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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청주 이씨(淸州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청주 이씨(淸州李氏)의 연원
 

청주 이씨(淸州李氏)의 시조 이능희(李能希)는 고려개국공신으로 벽상삼한 삼중대광 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를 지냈으며, 그의 선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사(高麗史)’ 이공승전(李公升傳)에는 이름이 희능(希能)으로 되어 있는데, ‘양촌집(陽村集)’과 문간공신도비(文簡公神道碑)에서 권근(權近)은 능희(能希)라 하여 이를 따르고 있다. 식읍(食邑) 3000호를 하사받았으며, 태조 원년(918년) 8월 개국공신 2등으로 지정되어 금은 그릇, 비단 등을 하사받았다. 시호(諡號)는 안도공(安度公)으로 묘(墓)가 없는 것으로 보아 화장법을 따른 듯하다.

이능희(李能希)의 10세손 계감(季?)은 낭성군(琅城君)에 봉해졌으며, 13세손 애(?)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ㆍ상당은 청주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런데 ‘관북파보(關北派譜ㆍ丁酉譜)’의 서문에 6세 문정공(文貞公) 공승(公升)의 둘째 아들 평장공(平章公) 계장(桂長)이 입북 세거하여 청주 이씨 관북파가 생겼다고 하고 있어 그 이전에 이미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은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계감(季?)의 동생 계성(季成)이 보은군(報恩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분적한 보은 이씨(報恩李氏)도 통합하였다.

▲ 시조 이능희(李能希)를 제향하기 위해 1815년 세운 충남 홍성군 홍동면 화신리 화신사(花新祠)에는 2~10세조도 배향하였으며, 매년 음력 9월 마지막 주일에 봉향한다.

▲ 청주 이씨(淸州李氏) 세보(世譜). ?

 

세계(世系)에 기록된 이들과는 달리 고려초 청주(淸州)출신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에 왕가도(王可道)가 있다. 그는 본래 이가도(李可道)였다. 성종 때 과거에 급제, 첨지정사(僉知政事)에 올라 상주국 개성현 개국백(上柱國開城縣開國伯)에 봉해지고 왕실의 성인 ‘왕(王)’을 사성받았다. 왕가도(王可道)는 이능희(李能希)의 아들 겸의(謙宜)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와 이능희(李能希)로 연결되는 청주 이씨와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이능희(李能希)의 아들 겸의(謙宜ㆍ생몰년 미상)는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고, 성종 3년(984년) 주농경(主農卿)으로 형관어사(刑官御事)가 되었다. 그 해 왕명을 받아 압록강안에 성을 쌓아 북방의 관성(關城)을 삼으려 하였는데, 이것을 방해하려는 여진의 습격을 받아 그들에게 포로가 되어 성을 쌓던 군사들도 흩어져 성을 쌓지 못하였다.

이능희(李能希)의 손자 원심(元審)은 벼슬이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고, 증손(曾孫) 중강(仲降)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또한 중강(仲降)의 손자인 공승(公升ㆍ1099~1183)은 자는 달부(達夫)로 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 의종 2년(1148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당시 사절수행의 군사에게 은 1근씩을 거두는 게 상례였으나 전혀 거두지 않아 청렴함을 보였다. 이듬해 우사간 지제고(右司諫知制誥)가 되고 1155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고시관을 맡아 김단보(金端寶) 및 황문장(黃文莊) 등을 합격시켰다. 1165년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秦事)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좌천되고,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ㆍ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치사(致仕)했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화를 모면했으나 명종 3년(1173년) 김보당(金甫當)의 반무인란(反武人亂)으로 다시 문관탄압이 재개되자 불일사(佛日寺)에 숨어 있다가 이의방(李義方)에게 잡혔으며, 의종 때에 연복정(延福亭)의 대역사를 일으켰을 때 원망을 사 이의방이 죽이려 하였으나 문생(門生) 문극겸(文克謙)의 힘으로 모면하였다. 1175년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오르고 이어 치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

 

 

▲ 벼슬에서 물러나 진천에서 살다가 죽은 문정공(文貞公) 이공승(李公升)을 기려 1726년 세운 충북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사양영당(思陽影堂)과 비석군.

청주 이씨(淸州李氏)는 공승(公升)의 아들대에 이르러 비로소 두 파로 나누어지는데, 춘로(椿老)의 후손이 정숙공파(貞肅公派), 계장(桂長)의 후손이 평장공파(平章公派)다.



