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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흥양 이씨(興陽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흥양 이씨(興陽李氏)의 연원

흥양(興陽)은 전남 고흥군(高興郡) 지방의 조선시대 행정구역명으로 고려 초에는 고이부곡(高伊部曲)이라 하였으며, 충렬왕 11년(1285년)에 고흥현(高興縣)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태조 4년(1935년)에 보성군 조양현(兆陽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397년에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로 현감(縣監)를 겸임하게 하였다. 세종 23년(1441년)에는 장흥부(長興府) 두원현(豆原縣)으로 바꾸고, 보성군 남양현(南陽縣)을 분할 편입하여 흥양(興陽)이라 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년) 군으로 고쳐 군수(郡守)를 두었으며, 1914년 고흥군으로 개칭하였다.

흥양 이씨(興陽李氏)의 시조(始祖)는 국자생원(國子生員) 이언림(李彦林)이다. 그는 고려 의종(毅宗) 3년(1149년) 병부상서(兵府尙書)와 공부상서(工部尙書)를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후, 흥양(興陽)에 정착ㆍ세거(定着世居)하였으며, 7세손 길(吉)이 충혜왕 때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져 흥양(興陽: 현재의 전남 고흥)을 관향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길(吉)을 ‘득본시조(得本始祖)’라 칭하여 흥양(興陽)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世譜)’를 보면 흥양 이씨(興陽李氏)의 시조 이언림(李彦林)이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의 5세손으로 기재되어 있다.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한(翰)ㆍ눌(訥)ㆍ진(瑨) 3형제를 두었고, 문경공(文景公) 한(翰)은 자연(子淵)과 자상(子祥)을 두었으며,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자상(子祥)은 예(預)와 오( )를 두었다. 그리고 문량공(文良公) 오의 아들 언림(彦林)이 흥양 이씨(興陽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주요 분파(分派)로는 개령파(開寧派), 군위파(軍威派), 단밀파(丹密派), 담양파(潭陽派), 무주파(茂朱派), 상주파(尙州派), 수원파(水原派), 의성파(義城派), 합천파(陜川派), 흥양파(興陽派) 등이 있다.

▲ (上)흥양 이씨 시조 상서공(尙瑞公) 이언림(李彦林) 제단(祭壇). (下)흥양군(興陽君) 이길(李吉) 제단과 찬성공(贊成公) 이서원(李舒原) 제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언림(彦林)의 손자 양승(陽升ㆍ?~1216)은 위위시승동정(衛尉寺承同正)을 지냈으며, 고려 고종 3년(1216년) 거란(契丹)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몽고에게 쫓겨 고려를 침공하자 상장군(上將軍) 김취려(金就礪)를 따라 정벌에 나섰다. 장흥역(長興驛)에서 적병을 격파하고, 박주(博州)에서 흥교역(興郊驛)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적이 다시 서경(西京)으로 침공해오자 이를 위주성(渭州城) 밖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전하여 1,00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이에 고종이 위위장군(衛尉將軍)을 추증하였다.

▲ 3세 위위장군(衛尉將軍) 이양승(李陽升)을 비롯한 8명의 공신을 제향하기 위해 1908년 흥양 이씨 문중에서 건립한 전남 고흥군 보천리 금성사(錦城祠).

이언림(李彦林)의 증손 원방(元邦)이 동정(同正)을 역임했으며, 7세 길(吉)이 문과에 올라 봉상대부(奉常大夫ㆍ정4품의 문관의 품계)를 거쳐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에 이르러 충혜왕 때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길(吉)을 ‘득본시조(得本始祖)’라 칭하여 흥양(興陽)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흥양 이씨의 묘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경북 상주시 낙동면 물양리 대사헌 이은(李垠)의 묘.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서원(舒原)은 이언림(李彦林)의 7세손이며, 서원(舒原)의 아들 균(均)이 문과에 올라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ㆍ경연과 장서를 맡아 본 정4품의 벼슬)에 이르렀다. 또한 대사헌 은(垠)의 아들인 언(堰)은 호는 낙빈(洛濱)으로 조선 세종 때 급제하여 집의(執義)ㆍ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ㆍ남원도호부사 겸 권농사(南原都護府使兼勸農使)ㆍ전주부윤(全州府尹) 등을 역임하였으며, 남원부사와 전주부윤 재임시에 청렴결백한 선정을 베푼 공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군위 문양서원(文陽書院)과 고흥 금성사(錦城祠)에 배향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양경(良敬).

