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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이씨(李氏)의 유래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이씨(李氏)의 유래

이씨(李氏)의 본관(本貫)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51본(本),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546본, ‘전고대방(典故大方)’에 109본, ‘국조방목(國朝榜目)’에 103본 등으로 가록되어 있으나, 그중 시조(始祖)가 뚜렷하게 밝혀지고 현존하는 본관은 100여 본으로 추정된다.

이들 이씨(李氏)의 연원(淵源)은 계통별(系統別)로 분류하면 첫째는 신라(新羅)의 육촌(六寸)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ㆍ급양부)의 촌장 알평(閼平ㆍ표암공)이 신라 유리왕 9년(32년)에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받을 때 이씨(李氏)를 하사받아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계통을 이어오다가 합천(陜川)ㆍ가평(加平)ㆍ평창(平昌)ㆍ원주(原州)ㆍ아산(牙山)ㆍ재령(載寧)ㆍ우봉 이씨(牛峰李氏) 등으로 분적(分籍)한 계통이 있다.

그리고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인 이한(李翰)의 계통과 당(唐)나라 장군으로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百濟)를 침공할 때 함께 따라와 신라로 귀화한 이무(李茂ㆍ연안 이씨의 시조)의 계통이 있으며, 중국 한문제(漢文帝) 때 사람인 이반(李槃)의 24대손 이황(李?ㆍ고성 이씨의 시조)과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둘째 아들 후예로 전하는 이허겸(李許謙ㆍ인천 이씨의 시조), 원(元)나라 출신으로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진 이지란(李之蘭ㆍ본명은 퉁두란, 청해 이씨의 시조), 중국 농서(?西) 출신으로 낙랑태수(樂浪太守)를 지낸 이진(李震ㆍ안악 이씨의 시조) 등으로 대별된다.

그밖에 우계 이씨(羽溪李氏)와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일부도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시조 알평(閼平)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이씨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상당한 세력을 떨치며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 온 씨족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을 숱하게 배출시켰다. 특히 신라와 고려조에서 역사를 수놓은 많은 명신(名臣)ㆍ재상(宰相)ㆍ학자 그리고 효(孝)를 바탕으로 한 효자와 열녀 등이 가문을 빛냈다.

⊙가리(加利) 이씨 시조 이승휴(李承休ㆍ1224~1300)는 고려 후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로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로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저자로 유명하다. 가리는 경북 성주군에 있던 지명으로 일명 기성(岐城)이며, 그는 가리현인으로 되어 있을 뿐 실제로 그곳에 어떤 연고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시조 이후 후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가평(加平) 이씨 신라(新羅) 때 완산호장(完山戶長)을 지낸 이인보(李仁輔)를 시조(始祖)로 한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형손(亨孫)의 8대조로 호장(戶長)을 지낸 진수(珍守)를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계해보(癸亥譜)’에 보면 관적이 완산(完山)으로부터 조종(朝宗)으로, 다시 가평으로 신라ㆍ고려ㆍ조선에 이르렀다는 ‘신축보(辛丑譜)’ 서문의 소개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다림(李多林)이 가평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이 되었다는 ‘정유보(丁酉譜)’의 서문도 아울러 기록되어 있다.

⊙강동(江東) 이씨 시조 이만욱(李萬郁)은 숙종 31년(1705년)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문헌이 없어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강양(江陽) 이씨 시조 이초(李超)는 고려 때 사재령(司宰令)을 지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보면 이개지(李開之)의 후손인데, 합천 이씨(陜川李氏)와 동원(同源)이라고 하였다.

⊙강진(康津) 이씨 시조 이진(李珍)은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해 충정왕 3년(1351년) 지도첨의상의(知都僉議商議), 공민왕 3년(1354년) 평리(評理)가 되었다. 그의 선계(先系)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때의 완(完)이라고 하는데, 그 뒤의 계대를 잃어 이진(李珍)을 시조로 하고 강진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강화(江華) 이씨 시조 이대평(李大平)은 고려시대에 중랑장태보(中郞將太保)를 지냈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녹훈되었다. 그가 세거한 곳이 하음(河陰ㆍ강화의 옛 이름)이어서 후손들이 강화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개성(開城) 이씨 시조 이차감(李次憾)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녹사령(錄事令)ㆍ영동정(令同正) 등을 역임하고 개성부윤(開城府尹)을 지냈다. 그의 손자 덕시(德時)는 고려 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공신이 됨으로써 후손들이 개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거창(居昌) 이씨 시조 이성곤(李性坤)은 영조 35년(1759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원흥(李元興)의 아들이라는 것 이외에 문헌의 부재로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 등을 알 수 없다.

⊙결성(結城) 이씨 시조 이창욱(李昌旭)은 홍양(洪陽ㆍ홍성) 출신으로 태종 14년(1414년) 호남지방(湖南地方)에 도적들이 봉기하자, 홍양초토사(洪陽招討使)로 도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우고 예산(禮山)에서 순절하여 호남제군 진무대장군(湖南諸郡鎭撫大將軍)에 추증되었으며, 결주군(潔州君결주는 결성의 다른 이름)에 봉해졌다. 본관은 처음 이성(利城)이었던 것을 정조(正祖) 때 결성으로 고쳤다.

