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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연원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원조 이두창(李頭昌)은 신라의 우장군(右將軍)으로 지략이 뛰어나 옥저(沃沮)로 하여금 양마 200필을 헌납하게 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어 후손 이공정(李公靖ㆍ李公正)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공정(李公靖ㆍ생몰년 미상)은 시호가 문경(文景)으로 황해도 우봉군(牛峰郡ㆍ지금의 금천군) 출신이다. 명종 23년(1193년)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중심이 된 대규모 민란이 청도와 울산에서 각각 일어났다. 이에 장군으로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의 지휘 아래 역시 장군 이지순(李至純)ㆍ김척후(金陟侯)ㆍ김경부(金慶夫)ㆍ노식(盧植) 등과 함께 이를 쳤으나 실패하였다. 벼슬은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으며, 금자광록대부 벽상삼한공신(金紫光祿大夫壁上三韓功臣)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우봉(牛峰)ㆍ잠성(岑城) 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그 곳에 세거하면서 관향(貫鄕)을 우봉(牛峰)으로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5에 이규보(李奎報)가 이공정(李公靖)에게 준 시에서 이공정(李公靖)의 인품을 알 수가 있다.

급사중 이공정에게(贈給事中李公靖)

鐵幹稜稜萬丈孤 / 무쇠같은 늠름한 만장 기골 호젓하고
令狐雙美一生俱 / 영호의 부자처럼 세상을 함께 하였네.
仙鼇壯力扶山起 / 선오의 굉장한 힘 산을 당겨 일어나고
金虎雄精叱電驅 / 금호의 굳센 정기 번개를 몰아치는 듯.
諫掖共稱張給事 / 간원에선 모두가 장급사를 함께 일컬었고
蔣壇兼作李金吾 / 장수로선 이금오를 아울러 칭송을 한다.
天池浴鳳恩波闊 / 봉황지의 은총 입어 그 은덕 활달하리니
餘潤能霑학轍無(魚) / 남은 혜택 학철의 고기까지 구할 것이다.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5에 실려 있는 이규보(李奎報)가 이공정(李公靖)에 준 시.

그의 아들 자성(子晟ㆍ?~1251)은 고종 18년(1231년) 몽고 살리타리(撤禮塔)가 쳐들어 오자 출전해 공을 세우고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이듬해 조정이 강화(江華)에 천도(遷都)한 틈을 타서 이통(李通)이 개경(開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상장군(上將軍)으로 후군진주(後軍陳主)가 되어 난을 평정, 이어 충주(忠州)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반란에 괴수인 중(僧) 우본(牛本)을 죽여 난을 평정했다. 또한 1233년 4월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적괴(賊魁) 거복(居卜)ㆍ왕심(往心)을 죽여 용문창(龍門倉)의 난을 토평하고, 6월에는 동경(東京ㆍ지금의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최산(崔山)ㆍ이유(李儒) 등을 영천(永川)에서 죽이고 개선하는 등 대몽항쟁기에 있어서 초기의 민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시기한 권귀(權貴) 등의 모함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출입을 끊었으며, 뒤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용력(勇力)이 있었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시호는 의열(義烈).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에 자리한 이유겸(李有謙)의 합장묘와 신도비.

유겸(有謙ㆍ1586~1663)은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悔)ㆍ송탄(松灘). 관찰사 지신(之信)의 손자이다. 처음 조수륜(趙守倫)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이때 성혼(成渾)의 학통을 받들었으며,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겼다. 재능이 많고 성격은 강직하며 우애가 깊었다. 광해군 때 스승 조수륜(趙守倫)이 화를 당하여 죽자 스승의 친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는데, 그가 예에 따라 습렴(襲殮)을 하였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죄를 입었으며, 이때 초야에 있으면서 당시 역(易)에 밝던 종실 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를 따라 하도(河圖)ㆍ낙서(洛書)와 괘화(卦怜)를 강구하여 깨쳤다.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때 상소로 죄를 입은 사실이 인정되어 6품직 유일(遺逸)로서 신령현감(新寧縣監)이 되었으며, 그 뒤 공조좌랑ㆍ함흥판관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며, 벼슬은 호조참의(戶曺參議)에 이르렀다. 만년에 관직을 사양하고 한가로이 지내면서 기영회(耆英會)를 만들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유겸(有謙)의 아들 영(翎ㆍ1615~1637)은 자는 거원(擧遠), 호는 우송재(友松齋)로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참봉(參奉)으로 아버지와 함께 강화(江華)에 들어가서 의병이 되어 광진(廣津)을 수비, 성이 함락되자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가족과 함께 길상산(吉祥山)으로 파란 도중 적을 만나 아버지와 함께 적과 대항, 아버지가 죽은 후 적의 포로가 될까 염려하여 불에 뛰어들어 화상을 입은 어머니를 업고 형 핵(?)과 도망하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아내 오씨(吳氏), 형수 김씨(金氏)도 자결했다. 이에 충절(忠節)로써 정문(旌門)에 세워지고,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 충헌공(忠獻公) 이숙의 간찰.

영(翎)의 동생 숙(肅+羽ㆍ1626~1688)은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정(逸休亭)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11세의 어린 나이로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잡혀 갔다가 사신으로 간 이덕인(李德仁)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인조 26년(164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종 6년(1655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 수찬(修撰)ㆍ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현종 8년(1667년) 집의(執義)로 있을 때 청나라 조정이 청나라 도피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조선에 책임을 물어 당시의 재상들을 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지탄을 받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진주사(陳奏使) 허적(許積) 등이 그 책임을 오히려 왕에게 돌리자, 그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크게 꾸짖고 처벌하도록 청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들을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던 김징(金澄) 등 7인과 함께 8간신(諫臣)으로 불렸다.