▲ 경북 군위군 부계면 창평리에 자리한 양경공(良敬公) 이언(李堰)의 묘와 그를 제향하는 문양서원(文陽書院).

전(1558`1648)은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磵), 수인(壽仁)의 아들이다. 선조 13년(1580년)에 동생 준(埈)과 함께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한 유성룡(柳成龍)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주자학(朱子學)을 깊이 연구해 학명(學名)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준(埈)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가 동생을 데리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준(埈)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고 ‘급난도(急難圖)’라 이름하니, 당시의 명공·거경들이 이 일을 가영(歌詠)하였다고 한다. 선조 36년(160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지례현감(知禮縣監)이 되었으나 다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평생을 학문에 전심했다. 상주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 경북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에 자리한 월간(月磵) 이전의 묘와 묘비.

▲ 월간(月澗) 이전이 노년에 도를 가르치던 곳에 세워져 이전ㆍ이준 형제를 제향하는 경북 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체화당(?華堂ㆍ경북문화재자료 제178호).

?▲ 이전과 이준 형제의 우애를 묘사한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磵蒼石兄弟急難圖ㆍ경북도유형문화재 제217호). 임진왜란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년) 봄, 병으로 거동이 힘들던 동생 이준이 형인 이전에게 피신하여 가문을 보존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형은 동생의 부탁 대신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동생을 업고 백화산 정상으로 피해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후에 이준이 명나라에 가서 중국인에게 이야기를 하니 그들이 감동하여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림은 백화산을 배경으로 왜적이 산 아래 진을 치고 창검을 들어 형제에게 다가오자 형이 아우를 업고 떠나는 장면, 업고 가던 아우를 내려놓고 적들에게 활을 겨누는 모습, 산정상을 향해 아우를 업고 달리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원경(元卿ㆍ1573~1654)은 자는 여선(汝先), 호는 죽포(竹圃)로 첨정(僉正) 대록(大祿)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고향에서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 전심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에게 거병(擧兵)할 것을 권유하여 나가 싸우게 하고, 그는 노모를 봉양하면서 군수물자를 모아 싸움터에 보냈다. 효행(孝行)으로 전라도 관찰사 김광혁(金光赫)의 천거를 받아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가 되고, 그의 마을 앞에는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긴 표석(表石)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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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8년 고종이 정려를 내린 이만번(李晩蕃)ㆍ이만경(李晩景) 형제의 충효각(전북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 이종성(李鍾誠) 등 3명의 의병장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려 전북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마곡재)에 세워진 국의병장 사지상.

종성(鍾誠ㆍ1871~1910)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의병에 참가하였다. 1908년 덕유산을 근거지로 항쟁을 벌이던 의병장 문태수(文泰洙)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무주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4월 150여명으로 증강된 병력을 이끌고 장수에 들어가 관공서를 소각하였다. 1909년 5월 남원에서 1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헌병과 교전하였고, 8월 중순 문태수와 함께 영동ㆍ청산ㆍ옥천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으며, 10월 경부선 이원역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일본군 3명을 생포하였다. 겨울이 닥치자 월동에 대비하여 무주의 본거지로 돌아와 영동ㆍ금산ㆍ진안ㆍ장수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웠다. 이동안 문태수와 다수의 의병이 투옥되자 남은 병력을 규합하여 항전을 계속하다가 1910년 4월 18일 무주 흑석산(黑石山) 계곡에서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다수의 왜적과 교전하다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