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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연원

영천 이씨(永川李氏) 시조(始祖)는 고려초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영천 땅에 세거한 이문한(李文漢)이며, 선계(先係)는 신라의 전신 사로육촌(斯盧六忖) 중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 알평(謁平)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시조 이하 5세까지는 이름과 관작만 기록되었으며, 6세 금오위장군(金吾衛將軍) 영(榮)은 영천 청통면 북습 망지산에 묘가 있고, 7세에 이르러 6형제의 계보기록이 족보에 전한다.

▲ (上)영천시 오미동에 세워진 시조 이후 5세까지의 제단비. (下)시조 이문한(李文漢)ㆍ익양군(益陽君) 이극인(李克仁)ㆍ영양군(永陽君) 이대영(李大榮)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尊德祠).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17세기까지 문중 가승(家乘)이 있었다. 18세기초 함흥 판서공파 가승보에서 시조 이문한(李文漢) 이하 12세 계보가 고증되어 조선 영조 24년(1746년) 건곤(乾坤) 2권으로 ‘최초 족보인 병인보(丙寅譜)’가 발간되었다. 현재 건권(乾卷)은 찾지 못하고 곤권(坤卷)만 전한다.

▲경북 영천시 청통면 망지산에 있는 6세조 금오위장군(金吾衛將軍) 이영(李榮)의 묘

1798년 간행된 영천 이씨 ‘무오보(戊午譜)’에 따르면 6세 영(榮)이 아들 6형제를 두면서 가문이 번성해 여러 파로 갈라졌다. 장남 광순(光純)의 현손으로 고려조에 선관서승(膳官署丞)을 지낸 약(約)을 파조로 하는 서승공파(署丞公派), 2남 광청(光淸)과 3남 봉(封)은 절손, 4남 극인(克仁)을 파조로 하는 익양군파(益陽君派), 5남 수춘(守椿)을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6남 세화(世和)는 상서공파(尙書公派)로 6세 이후 절손 등의 이력을 가진다.


4남 극인(克仁)은 6세까지 자손기록은 있으나 그후 기록은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계(上系) 미상이지만 극인(克仁)의 후손으로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낸 영양군(永陽君) 대영(大榮)과 울산군(鬱山君) 중영(仲榮) 형제가 있다. 현재 영양군파 문중에서는 상계기록 미상으로 대영(大榮)이 익양군파 극인(克仁)의 직계 손자뻘로 추정만 하고 있다. 때문에 대영(大榮)은 영천 이씨 중시조로 영양군파(永陽君派) 1세가 되며, 승랑 겸 관농방어사(承郞r兼觀農防禦使)를 지낸 동생 중영(仲榮)은 울산군파(蔚山君派) 중시조 1세가 된다. 그 중 영양군파(永陽君派)가 인물도 많이 나왔고, 수도 많아 오늘날 영천 이씨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한편 계보 미상으로 고려조에서 영동정(令同正) 지낸 박(?)을 중시조로 하는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가 있는데 현재 계대가 영양군파(永陽君派)와 비슷해 ‘동본이파(同本異派)’가 있을 수 없다는 양 문중의 논의 끝에 합적을 고려하고 있다.

 

▲ 1765년부터 45년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 1890년 찾게 된 영천시 오미동 이대영(李大榮) 묘.

영천 이씨는 고려 말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문과 급제자 48명을 비롯하여 호당(湖堂) 1명, 청백리(淸白吏) 2명, 공신 1명을 배출했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영(大榮)의 5대손인 석지(釋之)가 있다. 호가 남곡(南谷)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흡(洽)의 아들이며, 충혜왕 11년(1341년)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고, 충목왕 3년(134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ㆍ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으나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세력이 실권을 휘두르자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용인현(龍仁縣)에 있는 남곡(南谷)이라는 골짜기로 숨어 들어간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한 뒤 그 인품을 아껴 여러 차례로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선생은 끝까지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아들 5형제의 자손이 7파로 나눠지며 영천 이씨 10파 중에 가장 많다. 시호는 충정(忠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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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에 자리한 남곡(南谷) 이석지(李釋之) 묘와 남곡재(南谷齋).

