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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고성 이씨(固城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고성 이씨(固城李氏)의 연원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한(漢)나라 문제(文帝ㆍ기원전 202~157 재임) 때의 시중(侍中) 이반(李槃)의 24세손 이황(李璜)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이씨추원록(李氏追遠錄)’에 의하면 중국 한(漢)나라 무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었던 이반(李槃)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온 뒤 눌러 살게 되었는데, 이황(李璜)은 그 후손으로 24세손이라고 하였다. 그는 고려시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8세 우(瑀)가 충숙왕 때 네 고을의 목사를 지내고 철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철성(鐵性)으로 했다가, 우(瑀)의 손자 인(寅)이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내고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져 고성(固城)으로 개관(改貫)하였다.

▲ 1962년 간행된 철성이씨백세이감(鐵城李氏百世彛鑑).

그러나 ‘만성보(萬姓譜)’ 등에는 이황(李璜)이 고려 덕종(德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덕종 2년(1033년)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라 철령군(鐵嶺君ㆍ철령은 현재의 고성)에 봉해졌다고 한다.


고성 이씨는 고려 말 이후에 성세를 보여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36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으며, 계파(系派)로는 안정공파(安靖公派)ㆍ둔재공파(鈍齋公派)ㆍ호군공파(護軍公派)ㆍ좌윤공파(左尹公派)ㆍ동추공파(同樞公派)ㆍ병사공파(兵使公派)ㆍ참판공파(參判公派)ㆍ사암공파(思菴公派)ㆍ도촌공파(桃村公派)ㆍ은암공파(隱菴公派)가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6세 진(瑨)은 자는 국보(國寶), 호는 문산(文山)으로 고려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학사(承文院學士)가 되었으며, 원종(元宗)이 즉위하여 환관(宦官) 김신원(金信元)을 시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하도록 했으나 듣지 않고 문소산(文召山)에 들어가 은거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죽은 뒤 왕명으로 예장(禮葬)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고성 이씨 시조 이하 선대 단소(壇所).

7세 존비(尊庇ㆍ1233~1287)는 자는 지정(持正), 초명은 인성(仁成)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백문절(白文節)에게 글을 배워 문장과 예서(隷書)에 능하였으며, 유경(柳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학에 밝았다. 원종 1년(1260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내시(內侍)에 입적되었으며, 이어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ㆍ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ㆍ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호부(戶部)ㆍ병부(兵部)ㆍ이부(吏部)의 시랑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1년(1275년) 상서우승(尙書右丞)ㆍ예빈경(禮賓卿)을 거쳐 좌승지에 올랐으며, 이때 필도지(必?赤)의 일원이 되었다. 1279년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장군 정인경(鄭仁卿)과 함께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사행하였으며, 이듬해 지밀직사사ㆍ세자원빈(世子元賓)에 오르고, 1282년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1284년 감찰대부(監察大夫), 1287년에는 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의 도순문사(都巡撫使)가 되어 여몽군(麗蒙軍)의 일본정벌을 위한 병량(兵糧) 및 군선(軍船)의 조달을 담당하였는데 제반조치가 적의하여 민원을 사지 않았다. 그뒤 벼슬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러 죽자, 그의 죽음에 대하여 특히 세자가 울면서 심히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묘지명이 현재 전하며, 우(瑀)ㆍ정(精)ㆍ숙(璹)의 아들 3형제를 두었다.

▲ 행촌(杏村) 이암(李?)의 자화상과 유묵 및 그가 쓴 청평산문수사시장경비(淸平山文殊寺施藏經碑) 부분.

우(瑀)의 장남 암(?ㆍ1297~1364)은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충선왕 5년(131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충숙왕이 그의 재주를 아껴 비성교감(秘省校勘)을 맡겼고, 뒤에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충혜왕 초에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가 되었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자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여 유배되었고,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지신사(知申事)ㆍ동지추밀원사ㆍ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다. 충목왕 1년(1345년) 찬성사ㆍ정방제조(政房提調) 등을 거쳤고, 충목왕이 죽자 충정왕을 받들기 위해 원(元)나라를 다녀와서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를 받고 좌정승을 지냈다.


공민왕 8년(1359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었으나 싸움을 잘못해 전직되었다. 1363년 왕이 안동(安東)으로 피난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이라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墨竹)에 뛰어났으며, 우왕(禑王) 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 문정공(文貞公) 이암(李?)을 제향하던 금봉서원(金鳳書院)을 1712년 경남 고성군 대가면 갈천리로 이건한 갈천서원(葛川書院ㆍ경남문화재자료 제36호).

암(?)의 동생 교(嶠ㆍ?~1361)는 자는 모지(慕之), 호는 도촌(桃村)으로 충혜왕의 배향공신인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의 사위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1357년 형부상서(刑部尙書)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0년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 경남 고성군 고성읍 서외리에 자리한 행촌(杏村) 이암(李?)과 도촌(桃村) 이교(李嶠) 형제의 유허비(경남문화재자료 제219호)와 도촌(桃村) 이교(李嶠)의 단소.