⊙경산(京山) 이씨 시조 이덕부(李德富)는 고려 정종(定宗) 때 악거부정(樂居副正)을 지냈으며, 당시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의 전단(專斷)에 반대하여 명종 3년(1173년) 경산부(京山府) 본아리(本牙里ㆍ지금의 星州邑 京山里)에 옮겨 살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경주(慶州) 이씨 시조 이알평(李謁平)은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阿飡)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다. 유리왕 9년(32년) 양산촌 이씨(楊山村李氏)로 사성하였다고 하며, 법흥왕 23왕(536년) 문선공(文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무열왕 3년(656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를 알 수 없어, 이색(李穡)이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신라의 소판(蘇判)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 곧 기세조가 되었다.

한국의 이씨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의 이씨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분관된 것으로, 합천 이씨(陜川李氏)ㆍ차성 이씨(車城李氏)로 갈라졌다. 또 경주 이씨의 중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져, 평창 이씨(平昌李氏)ㆍ가평 이씨(加平李氏)ㆍ아산 이씨(牙山李氏)ㆍ재령 이씨(載寧李氏)ㆍ우계 이씨(羽溪李氏)ㆍ진주 이씨(晉州李氏)ㆍ원주 이씨(原州李氏)로 갈라져 나갔다.

⊙고령(高靈) 이씨
시조 이헌(李憲)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부(古阜·瀛州) 이씨 시조 이경조(李敬祖)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최충(崔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의 효시인 구재학당(九齋學堂) 출신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문종 25년(1071년) 김제(金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송(宋)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종(文宗)에서 숙종조(肅宗朝)에 이르기까지 5대(代)를 섬긴 공(功)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여산군(礖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의 전 세거지(世居地)인 고부(古阜)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부 이씨는 한때 관향이름을 고부의 다른 이름인 영주(瀛州)로 한 적이 있었는데, 1968년 간행한 ‘무신보(戊申譜)’에서 고부 이씨로 통일하였다.

⊙고성(固城·鐵城) 이씨 시조 이황(李璜)은 고려 덕종 때 문과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거란군의 침입 때 공을 세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고,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철성(鐵城)은 고성의 옛이름이어서 철성(鐵城)을 관향으로 하는 이씨도 고성 이씨와 같은 뿌리이다.

⊙공주(公州·公山) 이씨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신라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벼슬을 거쳐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다. ‘공주이씨세계도’에는 시조로부터 중시조까지의 소목(昭穆)이 뚜렷하며, 31세손 이백령(李栢齡)이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로, 34세손 이자송(李子松)이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관조로 분적되었다. 공산(公山)은 공주의 옛이름으로, 오늘날 같은 관향이면서 공주(公州)라 하는 종문(宗門)과 공산(公山)이라 부르는 종문이 있지만 모두 동원이다.

⊙광양(光陽) 이씨 시조 이무방(李茂方ㆍ李茂芳)은 고려시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그후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으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양으로 하였다.

⊙광주(廣州) 이씨 시조 이당(李唐)은 고려 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한편, 그의 선대 인물인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보는 설(說)도 있다. 그는 신라 내물왕 때의 내사령(內史令)으로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자 고려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으므로 고려 태조가 준안(准安ㆍ지금의 광주)으로 강제이주시켜 호장(戶長)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물왕부터 고려 때까지 살았다면 600년간 살았다는 것이 되므로 설득력이 없다. 본관은 조상의 거주지 준안(准安)이 고려 성종 때 광주(廣州)로 개칭되었으므로 광주 이씨라 한다.

⊙교하(交河) 이씨 교하(交河)는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교하ㆍ탄현면(炭縣面) 지역이다. 시조 이진형(李震亨)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의하면, 조선 숙종 28년(1702년) 예조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고 한다. 그 외의 유래 등은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금구(金溝) 이씨 시조 이주(李澍)는 고려조(高麗朝)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ㆍ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냈으며, 봉산군(鳳山君ㆍ봉산은 금구의 고호)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금구(金溝)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김포(金浦) 이씨 시조 이관중(李管仲)은 조선(朝鮮)에서 참봉(參奉)을 거쳐 벼슬이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으며, ‘병진보(丙辰譜)’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김포에서 성천(成川)ㆍ현봉(玄峰)으로 피난한 뒤 낙향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손자 창(倡)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금릉부(金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리하여 후손들이 김포(金浦)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나주(羅州) 이씨 시조 이철우(李哲祐)는 누대(累代)에 걸쳐 나주(羅州)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한 사족(士族)의 후손으로 조선 세조(世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평남 개천군(价川郡) 마장(馬場)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의 전 세거지인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았다 한다. 한산 이씨(韓山李氏)의 분적 계통이라는 설도 있으나,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남평(南平) 이씨 시조 이동말(李東抹)은 문헌이 없어 선계(先系)는 알 수 없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한 후 보조공신(補助功臣)으로 녹훈(錄勳)되어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다.