석지(釋之)의 아우 자용(子庸)은 우왕 4년(1378년)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전(前) 사재령(司宰令) 한국주(韓國柱)를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침입을 금하도록 단판하고 귀국할 때 큐우슈[九州]에서 포로가 되어 있던 우리 동포 230명을 구출해 왔다. 138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북원(北元)과 수교하는 사실에 격분한 명나라에 의해 억류되어 있던 김유(金庾)ㆍ홍상재(洪尙載)ㆍ주겸(周謙) 등과 같이 돌아오다가 객사하였다.



감(敢)은 자는 의민(義民), 호는 문한당(文閒堂)으로 우왕 11년(138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지제교(知製敎)ㆍ한성소윤(漢城少尹)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ㆍ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 등을 지냈다. 그는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북청(北靑)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효성이 자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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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한당(文閒堂) 이감(李敢)을 제향하는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임강정사(臨岡精舍)와 유허비.

조선조에서는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희충(希忠)의 아들 응(膺ㆍ1365∼1414)이 우왕 11년(1385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정종 2년(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태종 1년(1401년)에는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녹훈되고, 영양군(永陽君)에 봉하여졌다. 태종 3년(1403년) 우대언(右代言)이 되어 태종을 보필하였으며, 1405년에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성질이 굳세고 사납고 고항(高抗)하여 이론(異論)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함부로 남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으며, 아들은 순몽(順蒙)ㆍ계몽(啓蒙)이 있다. 시호는 정경(貞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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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위양공(威襄公) 이순몽(李順蒙)이 1443년 중국식으로 지은 경북 영천시 성내동 숭렬당(崇烈堂ㆍ보물 제521호). 지금은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으로 쓰고 있다. (下)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 칠읍산에 자리한 이순몽(李順蒙)의 묘. 경기도기념물 제92호.

응(膺)의 아들 순몽(順蒙ㆍ1386~1449)은 태종 5년(1405년) 음보(蔭補)로 벼슬을 시작하여 태종 16년(1416년)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후에 무과(武科)에 급제해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ㆍ동지총제(同知摠制)를 지냈다. 세종 1년(1419년)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로 이종무(李從茂)ㆍ우박(禹博) 등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정벌에 나서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했으나 오직 그 휘하의 군대만 손실 없이 귀환했다. 그 뒤 경상좌도 병마절제사(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ㆍ중군총제(中軍摠制) 등을 지냈으며, 한때 왕의 총애를 믿고 점차 교만하여 전 병조판서 황상(黃象)의 첩을 빼앗아 간통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다.


1425년 진하사(進賀使)로 중국에 다녀왔고, 1433년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가 되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고 돌아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했다. 세종 16년(1434년) 경상도 도절제사가 되어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고리대금을 일삼아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두터운 왕의 신임과 특히 세종이 가장 아끼는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에게 금은보화를 뇌물로 바쳐 무사했다. 1436년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憮)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47년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를 지냈다. 영천의 위양사(威襄祠)와 숭렬당(崇烈堂)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양(威襄).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유림동에 자리한 쌍계(雙溪) 이종검(李宗儉)의 묘.

종검(宗儉)은 호는 쌍계(雙溪)로 석지(釋之)의 손자다. 세종 11년(1429년) 종제인 보흠(甫欽)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여 한림ㆍ직제학(直提學)ㆍ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훈(錄勳)되었으며, 벼슬에서 물러나 부모님을 모심에 효성이 지극했다. 아우인 종겸(宗謙)과 우애가 독실하여 잡닭이 학(鶴)을 낳는 상서로운 이변을 가져 오는 일이 있었고, 문종(文宗)이 이를 듣고 효우당(孝友當)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세조가 즉위하여 보흠(甫欽)과 내종인 사육신 유성원(柳誠源)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 남곡(南谷)으로 돌아가 이맹전(李孟專)ㆍ김시습(金時習)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여생을 마쳤다. 정조 10년(1786년) 광주(廣州) 대치사(大峙祠)에 봉향되었고, 순조 4년(1804년) 안성 덕곡(德谷)에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추배되었다.

▲ (上)충장공(忠莊公) 이보흠(李甫欽)의 교지. (下)1442년 안평대군이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리게 하고 문사(文士)들에게 시를 짓게 한 것을 모아 엮은 소상팔경시첩(보물 제1405호)에 적힌 이보흠의 시.

