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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연원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이도(李棹)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초명(初名)이 치(齒), 시호는 성절(聖節)로 고려 태조(太祖)가 견훤(甄萱)을 정벌하러 5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南下)하여 금강(錦江)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여 도강이 어렵게 되었다. 치(齒)는 선박 수백 척을 동원하여 고려 태조와 고려군 5만 대군을 희생자 없이 무사히 금강을 건너게 해주었으므로 태조가 도(棹)라고 이름을 하사하고, 통합삼한삼중대광대사익찬공신(統合三韓三重大匡大師翊贊功臣)으로 벼슬을 내리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해졌다.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자리한 시조 이도(李棹)의 묘 건너편에 자리한 영사재(永思齋).

그후 그는 전의(全義) 이성산(李城山) 아래로 이거해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전의(全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또 예안 이씨(禮安李氏)가 전의 이씨(全義李氏)에서 분관(分貫)되었기에 흔히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라 부르며, 최근에 전의 이씨와 통합했으나 아직도 예안 이씨로 통칭되고 있다.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자리한 시조 이도(李棹)의 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심방리와 전동면 송성리에 소재한 이성(李城ㆍ충남지방문화재 제77호)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편에 “이성은 운주산의 북쪽에 소재한다. 산봉우리에 돌로써 축성하였다. 이도(李棹)가 살았던 고거(故居)로 전해진다. 그 안이 넓고 평평하다. 둘레는 1884척이고 성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못 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의현 읍지(邑誌)의 성지(城址)편에 “이성은 이성산의 산상에 소재한다. 산정의 넓고 평탄한 곳에 층층 제단이 있었다. 고려조 태사 이도가 살았던 옛 터다. 일찍이 제단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정자를 두었는데, 겨울에는 남쪽 정자에서 살고 여름이면 북쪽 정자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심방리 이성(李城)에 세워진 태사공유허비(1831년 건립)와 태서공 주거지비.

산 허리에는 바위 중심부에서 높이 2m, 폭 1m의 굴이 뚫려 있는 돌출한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말바위라 부른다. 옛날 성주인 이도(李棹)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곳에 와서 말을 타고 산 아래 저양장(猪養場)의 울을 순행하고서는 앞 냇가에서 세수하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 태사공 이도(李棹)의 전설이 전해오는 말바위(左)와 그의 묘자리를 잡아준 지관을 제향하는 진양각(眞陽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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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이도(李棹)의 7세손인 동암수공(東巖?公) 천(阡)에 이르러 세 아들 자원(子?)ㆍ혼(混)ㆍ자화(子華)를 두었는데, 이 세 아들을 중시조로 삼아 크게 3개의 파로 나뉘어진다.

직문한서(直文翰書)를 역임하고 대사성에 증직(贈職)된 장남 자원(子?)은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의 파조이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한 3남 자화(子華)는 선부전서공파(選部典書公派)의 파조가 돤다, 한편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차남 문장공(文莊公) 혼(混)은 문장공파(文莊公派)로, 그 손자인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익(翊)이 예안군(禮安君)으로 봉군(封君)되어 그 군호(君號)를 따라 전의(全義)에서 예안(禮安)으로 이적(移籍)하여 예안 이씨(禮安李氏)의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세워진 동암수공(東巖?公) 이천(李阡)과 세 아들 자원(子?)ㆍ혼(混)ㆍ자화(子華)의 신도비.

이 3개파에서 다시 이들의 5대손이면서 아울러 전의 이씨 13세손 대에 이르러 45개 파로 나뉘어지는데, 이것을 분류하여 보면 백파(伯派)인 대사성공(大司成公) 자원(子?)의 5대손에서는 18개 파, 중파仲派)인 문장공파(文莊公派)에서는 2개 파, 계파(季派)인 전서공파(典書公派)에서는 25개 파로 나누어진다.

▲ 이성(李城)과 전의 이씨 출신 인물에 관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대사성공파의 18개 파

진원현감공(珍原縣監公) 대종(大種)파, 감찰공(監察公) 대성(大晟)파, 도절제사공(都節制使公) 승간(承幹)파, 소윤공(小尹公) 성간(成幹)파, 형조정랑공(刑曹正郞公) 직간(直幹)파, 정선군수공(旌善郡守公) 강지(剛之)파, 사정공(司正公) 장발(長潑)파, 판사공(判事公) 장득(長得)파, 판관공(判官公) 영동(榮東)파, 판관공(判官公) 수동(秀東)파, 목사공(牧使公) 창동(昌東)파, 양정공(襄靖公) 화(樺)파, 급제공(及第公) 허( )파 또는 부사직공(副司直公) 허( )파, 옥계공(玉溪公) 남(枏)파, 주부공(主簿公) 효전(孝全)파, 진산군수공(珍山郡守公) 영간(英幹)파, 중추원사공(中樞院使公) 의흡(宜洽)파, 부사직공(副司直公) 삼기(三奇)파.

