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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양성 이씨(陽城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양성 이씨(陽城李氏)의 연원
 

양성 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이수광(李秀匡ㆍ1047~1083)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금오위대장군 상주국(金吾衛大將軍上柱國)의 작위를 받고 고려에 와서 문종조(文宗朝)에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 ‘갑자보(甲子譜)’ 세록(世錄)편을 보면, 능란한 외교술로 거란(契丹)과의 외교를 성공시켜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책훈되었고, 양성(陽城)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양성(陽城)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기해보(己亥譜)’ 부변의(附辨疑)편에는 고려 말의 하빈 이씨(河濱李氏)의 시조인 이거(李?)를 시조로 삼고 고려 중엽의 양성(陽城) 이수광(李秀匡)을 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파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보면 시조를 하빈 이씨와 연결시키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수광은 고려 중기의 인물로 고려 말의 인물인 이거의 후손이 될 수 없으므로 양성 이씨와 하빈 이씨는 동관(同貫)이 아니다. ?

▲ 묘가 실전되어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에 마련된 시조 이수광(李秀匡)의 단소(壇所).

이수광(李秀匡)은 여러 차례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유겸전(剛柔兼全)의 외교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 선린관계를 맺은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으로 책훈(策勳)되었고, 또한 덕망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한 곽자의(郭子儀)에 비하였다. 송나라가 변란으로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왕명으로 원정하여 한 달에 세 번 승첩(勝捷)을 거둠으로써 송나라에서 황제가 연회를 베풀어 친필로 “고려대신 이수광은 공관천하(功冠天下)요, 명양후세(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고, 특진 금오위대장군 상주국 관내후 은청광록(特進金吾衛大將軍上柱國關內侯銀靑光祿)의 직위를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영귀공자(榮貴公子)’라 칭송하였다


▲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에 자리한 시조 이하 2ㆍ3ㆍ5ㆍ6ㆍ8세의 단소.

이수광(李秀匡)의 아들 신정(臣靖)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오르고, 손자 원의(元儀)는 밀직사 승지동정(密直司承旨同正), 증손 영주(英柱)는 충렬왕(忠烈王)의 딸 순정공주(順正公主)를 아내로 맞아 관성현령(管城縣令)을 거쳐 충렬왕 원년(1274년) 내원승(內園丞)으로 낭장(郞將)에 특진하였다. 충렬왕 6년(1280년) 정역별감(程驛別監)을 지낸 후 1282년 인물추고별감(人物推考別監)이 되어 전국을 순찰하며 지방관리의 비행을 살핀 후, 1285년 충청도 안집사(忠淸道按集使)로 강윤명(康允明)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충렬왕 24년(1298년) 군부판서(軍簿判書)ㆍ응양군 상장군(鷹揚軍上將軍)을 거쳐 밀직부사(密直府使)에 올랐으며, 충렬왕 26년(1300년) 밀직사사(密直司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다.

▲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에 자리한 충렬왕(忠烈王)의 부마 이영주(李英柱)의 묘.

현손(玄孫) 정(?)은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으며, 5남을 두었다. 장남 수방(守邦ㆍ?~1341)은 호가 석탄(石灘)으로 용모가 뛰어나게 미려하였으며, 심성이 깨끗하였다 한다. 일찍이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영종(英宗) 황제가 그 풍의를 가상히 여겨 특히 예우하여 나해(那海)라는 이름을 주고 직성사인(直省舍人) 벼슬을 내렸으며, 환국하매 충숙왕이 융숭한 예우를 하였다. 충숙왕이 원나라 영종(英宗)에게 불려가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5년 동안 억류당하자, 중서성(中書省)에 부당함과 환국을 요청하는 글을 올려 국왕인을 다시 찾아 1325년 왕을 받들어 귀국하였다. 이후 1327년에도 또 모략이 있었으나 간신을 물리치고 선위(禪位)를 저지하였다. 1327년 군부판서(軍簿判書)로 1등 공신이 되었는데, 교지에 “과인이 5년간 원도(연경)에 있을 때, 간신이 왕위 찬탈 음모를 꾸몄으나 시종하는 신하들이 충정을 다하여 나를 보좌해 주었는 바, 그중에서도 이나해(李那海)의 공이 제일 크므로 1등 공신에 녹하고 아울러 부모처자에게도 작위를 내리노라.” 하였다. 1341년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병환으로 중도에서 죽었다.