⊙농서(瀧西) 이씨 시조 이장경(李長庚)의 선계는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그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서 요양성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원나라 왕이 그 공을 찬양하여 그와 조부인 이장경(李長庚)을 농서군공에 봉했으므로 후손들이 농서(?西)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단성(丹城) 이씨 시조 이현(李峴)은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 후 후손 원발(元發)이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원발(元發)의 7세손 영보(永寶)가 조선(朝鮮)에서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문공서원(文公書院)의 원장(院長)으로 단성(丹城)에 정착세거(定著世居)하면서부터 후손들이 원발(元發)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관향(貫鄕)을 단성(丹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단양(丹陽) 이씨 시조 이배환(李盃煥)은 고려 태조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뒤 세계가 실전되었다가 10세손인 방규(方揆)로부터 다시 이어졌고, 15세손 무(茂)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제1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ㆍ단산은 지금의 단양)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단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담양(潭陽) 이씨 시조 이덕명(李德明)은 백제(百濟) 때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지낸 인수(仁壽)의 후손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신평(新平)에서 분적(分籍)하여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담양(潭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흥(大興) 이씨 시조 이연계(李連桂)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후손으로 이성계(李成桂)가 함흥(咸興)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만류한 것이 화가 되어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가, 태종 3년(1403년) 풀려나 대흥군(大興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면서 대흥(大興)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덕산(德山) 이씨 시조 이재술(李在述)은 고려 명종 때 덕풍(德豊ㆍ지금의 충남 예산군 덕산)의 호장(戶長)을 지내고, 그의 아들 언후(彦厚)와 손자 극보(克甫)가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내며 명문의 기틀을 다졌으므로 후손들이 덕산(德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덕수(德水) 이씨 시조 이돈수(李敦守)는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으며, 중손 윤온(允?)은 봉익대부(奉翊大夫)ㆍ밀직사판도판서(密直使版圖判書) 등을 지냈고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덕수(德水)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덕은(德恩) 이씨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한 자영(自英ㆍ진위 이씨 시조)의 5세손 전(筌)을 시조로 한다. (筌)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덕은군(德恩君ㆍ덕운은 은진의 고호)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덕은(德恩)을 본관으로 삼아 진위 이씨(振威李氏)에서 분적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동성(東城·泗川) 이씨 시조 이식(李軾)은 고려 충렬왕 때 국자진사(國子進士)가 되었으며, 그 뒤 담양교도(潭陽敎導)를 지낸 자(禾+玆)에 이르기까지 6대가 진사를 누렸다. 이들이 사천(泗川)에서 거주하게 됨에 따라 사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으나, 동성(東城)은 사천의 옛 이름으로 현재는 동성 이씨로 관향을 통일하고 있다.

⊙벽진(碧珍) 이씨 시조 이총언(李悤言)은 신라 말 고려 초기의 호족으로 신라 말기 벽진군(碧珍郡ㆍ지금의 성주)의 치안에 힘써 백성을 보호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도움을 요청하자 18세의 나이인 아들 영(永)을 보내 후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삼한을 정복하는 등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이에 왕건은 그에게 삼중대광원훈(三重大匡元勳)으로 벽진장군(碧珍將軍)에 올랐다. 그리고 손수 서신을 보내 자손에 이르기까지 고마운 마음을 변치않도록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양식을 비축하여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기여하였으며, 후손들이 벽진(碧珍)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보성(寶城) 이씨 시조 이윤장(李胤章)은 고려 때 낭장(郎將)을 지냈으나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세계를 알 수 없다. 한편 보성(保城)을 보성(寶城)으로, 윤장(胤章)을 윤창(允昌)으로 전하기도 한다.

⊙봉산(鳳山) 이씨 시조 이수(李隨)는 이수(李隨)는 태조(太祖) 때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태종이 인재를 구할 때 성균관의 천거로 뽑혔으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사퇴하였고, 이듬해 충녕대군(忠寧大君ㆍ세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으나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특히 그는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았고, 봉산(鳳山)의 토지를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을 봉산(鳳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고려시대 사람인 이사빈(李士贇)을 시조로 하고, 이수(李隨)를 중시조로 보는 설(說)도 있다.

⊙부안(扶安) 이씨 시조 이지발(李之發)의 선대는 부안의 토착사족(土着士族)으로 전해지나 고증할 문헌이 없다. 6세손 이봉정(李奉禎)이 조선 때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보안군(保安君ㆍ보안은 부안의 옛 이름)에 봉해지자 부안을 관향으로, 계통이 확실한 이지발(李之發)을 시조로 삼았다.

⊙부여(扶餘) 이씨 시조 이품(李稟)은 고려 정종의 왕비 용목왕후(容穆王后)의 아버지로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내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부여(扶餘)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부평(富平) 이씨 시조 이희목(李希穆)은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4세손 이정공(李靖恭)이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짐으로써 부평(富平)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삼척(三陟) 이씨 시조 이강제(李康濟)는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세계나 본관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없다.

⊙상주(尙州·商山) 이씨 시조 이민도(李敏道)는 중국 농서(?西) 사람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원나라 말기에 난을 피해 동래(東來), 조선 개국 때 공을 세웠다. 상산군(商山君ㆍ상산은 상주의 옛이름)에 봉해졌으며, 태조의 명으로 본관을 농서(?西)에서 상주(尙州)로 하였다.