문장공파의 2개 파 익양공(翼襄公) 천파, 이판공(吏判公) 온파.

전서공파의 25개 파 참판공(參判公) 순백(淳伯)파, 녹사공(錄事公) 인장(仁長)파, 하동현감공(河東縣監公) 의장(義長)파, 평간공(平簡公) 예장(禮長)파, 주서공(注書公) 지장(智長)파, 예조참판공(禮曹參判公) 함장( 長)파, 관찰사공(觀察使公) 효장(孝長)파, 양간공(襄簡公) 서장(恕長)파, 직장공(直長公) 승준(承遵)파, 양호공(襄胡公) 병정(秉正)파, 좌윤공(左尹公) 효석(孝碩)파, 부사공(府使公) 우석(友碩)파, 진위현감공(振威縣監公) 인석(仁碩)파, 홍주판관공(洪州判官公) 의석(義碩)파, 부사과공(副司果公) 승중(承重)파, 절제사공(節制使公) 중손(仲孫)파, 사복판사공(司僕判事公) 세분(世芬)파 또는 사복시 정공(司僕寺正公) 세분(世芬)파, 군자판관공(軍資判官公) 세무(世茂)파, 동공(棟公)파, 직장공(直長公) 장손(檣孫)파, 수손공(樹孫公)파, 사마공(司馬公) 난손(欄孫)파, 충순공(忠順公) 지석(枝碩)파, 지무공(枝茂公)파, 장령공(掌令公) 사공(思恭)파이다.

전의 이씨 18세손에 이르러서는 총 277개 파로 구분된다. 대사성공파에서는 110개 파, 문장공파에서는 22개 파, 전서공파에서는 145개 파로 나누어진다.

이외에 다른 파 가령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중에서 도절제사공(都節制使公) 승간(承幹)의 5대손 중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와 판서 그리고 좌참찬을 지낸 신암(新菴) 준민(俊民ㆍ전의 이씨 18세손)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분의 후손들 중에 무과(武科)로 저명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이 분의 후손들은 보통 신암파(新菴派)라고 지칭한다. 준민(俊民)의 후손 중에 통제사공파(統制使公派) 등의 이름으로 여러 파를 형성하여 부르기도 한다.

또한 전서공파(典書公派) 중에서 양간공(襄簡公) 서장(恕長)의 4대손 중에 문과에 급제하여 북병사(北兵使)를 지낸 청강(淸江) 제신(濟臣ㆍ전의 이씨 17세손)의 후손들이 걸출하여 문과로 명성을 날렸는데 이 분의 후손들은 보통 청강공파(淸江公派)라고 부른다. 전서공(典書公) 자화(子華)의 증손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ㆍ양간공 서장의 조부, 전의 이씨 11세손)의 후손들은 효정공파(孝靖公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도 각 소문중에서 여러 명칭으로 파를 지칭하기도 한다.

전의 이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의공(文義公) 언충(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 문장공(文莊公) 혼(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 문장공(文莊公) 이혼(李混)이 조카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沖)에게 준 시. “너의 아버지는 비록 일찍이 돌아갔으나, 너의 숙부는 아직 살아 있구나. / 은의와 애정이 어찌 다름이 있으랴! 가까움을 말하지 말라. / 입신양명으로 반드시 출세하여 돈목과 신의로 가문을 일으키고 / 바라건대 충과 효를 온전히 하여 명성을 떨쳐 후손에게 빛내라”

자원(子?)의 아들 언충(李沖ㆍ1273∼1338)은 자는 입지(立之), 호는 운재(芸齋)로 충렬왕 18년(1292년) 사마시에 뽑혔고, 1294년 문과에 등제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였다가 군부좌랑(軍簿佐郎)에 승진되었다. 뒤에 대사성ㆍ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ㆍ지제고(知制誥)ㆍ선부전서(選部典書)ㆍ전의령(典儀令)을 역임하고, 충숙왕 8년(1321년)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갔으며, 집의(執義)를 거쳐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ㆍ정당문학(政堂文學)ㆍ첨의평리ㆍ예문관 대제학ㆍ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ㆍ충혜왕(忠惠王)의 네 왕을 섬기면서 총애를 받았다. 시호는 문의(文義).

