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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신평 이씨(新平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신평 이씨(新平李氏)의 연원

신평 이씨(新平李氏)의 시조 이덕명(李德明)은 시호가 문간(文簡)으로, 고려에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그의 선계(先系)는 백제 때 사평현(沙平縣) 호장(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라 전해지고 있으나,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昭穆)을 상고할 수 없다. 본관은 선대에 호장(戶長)을 지내던 사평현이 뒤에 신평현(新平縣)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신평(新平)으로 하였으며, 이덕명(李德明)은 담양 이씨(潭陽李氏)의 시조(始祖)로도 모셔지고 있다.

‘무오보(戊午譜)’에 따르면, 초조(初祖)는 이인수(李仁壽)로서 백제 때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게 아우가 둘이 있었는데 이주(李珠)는 백제의 공신으로 신평공(新平公)에 봉해졌으며, 이석덕(李碩德)은 신라의 아찬(阿?)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계대(繼代)나 연대가 확실치 않으므로 다만 이름과 관직만을 적어 이씨의 연원(淵源)을 삼는다고 하였다.

▲ 1928년 발간된 신평 이씨 세보인 무진보(戊辰譜).

한편 신양군(新陽君) 원로(元老)의 묘갈명(墓碣銘)에는 이덕명(李德明)을 원조(遠祖), 사재시령(司宰寺令)을 지낸 9세 덕배(德培)를 중조(中祖)로 한다는 구절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신평 이씨의 상계 인물로 7세 쌍매당(雙梅堂) 첨(詹) 같은 걸출한 분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사재시령(司宰寺令)을 지낸 9세 덕배(德培)를 중조로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는 것 같다.


‘기해보(己亥譜)’ 서문에는 신평 이씨는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관적(貫籍)을 신평(新平)으로 하여 자손들이 번성하였다고 적혀 있으며, 분파로는 괴당공파(槐堂公派·15세 天啓)ㆍ문정공파(文定公派·10세 可種)ㆍ사인공파(舍人公派·6세 元祥)ㆍ문안공파(文安公派·7세 詹)ㆍ사재공파(司宰公派·9세 德倍)ㆍ판서공파(判書公派· 9세 祥) 등 6개의 계파가 있다.

▲ 충남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에 자리한 시조 문간공(文簡公) 이덕명(李德明)의 묘와 재사인 덕모재(德慕齋).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덕명(德明)의 아들 환(桓)이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했으며, 그의 맏아들 임(稔)은 시중(侍中)을, 차남 비(秘)는 시랑(侍郞)을 지냈다.

▲충남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 신평 이씨 상계 6위 설단(초조 李仁壽, 백제공신 李珠, 신라 아찬 李碩德, 2세 李桓, 3세 李稔, 3세 李秘).

▲ 충북 청원군 가덕면 병암리에 자리한 사재공파(司宰公派) 파조 4세 이순경(李筍卿) 후 6위단.

덕명(德明)의 7세손 첨(詹ㆍ1345~1405)은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으로 증 참찬의정부사(贈參贊議政府事) 희상(熙祥)의 아들이다. 그의 고향 집에는 소나무가 2그루가 있었는데, 벼슬에 전념하다 몇 년만에 돌아와 보니 소나무는 없고 매화나무 2그루가 있어 호를 ‘쌍매당(雙梅堂)’이라 했다. 공민왕 14년(1365년) 감시(監試)에 합격, 136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듬해 우정언(右正言)에 이어 우왕 1년(1375년) 우헌납(右獻納)에 올라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ㆍ지윤(池奫)을 탄핵하여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388년 방환되어 내부부령 예문 응교(內府副令藝文應敎)를 거쳐 우상시(右常侍)에 전직, 공양왕 3년1391년) 좌대언(左代言)이 되고 이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감시(監試)를 맡아보았으나 이 해 장류(杖流)된 김진양(金震陽) 사건에 연루되어 결성(結城)에 유배당했다.

▲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문안공(文安公) 이첨(李詹)의 무오보(戊午譜ㆍ1978년)에 실린 초상과 유묵 .

조선 건국 후 태조 7년(1398년) 이조전서(吏曹典書)에 등용되고, 정종 2년(1400년) 첨서 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로 전위사(傳位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종 2년(1402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내고,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하륜(河崙)과 함께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저서로 ‘저생전(楮生傳)’ㆍ‘쌍매당집(雙梅堂集)’ 등이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

▲ 충남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에 자리한 문안공(文安公) 이첨(李詹)의 묘와 신도비.

