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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단양 이씨(丹陽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단양 이씨(丹陽李氏)의 연원

단양 이씨(丹陽李氏)의 시조(始祖) 이배환(李盃煥)은 단산(丹山ㆍ단양의 옛 이름) 사람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는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는 상고할 수 없고, 고려에서 내시진전직(內侍眞殿直)을 지낸 그의 10세손 방규(方揆ㆍ일명 공비)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계대(繼代)해 오고 있다.

그후 14세손 판서(判書) 거경(居敬)의 아들 무(茂)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方遠)을 도와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계파로는 고양파(高陽派), 북청파(北靑派), 영동파(永同派), 영변파(寧邊派), 용천파(龍川派), 중화파(中和派), 진천파(秦川派), 황간파(黃澗派)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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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동사강목 제10권 고종 7년(1220년) 3월조에 기록된 “…그때 사람이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짓기를, 원순(元淳)의 글, 인로(仁老)의 시, 공로(公老)의 사륙문(四六文)…”. (右)??동사강목 제10권 고종 11년(1220년) 12월조에 “우부승선(右副承宣) 이공로가 졸하였다. 공로는 문장에 능하여 사륙체(四六體)를 잘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안변판관으로 등용되었는데, 사재를 내어 백성들의 부세를 대신 내주어…(중략)…여러 차례 벼슬을 옮겼는데, 가는 곳마다 흐르는 물처럼 일을 잘 처리하니 백성들이 많이 칭송하고 복종하였다. 승선(承宣)이 되자 왕은 신임하여 심복으로 삼아서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서 졸하였다. 집에는 한두 섬의 곡식도 없었다.”

공로(公老ㆍ?~1224)는 자는 거화(去華)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안변판관(安邊判官)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사의서승(司儀署丞)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올랐다. 왕의 외척에 관련되었다 하여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오랫동안 등용되지 않으므로 그의 아버지 상재(尙材)가 최충헌에게 뇌물을 바쳐 감문위장사(監門衛長史)가 되었다. 고종초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상장군(上將軍) 조충(趙沖)의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어 적을 사로잡는 계책을 세워 적중한 것이 많았으며, 고종 6년(1219년) 한순(韓恂)ㆍ다지(多智) 등이 의주(義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선무사(宣撫使)가 되어 공을 세웠다. 이후 비서소감(秘書少監)ㆍ경상도안찰사ㆍ전중감(殿中監) 등을 거쳐 1222년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이 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고려 문학계의 중진으로 특히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에 능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34권에 실린 1390년 왜적이 전라도에 침입했을 때 절제사 이무(李茂)가 이를 물리치고 적의 머리 27급을 베었다는 기록.

▲ 익평공(翼平公) 이무(李茂)의 유묵.

 

 

무(茂ㆍ?~1409)는 자는 돈부(敦夫), 호는 중정(中亭)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우왕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으나, 유배된 조영길(趙英吉)이 도망간 것을 알고도 고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공양왕 때 이인임(李仁任) 일파로 몰려 곡주(谷州)에 유배되었으며, 조선 개국 뒤 다시 기용되어 태조 2년(1393년) 개성부윤(開城府尹)을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고, 1396년에는 도체찰사로서 이키섬[壹岐島]ㆍ쓰시마섬[對馬島]의 왜구를 토벌했다. 1398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세자 방석(芳碩)의 보필을 맡고 있던 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 등이 남은의 첩의 집인 송현(松峴ㆍ松峴洞)에 모여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방원(芳遠)에게 밀고하여 그들을 급습, 평정한 공로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정종 2년(1400년) 동북면도순문사 겸 영흥부윤(東北面都巡問察理使兼義興府尹)이 되었고, 같은 해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 방원을 도와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태종 2년(1402년) 우정승이 되었으며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가 되었다. 1406년 현존하는 동양 최초의 세계지도인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김사형(金士衡)ㆍ이회(李?) 등과 함께 편찬했다. 1408년 병으로 사직, 이듬해 태종의 처남인 민무질(閔無疾)ㆍ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원(昌原)에 유배되었다가 안성군 죽산(竹山)에 옮겨져 사형되었으며,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그는 문관으로 입신하였으나 문무를 겸비하여 왜구의 격퇴와 대마도 정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시호는 익평(翼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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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에 자리한 익평공(翼平公) 이무(李茂)의 묘. 고양시향토유적 제9호.

