문사(宗門事)가 이루어지고 있다.

 ▲ 전남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에 자리한 장성중파(長城中派) 파조 박곤생(朴坤生)의 묘. 

그후 한무(漢懋)의 아들 우(祐)는 호가 추재(秋齋)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공감판ㆍ첨정(僉正)에 이르렀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가 21년만인 광해군 10년(1617년) 예조(禮曹)에서 내린 유문(諭文)으로 본국인 66명과 함께 환국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조총 제조법을 전수(傳授)한 공으로 병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충렬(忠烈)의 시호가 내려졌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예복(禮福)은 군공(軍功)이 있어 장락원정(掌樂院正)에 증직(贈職)되고, 2남 진복(振福)은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 추재(秋齋) 박우(朴祐)가 왜국에 잡혀간 지 21년만에 환국하게 한 1617년 예조(禮曹)에서 내린 유문(諭文).

 ▲ 전남 무안군 해재면 양매리 고읍마을에 자리한 충렬공(忠烈公) 박우(朴祐)의 묘.

 

 

14세손 광전(光前ㆍ1526∼1597)은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 성균관 진사를 지낸 이의(而誼)의 아들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선조 1년(1568년) 진사가 되고, 유희춘(柳希春)이 학덕(學德)이 뛰어난 호남 지방의 선비 5인 추천할 때 천거받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으며, 다시 헌릉참봉(獻陵參奉)으로 옮겼으나 곧 그만두었다. 1581년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함열(咸悅)ㆍ회덕(懷德) 현감을 역임하였으나 상관의 뜻을 거슬려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계영(任啓英)ㆍ김익복(金益福) 등과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병 700여 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安邦俊)을 종사(從事)로 삼고 장자인 근효(根孝)를 참모로 삼았으나,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 문강공(文康公) 박광전(朴光前)의 시호교지와 시문집인 ‘죽천집(竹川集)’.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이 호남을 침범하자 전 판관(判官) 송홍렬(宋弘烈), 생원 박사길(朴士吉)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dj, 동복(同福)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안방준(安邦俊)에 의하면, 김인후(金麟厚)ㆍ기대승(奇大升)ㆍ이항(李恒)ㆍ유희춘(柳希春)과 함께 호남오현(湖南五賢)으로 일컫는다고 하였다. 저서에 ‘죽천집(竹川集)’이 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보성 용산서원(龍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 

 ▲ 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 자리한 문강공(文康公) 박광전(朴光前)의 묘와 재사인 화산재(華山齋) 및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전남 보성군 노동면 광곡리 죽천정(竹川亭).

 

 

광전(光前)의 맏아들 근효(根孝ㆍ1550~1607)는 자는 입지(立之), 호는 만포(晩圃)로 성혼(成渾)ㆍ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선조 24년(1591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임진왜란 때 아우 근제(根悌)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라우도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금산ㆍ무주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군세(軍勢)를 크게 떨쳤다.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어 군자감정(軍資監正)ㆍ장수현감(長水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전란이 끝난 뒤 문헌이 불타고 흩어져 없어졌음을 개탄하며 동지들과 힘을 모아 서적을 발간하는 등 문교 진흥에 힘썼다.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 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 자리한 만포(晩圃) 박근효(朴根孝)의 묘.

 

 

근효(根孝)의 아들 춘수(春秀ㆍ1590∼1641)는 자는 언실(言實), 호는 아수당(我誰堂)으로 김수항(金壽恒)의 문인이다. 인조 5년(162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ㆍ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장생(金長生)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안방준(安邦俊)을 의병장으로 하고, 자신은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전주에까지 이르렀다가 곧 화약(和約)이 성립되자 그만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아우 춘장(春長), 아들 진형(震亨) 등과 함께 300여 명을 모집하여 보성(寶城)에서 청주에까지 이르렀으나, 강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군량을 모두 완영(完營ㆍ全羅監營의 별칭)에 반품하였다. 그 뒤로는 죽을 때까지 후진양성에만 힘썼으며, 좌승지 겸 참찬관(左承旨兼參贊官)에 추증되었다.

춘수(春秀)의 아우 춘장(春長ㆍ1595~1664)은 자는 언승(彦承), 호는 동계(東溪)로 일찍이 양친을 잃고 실심한 나머지 학문에 뜻을 두지 아니했다가 30세가 되어 배움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맏형 춘수(春秀)로부터 처음으로 수학하였고, 36세 때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후금에 대항하였으나,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함락된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낙향하였다. 164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효종 3년(1652년) 시폐구제를 위한 5조목의 ‘의상응지소(擬上應旨疏)’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만년에 고향 용산(龍山) 아래에 정사를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662년 대기근이 들자 민정을 실상대로 알리고 백성을 구제하는데 앞장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저서로 ‘동계집(東溪集)’와 진원 박씨 최초의 족보(族譜)인 ‘정유보(丁酉譜)’를 만들었으며, 보성(寶城) 육현사(六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1896년 4권2책으로 간행되었으나 2권만 전하는 동계(東溪) 박춘장(朴春長)의 시문집인 ‘동계집(東溪集)’.

 

 

광전(光前)의 손자 춘호(春豪)는 자는 위원(偉元), 호는 해월당(海月堂), 참봉(參奉) 근제(根悌)의 아들로 진사시에 합격한 후 광해군 때는 찰방(察訪)에 제수된 바 있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는 종형(從兄) 춘수(春秀)ㆍ춘장(春長)과 함께 의병을 모집한 후 안방준(安邦俊)의 지휘하에서 군량을 준비하고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조정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정심하여,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고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찰방(察訪)이 되었다. 후손 정최(挺最)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였으며 ‘금호집(琴湖集)’을 저술하여, 인조 때 사천현감(泗川縣監)을 지낸 정영(挺榮)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가산(家産)을 털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남현(南鉉ㆍ1864~1930)과 학자(學者)로 명망이 높았던 용주(鎔柱ㆍ1899~1965), 신학문(新學問)의 기수 우용(佑龍ㆍ1882~1937)이 유명했고, 문용(文鎔ㆍ1892~1928)은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요인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하여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