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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성산·광평 이씨(星山廣平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성산·광평 이씨(星山廣平李氏)의 연원

성산·광평 이씨(星山廣平李氏)의 시조(始祖) 이무재(李茂材)는 성산(星山ㆍ성주의 고호)에 토착 세거(土著世居)한 사족(士族)으로, 고려 말에 사재동정(司宰同正)을 지냈다. 그의 증손(曾孫) 능(能ㆍ초명은 陵)이 고려조에서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광평군(廣平君ㆍ광평은 성주의 고호)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광평(廣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경현사(景賢祠)의 주벽(主壁)으로 제향(祭享)하고 있다.

▲ 경북 성주군 월항면 안포동에 자리한 광평군(廣平君) 이능(李能)의 묘.

본래 성주(星州)에는 여섯 가문의 이씨(李氏)가 세거하면서 조선 정조(正祖) 이전까지는 모두 본관을 성주(星州)로 사용했으나, 그 후 각각 성주(星州)ㆍ광평(廣平)ㆍ성산(星山)ㆍ경산(京山)ㆍ벽진(碧珍)ㆍ가리(加利)로 본관(本貫)을 달리했다. 그런데 후손의 일부는 성산(星山) 또는 광평(廣平)으로 관향(貫鄕)을 쓰고 있으므로 지금은 성산·광평 이씨(星山廣平李氏)라 칭하고 있다.


시조의 아들 영(永)은 경산부사(京山府使)를 역임했으며, 손자 두문(杜文)은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를 지냈다.

광평군(廣平君) 이능(李能), 정무공(靖武) 이호성(李好誠), 황곡(篁谷) 이칭(李稱), 매죽헌(梅竹軒) 이명호(李明?), 병산(屛山) 이명신을 제향하는 경남 함안군 가야읍 검안리 경현사(景賢祠)와 묘를 실전한 1세~6세의 제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호성(好誠ㆍ1397~1467)은 초명은 자성(子誠), 호는 동산(東山)으로 세종 9년(1427년) 무과에 급제해 사복시직장(司僕寺直長)이 되고,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31년(1449년)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서 읍(邑)을 옮기고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한 공으로,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그뒤 공조참의(工曹參議)ㆍ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거쳐 단종 1년(1453년)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세조 3년(1457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ㆍ경상좌도 병마절제사를 거쳐 1459년 첨지중추원사 겸 경상좌도 도절제사를 역임, 이듬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으나 연로한 아버지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을 요청, 세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에 임명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며 기사(騎射)에 능하고, 또한 이치(吏治)에 수완이 있었다. 일찍이 최윤덕(崔潤德)의 북정(北征)때 편비(偏裨ㆍ副將)로 이름을 떨쳐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으며, 20년 동안이나 북방을 수비하여 산천의 형세를 훤히 알기에 공수(攻守)에 실수가 없었다. 경현사(景賢祠)와 경덕사(敬德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정무(靖武).

▲ 경북 금릉군 감천면 양천동에 자리한 정무공(靖武公) 이호성(李好誠)의 묘와 신도비(경남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및 그를 제향하는 경남 고성군 미암면 두호리 경덕사(敬德祠).

호성(好誠)의 3남 거인(居仁ㆍ1431~?)은 어릴 때부터 무예에 출중하였으며 무과에 올라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그후 안주(安州)ㆍ광주(廣州)ㆍ해주(海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ㆍ제주(濟州)ㆍ삭주(朔州)ㆍ전주(全州) 등의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경상우수사ㆍ전라좌수사ㆍ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두문불출했으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희생된 박한주(朴漢柱)의 장례를 치뤄 주었다.

▲ 경남 함안군 가야읍 선왕동 이거인(李居仁)의 묘와 신도비.

호성(好誠)의 손자인 희조(希祖ㆍ1450~1520)는 자는 선술(善述)로 성품이 뛰어나 옥포만호(玉浦萬戶)에 임명되었으나, 봉친(奉親)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고향의 풍속을 바로 잡는데 힘썼다. 또한 함안 향인(鄕人)의 기능을 시험하는 향사당(鄕射堂)의 정당(正堂)을 창건(創建)하여 고을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조부 호성(好誠)을 위해 연산군 3년(1497년) 동산정(東山亭)을 세웠다.