수방(守邦)은 춘부(春富)ㆍ인부(仁富)ㆍ광부(光富)ㆍ원부(元富) 네 아들을 두었는데, 위로 세 아들은 모두 시중(侍中)에 올랐고 막내 원부(元富)도 상서(尙書)를 역임해 모두 대현(大顯)하니 세상의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해(那海) 같이 됐으면 하는 뜻에서 ‘사나해(似那海)’라고 한 것이 ‘사나이 대장부(大丈夫)’란 말의 기원이 됐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이춘부(李春富)의 단소와 전북 익산시 삼기면 오룡리 옥실에 자리한 아들 이한(李澣)의 묘.

특히 장남 춘부(春富ㆍ?~1371)는 충정왕 때 지신사(知申事)ㆍ우대언(右代言)ㆍ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공민왕 7년(1358년)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로서 왜구를 격퇴하고 이듬해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승진했고, 1360년 동강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로서 다시 왜구를 격퇴했다. 이듬해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전라도도순문사 겸 병마사(全羅道都巡檢兼兵馬使)가 되어 이를 물리친 공으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에 임명되고, 1361년 1등 공신이 되었다. 그 뒤 파면되었다가 1365년 신돈(辛旽)에게 아부하여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고,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에 올랐다. 1367년 충근절의동덕찬화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功臣)에 책록되었으며, 1368년에는 왕의 환심을 사서 시중까지 지냈다. 매일 아침 신돈의 집을 다녀와서야 등청을 할만큼 심복이었으며, 1371년 신돈이 수원에 귀양가게 되자 신돈의 심복으로서 횡포를 자행한 죄로 사형되었다.

▲ 이춘부(李春富)의 아우 이인부(李仁富)의 단소.

양성 이씨는 새 왕조 조선이 들어서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수방(守邦)의 셋째 아우 수인(守仁)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72현 중의 한 분이 되었고, 장손인 옥(沃ㆍ?~1409)은 1371년 아버지 춘부(春富)가 신돈의 심복으로서 횡포를 자행한 죄로 사형되자 5형제 모두 이에 연좌되어 가산은 몰수되고 강릉부의 관노가 되었다. 이때 강릉부ㆍ영덕현ㆍ덕원현에 왜구가 침입하자 용감히 싸워 왜구를 격퇴해 왕은 안장 갖춘 말과 벼슬을 내렸고, 우왕 13년(1387년) 좌상시(左常侍)를 지냈다. 뒤에 조민수(曺敏修)의 일파로 창왕(昌王)을 세우는 데 가담하였다 하여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공격을 받아 파출되었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태조 7년(1398년)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ㆍ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냈고, 1409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있을 때 죽었다. 그러나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志)에 있는 ‘절제사이선생봉안문(節制使李先生奉安文)’에 의하면 조선조에서는 퇴거(退居)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시호는 정절(靖節).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양천 허씨 세장산에서 실전되었다 592년만에 찾아 포천으로 이장한 정절공(靖節公) 이옥(李沃)의 묘와 이장시 발굴된 유물.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장서리에 자리한 이추(李推)의 묘.?

 

그러나 일부에서는 새 시대에 참여 가문의 융성(隆盛)을 지켰다. 수방(守邦)의 넷째 아우 수림(守林)의 아들 추(推ㆍ?∼1425)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ㆍ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해 청백리(淸白吏)에 오르고, 이시중공(二侍中公) 인부(仁富)의 아들 지실(之實)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라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웠다.


옥(沃)의 셋째 아들 사검(思儉ㆍ?~1446)은 태종 5년(1405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직(司直)을 지내고, 태종 8년(1408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명나라에 조하(朝賀)할 때 수행하여 그의 난잡한 행동을 충고하여 미움을 받았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ㆍ世宗)이 세자(世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그를 보좌, 이어 상호군(上護軍)에 승진했다가 파직되어 평산(平山)에 내려갔다. 세종 1년(1419년) 왜구(倭寇)가 황해도 연안에 침입하자 태종에 의해서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에 임명되었으나 싸우지 않은 죄로 옹진(甕津)에 유배, 이듬해 풀려 나왔다. 1427년 상호군으로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매를 가지고 명나라에 가다가 요동(遼東)에 이르러 매가 죽자, 죽은 매를 가지고 북경(北京)의 대궐에 가서 황제에 대한 태조의 충성을 그르친 것을 사죄, 이를 가상히 여긴 명나라 횡제에게서 장군모(將軍帽)를 하사받았다. 1429년 좌군 첨총제(左軍僉摠制)ㆍ경상좌도 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를 지내고,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세종 17년(1435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지중추부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시호는 공소(恭昭).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의 이사검(李思儉) 묘. 무인석의 모자가 투구형으로, 그가 진응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하사한 투구 모양과 같은 것이라 전한다.

