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안 이씨(淸安李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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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淸安)은 충북 괴산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태종 5년(1405년) 청주에 속해 있던 청당현(淸塘縣)과 도안현(道縣安)이 합쳐진 지명이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청안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청안군이 폐지되었으며, 서면(西面)은 청주에 편입하였고 나머지 일원은 괴산(槐山)으로 편입해서 청안면이 되었다.
청안 이씨(淸安李氏)의 시조 이학년(李鶴年)은 고려 광종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으며, 14세손 충간공(忠簡公) 이한번(李漢藩)을 중시조로 하는 호남파(湖南派)와 이한번(李漢藩)의 동생인 이항상(李恒相)의 아들 충원공(忠元公) 이양길(李陽吉)을 중시조로 하는 영남파(嶺南派)로 분파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이 두 파는 예전에 시조를 이학년(李鶴年)으로 설정하였으나 최근에 여러 가지 증거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서 세보에서 이를 수정하였다.
충원공파(忠元公派) 중시조 양길(陽吉)은 자는 의로(義老), 호는 여남(麗南)으로 고려 충정왕 2년(135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민왕 2년(1353년) 검교시랑(檢校侍郎)ㆍ예빈사동정(禮賓寺同正)을 지내다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였는데, 노여움을 싸서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공민왕 5년(1356년) 원나라가 설치한 탐라목장을 관할하던 제주 목호(牧胡) 홀고탁(忽古托) 등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던 중, 도순무사 윤시우(尹時遇)ㆍ제주목사 장천년(張天年)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사후 1등 공신에 녹훈되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원(忠元).
▲ 청안 이씨 경주시 외동읍 입곡(立谷) 입향조인 5세 신제(愼齊) 이기(李基)의 묘.
▲ 신제(愼齊) 이기(李基)의 아들인 부사 이경방(李經邦)의 묘. 그래서 자손들이 본관을 청안(淸安)으로 하고 그곳에서 세거하다가, 양길(陽吉)의 증손 림(臨)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사림파가 화를 당하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림(臨)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지(地)가 금성현령을 지내고 호서에서 경주부(慶州府) 안강현(安康縣) 서도리(西島里)로 이주하였고, 차남 진사 육(堉)은 흥해(興海)로, 3남 기(基)는 호가 신재(愼齋)로 장기현감 겸 경주진관 병마첨절제도위(長?縣監兼慶州鎭管兵馬僉節制都尉)를 지내고 경주시 외동읍 입곡(立谷)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청안 이씨는 경상남ㆍ북도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 1399년 1월 26일 이종주(李從周)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사령왕지(辭令王旨)인 이종주통정대부지울주사왕지(李從周通政大夫知蔚州事王旨ㆍ보물 제1006호). 대표적인 인물로는 종주(從周)를 꼽을 수 있다. 양길(陽吉)의 아들인 그는 지울주사 겸 권농병마단련사(知蔚州事兼勸農兵馬團鍊使)ㆍ울주 철장관(蔚州鐵場官)을 지냈다. 그가 정종 1년(1399년) 절제사로 있을 때 행려자(行旅者)를 구호하기 위해 자신의 봉급에서 출연하여 혜리원(惠利院)을 설립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하륜(河崙)의 ‘혜리원기문(惠利院記文)’에 기록되어 있다. ▲ 1435년 4월 20일에 이종주(李從周)의 손자인 이림(李臨)에게 무과에 급제하였음을 증명하는 홍패왕지(紅牌王旨)인 이림무과급제왕지(李臨武科及第王旨ㆍ보물 제1006호). 종주(從周)의 아들 선(旋)이 판윤(判尹), 손자 등(登)이 군수를 지내는 등 문관의 가통을 이어오던 중,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관계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해 왔으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촌 내외의 지친(至親)간인 응춘(應春)ㆍ우춘(遇春)ㆍ봉춘(逢春)ㆍ응벽(應壁)ㆍ팽수(彰壽)ㆍ방린(芳隣)ㆍ태립(台立)ㆍ유린(有隣)ㆍ승금(承金)ㆍ대립(大立)ㆍ대인(大仁)ㆍ덕매(德梅)ㆍ계수(繼秀)ㆍ삼한(三韓)ㆍ눌(訥) 등 16인이 동시에 창의하여 ‘일문 16의사’를 배출해 충의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 낙의재(樂義齋) 이눌(李訥)이 혈족 12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눌이 선무원종공신 1등, 2등 공신 3명, 3등 공신 3명, 창의의사 5명 등 12명이 임란창의공신으로 기록되어 이를 기리기 위해 2006년 세워진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 12인 공적비.