고려시대 명문으로 세력을 떨친 고성 이씨는 조선조에서도 대를 이어 유명한 문신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성세(盛勢)를 보였는데 암(?)의 장남 인(寅)은 고성군에 봉해졌으며, 차남 숭(崇)은 공민왕 때 궁술로 무명을 떨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때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올라, 대제학을 지낸 후 서예로 필명을 떨쳤던 아우 강(岡)과 함께 가세를 일으켰다.


▲ 경기도 광주시 목동에 자리한 양헌공(襄憲公) 이원(李原)의 묘와 재사인 광모재(廣慕齋) 및 1560년 세워진 신도비.

강(岡)의 아들 원(原ㆍ1368~1430)은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으로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우왕 8년(1382년) 진사가 되고, 1385년 문과에 급제해 사복시승(司僕寺丞)을 거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지평(持平)이 되었고, 정종 2년(1400년) 좌승지(左承旨)로 있을 때 방원(芳遠)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태종 1년(1401년)에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그해 철성군(鐵城君)에 봉작되었고, 같은 해에 공안부 소윤(恭安府少尹)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巡軍) 윤종(尹琮)을 구타한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左右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고, 1403년에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으로 있으면서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08년에 태조가 죽자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감판사(殯殿都監判事)가 되었고, 이듬해에 경상도 관찰사로 영상주목사를 겸직하였다. 이해에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14년 영길도도순문사(永吉道都巡問使)를 거쳐, 이듬해 6월에 예조판서로 있다가 12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참찬을 거쳐 1416년 3월에 판한성부사, 5월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417년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와 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세종 1년(1419년)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고, 1421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고, 1425년에 등극사(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하였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으며, 세조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양헌(襄憲).

▲ 안동댐 수몰로 경북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이건한 이증(李增)의 재사 수다재(水多齋ㆍ경북유형문화재 제23호)와 묘 및 1818년 세워진 이증신도비(경북유형문화재 제24호).

원(原)의 아들 증(增ㆍ1419~1480)은 단종 원년(1453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과거에 응하지 않고 음보(蔭補)로 진해(鎭海)ㆍ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냈는데, 선정(善政)으로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1455년 세조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산수가 아름다운 안동(安東)에 이거(移居)하여 학행(學行)과 덕망 있는 고장 선비 12인과 우향설(友鄕楔)를 맺고 덕업(德業)을 상권(相勸)하며 우유자적하였다. 영남지방의 고성 이씨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 이굉(李肱)이 건립한 안동시 정상동 귀래정(歸來亭ㆍ경북문화재자료 제17호)과 반구정(伴鷗亭ㆍ〃 제258호).

증(增)의 둘째 아들 굉(肱ㆍ1440~1516)은 자는 심원(深源), 호는 귀래정(歸莢亭)ㆍ연생당(戀生堂)으로 성종 11년(148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자(正字)를 거쳐 1493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연산군 6년(1500년) 집의(執義)를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김굉필(金宏弼)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기용되었다가 치사(致仕), 안동(安東)에 내려가 풍류를 즐겼다.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入鄕祖) 이증(李增)의 3남 이명(李?)이 1515년 건립해, 6남 이굉(李肱)이 물려받아 대대로 그의 종손들이 살아온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臨淸閣ㆍ보물 제182호).

원(原)의 손자인 육(陸ㆍ1438~1498)은 자는 방옹(放翁), 호는 청파(靑坡)로 문종 2년(145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간 학문을 닦고, 세조 10년(1464년)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해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보직되었다. 1456년 발영시(拔英試)에 2등, 세조 14년(146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문학(文學)ㆍ응교(應敎)를 거쳐 예종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대관(臺官)이 되고, 이어 판결사(判決事)ㆍ대사성(大司成)ㆍ충청도 관찰사ㆍ호조와 예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하고, 성종 15년(1484년)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병으로 사임했다.

뒤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성종 21년(1490년) 정조사(正朝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이듬해 고부청시 청승습부사(告訃請諡請承襲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ㆍ대사헌ㆍ호조참판(戶曹參判)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ㆍ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견문기를 엮은 ‘청파극담(靑坡劇談)’이 전한다.

▲ 청파(靑坡)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이 수록된 ‘청파이선생문집(靑坡李先生文集)’.

주(胄ㆍ1464~1504)는 자는 주지(胄之), 호는 망헌(忘軒), 현감(縣監) 평(評)의 아들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성종19년(148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ㆍ봉교(奉敎)로 있을 때 사관(史官)이 임금 앞에서 엎드려서 말하는 것을 시정하게 하였다. 정언(正言)을 지냈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또한 직언(直言)으로도 저명하였다. 그후 장령(掌令)으로 있던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적거(謫居)한 7년 후인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그가 전에 궐내에 대간청(臺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사형되어 효수(梟首) 되었다. 중종조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위되었으며, 정조 18년(1794년) 사림(士林)의 공의에 의하여 청도군 매전면 명제서원(明溪書院)에 종향(從享)되었다.

▲ 경북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유호연지(柳湖蓮池) 앞에 자리한 망헌(忘軒) 이주(李胄)의 단소.