옥(沃)의 넷째 아들 사임(思任)은 세종 4년(1422년) 행수(行守)를 거쳐 세종 8년(1426년) 지간성군사(知杆城郡事), 세종 12년(1430년) 간성군수가 되고, 이듬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세종 19년(1437년) 안동ㆍ김해부사로 경상좌도 절제사를 겸임했고, 세종 24년(1442년)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ㆍ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ㆍ충청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ㆍ형조참의(刑曹參議)ㆍ전라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세종 30년(144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고, 세종 31년(1449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경상우도 수군처치사ㆍ동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군기감제조(軍器監提調)로 재직시 병기제조와 국방력 강화에 힘썼다. 판한성부사로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양성 이씨는 조선조 초기에 이렇게 환로를 터 정2품(正二品) 이상의 고관만 해도 12명을 배출했으며, 이후 문과급제자는 태종 때 9세 옹(壅)을 비롯 38명에 달했다.

병조참판를 지낸 한(澣)의 아들 맹상(孟常ㆍ1376년∼?)은 태종 11년(1411년) 강릉판관(江陵判官)을 거쳐 세종 6년(1424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세종 19년(1437년) 지사간(知司諫)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지사간원사 겸 지형조사(知司諫院事兼知刑曹事), 세종 21년(1439년) 형조참의(刑曹參議), 세종 22년(1440년) 원주목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ㆍ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세종 23년(1441년) 공조와 호조참의가 되었다. 세종 25년(1443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자리한 정평공((靖平公) 이순지(李純之)와 부인 영월 신씨와의 합장묘.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4호.

수방(守邦)의 현손으로 맹상(孟常)의 아들인 순지(純之ㆍ?~1465)는 자는 성보(誠甫)로 족보에 의하면, 그에게는 형이 넷 있었는데 전지(全之)ㆍ겸지(謙之)ㆍ효지(孝之)ㆍ돈지(惇之)로 이들 가운데 셋째까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직 그의 태어난 해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형제 관계로 보아 1400년쯤으로 보인다. 그는 어렸을 때 몸이 약하여 자기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잔병이 많고 5살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로 누워서 살 정도의 그를 극진히 돌보아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만든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세종 9년(1427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김담(金淡)ㆍ이천(李?)ㆍ장영실(蔣英實) 등과 협조해 의상(儀象)을 교정하고, 간의규표(簡儀圭表)ㆍ앙부일귀(仰釜日晷)ㆍ자격루(自擊漏) 등을 제작했다. 승지(承旨)를 거쳐 1450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고, 세종 3년(1457년)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다. 이듬해 공조참판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고, 1459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원래 성격이 치밀하여 산학(算學)ㆍ천문(天文)ㆍ음양(陰陽)ㆍ풍수(風水)의 여러 방면에 걸쳐 능통했고, 1465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거쳐 행상호군(行上護軍)으로 죽었다. 아들은 6명을 두었는데, 말년에는 그의 시집간 딸이 사방지(舍方知)라는 여장차림의 남자 노비와 추문을 일으켜 말썽이 된 일도 있다. 시호는 정평(靖平).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에 자리한 이예(李芮)의 묘와 친필(中) 및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에 부친 찬시(讚詩).