⊙서림(西林·舒川) 이씨 시조 이익존(李?存)은 고려 때 흥록대부 호부상서(興祿大夫戶部尙書)에 올랐다. 18세손 이세공(李世公)이 고려공신이 되어 서림군(西林君ㆍ서림은 서천의 옛이름)에 봉해지고, 20세손 이언충(李彦忠)이 서주군(西州君ㆍ舒川의 딴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연안 이씨(延安李氏)에서 분적, 이익존을 비조(鼻祖)로 하고 이언충(李彦忠)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서산(瑞山) 이씨 시조 이영모(李令謨)는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야(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를 지내고 부성군(富城君ㆍ부성은 지금의 서산)에 봉해져 후손들이 서산(瑞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성산(星山) 이씨 시조 이능일(李能一)은 신라 말 성산현 일대를 통치하던 호족이었다. 고려 건국에 수훈을 세웠으며,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 부마가 되고 벼슬은 사공(司空)에 이르렀으며, 뒷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성산(星山)을 관향으로 삼았다.

⊙성주(星州) 이씨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사람으로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하자 충절을 지켜 고려조에 나아가지 않고 지금의 성주읍 경산동(京山洞)에 옮겨가 숨어 살았다. 고려 고종(高宗) 때 시조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명성을 떨치자 왕은 그를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적을 세웠으므로 원의 황제가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西郡公)으로 추봉하였다. 따라서 이장경(李長庚)을 중시조로 삼게 되었으며, 그가 농서군공(?西郡公)이 되었기 때문에 농서 이씨(?西李氏)라고도 하였는데 그 뒤 가세가 크게 일어나 충렬왕 이후 성주목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라고 하게 되었다.

⊙수안(遂安) 이씨 시조 이견웅(李堅雄)은 경산(京山) 사람으로 왕건을 고려 태조로 추대하고 태조를 따라 견훤(甄萱)을 토평,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다. 13세손 이연송(李連松)이 수안군(遂安君)에 봉함을 받아 계대하였으므로, 수안(遂安)을 관향으로 한 뒤 이때부터 그대로 봉지(封地)를 따라 수안 이씨라고 하였다.

⊙수원(水原) 이씨 시조 이자송(李子松)은 고려 우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ㆍ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해진 뒤 수성부원군(隋城府院君ㆍ수성은 수원의 옛이름)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수원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수원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순천(順天) 이씨 시조 이사고(李師古)는 고려시대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과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지냈다. 순천을 계통으로 관향을 정하기는 고려 때 비롯되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고증할 수 없어 구보(舊譜)에 의하여 대언공(代言公) 이사고(李師古)에서 시작한다고 범례(凡例)에 씌어 있다.

신평(新平) 이씨 시조 이덕명(李德明)은 고려시대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냈다. 한편 ‘무오보(戊午譜)’에 보면 시조는 백제 때 신평현(新平縣) 호장(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라고 했으나, 계대와 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다만 이름과 관직만을 적어 이씨의 연원을 삼는다고 하였다. 또 진무공신 신양군 묘갈명(振武功臣新陽君墓碣銘)에는 이덕명(李德明)을 원조(遠祖)로 삼고 사재시령(司宰寺令)을 지낸 이덕배(李德培)를 중조로 한다는 구절도 있다.

아산(牙山) 이씨 시조 이주좌(李周佐)은 신라 대아찬(大阿飡) 이알평(李謁平)의 후예로 5세조가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며,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승훈(李承訓)의 둘째 아들로 아산(牙山)으로 분적하여 아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기계(起系)는 200여 년 뒤의 인물인 이서(李舒)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안산(安山) 이씨 <경기계> 시조는 이인수(李仁守). 조선시대에 별시위(別侍衛)를 지냈다. 선계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그가 안산군(安山郡)에 거주하면서 연안 이씨에서 분적하여 이인수(李仁守)를 시조로, 본관을 안산으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철산계> 시조는 이희적(李希勣)으로 고려 고종 때 철산방어사(鐵山防禦使)를 지냈으며, 몽골의 살리타이군을 맞아 싸우다 순국하였다. 그 후손들이 안산에 세거하면서 관향을 안산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그러므로 <경기계>와 <철산계>는 다른 계통이다.

안성(安城) 이씨 시조 이중선(李仲宣)은 고려시대에 경군호장(京軍戶長)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데 큰 업적을 세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고 삼국모와 더불어 이자의(李資義)의 역모를 평정한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가 되었으며, 백하군(白夏君ㆍ백하는 안성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이런 연유로 자손들이 안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안악(安岳) 이씨 시조 이견(李堅)은 고려 공민왕 때 검교문하대승상장군(檢校門下大丞上將軍)을 지냈다. 안악 이씨는 상계의 소목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시조에 관한 서로 다른 주장이 엇갈려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이극규(李極奎)를 시조로 하는 주장이 있다.

양산(梁山) 이씨 시조 이만영(李萬英)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개국 후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 이전생(李全生)이 양산에 정착, 이전생의 아들 이징석(李澄石)이 양산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양산을 관향으로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양산(陽山) 이씨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신라 때 공산군(公山君ㆍ공산은 公州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는 공주 이씨(公州李氏)의 시조이기도 하여 공주 이씨와 양산 이씨가 동원(同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산과 공산이 갈린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이들 족보의 손록(孫錄)이나 세계표(世系表)에서 분관(分貫) 연혁을 볼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34세 이교송(李喬松)은 공산 이씨로 분적되었고, 아우 이자송(李子松)은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31세 이백령(李栢齡)은 양산군(陽山君)에 봉해져 양산 이씨로 분관되었다. 43세 이항무(李恒茂)가 세조 때 양산군에 봉해져 양산 이씨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양성(陽城) 이씨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시대에 동래하여, 문종 때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다.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난을 평정하여 공신으로 책훈되고 양성(陽城)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데 연유한다.

