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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연원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광종(光宗) 때 신무위 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내고 함풍군(咸豊君)에 봉(封)해진 이언(李彦)이다. ‘정묘보(丁卯譜)’ 세록(世錄)편에 의하면 시조공(始祖公) 이언(李彦)이 함풍군에 봉해져 자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성향(姓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 4세 순지(順之)는 고려조에서 검교(檢校)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냈고, 이어 그의 큰 아들 림(琳)은 문과에 급제하여 상의원직장동정(尙衣院直長同正)을 지냈다.


▲ 전남 함평군 함평읍 성남리에 자리한 함평 이씨 시조 이언(李彦)의 묘와 재실인 경모재(景慕齋).

순지(順之)의 둘째 아들 광봉(光逢)은 충숙왕 1년(1314년)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사신 임명을 받고 원(元)나라에 가서 연호를 원으로 고친 것을 축하하고 왔다. 충숙왕 6년(1319년)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가 되었다가 이듬해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벼슬이 올랐으며, 1324년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 충숙왕 초기에는 심양왕(瀋陽王)으로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전지(傳旨)를 보내 나라의 모든 일을 간여하였는데, 이때 그는 상왕인 충선왕을 보좌한다는 권세를 빌려 권한공(權漢功)ㆍ채홍철(蔡洪哲)ㆍ최성지(崔誠之) 등과 함께 뇌물을 받고 친척에게 관직을 팔았다. 이 때문에 충숙왕의 미움을 샀다. 충숙왕 8년(1321년) 원나라 인종(仁宗)이 죽으면서 충선왕이 토번(吐蕃)에 유배되자, 권한공(權漢功)ㆍ채홍철(蔡洪哲) 등과 함께 충숙왕의 명령으로 먼 섬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섬으로 가지 않고 홍주(현재 충남 홍성) 부근에 머물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 전남 함평군 함평읍 성남리에 자리한 2~4세의 3세위제단(三世位祭壇).?

그뒤 충숙왕에게 원한을 품고 충숙왕 9년(1322년) 원나라에 있던 고려 사람들과 심왕당(瀋王黨)을 만들어 충숙왕을 폐하고 심양왕 고(暠)를 고려 왕으로 앉히기 위해 책략을 꾸몄다. 이를 위해 충숙왕을 폐하기를 청하는 글을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올렸으나 원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1324년 삼사사(三司事)의 직을 맡아보았고, 1333년 삼사사벽상삼한삼중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명공신(三司使壁上三韓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佐命功臣)으로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함풍 이씨(咸豊李氏)라고 부르다가 태종 9년(1409년) 함풍(咸豊)과 모평(牟平) 두 현을 합하여 함평(咸平)으로 개칭되면서부터는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불러오고 있다.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5세(世)에서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 광봉(光逢)을 파조(派祖)로 하는 부원군파(府院君派)와 림(琳)을 파조로 하는 동정공파(同正公派)로 나누어지며, 11세 때 다시 감정공파(監正公派)ㆍ교수공파(敎授公派)ㆍ기성군파(箕城君派)ㆍ기와공파(箕窩公派)ㆍ대교공파(待敎公派)ㆍ목사공파(牧使公派)ㆍ부사공파(府使公派)ㆍ사직공파(司直公派)ㆍ운봉공파(雲峯公派)ㆍ지평공파(持平公派)ㆍ진사공파(進士公派)ㆍ참판공파(參判公派)ㆍ철성군파(鐵城君派)ㆍ판관공파(判官公派)ㆍ함성군파(咸城君派)ㆍ현감공파(縣監公派)ㆍ현령공파(縣令公派)ㆍ효우공파(孝友公派) 등 여러 파로 다시 나누어진다.