순지(純之)의 장조카인 예(芮ㆍ1419~1480)는 자는 가성(可成), 호는 눌재(訥齋)로 증판서(贈判書) 전지(全之)의 아들이다. 세종 20년(1438년) 진사시에 합격, 144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으며, 군기시 직장(軍器寺直長)ㆍ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ㆍ부교리(副校理)ㆍ부수찬(副修撰) 등을 거쳐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뒤 직집현전(直集賢殿)을 지냈다. 세조 1년(1455년) 집의(執義)ㆍ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거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대사헌을 역임하고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공조ㆍ형조ㆍ이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1465년 발영시(拔英試)에 2등, 같은 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보직, 공조ㆍ형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성종 2년(1471년)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ㆍ수지중추부사(守知中樞府事)ㆍ대사헌을 역임하였고,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성종 7년(147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 1514년 함흥(咸興)에서 목판(木板)으로 간행한 문간공(文簡公) 이승소(李承召)의 문집(文集)인 삼탄집(三灘集ㆍ충북유형문화재 제137호).

승소(承召ㆍ1422~1484)는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으로 옥(沃)의 증손이다. 세종 20년(1438년) 진사시에 합격, 144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부수찬(副修撰)ㆍ부교리(副校里)ㆍ응교(應敎)ㆍ장령(掌令) 등을 지냈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세조 4년(1458년) 예조참의로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찬정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ㆍ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지냈다. 1462년 세조의 ‘병장설(兵將說)’을 찬수하였으며, 성종 2년(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예조ㆍ이조ㆍ형조의 판서를 지내고, 1480년 주문사(奏聞使)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박식하여 예악(禮樂)ㆍ병형(兵刑)ㆍ음양(陰陽)ㆍ율력(律曆)ㆍ지리에 통달하였으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용모와 태도가 단아청정(端雅淸淨)해 ‘금옥군자(金玉君子)’라고도 불렸으며, 저서에 ‘삼탄집(三灘集)’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 충북 충주시 이류면 매현리에 자리한 문간공(文簡公) 이승소(李承召)의 묘와 그를 제향하기 위해 1904년 건립된 청간사(淸簡祠).

이와 같이 많은 인재를 배출함으로써 문운(門運)의 중흥을 맞이하였으나 7세 지택(之澤)의 사위인 황보인(皇甫仁)이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피화(被禍)되고,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당시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있던 사검(思儉)의 아들인 휘(徽ㆍ?~1456)는 사육신(死六臣) 이개(李塏)의 매부로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였다. 휘(徽)는 숙종조에 신원되어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사육신과 함께 배향되고, 양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휘(徽)의 장녀는 안동 김씨 김맹헌(金孟獻ㆍ직예문관)에게 출가하였는 바, 휘(徽)의 자손이 화를 피하여 멀리 나주로 숨어 자취가 묘연했던 528년간을 외손인 안동 김씨 문중에서 봉사해온 눈물겨운 일화가 숨어 있으며, 1984년에야 본손(本孫)봉사로 환원되었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이사검(李思儉) 묘 앞에 설치된 아들 이휘(李徽)의 단소.

영남(英男ㆍ1566년~1598년)은 자는 사수(士秀)로 부사직(副司直) 사종(嗣宗)의 아들이다. 선조 17년(1584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ㆍ훈련원 첨정(僉正)ㆍ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등을 지냈다. 선조 25년(1592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휘하의 율포만호(栗浦萬戶)로 전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원균을 도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왕래하며 청군(請軍)하였고, 이후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으로 각 해전에 참전해 많은 전공을 세웠다. 선조 28년(1595년) 태안군수(泰安郡守)ㆍ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에 전임되어 선정을 배풀었고, 선조 29년(1596년)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이 패사(敗死)한 후 조방장(助防將)으로 진도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였고, 1598년 가리포 첨사 겸 조방장(加里浦僉使兼助防將)으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순신과 함께 순국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 충북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에 자리한 이영남(李英男) 장군의 묘와 그가 사랑한 말의 무덤인 용마총(龍馬塚).

그외 나대용(羅大用)과 함께 충무공(忠武公) 휘하에서 거북선 제작에 참여하고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순국한 만호(萬戶) 14세 설(渫)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의병(義兵)의 원조인 13세 광익(光翼ㆍ1520~1592)은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자 생질(甥姪) 김천일(金千鎰)과 종제 광주(光宙)를 불러 국난에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당부하고, 고경명(高敬命) 등에게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띄우고는 선조(宣祖)가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다 73세의 노구(老軀)로 공주(公州)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의병장(義兵將)으로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 전투에서 분사(憤死)한 11世 굉(宏ㆍ?∼1593), 울산군수(蔚山郡守)로 분전하다 순국해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 13세 언함(1538∼1593), 간성군수(杆城郡守)로 의병을 영솔(領率)해 신립(申砬)과 함께 충주(忠州) 달천(達川)에서 신립(申砬)과 함께 싸우다 순국해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 14세 충신(忠信ㆍ?∼1592년),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좌익장(左翼將)으로 분전하다 순국한 광익(光翼)의 아들 14세 성찬(成燦),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14세 진(振ㆍ?~1598), 평산(平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밀양부사(密陽府使)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왜군을 크게 격파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된 14세 영(英ㆍ1559∼1616)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구국의 인물들이다.


