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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박)

상주 박씨(尙州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상주 박씨(尙州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다섯째 아들인 박언창(朴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ㆍ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박언창(朴彦昌)의 12세손으로서 고려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진 박려(朴侶)를 시조로 기술한 곳도 있다. 

 ▲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 박여(朴侶)를 비롯해 8위(位)를 제향하고 있는 충북 청원군 강외면 쌍청리 경모단(敬慕壇).

 

 

 

 

 

 

 

당시 사벌주(沙伐州)는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의 각축장(角逐場)으로 화(化)하여 경명왕은 언창(彦昌)을 사벌방어장(沙伐防禦將)으로 삼아 사벌주 수호를 명하자,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견훤(甄萱)을 격퇴시킨 후 지금의 사벌동(沙伐洞)과 흔국촌(欣國村)에 방위본영(防衛本營)을 두고 병풍산성(屛風山城)ㆍ이부곡산성(吏部谷山城)ㆍ자산산성(子山山城ㆍ일명 자양산성) 등을 축조(築造), 제반군비(諸般軍備)를 강화하여 내침하는 적과 대항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문희(聞喜ㆍ문경)와 고창(古昌ㆍ안동)을, 후백제 견훤은 대야(大耶ㆍ합천)ㆍ영천(靈川ㆍ고령)ㆍ고울(영천)ㆍ일선(一善ㆍ선산)을 점거함으로써 신라의 국세(國勢)는 급전 쇠약해져 낙동강(洛東江) 동쪽으로 축소되었다.

그에 따라 사벌주는 본국(本國)과의 교통이 두절되고 고립상태에 빠짐으로써 언창(彦昌)은 경명왕 2년(918년) 자립으로 사벌국(沙伐國)을 세워 국도(國都)를 사벌동(沙伐洞)과 흔국촌(欣國村)에 정하고 성루(城壘ㆍ사벌왕성) 및 궁전을 축건하여 둔진산(屯陣山)을 군사의 주둔지로 수비의 완벽을 기했다. 이때 견훤과 그의 아버지인 아자개(阿慈介)가 부단히 내침함에 대하여 사벌왕은 10여 년간 항거(抗拒)하였으나 경순왕 3년(927년) 9월 낙동강을 도하(渡河)하여 급습해 온 견훤 군사를 맞아 싸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항전 13년, 재위 11년만에 패망하였다. 



 

 

 

 ▲ 시조 박언창(朴彦昌)의 무덤이라 전하는 경북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전사벌왕릉(傳沙伐王陵ㆍ경북기념물 제25호)과 1954년 세워진 왕릉에 속한 사벌왕릉 신도비와 재사인 숭의각(崇義閣).

 

 

 

 

 

상주 박씨(尙州朴氏)는 사벌왕 언창(彦昌)의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예부상서(禮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욱(昱)의 증손 원작(元綽)이 덕종 1년(1032년) 상사봉어(尙舍奉御)로 있으면서 왕에게 혁거(革車·兵車)ㆍ수질노(繡質弩)ㆍ뇌등석포(雷謄石砲)를 제작할 것과 팔우노(八牛弩)ㆍ이십사반병기(二十四般兵器)를 변방의 성에 설치할 것을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정종 6년(1040년) 서면병마도감사(西面兵馬都監使)로 재임하면서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었는데, 지극히 신통하고 교묘하다고 하여 상을 받고 그 무기는 동서변진(東西邊鎭)에 설치되었다. 이밖에도 천균노(千鈞弩)를 제작하기도 하여 병기제작에 공적이 많았다.