양주(楊州) 이씨 시조 이석숭(李碩崇)은 진사(進士)를 지낸 양주의 토착사족이라 전하나, 문헌이 없어 세계는 알 수 없다.

여주(驪州·驪江·驪興) 이씨 여주 이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 즉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하는 교위공파(校尉公派),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는 문순공파(文順公派),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는 경주파(慶州派)가 있다. 이 3파는 각각 관향을 여흥ㆍ하음(河陰)ㆍ여강으로 달리 써오다가 여주(驪州)로 단일화했다.

연안(延安) 이씨 시조 이무(李茂)는 중국 당(唐)나라의 중랑장(中郎將)으로 신라 무열왕 7년(660년) 소정방(蘇定方)의 부장으로 신라에 와 백제를 평정한 뒤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이무묘비문(李茂墓碑文)에 보면 무열왕은 그에게 개국 현후작(縣侯爵)에 식읍 1000호를 추봉하고 빈객으로 예우, 신하로 대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황해도 연안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연안(延安)을 관향으로 삼아 현족(顯族)으로 세계를 이어왔다.

영천(寧川) 이씨 시조 이능간(李凌幹)은 고려 충숙왕 7년(1320년)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상왕을 호종하였으며, 뒤에 재궁(梓宮)을 모시고 돌아왔다. 1326년에는 지사사우상시(知司事右常侍)로 나라에 공을 세워 면좌당(免左堂)이란 액호(額號)를 사림으로부터 받았다. 충혜왕 2년(1332년)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조적(曺?)의 난을 평정, 공신이 되고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관향을 영천(寧川)으로 삼았다.

영천(永川) 이씨 시조 이문한(李文漢)은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영천 이씨는 시조의 6세손 이후의 연계가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 때 영양군(永陽君ㆍ영양은 영천의 옛 이름)에 봉해진 이대영(李大榮)을 비조로 하는 파와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이전(李?)을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파가 있다.

영해(寧海) 이씨 시조 이연동(李延東)은 고려시대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고, 나라에 공을 세워 영해군(寧海君)에 봉해져 완산(完山)으로부터 이적, 자손들이 영해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온양(溫陽) 이씨 시조 이흥서(李興瑞)는 조선 선조 때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함으로써 선계(先系)를 잃고 손자 이만대(李萬代)가 조부가 쓴 ‘난중향기(亂中鄕記)’를 근거로 이흥서(李興瑞)를 기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용궁(龍宮) 이씨 시조 이정식(李禎植)의 선계는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전해오나 이를 알 수 있는 문헌이 없다. 고려 때 그의 둘째 아들이 아우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가 폐한 사실이 관에 알려져 그의 3남이 각각 유배되었는데 후손들이 유배 전의 세거지인 용궁(龍宮)을 본관으로 삼고 세계를 이어왔다.

용인(龍仁) 이씨 시조 이길권(李吉卷)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사 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太師三重大匡)에 책록되었고, 구성백(駒城伯ㆍ구성은 용인의 다른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용인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용천(龍川) 이씨 시조 이밀(李密)은 고려 때도등고판관(都登庫判官)을 지냈다고 전해지나,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우계(羽溪) 이씨 시조 이양식(李陽植)은 원래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시조 이알평(李謁平)의 47세손 이선용(李宣用)의 둘째 아들로 고려 인종(仁宗) 때 중서사인좌복야(中書舍人左僕射)를 지냈다. 만년에 낙향하여 강릉(江陵)의 속현이던 우계현(羽溪懸)에 터를 잡아 관향을 삼고 분적함으로써 우계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우봉(牛峰) 이씨 시조 이공정(李公靖)은 고려 명종 때 금자광록대부 벽상삼한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金紫光祿大夫壁上三韓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ㆍ잠성은 우봉의 다른 이름)에 녹훈되었다. 그 뒤 자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아, 그를 시조로 하고 우봉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를 잇고 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도 그는 우봉인으로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고 하였다.

울산(蔚山) 이씨 시조 이철(李哲)은 고려시대에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공훈으로 학성군(鶴城君ㆍ학성은 지금의 울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울산으로 계대하고 있다.

원주(原州·李椿桂) 이씨 시조 이춘계(李椿桂)는 고려시대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고, 인종(仁宗)과 의종(懿宗) 때 병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중국 진(秦)나라 사람으로 진시황(秦始皇)의 학정을 피해 진한(辰韓)에 피난해 왔는데, 옛 일이어서 세계가 불확실하고 신라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진민(李眞民)이 원조(遠祖)라고 한다.

원주(原州·李申佑) 이씨 시조 이신우(李申佑)는 고려 목종 때 병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뒤 나라에 세운 공훈으로 원주백(原州伯)에 봉해졌으며, 호장(戶長)으로 원주에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경주(慶州)에서 분적, 이관하여 원주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분적(分籍) 초에는 익흥(益興)을 관향으로 삼았으나 13세 경원군(慶源君) 이반계(李攀桂)의 뜻에 따라 원주로 바꾸었다.