보흠(甫欽ㆍ?~1457)은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부사직(副司直) 현보(玄寶)의 아들로 유방선(柳方善)의 문인이다. 세종 11년(142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거쳐 사정(司正)이 되고, 1443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주부(主簿)가 되었다. 1448년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로 있던 중 사창(社倉) 제도의 실시를 위해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옮겨져 대구(大邱)에서 사창법(社倉法)을 효과적으로 시행했다. 단종이 폐위된 뒤 지순흥군사(知順興郡事)로 보외(補外)되었다가 세조 3년(1457년) 순흥부사(順興府使)로서 순흥(順興)에 유배된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와 함께 영남사인들을 규합해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박천(博川)에 유배된 뒤 금부도사 최수남(崔秀男)에게 교살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 청안(淸安)의 향사(鄕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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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절공(孝節公) 이현보(李賢輔)가 태어나 자란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농암종택(聾巖)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두 번에 걸쳐 옮겨 지었다.

현보(賢輔ㆍ1467~1555)는 자는 비중(?仲), 호는 농암(聾巖)ㆍ설빈옹(雪?翁)으로 현감

(縣監) 흠(欽)의 아들이다. 연산군 4년(149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ㆍ춘추관기사 등을 지냈다. 1504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논하다가 안동(安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복직된 뒤 밀양부사(密陽府使)ㆍ충주목사(忠州牧使) 등을 지내고, 중종 18년(1523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그뒤 병조참지(兵曹參知)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부제학(副提學)ㆍ경상도 관찰사ㆍ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지냈으며, 1542년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있을 때 은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명종 1년(1546년)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1554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는 조선시대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연을 읊은 많은 시조를 남겼으며, ‘농암가(聾巖歌)’, ‘춘민곡(春珉曲)’ 등의 시조와 ‘어부가(魚父歌)’를 개작(改作)했고 ‘농암문집(聾巖文集)’을 남겼다.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효절(孝節).

▲ 효절공(孝節公) 이현보(李賢輔) 영정과 경북 안동시 정자동에 자리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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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1665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경북 영천시 평은면 천본리 오계서원(迂溪書院)과 그가 공부하던 군자정(君子亭ㆍ下).

덕홍(德弘ㆍ1541~1596)은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선조 11년(1578년) 조정에서 이름난 선비 9명을 등용할 때 4위로 뽑혀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ㆍ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率)ㆍ영춘현감(永春縣監) 등을 지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였으며, 성리학과 역학에 뛰어났다. 혼천의(渾天儀)ㆍ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하였고, ‘심경(心經)’ㆍ‘고문전후집(古文前後集)’ 등을 주석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영주의 오계서원(汚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주역질의(周易質疑)’ㆍ‘사서질의(四書質疑)’ㆍ‘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ㆍ‘간재집(艮齋集)’ 등이 있다.

?? ▲ 경북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에 자리한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의 묘와 재사인 영모암(永慕菴).

이 밖의 인물로는 참봉(參奉) 수인(守認)의 아들인 덕남(德男ㆍ?~1592)이 있다. 자는 윤보(潤甫)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홍자수(洪自修)에게서 자랐으며, 20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해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이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선조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에게 무신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장수 재목을 천거하라 하자,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함께 천거되어 정3품의 어모장군 훈련원정(御侮將軍訓練院正)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안성에서 있었을 때 왜란이 일어나자, 외숙(外叔) 홍자수(洪自修), 외사촌 동생 홍계남(洪季男)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농기(農器)를 녹여서 무기를 만들며 군사를 조련시켜, 왜군이 진천의 엽둔령 고개를 넘어 안성으로 진군한다는 첩보를 듣고 선발대 3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청룡리의 동구 밖에서 왜적 10여 명을 사살하자 주위 청장년들이 의병으로 자원한 자가 3,000여 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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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공을 세우고 전사해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된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이덕남(李德男)의 묘.

왜적이 죽산부로 결집을 시도하자 죽산의 좌찬령(佐贊嶺)으로 달려가 연전연승으로 이를 격퇴했으며, 이 전투에서 외사촌 홍계남(洪季男)이 중상을 입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출하였다. 이어 기호(畿湖)ㆍ호서(湖西) 지방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죽산에 있던 왜적의 습격을 받고 혈전 끝에 외삼촌 홍자수(洪自修)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제문을 지어 장군의 지략과 충성심을 추모하기를 중국 제갈량(諸葛亮)의 지략에 비유했으며, 선조 30년(1597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서되었고, 숙종 44년(1718년) ‘충신지문(忠臣之門)’이란 정문이 세워지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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