원작(元綽)의 아들 성걸(成傑)은 현종 2년(1011년)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나주로 피난갈 때 호종하였으며, 정종 5년(1039년) 도병마부사로 있으면서 동북면 정변진(靜邊鎭ㆍ지금의 함남 영흥 부근)에 성을 쌓아 여진에 대한 방비를 굳게 하였다. 뒤에 호부상서를 거쳐 문종 1년(1047년) 서북면행영병마사(西北面行營兵馬使)가 되었으며, 1050년 동북면병마사로 있을 때 상신하여 진명(鎭溟ㆍ지금의 함남 덕원 부근)에 침입한 해적을 무찌른 병마녹사(兵馬錄事) 문양렬(文揚烈)의 전공을 포상하게 하였다. 1053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고, 겸사도(兼司徒)ㆍ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거쳐 1055년에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內史侍郎平章事上柱國)이 되었다. 1063년에 검교태위 문하시중(檢校太尉門下侍中)이 되어 치사하였다.

 ▲ (左)예종 3년(1108년) 8월 16일 박회절(朴懷節)이 여진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10권의 기록. (右)전사한 박회절(朴懷節)의 공을 기려 그의 처자에게 은병(銀甁)ㆍ능라사견(綾羅紗絹)을 내렸다는 ‘고려사’ 13권의 기록.


▲ 중서시랑 평장사 박순충(朴純沖)이 죽었다는 ‘고려사(高麗史)’ 18권 의종 16년(1162년) 7월 26일 기록.  

 

 

 

 

 

 

 

 

그외 고려조에서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번(蕃ㆍ시중 성걸의 아들)과 정국호사공신(靖國護社功臣)에 추봉(追封)된 회절(懷節)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회절(懷節)의 아들 순충(純沖ㆍ?~1162)은 원래는 서리(胥吏)였으나 출세를 하여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 인종 18년(1140년) 금(金)나라에서 인종의 생일을 축하하여 태주(泰州) 관내관찰사 완안병(完顔昺)이 사절로 왔다. 그때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으로 있었는데, 이에 대한 답례로 금나라로 가서 하례하고 돌아왔다. 의종 4년(1150년)에는 밀진사(密進使)가 되어 다시 금나라로 갔으나, 완안량(完顔亮)이 사촌인 제3대 황제 희종(熙宗)을 살해하고 즉위하는 정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되돌아왔다. 그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랐으며,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서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를 역임한 후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 치사하였다.

한편 첨의정승(僉議政丞) 원정(元挺)의 아들 여(侶)는 상주 박씨 상산부원군파(商山府院君派)의 시조이다. 원래는 농부였으나, 처남인 방신우(方臣祐)가 원나라에 건너가 수원황태후(壽元皇太后)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그 덕으로 충렬왕 32년(1306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올랐다. 이어 삼중대광 첨의찬성사(三重大匡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상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충선왕 1년(1309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이듬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제수되었다. 1312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숙왕 6년(1319년)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1321년에는 삼사판관(三司判官)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지원(之員)도 외삼촌인 방신우의 덕으로 갑자기 뛰어 총랑전서(摠郎典書)가 되었는데 토색질이 심하여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한편 여(侶)의 아우 영(瑛)은 충주 박씨(忠州朴氏), 여(侶)의 아들 전서(典書) 지영(之永)은 평택 박씨(平澤朴氏)로 분관(分貫)하였다. 


 ▲ 박여(朴侶)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는 ‘고려사(高麗史)’ 34권 충선왕 4년(1312년) 12월 2일 기록과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오른 ‘고려사’ 32권 충렬왕 32년(1306년) 1월 18일 기록.

 

조선조에 와서는 원정(元挺)의 증손 안신(安臣ㆍ1369∼1447)은 초명은 안신(安信), 자는 백충(伯忠)으로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문로(文老)의 아들이다. 태조 2년(1393년) 생원이 되고, 정종 1년(139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등용되었다. 태종 8년(1408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어 대사헌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ㆍ태종의 딸 경정공주의 남편)과 목인해(睦仁海)의 모반사건을 왕에게 알리지 않고 처리하다가 극형을 받게 되었다. 수레를 타고 형장에 끌려가면서 안신(安臣)은 나졸에게 기와조각을 집어 달라고 청하자 나졸이 냉소(冷笑)하며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눈을 부릅뜨며 ‘네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죽은 뒤에 원귀가 되어 반드시 너에게 먼저 해를 끼칠 것이다’ 하니 나졸이 두려워하며 기와조각을 하나 주워다 주니, 그는 그 기와장에 시(詩) 한 수를 썼다. ‘내가 직책을 잘못하였으니 죽음을 달게 받을 것이나, 임금이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남길까 두렵다’.

