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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평창 이씨(平昌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평창 이씨(平昌李氏)의 연원
 

평창 이씨(平昌李氏)의 시조(始祖)는 여러 문헌에 광(匡)으로 나와 있다. 그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증손으로 고려 태조 때 광록대부 개국공신(光祿大夫 開國功臣) 대사마 대장군(大司馬 大將軍)이 되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토평하여 혜종(惠宗) 원년(944년)에 평란공신(平難功臣) 백오부원군(白烏府院君)으로 봉해진 윤장(潤張)의 8세손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평창 이씨는 광(匡)을 시조로 하는 파와 윤장(潤張)을 시조로 하는 파로 양분되어 있다.

▲ 백오부원군(白烏府院君) 이윤장(李潤張)이 시조로, 이광(李匡)은 8세손으로 기록된 평창이씨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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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이씨의 족보는 영조 16년(1740년) 창보(創譜)된 이후 1919년 ‘기미보(己未譜)’에 이르기까지 7차례 발간되었지만, 한결같이 광(匡)을 시조로 하였다. 그런데 1900년 ‘경자보(庚子譜)’를 창보하면서 선계록(先系錄)을 작성하여 시조 광(匡)이 경주 이씨의 1세조 거명(居明)의 증손인 천우(天佑ㆍ일명 潤張)의 8세손이라 하고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단지 참고 자료로 삼게 했을 뿐 시조는 광(匡)으로 했는데, 후일 일부에서 시조를 윤장(潤張)으로 바꾸어 족보를 간행하였다. 이로 인해 종론(宗論)이 귀일(歸一)되지 않고 분분하므로 1983년 양파 대표가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기미보(己未譜)’와 같이 선계록(先系錄)은 그대로 두고 시조는 광(匡)으로 하기로 합의하였지만, 합의가 지켜지지 않고 있어 혼란을 주고 있다.

▲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유동리에 자리한 백오부원군(白烏府院君) 이윤장(李潤張)의 재실과 유동리 5층석탑(강원도문화재자료 제30호) 옆에 세워진 신도비.


시조 광(匡)은 고려 인종 4년(1126년)에 태어나 의종(懿宗) 때 추밀원부사 동북면도순문사 평장사(樞密院副使東北面都巡問使平章事)를 거쳐 광록대부 태사(光祿大夫太師)에 이르렀고, 백오군(白烏君)에 봉해졌다. 백오(白烏)는 평창(平昌)의 옛 이름이다.

▲ 평창 이씨 시조로 표기된 백오군(白烏君) 이광(李匡)과 백오부원군(白烏府院君) 이윤장(李潤張)의 신도비.

이후 평창 이씨는 감정공파(監正公派), 계인군파(啓仁君派), 노산부원군파(魯山府院君派), 문경공파(文景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용공파(司勇公派), 사직공종파(司直公宗派), 수사공파(水使公派), 익평공파(翼平公派), 정숙공파(靖肅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평장공파(平章公派), 평천군파(平川君派), 헌무공파(憲武公派) 등 19계파(系派)로 분파(分派)되었다.

▲ 서예로 이름을 날린 희현당(希賢堂) 이영서(李永瑞)의 유묵.?

 

광(匡)의 7세손 천기(天驥)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 릉(稜)ㆍ곡(梏)ㆍ과(科) 3형제와 함께 장단(長湍)에 낙향하여 충절을 지켰다. 태조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하였고, 후손들은 광(匡)을 시조로 하고 천기(天驥)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평창(平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천기(天驥)의 증손(曾孫) 영서(永瑞ㆍ?~1450)는 자는 석류(錫類), 호는 노산 (魯山)ㆍ희현당(希賢堂)으로 판관 종미(宗美)의 아들이다. 세종(世宗)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세종 16년(14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 3등으로 급제,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갔다.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吏曹)ㆍ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퇴임하였다. 특히 서예(書藝)로 이름을 날렸는데, 강희안(姜希顔) 등과 함께 금은(金銀)으로 불경(佛經)을 쓰는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영서(永瑞)의 맏아들 계남(季男ㆍ?∼1512)은 자는 자걸(子傑), 호는 휴휴당(休休堂)으로 좌찬성 이계동(李季仝)의 형이다. 예종 즉위년(1468년) 음서(蔭敍)로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 10년(1479년) 지평(持平)에 올랐다. 1486년 집의(執義) · 우부승지 ·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고, 1489년 좌승지ㆍ이조참의를 거쳐 1491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이어 성종 24년(1493년) 경상도 관찰사ㆍ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고,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로 옮겼다가 연산군 2년(1496년) 호조참판ㆍ대사헌을 거쳐 1501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1504년 호조판서에 오르고 1506년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으로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으며, 1511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평(翼平).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에 자리한 익평공파(翼平公派)의 파조 이계남(李季男)의 묘.