▲ 1479년 이희조(李希祖)가 조부인 정무공(靖武公) 이호성(李好誠)을 추모하여 세운 경남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동산정(東山亭).

호성(好誠)의 손자인 순조(順祖ㆍ1475~?)는 자는 계숙(繼叔)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연산군 때 등과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모친을 지성껏 봉양했다. 갑자사화(甲子士禍)때 희생된 박한주(朴漢柱)의 장례를 치룬 후 두문불출했다. 중종(中宗) 때 훈련원 습독(訓練院習讀)으로 제수되었고, 해남현감을 지내는 동안 성묘(聖廟)를 수선(修繕)하고 유풍(儒風)을 일으켰으며 민폐를 없애는데 힘썼다.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성종조(成宗祖)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서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정풍(政風)을 바로 잡는데 힘썼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벼슬을 버리고 함안 동지산(冬只山)에 은거하였다.

▲경남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에 자리한 이순조(李順祖)의 묘와 그를 제향하는 임곡재(林谷齋).

칭(稱ㆍ1535~1600)은 자는 여선(汝宣), 호는 황곡(篁谷)으로 호성(好誠)의 현손이다. 어릴 때부터 경서(經書)에 뛰어났으며, 태학관(太學館)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고향에 정사(精舍)를 짓고 황곡서당(篁谷書堂)이라 이름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선조 때 숨은 인재로서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창의하였고, 청양현감(靑陽縣監)ㆍ진령현감(鎭令縣監)ㆍ당진현감(唐津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뒤 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제수되었을 때 관찰사(觀察使) 김문정(金文貞)이 간청하므로 부임하여 향교를 보수하고 군비를 정돈하며, 유민(遺民)을 보호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만년에는 학문에 힘쓰며 검암정사(儉岩精舍)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지평(持平)으로 증직되었다.

▲ 경남 함안군 법수면 윤외리에 자리한 황곡(篁谷) 이칭(李稱)의 묘와 그를 제향하는 함안군 가야읍 검단리 황곡서당(篁谷書堂).

칭(稱)의 아들 명호(明?ㆍ1565~1624)는 자는 양초(養初), 호는 매죽헌(梅竹軒)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인효(仁孝)하고 문필에도 뛰어나 13세에 진주백일장 향시에서 장원하였다.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수신에 힘썼으며, 부모의 청으로 과거에 응하여 사마시(司馬試)에 올랐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후 매죽헌(梅竹軒)이란 정사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유고가 많았으나 소실되고 문집 2권1책이 전한다.

▲ 경남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 자리한 이명호(李明?)의 묘와 그를 추배하다 1869년 훼철된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여양서원(廬陽書院)의 유허비.

명호(明?)의 동생 명신(明신ㆍ1566~1630)은 자는 복초(復初), 호는 병산(屛山)으로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경학(經學)을 연구하였다. 선조 24년(1594년) 무과에 선발되어 웅천현감 겸 병마절제도위(熊川縣監兼兵馬節制都尉)가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적의 소탕에 공을 세워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선조 41년(1608년) 광해군이 즉위함에 일시 은거하였다가, 이괄(李适)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진문공신(振武功臣)에 녹훈되다.

▲ 경남 의령군 정곡면 적곡리에 자리한 이명신의 묘와 그를 제향하는 경남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 병산제(屛山齊).

칭(稱)의 아우 길(佶ㆍ1538~?)은 자는 여한(汝閒), 호는 검계(儉溪)ㆍ독촌(獨村)으로 외삼촌인 갈천(葛川) 임훈(林薰)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3년 상사(喪事)에 칭(稱)과 함께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모친의 명(命)에 따라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검암정사(儉巖精舍)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함안의 세덕사(世德祠)에 배향되었으며, ‘검계집(儉溪集)’ 2권1책이 전한다.

▲ 경남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 자리한 검계(儉溪) 이길(李佶)의 묘와 그를 제향하는 검계정(儉溪亭).

그외 적상(迪祥)은 호는 만은(晩隱)으로 어려서부터 학업에 얼중해서 논어와 효경을 통달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 청도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임기가 끝나자 주민들이 유임을 진정했으며, 뒤에 거창현감으로 있으면서 역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