무(茂)의 손자 숙균(淑均ㆍ1397~1448)은 자는 균평(均平)으로 아버지는 춘천부사(春川府使) 공지(公祗)이다. 세종 5년(1423년)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외직(外職)을 맡아 많은 공을 세웠는데, 특히 서방(西方)을 지키는 방책을 자주 올려 당시 국방정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종 8년(1426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여 서민을 위한 탁월한 정치를 하였으며, 여가를 이용하여 군민에게 무기와 기술 및 인재양성에 주력하여 고과(考課)가 최고였다고 한다. 후일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임지에 나가기 전에 세상을 뜨므로, 세종은 그의 공을 높이 여겨 가선대부 한성판윤(嘉善大夫漢城判尹)에 증직(贈職)하고 예장(禮葬)을 하였다. 시호(諡號)는 회옹(晦翁).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원당읍 식사동 회옹공(晦翁公) 이숙균(李淑均)의 묘. 고양시향토유적 제50호.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겸(謙)과 지시(之詩), 정립(挺立)이 뛰어났다.


겸(謙ㆍ생몰년 미상)은 자는 자익(子益), 호는 손재(遜齋)로 집의(執義) 맹지(孟知)의 아들이다. 연산군 7년(1501년) 진사(進士)가 되고, 중종 2년(1507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흥덕현감(興德縣監)ㆍ장령(掌令)ㆍ사성(司成)을 거쳐 중화부사(中和府使)에 이르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장령(將令)으로서 대사성 유운(柳雲)과 조광조(趙光祖) 등을 변호하는 극렬한 상소를 올려 파직되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지며, 영조(英祖) 때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 손재(遜齋) 이겸(李謙)의 간찰.

지시(之詩ㆍ?~1592)는 자는 영이(詠而), 호는 송암(松庵), 아우 지례(之禮)와 더불어 문재와 무예에 다같이 뛰어났다. 선조 즉위년(1567년)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여 훈련원정(訓練院正)이 되었다가 문장에 뛰어나 동반직(東班職)에 전임되어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곧이어 문무가 겸비한 것을 인정받아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다. 선조 16년(1583년) 이성현감(利城縣監)으로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慶祿)의 조방장(助防將)으로 경상도에서 여러 번 싸워 공을 세웠으며, 청주가 함락되고 적이 수원에 웅거하자 이를 격퇴하기 위하여 백광언(白光彦) 등과 함께 분전하다가 아우 지례(之禮)와 더불어 모두 전사하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정되고 병조참판의 추증을 받았다가 후에 다시 형제 모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태인(泰仁) 모충사(慕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경의(景毅).


▲ (上)경의공(景毅公) 이지시(李之詩)와 아우 이지례(李之禮)를 제향하는 충남 부여군 남면 내곡리 동절사(同節祠). (下)전북 정읍시 옹동면 산성마을에 자리한 모충사(慕忠祠)는 1667년 백광언(白光彦)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1702년 이지시 형제를 추배하였다. 현 건물은 1868년 훼철된 것을 1979년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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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립(光立ㆍ생몰년 미상)은 무과에 급제하여 용맹하면서도 박식하고 사려가 깊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정묘호란 때 용골성(龍骨城)의 수성좌수(守城坐首)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부사 장사준(張士俊)이 이웃 성의 패배를 보고 적에게 투항할 태도를 취하자 사태수습을 위하여 나섰다. 마침 정봉수(鄭鳳壽) 형제가 해도(海島)로부터 이르자 이들과 함께 충의를 다짐하고, 정봉수를 의병장으로 하고 자신은 참모가 되어 장사준을 참하고 용골성을 지켰다. 이로부터 성세를 크게 떨쳤으며, 싸움을 할 때마다 이김으로써 창주첨사(昌州僉使)에 제수되고, 가의대부에 올랐다. 인조 11년(1633년) 경중명(耿仲明)의 난에 양서(兩西)의 전선(戰船)을 총지휘하기도 하였으며,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광립(光立)의 아우 정립(挺立ㆍ?∼1627)은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內禁衛)에 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경기도 소사(素沙)에서 있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훈련판관(訓鍊判官)이 되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올랐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종록(安宗祿)ㆍ장희준(張凞俊)ㆍ김우(金佑) 등과 함께 의병 3,000여 명을 모아 소위포(小爲浦)에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해 온 후금의 군사를 맞아 3일간의 혈전 끝에 많은 적병을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듣고 가도(?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明)나라의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은 직접 그를 찾아와서 그 승리를 축하해 주고, 승전의 사실을 조선 조정과 명나라에 보고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상으로 은자패(銀子牌)를 보냈고, 모문룡의 주둔지에서도 많은 조총과 탄약, 쌀과 포목, 은화(銀貨) 등을 보내왔다. 그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인산진 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의 직위를 제수받고 압록강 어귀에 있는 대계도(大鷄島)에 진을 치고 있던 중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인 1648년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영조 12년(1736년)에 안주(安州)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