가종(可種)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상원(上垣)의 아들로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수의교위(修義校尉)ㆍ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정종 1년(1399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가선대부(嘉善大夫)ㆍ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초명은 성언(成彦)이라고 불렀으나 태종 5년(1405년) 봉사(奉事)로 있을 때 태종(太宗)의 총애를 받아 가종(可種)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그후 세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ㆍ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내고, 벼슬을 사퇴한 후 고향에 돌아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로 소요하였다. 시호는 문정(文定).

▲ 충남 당진군 신평면 도성리에 자리한 문정공(文正公) 이가종(李可種)의 묘와 재사인 문정사(文正祠).

상(祥)은 호는 덕계(德溪)로 7세 때 왜적(倭賊)에게 10년 간 납치되었다가 환국(還國)하였다. 효행이 지극하여 조선 세종(世宗) 때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 충남 당진군 순성면 봉소리에 자리한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 이상(李祥)의 묘와 세종 때 세워진 정려(旌閭).

천계(天啓)는 자는 형백(亨伯), 호는 괴당(槐堂)으로 부장(部將) 철봉(鐵奉)의 아들이다. 중종 32년(153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 1544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발탁되었으며, 인종 1년(1545년) 장령(掌令)이 되었으나 이 해 명종이 즉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이기(李?)의 모함으로 삭직(削職)되었다. 명종 2년(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사건 때 다시 이기의 무고를 받아 영해(寧海)에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으며, 선조 즉위년(1567) 10월 신원(伸寃)으로 관작을 환급받았다. 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학문으로 사림간에 명망이 있었다.

▲ 충북 보은군 내북면 산성리에 자리한 괴당공파(槐堂公派) 파조 이천계(李天啓)의 묘와 재사인 백봉사(栢峯祠).

거(?ㆍ1532~1608)는 자는 중상(仲尙), 호는 남촌(南村)으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인 정랑(正郞) 세순(世純)의 아들이다. 허엽(許曄)의 문인으로 명종 7년(1552년) 진사가 되고, 이듬해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으며, 1557년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로 있을 때 주청사(秦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1년 예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지내고, 수찬(修撰)ㆍ사간(司諫)ㆍ직강(直講) 등을 역임했다. 선조 23년(1590년) 황주목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유임을 탄원하였으며, 그후 예조참의ㆍ강화부사(江華府使)ㆍ형조참의(刑曹參議)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후 선조 36년(1603년)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유묵과 단소.

달(達ㆍ1539~1612)은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로 홍주 이씨(洪州李氏)라는 설이 있으나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혀 신평 이씨(新平李氏)인 것이 확인되었다. 서얼(庶孼)이어서 더 이상의 가계는 확실하지 않으며,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蓀谷)이라고 하였다.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하였지만,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으며,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였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렸으며,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에서, “그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 신라ㆍ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 여관에 얹혀 살다가 죽었으며, 무덤은 전해오지 않는다.

▲ 충북 청원군 가덕면 시동리에 자리한 신양군(新陽君) 이원로(李元老) 묘.

원로(元老ㆍ1576~1654)는 장수현감 응룡(應龍)의 아들로 인조13년(1635년)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으로 완양군(完陽君ㆍ一云 新陽君)에 봉해졌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 120년 전 건립된 당시의 전형적인 농가 모습을 지니고 있는 전북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의 생가(전북기념물 제21호).

정직(定稷ㆍ1841∼1910)은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으로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 알려졌으며, 뒤에 학문에 전념하여 사학(四學ㆍ性理·詩學·天曆·算數)과 실학(實學)ㆍ서화(書畵)에 통달한 대학자가 되었다. 1869년 연행사(燕行使)를 따라 연경(燕京)에 들어가 백가서(百家書)를 두루 살피고 명사(名士)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에 근거하여 칸트와 베이컨의 서양철학사상을 소개하고, 그것을 유학사상과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특히 칸트가 도덕(道德)과 실천적인 면을 중요시한 점과 자유(自由)를 말한 점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실학자로서 조선조 최초로 서양철학을 도입하고 1900년대를 전후한 서양철학 연구를 통하여 성리학과의 접목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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