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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용인 이씨(龍仁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용인 이씨(龍仁李氏)의 연원
 

용인 이씨(龍仁李氏)의 시조인 이길권(李吉卷)에 대해서 정사(正史)에 전하는 기록은 없다. 단지 용인 이씨의 세보(世譜)에 그의 행적이 전할 뿐이다. 세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신라 효공왕 8년(904년)에 용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남달리 학식과 재능이 뛰어났다. 특히 천문지리에에 밝았고, 당시의 저명한 도승인 도선대사(道詵大師)와도 긴밀한 교분을 나누며 학문과 경륜을 닦았다고 한다.

왕건의 요청으로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태봉국의 궁예(弓裔)를 치고 동예(東濊)의 고부이오환(古扶伊梧桓) 등을 정복하는 등 삼한통일(三韓統一)에 공을 세웠으며, 훗날 왕건이 고려의 태조가 되었을 때 그의 공로를 잊지 않고 개국공신으로서의 예우로서 식읍(食邑) 500호를 하사하고 산성군(山城君)에 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후한 봉록은 오히려 짐이 된다”고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그 뒤에 왕건은 다시 그의 인품을 추앙하여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숭록대부 태사(駒城伯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崇祿大夫太師)의 품계를 하사하였고, 구성백(駒城伯)에 봉해졌다. 또한 왕건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고려조의 첫 부마(附馬)가 되었다고 전한다. 평소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던 그는 훗날 다시 고향인 용인(龍仁)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내다가 목종 18년(1008년)에 105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으며,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안곡공(安穀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손들도 그를 시조로 모시고, 그가 살았던 용인(龍仁)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리에 자리한 시조 이길권(李吉卷) 발상지비(發祥地碑).

용인 이씨는 고려조 이후 대대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용인을 빛낸 대표적인 가문으로, 부사공파(府使公派)ㆍ부사공계종파(府使公繼宗派)ㆍ부정공파(副正公派)ㆍ사용공파(司勇公派)ㆍ사직공파(司直公派)ㆍ소경공파(少卿公派)ㆍ순위공파(巡衛公派)ㆍ승랑장공파(勝郞將公派)ㆍ주부공파(主簿公派)ㆍ참판공파(參判公派)ㆍ초산파(楚山派)ㆍ판관공파(判官公派)ㆍ현감공파(縣監公派)로 분파되었다.

고려조의 효공(孝恭)은 정종 때 문화시랑(門下侍郞)을, 현후(鉉候)는 인조 때 평장사(平章事)를, 광시(光時)는 충숙왕 때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다.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리에 자리한 중시조 이중인(李中仁)의 묘. 용인시향토유적 제60호.

광시(光時)의 아들 중인(中仁)은 일찌기 큰 뜻을 품고 학문과 덕량을 닦은 그는 당시에 팔현(八賢)이라고 불리워졌던 이조년(李兆年)ㆍ이숭인(李崇人)ㆍ김주(金澍) 등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서로 스승이 되고 벗이 되는 등 덕망 높은 학자로 추앙되었다. 정몽주(鄭夢周)와 이색(李穡) 등이 그에게 경서(經書) 및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배웠으며, 같은 시대의 학자 이백겸(李伯謙)은 그를 한번 만나보곤 “그대의 흉중에는 진시황(秦始皇)과 초패왕(楚覇王)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의 호가 진초(秦楚)로 불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관직이 통직랑 홍부도감판관(通直朗弘副都監判官)에까지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정이 문란해짐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와 오직 학문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그에게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구성부원군(三韓璧上功臣三重大匡駒城俯院君)의 품계를 내리고 국정을 보필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는 고려조의 신하다.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거늘 어찌 그대의 청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며 개성의 광덕산(光德山) 서쪽 기슭에 위치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이들 72명의 고려 충신들이 절의만을 고집하자 개국공신인 조준ㆍ정도전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두문동을 불태워 위협하기에까지 이르자, 그는 양주군 별내면에 있는 송산(松山)에 들어와 조윤(趙胤)ㆍ김주(金澍)ㆍ원선(元宣)ㆍ김양남(金揚南) 등과 함께 절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중인(仲仁)의 맏아들 사영(士穎ㆍ?~1406)은 호는 평은(平隱)으로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ㆍ안동부사(安東府使)ㆍ형조전서(刑曹典書)를 거쳐 공양왕 3년(1391년) 밀직사우대언(密直使右代言)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가 격살된 후 당여(黨與)로 몰려 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 등 56인과 함께 1392년 7월에 전북 남원으로 유배되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중인(中仁)의 ‘이씨 왕조에서는 벼슬하지 말라’는 유훈을 지켜 조선 건국 이후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매산리에 자리한 이사위(李士渭)의 묘. 용인시향토유적 제63호.