▲ 충북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에 자리한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을 제향하는 경양사와 유허비.

정간(貞幹)은 천(仟)의 현손이며 언충(彦沖)의 재종손으로, 세종(世宗) 때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 중 노모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퇴한 효자였다. 그의 나이 80세였고 노모가 100세를 맞았을 때, 그는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여 노모를 즐겁게 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정2품으로 올리고 왕으로부터 사연(賜筵)과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또, 죽음에 임박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거둥(擧動)해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자의 어필(御筆)을 내려, 오늘날 전의 이씨 문중 후손들은 이 문구를 가훈으로 전하면서 나무로 새겨 족보 첫머리에 찍어 놓았다. 더욱이 세종은 정간(貞幹)의 부인 낙안 김씨(樂安金氏)를 정대부인(貞大夫人)으로 봉직하는 특전을 내렸다. 이 집안은 그 손이 번창하여 부인 생시에 내외 증손이 1208명, 현손이 90여 명이었다고 한다.



정간(貞幹)의 손자 서장(恕長ㆍ1423∼1484)은 자는 자충(子忠)으로 한성부윤 사관(士寬)의 아들이다. 세조 3년(1457년) 녹사(錄事)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응시하여 정과(丁科)로 급제하였으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ㆍ사헌부 감찰ㆍ형조좌랑ㆍ병조정랑을 거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ㆍ사섬시 소윤(司贍寺少尹)ㆍ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두루 역임하였다. 1466년 의정부 사인((議政府含人)에 오르고 이듬해 도통사(都統使) 이준(李浚)의 종사관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토벌에 참여하여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절충장군 대호군(折衝將軍大護軍)에 특별 임명되었다. 얼마 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함경도 관찰사ㆍ경상도 관찰사ㆍ한성부 좌윤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475년 성절사 김양경(金良璥)과 함께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와 호조참판이 되었다. 1477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1479년과 1481년 두 차례에 걸쳐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1483년 4월 다시 전성군이 되고 이해 9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으며 그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시호는 양간(襄簡).

▲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에 기록된 전의 이씨 인물. 클릭!

덕량(德良ㆍ1435∼1487)은 자는 군거(君擧)로 지장(智長)의 아들이며,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자서(姉淚)이다. 세조 3년(1457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ㆍ사복직장ㆍ종친부 부전첨(宗親府副典籤)ㆍ세자익찬(世子翊贊)이 되고, 1462년 호조정랑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3년 겸사복 소윤(兼司僕小尹), 이어 사헌부 장령ㆍ훈련원 부사를 역임하고 1465년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에 임명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회령부사가 되어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의군(全義君)에 봉해졌다. 이어 회령진 병마절제사(會寧鎭兵馬節制使)를 겸하고, 이듬해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었다. 예종 1년(1469년) 관비(官婢)를 지나치게 형벌하여 죽게 해 고신을 몰수당하였다가, 이듬해 한명회(韓明澮)의 도움으로 직첩을 돌려받고 다시 전의군(全義君)에 봉해졌다. 성종 4년(1473년) 문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절도사ㆍ경기도 관찰사ㆍ영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영안도 관찰사로 재직시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공을 세웠다. 1480년 공조참판에 이어 병조참판ㆍ형조판서ㆍ대사헌ㆍ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무예에 뛰어났으며, 청렴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장경(莊敬).

수남(壽男ㆍ1439∼1471)은 자는 자인(子仁)으로 세조 1년(1455)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이듬해 대교(待敎)ㆍ검열(檢閱)ㆍ봉교(奉敎)를 역임하였다. 1460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ㆍ사헌부 감찰(成均館主簿)ㆍ예조좌랑ㆍ이조좌랑ㆍ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하였다. 1466년 사예로 문과중시와 발영시(拔英試)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우부승지ㆍ좌부승지를 거쳐 1467년 토목역사를 중지하라는 왕명을 계류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성종 2년(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전산군(全山君)에 봉하여졌으며,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사이가 좋지 않은 홍윤성(洪允成)이 그를 초청하여 가혹하게 소주를 권하여 과음으로 죽었다.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간(良簡).

▲ 경기도 양주시 남면 한산리에 자리한 정숙공(定肅公) 이탁(李鐸)의 묘.