이 시를 나졸에게 주어 속히 달려가서 아뢰고 오라 하였더니 나졸이 할 수 없이 가지고 가서 대궐에 올리었다. 그 때 성석린(成石璘)ㆍ하윤(河崙)ㆍ권근(權近) 등이 구명운동을 하여 유배에 그쳤다. 뒤에 집의(執義)ㆍ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역임하고 세종 6년(1424년)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도중에서 침입해온 해적을 위력으로 물리쳐서 무사히 귀환하게 되었다. 귀국 후 우사간(右司諫)에 임명되었고, 이어 공조ㆍ예조ㆍ병조의 참의, 병조ㆍ예조ㆍ형조ㆍ공조ㆍ이조의 참판을 거쳐 대사헌, 황해도ㆍ전라도ㆍ충청도ㆍ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39년 형조판서, 이듬해 우참찬, 1442년 공조판서로 나이가 많아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이조판서에 전직되어 1444년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



 

 ▲ 경북 상주시 개운동 대방곡(大芳谷)에 자리한 형조참판 박이창(朴以昌)의 묘.

 

 

 

안신(安臣)의의 아들 이창(以昌ㆍ?∼1451)은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평안감사(平安監司)에 이르렀고, 성품이 강개(慷慨)하여 바른말을 잘했다. 당시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들이 평안도 고을에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건량(乾糧)을 가져가는 관습이 있어, 이창(以昌)은 그 폐단을 간언(諫言)하여 이를 엄하게 다스리는 기강을 세웠다. 문종(文宗) 때 평안감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북경(北京)에 갈 때 길이 멀므로 부득이 많은 양미(糧米)를 준비해 가지고 가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돌아올 때 의주(義州)에서 잡혀 신안관(新安館)까지 오다가 밤중에 찼던 칼을 빼어 스스로 목과 배를 찔러 거의 죽게 되었다.

서장관(書狀官) 이익(李翊)이 곧 가서 보니 그는 “노신(老臣)이 본디 오명(汚名)이 없었으므로, 행여 충성을 다할까 하여 당초에 양미를 정수(定數)대로 가지려 하였던 것인데 통역의 무리가 하는 말이, ‘지금은 마침 장마가 시작되어 팔참(八站)에 들어서서 수재를 만나 중도에 막혀서 양미가 떨어지면 굶어 죽을테니 더 가져가야 하오’ 하기에, 나도 그럴까 하여 쌀 40말을 더 갖고 간 것이며, 장차 그 연유를 아뢰려 했는데 이미 국법을 범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뵈며, 동렬대신(同列大臣)들을 보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며, 또 계속하여 “의주에 도착했을 때 이 결심이 이미 정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을 호송하는 중국인들이 많았으므로 타국사람에게 알려서는 안되겠기에 여기 와서 이렇게 하게 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안곡서원(安谷書院ㆍ화성시향토유적 제1호)은 현종 9년(1666년) 박세희(朴世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1670년 그의 형 박세훈(朴世勳)을 추가 배향하였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1976년 중건하였다.

 

 

 

 

 

 

 

세종조(世宗朝)에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지낸 사화(士華)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인 세훈(世勳ㆍ1488∼1553)은 자는 훈지(勳之), 호는 송촌(松村)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주동의 효아(鑄洞孝兒)’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문명(文名)이 높았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 응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부모를 정성껏 받들어 봉양하였다. 연산군 10년(1504년) 아버지가 죽자, 남양(南陽)에 있는 무덤 밑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를 하면서 3년 동안 죽만 먹고 애통하게 지내니 고을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을 하였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해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을 하고는 그대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중종 14년(1519년) 그의 문명이 널리 알려지자 조광조(趙光祖) 등이 별과(別科)에 천거하였는데,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뒤 조정에서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에 임용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도원재(道源齋) 박세희(朴世熹)와 박증손(朴曾孫)ㆍ박대붕(朴大鵬)의 상주 박씨 3인을 제향하는 전남 순천시 상사면 동백리 이천서원(伊川書院). 1868년 훼철되어 1961년 후손들이 옛 자리에 복설하였다.