중인(中仁)의 2남 사위(士渭)는 고려 공민왕 9년(1360년) 과거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으며, 공양왕 2년(1390년) 왕이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을 때 참찬관(參贊官)이 되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이듬해에는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를 지냈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조 5년(1396년)에 도성축조 일을 맡아보던 관리를 때려서 옥에 갇힌 일이 있었으며, 이색(李穡)과 친교가 있어 ‘목은집(牧隱集)’에 그에 관한 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에 자리한 이백지(李伯持)의 묘. 용인시향토유적 제57호.

사위(士渭)의 아들 백지(伯持ㆍ1361~1419)는 우왕 11년(1385년) 문과 동진사(同進士ㆍ丙科에 해당)에 제12위로 급제하였다. 태종 9년(1409년) 성주목사로 재직하면서 백성을 동원하여 관둔전(官屯田)을 경작하도록 하였다가 경차관(敬差官)에게 적발되어 중도부처(中途付處ㆍ유배 도중 죄의 가벼움으로 도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형벌제도)되었다. 1419년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병으로 사임한 뒤 그 해 12월에 죽었으며, 조정에서 종이 70권을 치부(致賻)하였다.

▲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에 자리한 이승충(李升忠)의 묘.

승충(升忠ㆍ1398~1481)은 호는 은재(隱齋), 아버지는 지영천군사(知永川郡事) 백찬(伯撰), 세종 2년(1420년) 입사하여 예빈시 녹사(禮賓寺錄事)ㆍ사복시 직장(寺僕寺直長)ㆍ판관 및 소윤을 역임하고 3군 호군에 승진하였다. 1450년 전라도점마별감(全羅道點馬別監)으로 파견되어 마정을 점검, 이후 문종 2년(1452년)까지 겸사복(兼司僕)을 겸대하면서 국왕을 시종하였다. 세조 1년(1455년) 호분위상호군(虎賁衛上護軍)의 군직으로 인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된 뒤 곧 향리에 퇴거하였다. 1467년 세조(世祖)의 부름을 받고 70 고령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으며, 82세에 노인가자(老人加資)로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 장양공(壯襄公) 이일(李鎰)의 유묵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매산리에 자리한 정부인 전주 이씨와의 합장묘.

일(鎰ㆍ1538~1601)은 자는 중경(重卿)으로 관찰사 백지(伯持)의 후손이다. 명종 13년(1558년) 무과(武科)로 급제,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선조 20년(1587년) 함경도북병사로 니탕개(尼湯介)가 북변에 침입해 경원(慶源)을 함락하고 종성(鍾城)을 포위하자, 특명으로 경원부사(慶源府使)가 되어 이를 격퇴했다. 1586년 니탕개가 다시 회령(會寧)에 침공하자 회령부사(會寧府使)로서 그 본거지를 소탕하는 등 공을 세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순변사(慶尙道巡邊使)로 왜군을 상주(尙州)ㆍ충주(忠州)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하였다.

조정에서 패전에 대한 처벌이 주장되기도 했지만 용서받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ㆍ훈련원지사(訓鍊院知使)를 지내면서 군사조련에 힘썼다. 그후 임진강(臨津江)ㆍ평양(平壤) 등지를 방어하고 동변방어사(東邊防禦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원병과 함께 평양(平壤)을 수복했다. 서울 탈환 후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그 좌지사(左知事)로 군대를 훈련했고, 뒤에 함경북도 순변사와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 등 3도 순변사를 지냈으며 무용대장(武勇大將)을 역임했다. 1600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01년 부하를 죽였다는 살인혐의로 호송되던 중 병을 얻어 정평(定平)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증보제승방략(增補制勝方略)’이 있다. 시호는 장양(壯襄).

 

▲ 1588년 정월 장양공(壯襄公) 이일(李鎰)이 여진족 시전부락을 토벌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손자가 그린 장영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가 색이 바래고 낡아 1849년 다시 그렸다.

