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이씨(梁山李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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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이씨(梁山李氏)의 시조(始祖) 이만영(李萬英)은 고려(高麗) 말에 문과(文科)에 등제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보조공신(輔祚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인천군(仁川君)으로 봉해졌다.
양산 이씨(梁山李氏)는 인천 이씨(仁川李氏)에서 분적(分籍)되었다. ‘인천이씨대동보(仁川李氏大同譜)’ 구보(舊譜)에는 시조 이만영(李萬英)을 인천 이씨(仁川李氏) 원대손(遠代孫)으로 기록하였고, 1982년 신보(新譜)에는 양산 이씨(梁山李氏)를 인천군 만영판서공파(仁川君 萬英判書公派)로 기록하였다.
양산 이씨(梁山李氏)는 임진왜란과 종가의 화재 등으로 인하여 가승보(家承譜)가 소실당하여 족보를 재정립하려 하니 고증할 자료가 전혀 없어, 순천 박씨(順天朴氏) 가승보(家承譜)에 근거를 두고 양산 이씨(梁山李氏) 일세(一世)는 인천군(仁川君) 이만영(李萬英)으로 정립하였다. 인쇄본 초판은 1928년 발간하였고, 이를 만성보(萬姓譜)에 등재한 관계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양산 이씨 1세는 이만영(李萬英)으로 되었다.
▲ 경남 창녕군 장마면 장기리에 자리한 시조 이만영(李萬英)의 묘(左)와 아들 이전생(李全生)의 묘.
그러나 1965년 거창(居昌) 종인(宗人)의 장서(藏書) 가운데 고려 명종(明宗) 19년(1563년) 때의 고보(古譜)가 발견됨에 따라 이에 근거를 두고 새로 발행된 1970년판 세보(世譜)에는 양산 이씨 1세는 이영무(李永茂)로 되어 있다. 이는 이만영(李萬英)으로부터 3대를 소급한 것이다. 이후 1979년 구미(龜尾) 종인(宗人)이 소장한 인조(仁祖) 2年(1624년) 고보(古譜)에도 양산 이씨 1세는 이영무(李永茂)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만성통보(萬姓統譜)로 족보연구가들 사이에서 ‘바이블’로 통하는 1924년 서울 세창회관에서 윤희구가 발행한 ‘전고대방(典古大方)’에서는 양산 이씨의 시조를 이만영(李萬英)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1998년 서울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글판 한국인의 족보’에서도 이만영(李萬英)을 양산 이씨의 시조로 적고 있다.
이만영(李萬英)의 아들 전생(全生ㆍ?~1450)은 고려 말 문과(文科)에 급제했으며, 당대 유명한 지리풍수학자로 전한다. 공민왕의 왕명을 받들고 전국을 순찰하는 도중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 427번지에 이르렀을 때 길지임을 발견하고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곳에 정착하면서 3남 2녀를 얻었는데, 후일 아들 3형제가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한 후 종1품의 품계까지 오른 명장수가 되었다. 이로써 마을 이름도 세 장수(三將帥)가 태어난 마을이라고 삼수리(三帥里)라 칭했다.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 자리한 삼장수(三將帥) 생가터.????
전생(全生)은 태조 7년(1398년) 가선대부 공조전서(嘉善大夫工曺典書)에 임명됐으며, 태종 때는 예조판서와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등을 역임했다. 노후에는 향리에서 머물다 세종 32년(1450년) 1월 향년 99세로 죽었는데, 세종(世宗)은 한 부모 밑에 세 장수(將帥)인 징석(澄石)ㆍ징옥(澄玉)ㆍ징규(澄圭) 3형제가 태어나서 일국간성(一國干城)의 공을 세운 탓으로 그 공을 치하하고자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으로 증봉군(增封君)하였으며, 이때부터 양산 이씨의 관향(貫鄕)이 생겼다. 이후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양산(梁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차남인 징옥(澄玉ㆍ충강공파)의 후손들은 근대에 양산 이씨(梁山李氏)에서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환관(還貫)하였고, 징규(澄圭)는 영산 이씨(靈山李氏)로 분파되었다. 또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이천 이씨의 중시조인 일소(逸素)는 양산 이씨의 10세손으로 파악되고 있다.
▲ 장강공(莊剛公) 이징석(李澄石)의 교지.
전생(全生)의 큰아들인 징석(澄石ㆍ1395~1461)은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태종 16년(1416년)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무과 중시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세종 3년(1421년) 상호군을 거쳐 연일진병마절제사(延日鎭兵馬節制使)가 되었고, 1423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우도병마도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427년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로 경상도 병마도절제사가 되고, 또 좌군총제로 승진하였다. 1432년 중추원부사를 임명받고, 이듬해에는 도원수 최윤덕(崔閏德)의 부장인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3, 01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兀刺) 등지로 가 파저강(婆猪江)에 침입한 야인을 평정한 공으로 중추원사에 올랐다. 그 뒤 경상도 병마도절제사ㆍ경상좌도처치사ㆍ경상우도도안무처치사 등을 거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어버이를 섬기기 위해 사퇴하였다.
1451년 문종이 즉위하자 다시 중추원부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지중추원사에 승진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단종 1년(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동생 징옥이 크게 분개해 병마를 이끌고 북으로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고 두만강을 건너려 하다가 종성판관 정종(鄭種) 등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피살되었다. 이에 아들과 함께 연좌 하옥되었으나, “평소에 동생과 사이가 나쁘고 내통이 없다.” 하여 석방되었는데, 이는 수양대군이 그의 무예를 아껴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세조 1년1455년)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양산군(梁山君)에 봉해졌으며,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강(莊剛).