 

 

 

 

 

 

 

세훈(世勳)의 아우 세희(世熹ㆍ1491∼?)는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로 중종 9년(151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같은 해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냈다. 1517년 정언(正言)에 임명된 후 이조좌랑(吏曹佐郞)ㆍ충청도도사ㆍ장령ㆍ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역임하고, 1519년에 사간(司諫)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상주(尙州)에 유배되었다가 강계(江界)에서 죽었다. 젊어서부터 조광조와 종유(從遊)하였으며, 김식(金湜)ㆍ김정(金淨)ㆍ김구(金絿) 등과 늘 교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剛). 

 ▲ 전남 광양시 광양읍 목성리 유당공원(柳塘公園)은 1547년 당시 현감 박세후(朴世煦)가 광양읍성을 축조하고 멀리 바다쪽에서 왜구들이 볼 수 없게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였다.


 

 

 

 

 

 

 

 

 

 

 

막내 세후(世煦ㆍ1493∼1550)는 자는 중온(仲溫), 호는 인재(認齋)ㆍ눌재(訥齋)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중종 11년(1516년) 진사가 되고, 151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일소되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등용되고 1522년 박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1527년 다시 박사로 복직되어 사헌부 감찰로 승진되었고, 이듬해 광양현감을 거쳐 이조좌랑으로 옮겼으나, 김안로(金安老)의 청혼을 거절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44년 좌필선(左弼善)에 이어 곧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명종 즉위년(1545년)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고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참의를 지내고, 1549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지역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양구현감 신난수(愼蘭秀)의 비행을 적발하여 보고하였다가 도리어 고문을 받고 왕의 특명으로 풀려났다.

세훈(世勳)의 아들 충간(忠侃ㆍ?∼1601)은 자는 숙정(叔精)으로 음보(蔭補)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선조 17년(1584년) 호조정랑에 올랐고, 1589년 재령군수로 재직중 한준(韓準)ㆍ이축(李軸)ㆍ한응인(韓應寅)과 함께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을 고변하여, 그 공으로 형조참판으로 승진되고 또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이어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순검사(巡檢使)로 국내 여러 성의 수축을 담당하여 서울로 진군하는 왜적에 대비하였으나 왜병과 싸우다 도망한 죄로 파면, 이듬해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에서 다시 파면되었다가 뒤에 영남ㆍ호남 지방에 파견되어 군량미의 조달을 담당하였다. 1594년에는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구호에 필요한 쌀ㆍ콩 등의 신속한 조달대책을 상소하여 백성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1597년 순검사ㆍ선공감제조(繕工監提調)를 역임하고, 1599년에는 충훈부(忠勳府)의 쌀ㆍ소금 등을 사용(私用)하였다 하여 한때 불우하였으며, 1600년 붕당(朋黨)의 폐해를 상소하여 집권층 남이공(南以恭) 등에게 여러 차례 탄핵받았다.

유명(惟明ㆍ1582∼1640)은 자는 형부(炯夫), 찰방(察訪) 치관(致寬)의 아들로 광해군 12년(1620년) 무과에 급제하여 서산군수에 초배되어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ㆍ만포첨사(滿浦僉使)를 역임하였다. 그뒤 1623년에 덕원부사(德源府使)로 재직할 때 평산부사(平山府使) 이귀(李貴)의 별장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상원군(商原君)으로 봉하여졌다. 이어 서산군수를 거쳐 당상선전관(堂上宣傳官)ㆍ오위장(五衛將) 등을 역임하였고, 인조 6년(1628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그뒤 당상선전관(堂上宣傳官)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으며, 뒤에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충남 연기군 동면 합강리 합호서원(合湖書院ㆍ충남문화재자료 제41호)은 1716년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영정을 봉안한 합호사(合湖祠)라는 영당이었으나 그후 1843년 후손과 박광보(朴光輔) 등을 배향하였으며, 1868년 훼철되어 1937년 현 상태로 재건하였다.