음죽(陰竹) 이씨 시조 이방서(李方瑞)는 고려 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역임했고, 이천(利川)에 정착하였다. 그 뒤 후손들이 음죽(陰竹ㆍ이천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하였다.

익산(益山) 이씨 시조 이문진(李文眞)은 고구려 영양왕(?陽王) 때 대학박사 문부전서 오경박사(大學博士文部典書五經博士)로 공신후(功臣侯)가 되었고, 백제공주와 혼인하여 백제로부터 익주(益州ㆍ익산의 옛 이름)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익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익흥(益興) 이씨 시조는 이반계(李攀桂)의 선계는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이반계(李攀桂)는 원주 이씨 시조 이신우(李申祐)의 12세손으로서 고려 때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원주에서 분적, 익흥을 관향으로 삼았다. 한편 호장(戶長) 이신우(李申祐)와 장령(掌令) 이시정(李時禎)을 각각 시조로 전하는 문헌들도 있다.

⊙인천(仁川) 이씨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러 소성백(邵城伯ㆍ소성은 지금의 인천)에 피봉되었다. 본래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모비(母妃)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되었으나 이허겸의 10대조 허기(許奇)가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이씨를 사성받았다고 한다. 이허겸까지 이ㆍ허 2성으로 내려오다가 이허겸(李許謙)을 관조로 후손들이 인천을 본관으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임천(林川) 이씨 시조 이현(李玄)은 본래 회골인(回?人)으로 고려말 귀화하여 공양왕(恭讓王) 때 통사(通事ㆍ通官)의 공으로 임천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그 뒤 후손들이 임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장수(長水) 이씨 시조 이임간(李林幹)은 고려 충선왕 때 정승으로 상서병부판(尙書兵部判)을 지냈으며,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ㆍ장천은 장수의 다른 이름)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장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장성(長城) 이씨 시조 이병규(李丙奎)는 문종 1년(1451년)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禮曹正郎)에 이르렀다. 그 뒤 후손들이 장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장흥(長興) 이씨 시조 이원성(李元成)은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을 지냈다. 그의 선계나 그 밖의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재령(載寧) 이씨 시조 이우칭(李禹?)은 고려 때 보조공신(補祚功臣)에 녹훈되고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가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재령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경주(慶州)가 본관이었다. 따라서 재령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된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의(全義·禮安) 이씨 시조 이도(李棹)는 공주(公州) 출신으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고자 공주에 이르렀을 때 홍수로 금강이 범람, 진군을 멈추게 되자 도강책(渡江策)을 주도한 공이 커, 삼한개국익찬이등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開國翊贊二等功臣三重大匡太師)에 책록되고 전산후(全山侯ㆍ전산은 전의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전의의 이성산(李城山) 아래 거주하게 되어 후손들이 전의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예안 이씨(禮安李氏)가 전의 이씨에서 분관되었기 때문에 흔히 전의ㆍ예안 이씨라고 한다.

⊙전주(全州) 이씨 시조 이한(李翰)은 전주에 토착해온 명문 태생으로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였고, 문성왕(文聖王)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고 한다. 이한(李翰)의 선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언제부터 전주에 세거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한(李翰) 이후 18세손인 이안사(李安社ㆍ穆祖)에 이르기까지 전주에서 호족으로 세거하고, 시조의 묘도 전주에 있기 때문에 본관을 전주로 하게 된 것 같다.

이한(李翰)의 후손 중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6대조 이린(李隣)ㆍ이의방(李義方) 등은 고려 중앙정부에 진출, 관직에 있기도 했다. 그 뒤 이성계의 직계 선조는 동북면으로 이주, 여진족이 사는 지역으로 임시 옮겨가 살았다. 그러다가 시조 이한의 22세손인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전주 이씨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그 뒤 27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자손이 크게 번성, 현달하여 파계(派系)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성씨를 이룰 때 제왕은 조상으로 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왕자, 즉 대군이나 군을 파조(派祖)로 하여 분파하였다. 전주 이씨의 분파는 이안사(李安社)의 선계에서 갈라지는 파와 그 이후에서 갈라지는 파를 합하여 모두 123파가 된다.

⊙정선(旌善) 이씨 시조 이양혼(李陽?)은 송(宋)나라 안남국(安南國) 남평왕(南平王) 건덕(乾德)의 셋째 아들로, 그가 북송(北宋) 휘종(徽宗) 때 국난(國亂)을 피하여 우리 나라의 경주(慶州)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관향을 정선으로 삼게 된 것은 8세손 이우원(李遇元)이 정선으로 낙향, 세거한 데서 연유한다.

⊙정주(貞州) 이씨 시조 이세화(李世華)는 고려 고종 18년(1231년) 광주안무사(廣州按撫使)로 있으면서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고, 뒤에는 사재경(司宰卿)을 지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정주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진보(眞寶·眞城) 이씨 시조 이석(李碩)은 진보(眞寶) 현리(縣吏)를 지낸 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다. ‘시조공묘갈명(始祖公墓碣銘)’에 보면 그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 홍건적을 평정,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진 점으로 미루어, 이석(李碩)은 충렬왕과 충선왕 때 인물이라고 하였다. 진성(본래는 진보였는데, 진보성을 줄여 진성이라 부른다)을 관향으로 삼게 된 것은 선조들이 대대로 진보(眞寶)에 세거한 데서 연유한다.