정숙공파(貞肅公派)는 그 4세손에 이르러 정(挺)의 후손이 문간공파(文簡公派)로, 방직(邦直)의 후손이 현성공파(現城公派)로 나누어지는데, 방직(邦直)의 후손은 그 손자인 중하(仲夏)가 함흥(咸興)에 유배간 것을 계기로 후손이 그곳에 살아 관북파(關北派)의 일부를 이룬다.

평장공파(平章公派)는 계장(桂長)의 아들 황(滉)이 영돈영부사(領敦寧府事)를 지내고, 흡곡(?谷)에 좌천된 것을 계기로 북천(北遷), 함경도에 거주하여 역시 관북파(關北派)의 일부가 된다. 그 손자인 모전(模全)의 후손이 봉상공파(奉常公派), 무(茂)의 후손이 통정공파(通政公派), 기(基)의 후손이 참봉공파(參奉公派), 윤손(潤孫)의 후손이 교위공파(校尉公派)로 나누어진다.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문도공(文度公) 이거이(李居易) 묘로 가는 길에 만나는 청주 이씨 사패비(右) 등 5기의 비.

공승(公升)의 장남 춘로(春老ㆍ1133~1209)는 자는 고존(固存)으로 일찍이 서해안찰사(西海按察使)로 있을 때 이민(吏民)이 외복(畏服)하였고, 여러 번 요직을 지냈으며 청근(淸謹)이라고 했다.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숙(貞肅).



공승(公升)의 차자(次子)인 계장(桂長ㆍ생몰년 미상)은 문과(文科)에 급제해 신종 2년(1199년) 비서감(秘書監)으로서, 희종 1년(1205년)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서, 희종 7년(1211년)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서 각각 과거(科擧)를 관장했다. 뒤에 수태부ㆍ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ㆍ동수국사(同修國史)에 이르렀다. 그동안 국자감시(國子監試) 1회, 예부시(禮部試) 3회를 주관하면서 명사를 선발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 충북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에 자리한 문간공(文簡公) 이정(李挺) 부부 묘(앞쪽이 부인의 묘)와 묘표석(表石).

11세손 정(挺ㆍ1297∼1361)은 호는 사암(思菴)으로 충숙왕12년(1325년) 음보(蔭補)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이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하고, 전법좌랑(典法佐郞)ㆍ판도정랑(版圖正郞)ㆍ지초계군사(知草溪君事)ㆍ감찰장령(監察掌令)ㆍ전법총랑(典法摠郞)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 2년(1353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ㆍ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ㆍ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역임하고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서원백(西原伯)에 봉해졌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으로 아들 4형제 모두가 명망이 높았다.

장남 유신(由信)은 호는 송은(松隱)으로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림랑지평(文林郞 持平)이 되었다가 외임(外任)으로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중직대부 형부랑중(中直大夫刑部郞中)이 되었는데, 당시 원(元)나라의 풍속을 따라 머리를 땋았던 것을 풀게 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으며, 임종(臨終)에 앞서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나라를 망친 것은 그 책임이 누대에 벼슬한 집에 있다. 내가 충성심이 부족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 죄를 면할 길이 없다” 하고 앞으로 깨끗하게 살 것을 당부한 다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장남 덕윤을 상당으로, 차남 부윤은 홍주로 각각 숨었다. 이로 인하여 홍주에는 청주 이씨가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2남 거인(居仁ㆍ?~1402)은 호는 난파(蘭坡)로 대구파(大邱派)의 중시조(中始祖)다. 우왕 초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우왕 8년(1382년)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왜구를 소탕하였다. 1388년에 지문하(知門下)로 상만호가 되어 임견미사건(林堅味事件)을 맡았고, 공양왕 1년(1389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재직시에는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 유배되었다가 1391년 경상도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로 다시 등용되었다. 이듬해 조선이 건국되자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청천백(淸川伯ㆍ淸城伯이라고도 함)에 봉해졌다. 태조 3년(1394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있을 때 전날 사신으로 밀무역을 한 사실과 타인의 가기(家基)를 탈취한 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이듬해 파직되었다. 정종 1년(1399년) 조박(趙璞) 살해음모에 연루되어 청주에 유배되고,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공절(恭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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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자리한 문도공(文度公) 이거이(李居易)의 묘. 충북기념물 제95호.