그러나 동생 징옥(澄玉)이 청렴결백해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렴결백은 복없는 사람의 별호”라고 말하면서, 지방에 나갈 때마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점탈해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았다. 평소에 너무 탐욕해 동생 징옥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버지의 상중에 징옥을 구타해 비난을 받을 정도로 성질이 난폭했다 한다.
최근 종중(宗中)에서는 징석(澄石)의 묘 앞에 있는 마총(馬塚)을 파 보았는데, 총중(塚中)에 숯이 수십가마 묻혀 있었다고 한다. 말안장 등 도구가 나오고 상자 안에 말의 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부식을 방지(防止)하기 위해 숯을 넣은 것이라 하며, 말안장 상자 등은 옛 모습대로 다시 파묻어 놓았다고 한다. 주변에는 지금도 숯덩이가 여기 저기 뒹굴고 있다. 그리고 세종(世宗) 13년(1431년)에 하사(下賜)한 사패전장(賜牌田莊)도 남아 있고, 옛날 그가 살았다는 집터가 지금은 축대만 남아 있다.
전생(全生)의 3남인 징규(澄圭ㆍ1403~1468)는 세종 2년(1420)에 무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있으면서 청백리로 유명하였으며, 두 형을 대신하여 향리에 자주 드나들면서 효성이 지극했다. 징규는 금정산(金井山) 금봉탕 앞에서 글공부를 하고 금정산 산상 평원에서 무예를 닦았다고 전하며, 특히 무예 수련을 했다는 금정산 고당제 근처에는 아직도 마애여래불좌상이 남아 있는데 이를 두고 일명 이징규 장군의 자화상이라고도 한다.
세조 7년(1461년) 9월 ‘세조실록’에 의하면 “이징규가 명나라에 진하사로 가서 중추절과 성절을 화려하게 빛내어 국위를 선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단종 1년(1453년) 8월 24일 이징규가 온정으로 가는데 세조가 동교에 나가서 이징규를 전송하였고, 동년 12월 16일 이징규를 원종공신일등으로 녹훈했다. 1453년 10월에서 1454년 2월 사이에는 큰 형 징석(澄石)과 함께 징옥(澄玉)의 친형제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연금당하였으며, 조정의 세조 측근 중신들이 무려 13회 이상이나 이징규를 연좌 주살하라고 상소한 바 있다. 세조의 반대로 구명되었으며, 세조는 오히려 그를 중추원사ㆍ판중추원사ㆍ진응사ㆍ진화사 등으로 품계를 높였다. 그러나 죽은 뒤 말년에 거주하던 자택은 초토화되어 연못이 되고 무덤은 폐허가 되었으며, 현재는 무덤 앞에 머리가 잘린 장군석이 있다. 세조의 중신들이 세조 말년인 1467년에 세조 사후에 있을 수 있는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하여 지방민들의 난동극을 꾸며 만들어낸 결과라고 한다.
징석(澄石) 13세, 징옥(澄玉) 9세, 징규(澄圭) 6세 때의 이야기이다. 이들 3형제는 서당에서 돌아오다가 양민의 재산을 약탈해 가는 50여 명의 도적떼를 발견하자 모두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본 고을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보고 날개가 달린 장사라고 이름하게 되었고, 혼이 났던 도적떼들은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두번 다시 이 고을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고을에는 도적떼로 인한 민폐가 없는 평화롭고 밝은 고을이 되어 고을 사람들은 ‘방아로구나. 방아로구나. 해가 지면 달님이 뜨고, 달님이 지면 햇님이 뜨네’라고 노래하였다. 이것이 전하고 있는 삼장수 민요인데, 햇님과 달님은 삼장수를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 이징석(李澄石)의 아들 이팔동(李八仝)의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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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석(澄石)의 아들인 팔동(八仝ㆍ1414~1479)의 자(字)는 차옹(次翁)으로 위용장군행의흥위중부간사직겸선전관(威勇將軍行義興衛中部揀司直兼宣傳官) 및 행고성현령(行固城縣令)을 역임했고, 징석(澄石)의 4대손인 몽란(夢鸞ㆍ1544~1608)의 자는 응소(應韶), 호는 죽헌(竹軒)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지냈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 죽헌(竹軒) 이몽란(李夢鸞)의 사령서와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그외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한 윤조(胤祖)와 금산군사(金山郡事)를 지낸 윤환(胤環)이 뛰어났고,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종(種)과 효자(孝子)로 이름난 우춘(遇春)이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성춘(聖春)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양산이씨종손가소장고문서(梁山李氏宗孫家所藏古文書ㆍ보물 제1001호)는 거의 조선 전기의 것으로 전생(全生)의 홍무년간(洪武年間) 왕지(王旨) 1점을 위시하여 징석(澄石)의 왕지(王旨) 4점, 유서(諭書) 1점, 세종(世宗)이 하사(下賜)한 사패교지(賜牌敎旨) 3점, 세조(世祖)의 사제문(賜祭文) 등 징석(澄石)에 관련된 문서(文書)가 9점이 있다. 그리고 징석(澄石)의 장남 팔동(八仝)의 교지(敎旨) 1점과 징석(澄石)의 직계 4대 후손인 몽난(夢鸞)의 병조(兵曹) 발급(發給) 사령서(辭令書) 3점과 무과급제교지(武科及第敎旨) 1건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된 녹권(錄券) 1책(冊) 등 5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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