탁(鐸ㆍ1509~1576)은 자는 선명(善鳴), 호는 약봉(藥峰), 신천군수 창형(昌亨)의 아들이다. 중종 26년(153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ㆍ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저작(著作)이 되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ㆍ성균관 전적ㆍ공조와 예조의 정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관(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였다. 1544년 형조정랑으로 된 후 병조정랑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으며, 명종 1년(1546년) 이조정랑을 거쳐 사인(舍人)ㆍ집의가 되어 1548년 대사헌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권신 이기(李틒)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좌천되었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64년 대사헌이 되어 대사간 박순(朴淳)과 함께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여 유배시켰으며, 이어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공조ㆍ호조ㆍ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566년 8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선조 1년(1568년) 우찬성을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1년 우의정으로 영경연감 춘추관(領經筵監春秋官)을 겸임하다가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죽었다.


그는 재덕이 뛰어나고 사람을 대하는데 너그럽고 온화하여 세상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 힘껏 공정한 도(道)를 넓혀 선비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그의 사후에 “전조(銓曹)의 정사가 공정하기로는 이탁(李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정승(政丞)에 제수되었을 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그는 지극히 청렴하여 재상직에 있을 때에도 검소하고 청빈하게 지내 녹봉을 받는 이외에 달리 생업을 영위하지 않았다. 간혹 고을에서 예물을 보내는 것이 있으면 곧 이웃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주방에 남겨 두지 않았으며, 학자와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정숙(定肅).

준민(俊民ㆍ1524~1590)은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참봉 공량(公亮)의 아들로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명종 4년(154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54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어 사장(詞章) 중심의 문풍 현실을 개탄, 경학(經學)의 장려에 힘썼다. 이어 1556년에는 중시문과(重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수찬(修撰)이 되어 경서 정리에 힘썼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대윤(大尹)의 당파로 몰려 한때 파직되었다가 곧 기용되어 병조판서ㆍ좌참찬 등을 지냈다. 특히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병조판서로 있을 때는 수도를 중심으로 한 변방의 수비강화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이(李珥)를 존경하였으며, 천품이 강직하여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다. 따라서 파당이 치열해 가자 칭병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효익(孝翼).

▲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 자리한 평간공(平簡公) 이제신(李濟臣)의 묘와 1621년 건립된 신도비(上).

제신(濟臣ㆍ1536~1584)은 자는 몽응(夢應), 호는 청강(淸江), 병마사 문성(文誠)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7세 때 시를 지어 조식(曺植)을 놀라게 하였다. 명종 7년(1558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64년에는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형조정랑ㆍ공조정랑ㆍ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그 뒤 사헌부 감찰ㆍ사간원 정언ㆍ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선조 4년(1571년) 울산군수를 지냈으며, 1578년 진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는데 토호(土豪)들의 모함으로 사직했다. 1581년 강계부사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1583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으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패전의 책임으로 의주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양근의 미원서원(迷原書院)과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평간(平簡).

▲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에 자리한 효정공(孝貞公) 이행원(李行遠)의 묘.

제신(濟臣)의 증손 행원(行遠ㆍ1592∼1648)은 자는 사치(士致), 호는 서화(西華)로 현령을 지낸 중기(重基)의 아들이다. 광해군 2년(1610년) 진사가 되고, 광해군 9년(161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字)ㆍ박사(博士)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문장력이 뛰어나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서 교서(敎書) 등을 많이 지었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승지(承旨)로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여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이듬해 화의가 성립된 후에는 세자시강원 부빈객(世子侍講院副賓客)이 되어 볼모로 잡혀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종하여 심양에 갔다. 귀국 후 대사헌ㆍ이조판서ㆍ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인조 25년(1647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던 도중 평안도 의주에서 병사했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

 

 

 

▲ (上)문정공(文貞公) 이신의(李愼儀)가 1618년 회령에 귀양갔을 때 구한 거문고. (下)거문고 뒤판의 명문과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받은 선무원종공신녹권.