그밖에 학문과 문장으로 양성 이씨를 빛낸 인물로 13세 문령(文齡ㆍ1524∼1592)은 자는 희옹(姬翁)으로 벼슬은 예빈사참봉(禮賓寺參奉)ㆍ장연훈도(長淵訓導)ㆍ재령교수(載寧敎授) 등에 그쳤으나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당대의 거유(巨儒)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수계강론(修契講論)하였는데, 율곡은 늘 문령(文齡)의 인품에 감탄하여 석촌존사(石村尊師)라고 높이 불렀다.

▲ 충북 진천군 진천읍 행정리에 자리한 이몽길(李夢吉)의 묘와 아들 이득곤(李得坤)이 1616년 건립해 1983년 진천읍 건송리에 이건된 식파정(息波亭).

성리학자(性理學者) 15세 몽길(夢吉ㆍ1564~?)은 자는 응휴(應休), 대명(大鳴)의 아들로 신잡(申?)의 문인이다. 선조 39년(1606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ㆍ유필선(柳弼善) 등과 더불어 낙중팔현(洛中八賢)으로 불리웠으며, 사복사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아들 득곤(得坤ㆍ1587∼?)은 자는 덕후(德厚), 호는 식파정(息波亭)으로 성경(聖經)에 뛰어나 광해군조에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산림에 들어가 유유자적하니, 세인들이 상산처사(常山處士)라 일컬었다.


오세창(吳世昌)이 서양화법을 이용하여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고 평한 이희영(李喜英)의 ‘견도(犬圖)’.

희영(喜英ㆍ?∼1801)은 자는 추찬(秋餐)이며, 천주교인으로 교명(敎名)은 루가이다. 처음 여주에서 살았으나 서울에 올라와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서학(西學)을 배우고 가톨릭교도가 되었다. 정철조(鄭喆祚)에게 그림을 배웠고, 성화(聖畵)와 영모화(翎毛畵)ㆍ산수 등을 즐겨 그렸다.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예수의 상(像)을 그려 황사영(黃嗣永)에게 보낸 일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유작으로 ‘견도(大圖)’와 ‘누각산수도’를 비롯한 남종화풍 산수도가 여러 점 전하고 있으며, 특히 ‘견도(犬圖)’에 대해서 오세창(吳世昌)은 서양화법을 이용하여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고 평한 바 있다.

▲ 조선 말기 의병대장으로 1909년 45세로 순국한 이능권(李能權)의 최후 모습.

능권(能權ㆍ1864~1909)은 아명은 능한(能漢)으로 강화(江華)에서 출생했다. 대한제국의 육군장교로 고종 42년(1905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가는 이준(李儁) 일행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순종 1년(1907년) 군대해산령으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가 해산되자 군인 300여 명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되었으며, 의병은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훈련이 잘 되어 일본군과의 접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의병부대를 대동창의진(大同倡義陣)이라 하고, 강화군 길상면(吉祥面)에 살고 있는 방의표(方宜杓)로부터 군자금 1500냥을 조달받는 등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전등사(傳燈寺)에 숨겨 둔 무기를 일본군에게 넘겨준 송계찬(宋戒燦)을 살해하였다. 1909년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강도 및 모살죄의 명목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뒤 그해 순국했다. 강화(江華) 영모재(永慕齋)에 봉위되었으며, 국가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고 대전국립묘지 순국선열 묘역에 모셔졌다.


조선조를 통해 양성 이씨 문과급제자는 38명, 군호(君號)를 받은 자는 6명, 익호(諡號) 5명, 호당(湖堂) 1명, 공신(功臣) 38명, 왕자사부(王子師傳) 5명, 묘사(廟祠) 및 서원(書院)에 배정된 이가 11명, 효자정려(孝子旌閭) 20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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