▲ 청안 이씨 16의사(義士)들의 의병활동을 수록한 충의록(忠義錄).??? 응춘(應春ㆍ1522~1592)은 자는 태영(泰英), 호는 퇴사재(退思齋)로 명종 21년(1566년)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부장(五衛部將)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우춘(遇春)ㆍ봉춘(逢春), 아들 승회(承會)와 창의를 부르짖고, 노복(奴僕)ㆍ이민(里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산곡(山谷)으로 출입하면서 전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많은 적군을 무찔렀다. 다시 전진(戰陣)을 개운포(開雲浦)로 옮겨 바다에서 상륙하는 적을 맞이하여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순조 32년(1832년) 아들 고(故) 훈련정(訓鍊正) 승회(承會)와 함께 증직되고 포상되었으며, 덕산서사(德山書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1910년 후손에 의해 간행된 낙의재(樂義齋) 이눌(李訥)의 시문집인 낙의재집(樂義齋集).? 눌(訥ㆍ1569~1599)은 자는 약우(若愚), 호는 낙의재(樂義齋)로 아버지 신정(新貞) 밑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유교 경전의 뜻을 탐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東萊) 함락의 소식을 들은 지 4일만에 거주지 경주에서 ‘천사장(天使將)’을 칭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동령(東嶺)ㆍ효령(孝嶺)ㆍ나아령(羅兒嶺) 등을 지켰으며, 석읍동(石邑洞)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계속하여 화담(花潭)ㆍ나아곡(羅兒谷)ㆍ영지(影池) 등에서 적군을 격파하였으며, 권응수(權應銖)ㆍ최덕량(崔德良)이 지휘하는 부대와 합동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1596년 9월에 휘하 500명을 이끌고 대구로 가서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연합하였다. 1597년 화왕(火旺)에서 곽재우(郭再祐)와 만났고, 통제사 원균(元均)이 패전한 후 월성(月城)으로 부대를 옮긴 후 대구에서 전투를 벌이다 부상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서실(書室)을 중건하여 학문활동을 하던 중 부상한 곳이 악화되어 죽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문집으로 ‘낙의재선생유집(樂義齋先生遺集)’ 1책이 있다. ▲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에 자리한 낙의재(樂義齋) 이눌(李訥)의 묘와 재실인 한강재(漢江齋). 방린(芳隣ㆍ1574~1624)은 자는 덕화(德華), 호는 동호(東湖), 장기현감 기(基)의 현손이며 참봉 세례(世禮)의 아들이다. 명종 2년(1547년) 어릴 적부터 활쏘기 등 무예가 뛰어났으며, 선조 16년(158년)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봉사(訓練奉事)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퇴와(退窩) 유린(有隣), 수와(睡窩), 광린(光隣)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안동부 판관(安東府判官)에 제수되었다. ▲ 임진왜란 때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동호(東湖) 방린(芳隣)과 유린(有隣), 광린(光隣) 3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1815년 세운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 삼괴정(三槐亭ㆍ경북유형문화재 제268호). 그외 두촌(仕村) 팽수(彭壽)는 복병장(伏兵將)으로 울주 서생포(西生浦)에서 순절해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정려가 명해졌으며, 남계(南溪) 태립(台立)은 임진왜란 중 향교에 성현의 위패를 안전하게 봉안하고 난이 끝난 후 사비로 향교를 보수했다. ▲ (左) 두촌(仕村) 이팽수(李彭壽)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200여 년 전 지어진 경주시 안강읍 대동리 영모재(永慕齋). (右) 이팽수(李彭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세운 경주시 안강읍 산대리 표충각(表忠閣). 