예의판서(禮儀判書) 돈(惇ㆍ상산부원군 여의 손자)의 아들 양생(良生)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고, 그의 현손(玄孫) 광보(光輔·장사랑으로 부장을 역임)ㆍ광필(光弼·정선군수와 파주목사를 역임)ㆍ광좌(光佐·문의현령과 선공감정을 지냄)ㆍ광우(光佑) 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 필재(蓽齋) 박광우(朴光佑)를 제향하는 충북 청원군 오창읍 양지리 송천서원(松泉書院).

 

특히 막내 광우(光佑ㆍ1495~1545)는 자는 국이(國耳), 호는 필재(蓽齋)ㆍ잠소당(潛昭堂)으로 중종(中宗) 14년(1519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을 때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과 함께 대궐 마당에 들어가서 울부짖으니 중종(中宗)이 하교하기를 “학생들이 대궐에 들어와서 호곡한다는 것은 천고에 없는 일이다”고 하자, 여러 학생 가운데서 광우(光佑)가 뛰어나와 크게 소리쳐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 관서공자(關西孔子)로 불리우던 양진(楊震)이 죄를 받을 때 태학(太學)의 학생 3천 명이 대궐을 지키며 호곡한 일은 있사옵니다마는 전하께서 오늘날 하시는 일은 정말 천고에 없었던 일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몰아내게 하자 그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옷을 찢어 머리를 동여매고 의정부 행랑에 나와 앉아서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李澯)과 첨지 김로(金魯)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이 신원소를 불러 쓰게 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용솟음치듯 함으로써 그의 절의와 문장을 나타내었다.

152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중종 31년(1536년) 재령군수(載寧郡守)로서 문장에 능하여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였고, 1545년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하옥, 이어 동선역(洞仙驛)으로 유배되던 중 장독으로 인하여 돈화문(敦義門) 밖에서 죽었다. 1547년 가산이 몰수되고, 1570년 신원되었다. 그는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와 교분이 있었으며, 뒤에는 이언적(李彦迪)과 같이 화를 당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절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원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

 ▲ 충북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에 자리한 정절공(貞節公) 박광우(朴光佑)의 묘와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오산리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할 때 나온 관(棺)ㆍ청동방울 7개ㆍ백자항아리 1점. 아래는 박광우의 위패를 모신 숭인사(崇仁祠).

 

광우(光佑)의 아들 3형제 중 척암 김근공(金謹恭)의 제자였던 맏아들 수(受)가 주역(周易)에 능통하여 학명(學名)이 높았으며, 막내 의(宜)는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역임하였다

 ▲ 선곡(仙谷) 박건중(朴建中)의 영정과 1806년 완성한 ‘상례비요보(喪禮備要補)’ 및 유묵.

 

 

 

 

 

 

 

건중(建中ㆍ1766∼1841)은 자는 사표(士標), 호는 선곡(仙谷)으로 송환기(宋煥箕)와 김정묵(金正默) 등에게 사사하였다. 학문하는 자세가 독실하였으며 말이 행동을 앞서는 법이 없었으며, 이론을 실천하는 데 힘써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예학자다운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예학에 대하여 연구한 바가 깊었으며, 예절에 대한 제가(諸家)들의 예설 등을 인용하여 1800년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증보하여 ‘상례비요보(喪禮備要補)’를 편찬ㆍ간행하였다. 또한, 상례에 관한 사항을 조목별로 정리한 ‘비요촬략조해(備要撮略條解)’와 아녀자나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한글로 쓴 ‘초종례요람(初終禮要覽)’ 1권도 지었다. 1857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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