세칭 ‘국조명장(國朝名將)’으로 불렸던 계동(季仝ㆍ1450∼1506)은 자는 자준(子俊), 호는 동호(東湖)로 성종 1년(1470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이 되었다. 1476년 무과중시에 급제하여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ㆍ창성부사(昌城府使)를 지낸 뒤 동부승지(同副承旨)ㆍ선전관을 거쳐 1480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중국으로 떠나기 전 사연(賜宴)에서의 불경스런 행동으로 탄핵받고 유배되었다. 1481년 풀려나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1482년 여진어에 능통하여 함경도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486년 좌윤ㆍ형조참판ㆍ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489년 금제사(擒制使)로 황해도에 파견되어 도적을 소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1490년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고 이어 형조판서ㆍ경기도 관찰사지ㆍ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연산군 4년(1498년) 병조판서에 올라 이듬해 왕명에 따라 고부사(告訃使)로 명나라를 다녀와 왕명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와 ‘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진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 뒤 우찬성ㆍ좌찬성ㆍ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무과 출신으로 유일하게 대사헌(大司憲)에 오른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그 후손에도 인재가 많아 문과 급제자가 24명이나 배출되었다. 시호는 헌무(憲武).

▲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상곡(上谷)에 자리한 헌무공(憲武公) 이계동(李季仝)의 묘.


계동(季仝)의 아들 광(光)은 연산군 1년(149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이르렀고, 학문과 글씨에 뛰어나서 ‘관동천재(關東天才)’로 일컬어졌으나 23세로 요절했다.


근세의 인물로는 정조 때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했던 동욱(東郁)의 아들 승훈(承薰ㆍ1756∼1801)이 유명하다.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으로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동(盤石洞ㆍ지금의 中林洞 일대)에서 태어나, 24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ㆍ약현(若鉉)ㆍ약종(若鍾)ㆍ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으며,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天眞庵)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된다. 그는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 묘. 1981년 발굴하여 유해는 한국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天眞庵)으로 옮겨졌다.

영세 후 천주교 서적과 십자가상 등을 가지고 귀국해 조선교회를 설립하고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에 힘쓰다가 형조(刑曹)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하지만 그는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한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됐던 윤유일 (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다시 교회를 떠났다. 그 후에도 승훈은 여러 차례 배교(背敎)를 했지만 순조(純祖)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이가환 (李家煥)ㆍ정약용ㆍ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체포된 후, 다른 6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45세의 나이로 목을 짤려 순교했다.

비록 그는 이처럼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땅에 복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선구자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는 병인박해(1866년) 때, 증손 연구(蓮龜)와 균구(筠龜)는 1871년 제물포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철종 7년(1856년)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되었다. 1981년 승훈의 묘가 개봉되어 유해가 한국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天眞庵)으로 옮겨졌는데, 이때 묘에서 ‘成均進士李公承薰墓’라고 쓴 사발이 출토되었다.

▲ 항재(恒齋) 이정규(李正奎)의 의병종군기인 ‘종의록(從義錄)’.

정규(正奎)는 자는 치심(致心), 호는 옥산(玉山)ㆍ항재(恒齋)로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에게 배웠으며,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유인석을 좇아 종군하고 의병측의 입장을 중앙에 알리기 위해 상경하여 종앙의 요로에 교섭하기도 하였다. 유인석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뒤를 좇았고, 정미의병 때에는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의 참모 종사로도 활약하였다. 유인석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후에는 국내에 남아 해외 동지들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으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만년에는 장담에서의 강회를 주재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종군기록인 ‘종의록(從義錄)’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외에도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저술해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현근(炫瑾) 등이 평창 이씨를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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