충간공파(忠簡公派)중시조 한번(漢藩)은 자는 국서(國瑞), 시호가 충간(忠簡)으로 고려 충렬왕 25년(1299년) 문과에 급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영광군사(靈光郡事)를 거쳐 국사원검열관(國史院檢閱官)을 지냈다. 공민왕 7년(1363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막은 공으로 추성보리공신(推誠保理功臣)ㆍ삼중대광(三重大匡)에 책록되고 청안백(淸安伯)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본관을 청안(淸安)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100여 년 사이의 세계가 실전되어 태종 12년(1412년) 무과에 급제, 전라(全羅)ㆍ공충(公忠) 양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내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문간공(文簡公) 광경(光慶)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헤아리고 있다. ▲ 2006년 3월 7일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분묘 이장지에서 발견된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의 미이라. 시신은 신장 160cm 정도로 발견 당시 머리카락ㆍ얼굴ㆍ치아ㆍ어깨 등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었으며, 족보에 기남은 1606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집안 유일의 문과 급제자 한(漢)은 현종 때 문과에 급제, 현령을 지냈다. 기남(箕南)은 호가 석탄(石灘)으로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김인후(金麟厚)ㆍ박순(朴淳)ㆍ정철(鄭澈)ㆍ기효간(奇孝諫) 등과 도의로 사귀었고, 선조 때 동몽교관(童蒙敎官)ㆍ사헌부 감찰 등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응벽(應璧ㆍ1543∼1599)은 자는 여완(汝完), 호는 칠송당(七松堂)으로 의감(宜堪)의 아들이다. 1592년 4월에 왜군이 침입하자 재종질(再從姪) 눌(訥) 등 10여 명과 도적을 토벌할 것을 논의하여, 이후 10여일 만에 천여 명의 동지를 규합, 나아곡(羅兒谷)에 진을 치고 사방으로 노략질을 일삼던 적을 크게 무찔렀다. 또 개운포(開雲浦)에서 적을 무찔렀으며, 1596년 9월에는 명나라 장군과 더불어 병사 800명을 거느리고 팔공산(八空山)에서 회맹하였고, 곽재우(郭再祐)와 합병하여 공산(公山)의 적을 격파하였다.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효행(孝行)으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문집(文集)으로 ‘칠송당실기(七松堂實記)’ 2권 1책이 있다.
계수(繼秀ㆍ1567∼1637)는 자는 한서(漢瑞), 호는 영풍정(詠風亭)으로 아버지는 응진(應軫)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침입하자 족제인 눌(訥)에게 “마땅히 힘을 합쳐 왕실을 보존하고 왜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하고는 동해 우산령(牛山嶺)에서 창의하였다. 1598년에 용양위부사직(龍?衛副司直)에 제수되었고,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 2등에 추록되었으며, 1634년에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에 승자(陞資)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사(義士)들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에 이르렀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자결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해 현령을 지낸 광경(光慶)의 아들 존학(存學), 광경(光慶)의 손자로 병조정랑을 지낸 숭문(崇文), 증손으로 군수를 지낸 배(培), 토산현감ㆍ충주진 영장(忠州鎭營將)을 지낸 현손 덕유(德裕) 등을 들 수 있다.
기남(箕南)의 아들 문룡(文龍)은 호가 기호(岐湖)로 변이중(邊以中)ㆍ박광옥(朴光玉)의 문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동생 경룡(慶龍)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으며, 6년 동안 일본군과 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봉해지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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