사경(士慶ㆍ1569~1621)은 자는 이선(而善), 호는 쌍곡(雙谷)으로 생원(生員) 계인(啓仁)의 아들이다. 선조 23년(1590년) 생원(生員)이 되고, 160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전적(典籍)ㆍ정언(正言)ㆍ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조 38년(1605년) 삼화현령(三和縣令)으로 부정이 심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ㆍ지평(持平) 등을 역임한 뒤 광해군 5년(1613년)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되었으나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란하였던 관사(官舍)에 불이 났으므로 파직되었다. 광해군 10년(1618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이때 경상도 관찰사 윤훤(尹暄), 충청도 관찰사 이춘원(李春元) 등이 올린 서장(書狀)에 이미 폐위된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해 여전히 대비(大妃)의 존칭을 쓴 사실을 묵인한 죄로 대북(大北)의 탄핵을 받자 벼슬을 사퇴했다. 승지(承旨), 병조와 예조의 참의(參議) 등을 역임, 당시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과 친척간이었으나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청렴하여 존경을 받았다.

▲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내리에 자리한 쌍곡(雙谷) 이사경(李士慶)의 묘.


용인 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83명, 상신 3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하였다. 역사상 대표적 인물인 세백(世白ㆍ1635∼1703)은 자는 중경(仲庚), 호는 우사(雩沙)ㆍ북계(北溪), 목사 정악(挺岳)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외증손이다. 효종 8년(165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송준길(宋浚吉)의 가르침을 받았다. 현종 7년(1666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서 홍천현감에 이르렀으며, 숙종 1년(167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1년 지평이 되고 그뒤 정언ㆍ교리ㆍ이조좌랑ㆍ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1684년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그곳 백성들이 이원익(李元翼)의 사당에 함께 제사하였다.

그뒤 1687년 수어사와 도승지를 비롯하여 공조참판ㆍ대사간 등을 거쳐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에 도승지로 있으면서 송시열(宋時烈)의 유배에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도승지로 복관되어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ㆍ한성부 판윤을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호조ㆍ이조판서 등을 거쳐 1698년 우의정에 올랐고, 1700년에는 좌의정이 되어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아들 의현(宜顯)과 연달아 정승이 된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예학(禮學)에 밝아 국가의 중요 예론에 깊이 참여하였다. 특히 노론의 중심인물로서 소론ㆍ남인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중요한 몫을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에 자리한 충정공(忠正公) 이세백(李世白)의 묘와 유묵.

세백(世白)의 아들 의현(宜顯ㆍ1669~1745)은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으로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숙종 20년(1694년) 별시문과에 급제, 1696년 검열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황해도 관찰사ㆍ도승지 등을 지내고, 경종이 즉위하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1722년 신임사화(同義禁)로 운산(雲山)에 유배, 1725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풀려나와 형조판서로 서용되었다. 1727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추방되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고, 이어 1732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5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삭직되었으나 이듬해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어 반란관련자에 대한 치죄를 담당하였고, 1732년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11년(1735년) 특별히 영의정에 임명되어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命) 두 대신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는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 삭직되었다가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의 구원으로 판중추부사로 서용되었고, 173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냈다. 1742년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청백리로 이름났다. 글씨에 능하였으며, 저서로 ‘도곡집(陶谷集)’ 32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 경기도 남양주시 어패동에 자리한 문간공(文簡公) 이의현(李宜顯)의 묘와 문간(文簡)의 시호를 내린 교지.

보혁(普赫ㆍ1684~1762)은 자는 성원(聲遠).으로 좌의정 세백(世百)의 재종손(再從孫)이다.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평양부윤이 되었는데 영조 1년(1725년) 부정혐의로 관직이 삭거되었다. 그뒤 성주목사로 기용되었다가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우방장(右防將)으로 영남에서 기병한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었으며 인평군(仁平君)에 봉해졌다. 1733년에 동의금(同義禁)ㆍ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1736년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738년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로 재직 중 남형(濫刑)을 한 죄로 파직되었다. 1740년 풍덕부사(豊德府使)ㆍ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의금부 도총관과 한성부 판윤ㆍ공조판서가 되었다.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있을 당시 손자 재협(在協)이 과거에 급제하니 조정에서 삼부자 즉, 삼대가 과거급제한 것을 가상히 여겨 선조대왕의 특명으로 판돈령 부사에 특배되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에 자리한 충정공(忠貞公) 이보혁(李普赫)의 묘.