4남 거이(居易ㆍ1348∼1412)는 자는 낙천(樂天), 호는 청허당(淸虛堂)으로 태조의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와 혼인한 애(?)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한 백강(伯剛)의 아버지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 태조 2년(139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낸 뒤 평안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ㆍ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거쳐 정종 2년(1400년)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올랐다. 그러나 정종이 재위할 때 시행된 사병혁파(私兵革罷) 조처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 연유가 되어 한때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태종 2년(1402년)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또한 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아들 애(?)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복직, 우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도(文度).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에 자리한 상당부원군 이애(李?)와 경신공주의 묘. 용인시향토유적 제32호.


거이(居易)의 장남 애(?ㆍ1363∼1414)는 초명은 백경(伯卿)이었으나, 이름의 음(音)이 정종의 이름과 비슷하다 하여 저(佇)로 개명하였다가, 그뒤 그 이름이 또한 세자(양녕대군)의 이름과 음이 비슷하여 또다시 애(?)로 개명하였다. 태조의 맏딸 경신공주(慶愼公主)의 남편으로서 태조 7년(1398년) 그의 아버지와 함께 방원(芳遠ㆍ뒤의 태종)을 도와 방석(芳碩)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어 상당후(上黨侯)가 되었고, 영완산부사(領完山府事)로 있으면서 사병(私兵)을 모으고 부도(不道)한 언동을 한 죄로 정종 2년(1400년) 사장(私莊)에 안치되었다가 풀려났다. 태종 1년(1401년)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02년 겸판승추부사(兼判承樞府事)ㆍ의정부찬성사가 되었고, 1404년 아버지 거이(居易)의 죄로 그도 함주(咸州)로 유배되어 이듬해에는 이천ㆍ임강(臨江) 등지로 옮겨졌다가, 고향인 진주(鎭州)에 살도록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다. 그뒤 세종 6년(1424년)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경숙(景肅).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지세마을에 자리한 청평위(淸平尉) 이백강(李伯剛)과 정순공주(貞順公主)의 합장묘. 왼쪽 묘비가 있는 묘는 사위 이계린의 묘.

거이(居易)의 4남인 백강(伯剛ㆍ1381∼1451)은 태조 6년(1397년) 음보(蔭補)로 별장(別將)을 지내고, 정종 1년(1399년) 감찰(監察)이 되었다. 그 후 이방원(李芳遠)의 맏딸인 정순공주(貞順公主))과 결혼하여 청평위(淸平尉)가 되었고, 병조좌랑ㆍ형조좌랑을 지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서 아버지와 함께 공신(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우장군을 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태종이 즉위하자 숭정대부(崇政大夫)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으나 1404년 아버지 거이(居易)가 불궤(不軌)를 도모한다 하여 서인으로 폐해지고 동성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세종 즉위년(1418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부마가 부원군에 봉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422년 진하사(陳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50년 수록대부(綏祿大夫) 청평위(淸平尉)가 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그는 부마들 중에서 특히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일컬어졌다. 시호는 정절(靖節)로 슬하에 한산 이씨 한산군(漢山君) 이계린(李季璘)에게 출가한 1녀를 두었다.

상(祥)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청륜(淸倫)은 진사(進士)로 대구파(大邱派)이며, 2남 상륜(尙倫)은 참봉(參奉)으로 의령파(宜寧派), 3남 숭륜(崇倫)은 천창파(泉倉派)로 진사(進士)와 참봉(參奉)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숭륜(崇倫)은 임진왜란 때 근피효진하여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천창)에 복거(卜居)하며 시문(詩文)으로 여생을 즐겼다.

임진왜란 때의 인물로는 거(?), 우민(禹民), 계년(桂年)이 있다. 청절공(淸節公) 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해 청주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으며, 수년간의 전쟁으로 민심이 피폐하자 이를 이용하여 이몽학(李夢學)이 반란을 일으키자 홍주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반란진압에 기여하였다. 우민(禹民)은 자는 치윤(治允), 호는 강의재(剛毅齋)로 선조 16년(1583년) 무과에 급제해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거쳐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진양(晋陽)에서 순절했다. 계년(桂年)은 무과에 급제해 훈련첨정(訓練僉正)ㆍ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거쳐 남원판관(南原判官)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께 창의, 김천일(金千鎰)ㆍ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