1670년 호조참의ㆍ승지를 거쳐 1673년 대사간이 되었으며, 1674년 서인이 실각하여 삭출되었으나 뒤에 다시 등용되어 숙종 6년(1680년) 대사헌ㆍ형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이조판서ㆍ대사헌을 거쳐 예조판서ㆍ좌참찬ㆍ대사헌ㆍ이조판서ㆍ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11월 동지사(同知事)를 지냈으며, 1687년 2월 대사헌으로 국왕에게 왕통을 이을 후사를 얻도록 정욕을 절제하여 후사를 구하는 도를 진술하고, 아울러 종학(宗學)이 폐한 지 오래 되었으니 종부시(宗簿寺)의 관원을 엄선하여 종래 종학 관원을 대신하여 가르치는 임무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해 5월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8월 우의정에 올랐다. 전국에 막대한 전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며, 대구의 상덕사(尙德祠)와 안의의 성천서원(星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에 자리한 충헌공(忠獻公) 이숙의 묘와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로 재임시(1672~1673) 선정을 기리기 위해 경상감영에 세웠다 1907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상덕사(尙德祠)로 이전된 선정비.

재(縡)의 손자 채(采ㆍ1745~1820)는 자는 계량(季良), 호는 화천(華泉)으로 영조 50년(177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휘령전 참봉(徽寧殿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뒤 사헌부(司憲府)ㆍ호조ㆍ형조의 벼슬을 거쳐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ㆍ음죽현감(陰竹縣監)을 지내다가 무고를 받고 파직되었다. 정조 14년(1790) 다시 벼슬에 올라 홍릉령(弘陵令)에 기용되었으며,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나가 둑을 쌓아 농사에 도움을 주어 주민들이 그 둑을 이공제(李公堤)라 하였다. 그후 선산부사(善山府使), 상주ㆍ충주ㆍ황주의 목사를 역임하고, 1800년에 세자익위사 위수(世子翊衛司衛率)ㆍ사어(司禦) 등의 관직을 거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황주부사(黃州府使)를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ㆍ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부총관(副摠管)을 겸했다. 저서로 ‘화천집(華泉集)’ 16권 8책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

▲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 영정(左)과 손자인 문경공(文敬公) 이채(李采) 영정.

상적(尙迪ㆍ1804~1865)은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으로 원외랑공파(員外郞公派) 연직(延稷)의 맏아들이며,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잡과에 급제하였으며, 12번이나 중국을 다녀왔다. 헌종 13년(184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정조ㆍ순조ㆍ헌종 대의 ‘국조보감(國朝寶鑑)’ 간행에 참여하였다. 철종 13년(1862년) 왕의 특명으로 영구히 지중추부사직을 받았다. 역관으로서 여러 번 중국을 다녀오면서 청(淸)나라의 서화ㆍ금석 등을 들여왔으며, 오곤량(吳崑梁)ㆍ유희해(劉喜海)ㆍ옹방강(翁方綱) 등과 교유하였다. 청나라에서도 명성을 얻어 시문집인 ‘은송당집(恩誦堂集)’을 중국에서 간행하였으며, 특히 헌종도 애송했으므로 그의 문집을 ‘은송당집(恩誦堂集)’이라고 이름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ㆍ국보 제180호)’는 59세 때 그린 작품으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상적(尙迪)의 인품을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며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그 발문에는 ‘그대와 나와의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내가 귀양을 온 후에도 변함없는 그대의 보살핌에 더욱 감사한다’고 극찬한 발문에서 상적(尙迪)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유묵과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그려준 세한도(歲寒圖ㆍ국보 제180호).

??완용(完用ㆍ1858~1926)은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으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며, 석준(奭俊)의 아들로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에게 입양되었다. 고종 19년(1882년) 증광문과에 급제, 주서ㆍ규장각대교ㆍ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으며 1886년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 박정양(朴定陽)을 수행하여 미국에 건너갔다가 귀국한 뒤 부승지ㆍ이조참의 등을 지내고, 1888년 주차미국참찬관ㆍ대리공사를 지냈다. 1890년 돌아와 대사성ㆍ중추원의관(中樞院醫官) 등을 지내고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이범진(李範晉)과 함께 친러파로서 외부대신에 올라 학부대신ㆍ농상공부대신서리를 겸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있다가 친일파로 변신, 1905년 학부대신이 되어 일본의 을사늑약 체결 제의를 앞장서 지지, 체결하게 하였다.

그해 12월 의정대신 겸 외부대신서리를 지내고 순종 1년(1907년) 의정부참정으로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쳤으며,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ㆍ궁내부대신서리를 겸했다. 헤이그특사사건 뒤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해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으며, 1909년 이재명(李在明)의 칼에 맞아 부상당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전권위원이 되어 한일합병조약을 체결, 일제에게 나라를 넘겨주었다. 그 공으로 일제에 의해 백작이 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이 되었으며, 3·1운동 때 독립투쟁을 비난하며 경고문을 발표하는 등 매국행위를 계속했다. 1925년에 황해도 장단군에서 시조 이공정(李公靖)의 묘를 찾아내 크게 개축한 일이 있는데, 이공정의 23대손이다.

▲ 영친왕과 이완용(영친왕 왼쪽 뒤) 내각.

우봉 이씨(牛峰李氏)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40명, 상신 1명, 문형 1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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