보혁(普赫)의 아들 경호(景祜ㆍ1705~1779)는 초명은 경조(景祚), 자는 효석(孝錫)으로 양명학(陽明學)의 사상적 체계를 정립한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이다. 영조11년(1735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1753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판결사(判決事)ㆍ대사간을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대사헌 및 병조ㆍ예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영조 38년(1762년)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인양군(仁陽君)을 습봉(襲封)해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호조ㆍ예조ㆍ병조의 판서, 좌참찬(左參贊)ㆍ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지냈다. 70세가 되어 아들 재협(在協)에 의하여 시종(侍從)의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더해지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정조 2년(1778년) 홍국영(洪國榮)의 누이 원빈 홍씨가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가례가 이루어지자 병을 이유로 가례청 당상(嘉禮廳堂上)의 자리를 체직하였으며, 같은 해 7월 명릉(明陵)의 보살핌을 게을리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에 자리한 이경호(李景祜)의 묘.

 

 

▲ (左)문간공(文簡公) 이의현(李宜顯) 영정. (右)인릉군(仁陵君) 이재협(李在協) 영정.

보혁(普赫)의 손자이자 경호(景祜)의 아들인 재협(在協ㆍ1731~1790)은 자는 여고(汝皐)로 음보(蔭補)로 통덕랑(通德郎)이 되고, 영조 33년(175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ㆍ교리(校理)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뒤, 1760년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호서(湖西) 지방을 순찰하였다. 이어 홍문관 교리로서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ㆍ문학(文學)을 겸임하였고, 헌납(獻納)ㆍ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대사간ㆍ승지(承旨)를 거쳐,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정조 5년(1781년) 병조판서로 승차(陞次)한 뒤 인릉군(仁陵君)에 봉해졌으며, 1787년 우의정을 거쳐 곧 좌의정이 되었고, 1789년 영의정에 올랐다.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에 자리한 인릉군(仁陵君) 이재협(李在協)의 묘.

교악(喬岳ㆍ1653~1728)은 자는 백첨(伯瞻), 호는 석음와(惜陰窩),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숙종 22년(1696년) 사마시를 거쳐, 숙종 31년(1705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하여 지평(持平)이 되었다. 1712년 이후 정언ㆍ좌승지ㆍ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경종 즉위년(1720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이 때 소론의 윤증(尹拯)이 노론을 탄압하고 송시열의 사원을 철폐하자 이를 통탄하며 항변하다가 경산에 유배, 이어 동래에 이배되었다. 영조 1년(1725년)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 예조참의ㆍ도승지ㆍ대사간ㆍ형조참판 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 때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대사헌의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지내다가, 영조 4년(1728) 소론의 일파인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울분 끝에 분사(憤死)했다.

▲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도하리(살구골)에 자리한 석음와(惜陰窩) 이교악(李喬岳)의 묘.


의철(宜哲ㆍ1703~1778)은 자는 원명(原明), 호는 문암(文庵), 좌랑(佐郞) 세운(世運)의 아들로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영조 3년(1727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이어 장릉참봉(長陵參奉)ㆍ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등을 지냈다. 1748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대사간을 거쳐 승지로 취임하였다. 1769년 왕은 홍봉한(洪鳳漢)에게 “철이 고서를 많이 읽고 성격 또한 침착하고 깨끗한데 너무 오랫동안 침체시켜 두었다.”고 말하면서 발탁의 뜻을 비춘 뒤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그 해 전라도 광주지방 유생들이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서 출척하려고 상소하자 지배층의 노여움을 사 박해를 받았는데, 그 곳 유생들을 옹호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1775년 다시 승지가 되고, 영조가 승하하자 그의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을 짓기 위하여 찬집청(撰集廳)을 세웠는데, 이때 채제공(蔡濟恭) 등과 같이 당상(堂上)이 되어 이를 주관하였다. 그 뒤 대사헌ㆍ대사성ㆍ예조판서ㆍ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 문암(文庵) 이의철(李宜哲)의 유묵.