⊙진위(振威) 이씨 시조 이자영(李自英)은 고려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진위군(振威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본관을 진위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先代)는 경주 이씨로 시조 이거명(李居明)의 후예라고 한다.

⊙진주(晋州) 이씨 시조 이군재(李君梓)는 조선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을축보(乙丑譜)’에 보면, 그는 성품이 곧아 왕에게 직간하다가 미움을 사 성천(成川)으로 유배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대제학을 사임하고 진주로 낙향한 형 이영재(李英梓)를 생각, 본관을 진주(晋州)로 정하였다고 한다.

⊙차성(車城·機張) 이씨 시조 이위(李渭)는 신라 말 또는 고려사람이라는 양분된 설이 있다. 그가 차성군(車城君ㆍ차성은 기장의 옛 이름)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차성에 세거하면서 관향 역시 차성으로 하여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창녕(昌寧) 이씨 시조 이정현(李正賢)은 고려 원종 때 태어나 충선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뒤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창녕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천안(天安) 이씨 시조 이립상은 ‘기사보(己巳譜)’에 보면 그의 행적이 나와 있지 않고 서문에도 천안(天安)으로 관향을 삼은 뒤 1세 이상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이립상은 한 파의 기세조인 듯하다.

⊙청송(靑松) 이씨 시조 이덕부(李德富)는 부정(副正)을 지냈으며, 성주(星州)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그의 5세손 이우(李祐)가 청송군(靑松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청안(淸安) 이씨 시조를 달리하는 2파가 있다.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는 이양길(李陽吉)로 공민왕 5년(1356년) 가을적홀고탁란(加乙赤忽古托亂) 때 순절, 1등훈에 녹훈되고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다. 또 다른 계통인 충간공파(忠簡公派)는 이한번(李漢藩)을 시조로 한다. 그는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와 영광군사(靈光郡事)를 거쳐 국사원 검열관(國史院檢閱官)을 지낸 뒤 1358년 홍건적을 막은 공으로 청안군(淸安君)에 봉해졌다.

⊙청주(淸州) 이씨 시조 이능희(李能希)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10세손 이계감(李季?)이 낭성군(琅城君)에 봉해졌고 12세손 이애(李?ㆍ李佇)가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ㆍ상당은 지금의 청주)에 봉해져 후손들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청주이씨족보’에 보면 이능희(李能希) 이후에 본관을 청주로 정하였다고 전해진다.

⊙청해(靑海) 이씨 시조 이지란(李之蘭)은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공민왕 20년(1371년) 고려에 귀화하면서 개명하였다. 그 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은 본래의 고향인 중국 칭하이성[靑海省]을 연유로 하여 본관을 청해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초산(楚山) 이씨 중시조는 이헌(李憲)으로 고려 공민왕 때 춘방시학사(春坊侍學士)를 지냈는데, 이헌(李憲)을 시조라고도 한다. 고려가 망하자 초산(楚山ㆍ井州의 옛 이름)으로 낙향, 스스로 산림거사라 하고 여생을 보냈다. 전국인구조사에서 그 통계가 나와 있지 않으나 초산 이씨 문중에서 1975년 보첩을 발간하였다.

⊙충주(忠州) 이씨 시조 이관(李墳)은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충주백(忠州栢)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태안(泰安) 이씨 시조 이기(李奇)는 중국 당나라 때의 이승남(李昇南)의 후손으로 고려 광종(光宗) 때 난을 피해 동래하여, 태안(泰安)에 들어와 세거하게 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 그 뒤 7세손 이천이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태안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태원(太原) 이씨 시조 이귀지(李貴芝)는 고려 충렬왕 때 중국의 타이위안[太原]에서 난을 피해 동래(東來)하였다. 손자 이방무(李芳茂)는 조선조 개국원종공신으로 벼슬이 사정(司正)에 이르렀으며, 후손들이 북청(北靑)에 정착하면서 타이위안[太原]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통진(通津) 이씨 시조 이인(李仁)은 조선시대 수의부위참판(修義副尉參判) 등을 지냈고, 통진에서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이거한 뒤 통진을 관향으로 삼았다.

⊙평산(平山) 이씨 시조 이부명(李敷明)은 그 뒤의 세계를 실전, 그의 후손인 고려시대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이자용(李子庸)을 기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선조들의 세거지인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평양(平壤) 이씨 시조 이극문(李克文)은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고 전해지나,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평창(平昌) 이씨 시조 이광(李匡)은 고려 인종 4년(1126년)에 태어나 의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府事)ㆍ동북면도순문사평장사(東北面都巡問使平章事)를 거쳐 광록대부 태사(光祿大夫太師)에 이르렀고, 백조군(白鳥君ㆍ백조는 평창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8세손 이천기(李天驥)가 공민왕 때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러 많은 공훈을 세워 평창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평창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하빈(河濱) 이씨 시조는 이거(李据)는 고려시대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올랐다. 명종 4년(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기병하여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을 평정할 때 낭장(郞將)으로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道指揮使) 최균(崔均)을 따르다가 서경유수군(西京留守軍)을 받아들여 정이지당(鄭李之黨)을 토평하여 그 공으로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빈(대구시 달성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하음(河陰) 이씨 시조 이영(李英)은 내시정용낭장을 지냈다는 것 외에 세계나 사적(事蹟) 등은 알 수 없다.

