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이씨(安城李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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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이씨세보(安城李氏世譜)’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始祖) 이중선(李仲宣)은 중국 감숙성(甘肅省) 농서 이씨(?西李氏)이며,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과 이태백(李太白)의 후손으로 청륜계(靑綸系) 맹선(孟宣)ㆍ중선(仲宣)ㆍ계선(季宣) 3형제 중 둘째로 전한다.
고려 문종(文宗) 1048년경 송(宋)나라 사신으로 와서 문종의 어청(御請)으로 세자와 세손(世孫)의 사전(師傳ㆍ스승을 이어 받음)을 소임하면서 고려에 정주하게 되었다. 이어서 경군호장(京軍戶長)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공으로 거듭 천거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어 순종(順宗)ㆍ선종(宣宗)ㆍ헌종(獻宗) 때까지 네 임금을 섬겼다. 헌종 때 이자의(李資義)의 역모(逆謀)가 발각되어 당시의 상장군(上將軍) 등과 더불어 이를 평정하고 사직(社稷)의 위태로움을 도운 공훈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벼슬이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고, 뒤에 백하군(白夏君ㆍ백하는 안성의 고호)에 봉해졌다.
▲ ?안성이씨세보(安城李氏世譜)의 1~3세의 기록.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안성(安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그의 후손 구(玖ㆍ일명 흠)ㆍ희(禧)ㆍ유(裕)ㆍ극엄(克儼)ㆍ유인(惟仁)ㆍ공백(共白) 등을 일세조로 하고 광릉부원군파(廣陵府院君派)ㆍ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ㆍ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ㆍ좌사랑중공파(左司郞中公派)ㆍ합문부사공파(閤門副使公派)로 분파되었다.
▲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산리에 자리한 시조 이중선(李仲宣) 단소(壇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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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선(仲宣)의 아들 영(永)이 아버지가 죽자 영업전(營業田ㆍ경군을 대우하기 위하여 마련한 군전의 하나)을 이어받고자 하여 서리(胥吏)가 되어서 문서를 정조(政曹)의 주사(主事)에게 줄 때 절을 하지 않아 주사가 성을 내며 꾸짖었다. 그는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리며 말하기를 ‘내가 과거를 하여 조정에서 벼슬을 할 수 있는데 어찌 너 따위에게 머리를 숙이랴’ 하고 학문에 힘써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으나, 숙종 9년(1104년) 여진토벌에 출전하였다가 패하여 면직되었다.
예종 8년(1113년)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요(遼)나라에 다녀왔고, 1116년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ㆍ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ㆍ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으나, 예종 17년(1122년) 이자겸(李資謙)이 한안인(韓安仁)을 죽일 때 영(永)은 안인(安仁)과 동서(同壻)간이므로 연좌(緣坐)되어 진도(珍島)로 귀양갔다가 어머니와 자식들이 노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술을 한 말이나 마셔 분사(憤死)했다고 한다. 이자겸이 쫓겨난 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추증되었으며, 죄안(罪案)에서 삭제되었다.
▲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 자리한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 파조인 이희(李禧)의 단소.
희(禧)는 호가 양성재(養性齋)로 공민왕 23년(1374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고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수군(水軍)을 개편했으며, 이어 양광도 안무사(楊廣道按撫使)로 나가 왜구(倭寇) 방어에 공을 세웠다. 그후 사신으로 중국에 건너가 금은과 비단을 천자에게 바치고 성현서적(聖賢書籍)과 예악문전(禮樂文典) 등을 가져와 귀국 후 문인들에게 교수보급(敎授普及)시켜 동국(東國)을 예의방(禮義邦)으로 이끄는데 공을 세워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다.
유(裕)는 우왕(禑王) 때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권위가 날로 높아지자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성(安城)에 은퇴해 일생을 마쳤으며, 유인(惟仁)은 고려 말에 벼슬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류산(頭流山) 배록동(排祿洞)에 은거해 두문동 72현에 참여하였다.
▲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 자리한 이숙번(李叔蕃)의 아버지 문정공(文靖公) 이경(李坰)의 단소.
경(坰)은 호는 죽헌(竹軒)으로 우왕 2년(1376년) 문과에 급제하고, 1378년 인천(仁川)ㆍ안산(安山)ㆍ부평(富平)ㆍ해풍(海豊) 등지의 왜구와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평왜대장군(平倭大將軍)이 되고, 1388년 남원(南原)을 위시한 삼남지방(三南地方)의 왜병(倭兵)을 크게 격파한 공으로 추충정난보조공신(推忠靖亂補祚功臣)에 오르고,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 자리한 충숙공(忠肅公) 이숙번(李叔蕃)의 합장묘. 시흥시향토유적 제18호.
경(坰)의 아들 숙번(叔蕃ㆍ1373∼1440)은 조선시대 최초로 치러진 과거시험인 태조 2년(1393년)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1398년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을 때 방원(芳遠ㆍ太宗)과 함께 사병(私兵)을 출동시켜 경복궁(景福宮)을 포위, 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 등을 죽이는 등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다. 정종 2년(1400년) 박포(朴苞) 등이 방간(芳幹)을 받들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선두에서 이를 토벌,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으며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태종 2년(1402년)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ㆍ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거쳐 1406년 중군총제(中軍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에 올랐다. 1412년 종1품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1413년 병조판서, 다음해 찬성(贊成)에 오르고 태종15년(1415년)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성품이 포학하고, 자신의 공을 믿고 거만하여 여러 차례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경상도 함양(咸陽)에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술하게 되자 개국 초의 사실에 소상하다 하여 풀려 편찬에 참여했다가 완성된 뒤 다시 유배지에 보내져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무(茂)는 세종 15년(1433년) 진사(進士)가 되고, 다음해 육진(六鎭) 설치와 이민국책(移民國策)에 의한 개척지도자에 선발되어 백호아대(百戶阿代)로서 북청(北靑)에 들어가 치민치정(治民治政)에 큰 공을 세웠다. 이리하여 그 위업에 따라 북방대족(北方大族)이라 할 만큼 후손이 번연하여 입북파조(入北派祖)가 되었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
▲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자리한 해은(海隱) 이윤(李潤)의 정려각과 효자비.
울진 출신의 효자인 윤(潤)은 호는 해은(海隱)으로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자기의 다리를 베어 피를 내고,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 수개월을 연명케 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병이 들자 하늘에 빌면서 자기의 몸을 대신할 것을 원하였으며, 자기의 열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수개월을 더 살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3년 동안 여막을 짓고 묘를 지키며 참신 한 켤레로 상(喪)을 마쳤다. 태종 5년(1405년)에 조정으로부터 정려(旌閭)를 명하였고, 살고 있던 동리를 효자마을(孝子坊)이라 하였으며 벼슬은 평해훈도(平海訓導)였다.
죽림(竹林)은 광해군 10년(1618년)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다. 인조 15년(1637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명으로 함경도 근왕병(咸鏡道勤王兵)을 총지휘하는 남영장(南營將)이 되어 철령(鐵嶺) 방면에 후퇴하는 청군(淸軍)을 만나 대전, 다른 장수들은 모두 도망갔으나 혼자서 분전 끝에 아우 송림(松林)과 함께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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