주(胄)의 동생 육(育)은 자는 원숙(元叔), 호는 모헌(慕軒)으로 원(原)의 증손이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연산군 초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어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을 지냈으나,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戌午史禍)에 두 형인 쌍매당(雙梅堂) 윤(胤)과 망헌(忘軒) 주(胄)가 모두 연류되어 장형에 처해져 유배되었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에 은거하여 후진들의 교도에 전력하는 한편, 옛날부터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던 신라지(新羅池)를 파고 넓혀서 오늘날과 같은 규모의 못으로 만들어 유호(柳湖)라 이름하고 연(蓮)뿌리를 온 못에 심어 연밭을 만들었다. 넓이 21,000여 평, 둘레 700m의 이 유호연지(柳湖蓮池) 위에는 군자정(君子亭)을 지었는데, 이 아름다운 가경이 청도팔경(淸道八景)의 하나이다.


▲ (上)고성 이씨 청도 입향조 모헌(慕軒) 이육(李育)이 조성한 유호연지(柳湖蓮池). (下)친정 아버지가 묻힐 묘터에 물동이로 물을 부어 못 쓰게 하고 이장한 시아버지 이육(李育)의 묘.

육(陸)의 후손인 괄(适ㆍ1587~1624)은 자는 백규(白圭)로 대사간(大司諫) 지(猩)의 아들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刑曹佐郞)ㆍ태안군수(泰安郡守)를 지냈다. 광해군 14년(1622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있을 때 신경진(申景?

)의 아우 신경유(申景裕)가 협박하다시피 권유하므로 그를 따라 상경,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 거사에 참여해 김류(金?)와 지휘권을 놓고 반목이 있었으나 반정을 성공하게 하였다. 이 때 2등공신(功臣)에 훈록되어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가 그 해에 뒤미처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平安道兵馬節度使兼副元帥)로 임명되어 영변(寧邊)에 출진, 성책을 쌓고 군사훈련에 힘써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624년 아들 전(?)이 한명련(韓明璉)ㆍ정충신(鄭忠信) 등과 공모하여 반역을 꾀한다는 고변을 받자 조정에서 사실 여부를 조사할 목적으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와 선전관(宣傳官)이 영변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진격,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 가고 한때 한성(漢城)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장만(張晩) 원수 휘하 정충신(鄭忠信) 등이 이끄는 관군에게 대패하여 도망가다가 부하장수 기익헌(奇益獻)ㆍ이수백(李守白) 등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무예뿐 아니라 글을 잘 하고,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 대계(大溪) 이주정(李周禎)의 시문집인 ‘대계집(大溪集)’과 그가 사용하던 경서통(經書筒).

주정(周禎ㆍ1750~1818)은 초명은 종제(宗濟), 자는 경첨(景瞻), 호는 대계(大溪), 팔회당(八懷堂) 시항(時沆)의 증손(曾孫)으로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진사시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결성현감(結城縣監)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선정(善政)을 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예의(禮義)를 근본으로 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에 노력하도록 자손에게 훈계하였다. 순조 18년(1818년) 우연히 병을 얻어 그 해 4월 22일 세상을 떠나니 고을 사람들이 통곡해 마지않았고, 시장 상인들은 사흘 동안 철시하며 조상했다.

▲ 해학(海鶴) 이기(李沂)의 모습과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 자리한 생가(전북기념물 제118호).

한말에 와서는 기(沂ㆍ1848~1909)는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으로 고종 31년(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자 전봉준(全琫準)을 찾아가 동학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려다 김개남(金介男)의 반대로 구례(求禮) 자택에 돌아왔다. 광무 9년(1905년) 노일전쟁이 끝나고 미국 포츠머드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기 위해 나인영(羅寅永)과 함께 도미(渡美)하려 했으나 일본 공사 하야시(林權助)의 방해로 떠나지 못했다. 이에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일본 천황과 정계요인들에게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서면항의(書面抗議)를 했다.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귀국,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장지연(張志淵)ㆍ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해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융희 1년(1907년) 나인영(羅寅永) 등 동지 10여 명과 합의하여 결사대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 을사오적신(乙已五賊臣)의 암살을 결행했으나 권중현(權重顯)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실패해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돌아와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면서 민중계몽운동에 종사했으며, 일생에 걸친 항일구국운동으로 1968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취임 때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모습과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구국기념비.

상룡(相龍ㆍ1858~1932)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시국강연을 하였다.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산업ㆍ교육 우선주의와 군사중심주의의 병행을 강조하였으며,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자치기구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교민들을 결속시켰다. 1919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부민단을 해체하여 한족회를 조직하였으며, 임시군정부를 수립하고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지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였다. 1921년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열어 서간도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수립하였으며,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분규가 계속되자 국무령을 사임하고 서간도로 돌아와 정의부(正義府)ㆍ참의부(參議府)ㆍ신민부(新民府) 등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만인 1990년 9월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6년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 1704년 좌승지(左承旨) 이후식(李後植)이 지은 법흥동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중요민속자료 제18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