⊙학성(鶴城) 이씨 시조 이예(李藝)는 울주군기관(蔚州郡記官ㆍ울주는 학성의 다른 이름)으로 출사하여 24세 때 군수 이은(李殷)과 함께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는데 이은을 극진히 공대하니 일본인이 예절에 감복하여 같이 돌려 보냈다. 왕이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예빈소윤좌군사직(禮賓少尹左軍司直)을 제수하였다. 일본과의 외교관계의 확립에 큰 업적을 남겼고, 병기의 발명에도 힘써 완구포(碗口砲) 등의 제작은 유명하다. 그 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학성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한산(韓山) 이씨 시조를 달리하는 2계로 나뉜다.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 한림국사원검열(翰林國史院檢閱)을 지냈고, 충목왕 때 귀국해 정당문학(正堂文學)과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진 이곡(李穀)의 5대조인 이윤경(李允卿)을 시조로 하는 호장공계(戶長公系)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고려 충렬왕 때 광정대부 도첨의 참리상호군 검교대장군(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護軍檢校大將軍)에 오르고 역시 한주군(韓州君)에 봉해진 이무(李茂)의 3대로 이윤우(李允佑)를 시조로 하는 권지공계(權知公系)이다.

⊙함안(咸安) 이씨 시조 이상(李尙)은 고려 고종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파산군(巴山君ㆍ파산은 지금의 함안)에 봉해졌다. ‘을축보(乙丑譜)’에 그의 선계 등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고, 범례편에 파산군이 처음으로 봉작되었으므로 그를 시조로 한다는 내용만 적혀 있다. 따라서 후손들이 함안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함양(咸陽) 이씨 시조 이홍(李洪)은 조선 때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세계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없다.

⊙함평(咸平) 이씨 시조 이언(李彦)은 고려 태조 때 신무위 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냈고, 함풍군(咸豊君ㆍ함풍은 함평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5세손 이림(李琳)은 고려시대 검교 흥위위대장군(檢校興威衛大將軍)을 지낸 이순지(李順之)의 큰 아들로 신종 때 태어나 문과에 급제, 상의원직장동정(尙衣院直長同正)을 지냈는데, 그 뒤 후손들이 크게 번성, 함평 이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순지(李順之)의 둘째 아들 이광봉(李光逢)은 충숙왕 때 함풍부원군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일파를 이루고 있다.

⊙합천(陜川) 이씨 시조 이개(李開)는 신라에서 벼슬하여 강양군(江陽君ㆍ강양은 합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고 고려가 건국되자 절의를 지켜 태조의 부름을 거역,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합천호장(陜川戶長)으로 옮겼다. ‘문충공사적기(文忠公事蹟記)’에 보면 그는 최치원(崔致遠)의 문인으로 유학의 진흥에 힘써 그 공으로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졌으며 박경엽(朴敬燁)의 난을 토평, 다시 문학을 진흥시켜 중국에 버금가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는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으로, 따라서 합천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된 성이다. 이개(李開)가 합천호장(陜川戶長)을 지냈고, 그곳에서 죽은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합천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해남(海南) 이씨 시조 이지형(李之亨)은 고려시대에 태자소경(太子少卿)을 지냈다고 한다. 선계는 실전되어 알 수 없고 다만 후손들이 해남에 세거하며 본관을 해남으로,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해주(海州) 이씨 시조 이선(李璿)은 조선시대에 참봉(參奉)을 지낸 뒤 해주에 정착, 세거의 터를 마련함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을 해주로 삼게 되었다. 그의 선계는 덕수 이씨(德水李氏) 로 조선시대에 감찰(監察)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의 큰 아들이다.

⊙홍주(洪州·安平) 이씨 시조 이유성(李維城)은 고려시대 인물로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를 거쳐 정당문학ㆍ찬성사에 올랐다. 그 뒤의 계보는 병화 등 여러 사정으로 인멸되었다. 선계의 실전(失傳)으로 본관을 정하기는 9세손인 이기종(李起宗)이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으로 봉해진 것이 연유가 된다. 후손 중에 일부는 호적상의 본관이 안평(安平)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는 중간에서 호적상 오기임이 입증되어 그중 대부분은 홍주(洪州)로 정정하였고, 잔여 종인(宗人)들도 현재 정정 중에 있다.

⊙화산(花山) 이씨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안남왕(安南王) 이용한(李龍翰)의 아우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여 고려 고종 때 옹진(甕津)의 화산(花山)에 망명, 정착하였다.

⊙회덕(懷德) 이씨 시조 이몽(李蒙)은 능양군(綾陽君ㆍ인조)의 후예로 나라에 공이 있어 회덕군(懷德君)에 봉해졌다고 전해지나 문헌이 없어 선계를 알 수 없다.

⊙흥양(興陽) 이씨 시조 이언림(李彦林)은 고려 인종 때 병부상서(兵部尙書), 이듬해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우복야(右僕射)를 지냈다. 그 뒤 7세손 이길(李吉)이 문과에 올라 봉상대부 통례문부사(奉常大夫通禮門副使)를 지내고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흥양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