재학(在學ㆍ1745~1806)은 자는 성중(聖中), 호는 지포(芝浦), 예조판서 숭우(崇祐)의 아들이다. 영조 46년(177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수찬(修撰)ㆍ교리(校理)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76년에는 시독관(侍讀官)으로, 정조 4년(1780년)에는 대사간으로 각각 있으면서 왕에게 간언을 서슴치 않았고, 또한 중앙정계의 관리기강에 힘썼다. 그 후 여러 조(曹)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793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5년에는 형조판서에 승진해 의옥(疑獄) 사건을 잘 다스려 명형관(名刑官)으로 유명했고, 척신(戚臣) 김구주(金龜柱)의 역모를 탄핵, 유배되게 했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산릉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으로 공사(工事)를 감독했으나 벽파(僻派)로부터 공사가 지연되었다는 탄핵을 받고 가산(嘉山)에 유배, 이듬해 온성(穩城)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순조 5년(1805년)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문장과 글씨에는 일가를 이루었으며, 시호는 익헌(翼獻).

▲ 익헌공(翼獻公) 이재학(李在學)의 간찰.

조선 후기 화가인 재관(在寬ㆍ1783~1837)은 자는 원강(元綱), 호는 소당(小塘)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여 그림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벼슬은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헌종 2년1836년) 영흥(永興) 선원전(璿源殿)의 태조 어진(御眞)이 도적에 의해 훼손된 것을 복원한 공으로 등산진 첨절제사(登山鎭僉節制使)가 되었다가 사직, 이듬해 병사했다. 화조(花鳥)ㆍ초충(草蟲)ㆍ물고기 그림에 뛰어났으며, 초상화와 영모화(翎毛畵)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것이 없다. 대표작으로 ‘송하처사도(松下處士圖)’ㆍ미인사서도(美人寫書圖)’ㆍ귀어도(歸漁圖)’ㆍ천지석벽도(天池石壁圖)’ㆍ오수도(午睡圖)’ 등이 있다.

▲ 조선 후기 화가인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의 초엽제시(上)ㆍ송하처사도(左)ㆍ파초하선인(中)ㆍ어귀도(下).

삼현(參鉉ㆍ1807~?)은 자는 태경(台卿), 호는 종산(鐘山), 재익(在翼)의 아들이다. 순조 34년(1834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헌종 7년(184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 주서(弘文館注書)가 되었다. 1845년 도당회권(都堂會圈) 23인에 선발되었고, 이듬해 부사과(副司果)가 되어 진전작헌례(眞殿酌獻禮)에 참가하여 시상을 받았다. 철종 1년(1850년)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여 국권의 위엄을 보였으며, 철종 6년(1855년) 좌승지(左承旨)가 되었으나 대사헌 이경재(李經在)와의 논쟁으로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삭직(削職)되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1860년 대사성이 되었고, 1862년 진주민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선무사(宣撫使)가 되어 영남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고 관련된 관리들을 징치하였다. 고종 1년(1864년) 함흥부 안핵사(咸興府按?使)가 되어 북방의 민심을 무마하고 부세(賦稅)와 호역(戶役)을 경감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예조판서가 되었다. 저서로는 ‘종산집(鐘山集)’이 있으며, 고종 6년(1869년)에 ‘용인이씨족보(龍仁李氏族譜)’를 증보 간행했다.

▲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 부인이 다섯 딸에게 재산을 나눠준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ㆍ강릉시유형문화재 제9호).

원명(源命ㆍ1807~1887)은 자는 치명(穉溟), 초명은 원경(源庚), 형조판서 규현(奎鉉)의 둘째 아들로 순조 29년(182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철종 1년(1850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뒤 1852년 이조참의, 1855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60년 이조참판ㆍ형조판서ㆍ도총관(都摠管)을 거쳐 이듬해 형조판서로 재직 중 11월에 정사로 청나라에 갔다.

1862년 대호군ㆍ대사헌을 거쳐 이듬해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으며, 1864년 다시 대사헌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12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이듬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고, 고종 3년(1866) 2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그 뒤 이조판서가 되었다. 1867년 우참찬을 거쳐 1869년 공조판서ㆍ형조판서ㆍ우참찬ㆍ예조판서 등을 지내고, 1879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그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ㆍ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ㆍ판돈녕부사ㆍ공조판서ㆍ형조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동야휘집(東野彙輯)’ 8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