신의(愼儀ㆍ1551~1627)는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으로 참의 원손(元孫)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두 번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민순(閔純)의 권고로 천거에 응하여 봉사(奉事)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鄕兵) 300명을 모집하여 적을 무찔러 직장(直長)에 임명되었고, 이어 주부(主簿)를 지내고 공조좌랑ㆍ형조좌랑이 되었다. 1594년 왜군을 토벌한 공으로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다. 1596년 7월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나자 병사 8,000명을 모아 대응하였다. 그뒤 고부군수ㆍ괴산군수ㆍ광주목사(廣州牧使)ㆍ남원부사ㆍ홍주목사ㆍ 해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1610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특별히 가자(加資)되고 1614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사용이 되었다. 1617년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려 하자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이듬해 회령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참의가 되고 얼마 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으며, 판결사 겸 경연특진관이 되었다가 그뒤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1625년 다시 장례원 판결사(掌?院判決事)가 되고,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과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석탄집(石灘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

▲ 문정공(文貞公) 이덕수(李德壽)의 영정과 유묵.

덕수(德壽ㆍ1673~1744)는 자는 인로(仁老), 호는 벽계(蘗溪)ㆍ서당(西堂), 아버지는 참판 징명(徵明), 박세당(朴世堂)ㆍ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선조의 덕으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숙종 39년(17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문의현감(文義縣監)으로 임명되었다.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옮겼다. 그 뒤 홍문관의 수찬ㆍ부수찬ㆍ부교리·ㆍ부응교ㆍ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경종 2년(1722년) 집의(執義)로 있을 때 임인옥사(壬寅獄事)로 몰리게 된 호조판서 김연(金演)을 구하려다 사간원으로부터 김창집(金昌集)과 같은 역당(逆黨)으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무마되었다. 경종이 죽자 이광좌(李光佐)의 추천으로 이진망(李眞望)과 함께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에 임명되고 이를 계기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했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735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문장이 출중해 홍문관과 예문관 관직에 여러 차례 올랐으며, 성품이 조심스럽고 온후해 당론에 뛰어들지 않았다. 1737년 이현필(李顯弼)이 책문(策問)을 볼 때 영조를 비방한 사건으로 탄핵받았을 때나, 이광의(李匡誼)가 김복택(金福澤)의 일을 거론해 화를 입었을 때 이광의(李匡誼)를 은근히 비호했다 하여 탄핵받았을 때도 무사했던 것은 그의 이러한 성품으로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호는 문정(文貞).

▲ 충정공(忠貞公) 이상진(李尙眞)의 유묵.

상진(尙眞ㆍ1614~1690)은 자는 천득(天得), 호는 만암(晩庵), 아버지는 참봉(參奉) 영선(榮先)이다. 인조 23년(164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효종 3년(1652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을 때 국가의 제반사를 논리 정연하게 논평해 왕의 신임을 받았다. 1654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있을 때에는 당시의 시사(時事)를 여러 차례 직언해 왕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헌종 때에는 이조참판ㆍ대사간을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일이 있다. 당시 영남에서는 대동법(大同法)이 아직 시행되지 않아 정무가 매우 번거로웠다. 감사로 부임한 그는 대동법으로 일어난 송사 판결을 신속하고 조리있게 처결해 송옥(訟獄)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인재를 뽑아 쓰고 탐관오리를 숙정해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서의 칭송이 도내에 자자했다 한다.



숙종 4년(1678년)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결과 김익훈(金益勳)ㆍ이사명(李師命) 등의 보사공신추록(保社功臣追錄)에 대해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의견이 맞지 않아 추록 심의에 불참하고 면직을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겨 앉게 되었다. 1689년 왕비의 폐위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이에 관한 소를 올리는 자는 대역죄로 다스리겠다.”는 지엄한 왕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忠憤)을 억제할 길이 없어 폐위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숙종(肅宗)의 진노를 샀다. 이에 종성ㆍ북청ㆍ철원 등지로 귀양갔다가 소결(疏決)로 용서되어 부여에 있는 옛집에서 우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된 뒤 숙종은 과거를 후회하고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1695년에는 청백리(淸白吏)에 선출되었다. 또 전주에 장보사원(章甫祠院)을 세우고, 1708년에는 북청에 있는 이항복(李恒福)의 사당에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

 

▲ 32세의 젊은 나이로 목숨을 끊은 국은(菊隱) 이한응(李漢應)의 영정과 묘.

근세의 인물로 한응(漢應ㆍ1874~1905)은 일명 한응(漢膺)으로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경호(璟鎬)의 아들로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97년 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ㆍ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어 한국의 독립이 흔들리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한국 외교를 위하여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또한 영일동맹(英日同盟)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외교권이 강탈되자, 그 치욕과 망국의 한을 참지 못해 임지에서 음독 자결하였으며,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용인에 안장될 수 있었다. 가선대부 내부협판(嘉善大夫內部協辦)에 추증되었으며,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전의 이씨는 조선에서만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 공신 6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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