▲ 함평 이씨 중시조인 장양공(莊襄公) 이종생(李從生)의 적개2등공신 교서. 클릭!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70명을 배출했으며, 중시조(中始祖)는 10대손인 종생(從生ㆍ1423∼1495)으로 극명(克明)의 아들이다. 내금위(內禁衛)에 속해 있다가 세조 6년(1460년) 무과에 급제해 사용(司勇)이 되었으며, 이듬해 선절장군(宣節將軍)으로 의흥위대호군(義興衛大護軍)이 되었다. 1466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1467년 위장(衛將)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토벌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졌다. 이해 9월 강순(康純)의 휘하에서 파저강(婆猪江)의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했고, 세조 4년(1468년) 영변부사(寧邊府使)에 승진했다. 다음해 영변에 진(鎭)이 설치되자 절도사(節度使)를 겸임, 성종 6년(1475년)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9년 건주의(建州衛) 정벌 때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위장(衛將)으로 출전하여 야인들을 토벌하고, 1481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485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시호는 장양(莊襄).

▲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에 자리한 ??장양공(莊襄公) 이종생(李從生)의묘.

효원(效元ㆍ1549~1629)은 자는 성백(誠伯), 호는 장포(長浦), 우윤(右尹) 관(瓘)의 아들이다. 선조 17년(158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정랑(兵曹正郞)ㆍ사서(司書)ㆍ승지(承旨)ㆍ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지내고, 선조 36년(1603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북인(北人)이 대북(大北)ㆍ소북(小北)으로 분열, 정권쟁탈이 치열할 때 그는 영상 유영경(柳永慶)의 소북파에 가담해 세자 광해군(光海君)을 폐위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고 반대파인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여 유배케 했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가 집권함에 따라 이듬해 삭직(削職)되고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유유자적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14년만에 풀려나 초가에서 청빈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집이 재신(宰臣)을 지낸 사람의 집인 줄 몰랐으며, 인조반정이 있었던 그 해 겨울,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촌로들과 산수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 충남 청양군 청양읍 장승리에 자리한 이관(李瓘)과 아들 이효원(李效元)의 계장(繼葬)된 묘.

효원(效元)의 아들 해(?ㆍ?~1670)는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襲翁)으로 광해군 때 아버지와 형 정(瀞)이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 대북(大北)에 의해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함릉군(咸陵君)에 봉해졌다. 이때 공신에게 지급된 전지(田地)를 모두 반환하여 청백한 사람으로 칭송이 높았으며, 이듬해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특진했다. 효종 3년(1649년) 병으로 사직,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전임했다. 이 해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현종 10년(1669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

 

▲ (左)1479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량(李良) 장군이 장군도 동쪽과 돌산 북쪽 사이 해협에 왜군 침입을 봉쇄하고자 돌로 쌓은 사실을 적은 여수시 군자동 방왜축제비(防倭築堤碑ㆍ전남문화재자료 제240호). (右)이순신(李舜臣)과 칠실(漆室) 이덕일(李德一)을 제향하는 함평 월산사(月山祠)가 훼철된 후 1911년 후손들이 건립한 유허비.

덕일(德一ㆍ1561~1622)은 자는 경이(敬而), 호는 칠실(漆室)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아 문명을 떨쳤으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급제,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피난민을 모아 의병을 조직, 각처에서 공을 세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에게 인정받고 그 막하로 들어갔다. 이순신의 전사 후 축성제구책(築城制寇策)을 논하여 이정구(李廷龜)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광해군 때 국정이 문란해짐을 한탄해 시조 28수를 지어 충분(忠憤)한 심정을 읊었으며, 함평(咸平)의 월산사(月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문촌(文村) 이광선(李光先) 장군의 선무원종공신녹권과 교지.

광선(光先ㆍ1563~1616)은 자는 여효(汝孝), 호는 문촌(文村)으로 참봉(參奉) 몽정(夢禎)의 아들이다. 선조 23년(159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오위(五衛)의 부장(部將)이 되었으며, 선조 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파천하는 임금을 호종(扈從)하며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각처에 왕명을 전달하였다. 그 해 7월 금산에서 전주로 넘어오는 왜군을 맞아 웅치(熊峙)ㆍ이치(梨峙)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고, 선조 26년(1593년) 2월 행주(幸州)전투에서 권율 장군과 함께 무공을 세웠다. 선조 32년(1599년) 7월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이 되고, 그 해 8월 소위장군(昭威將軍)으로 승진해 무신(武臣) 선전관을 겸하고 9월 보공장군(保功將軍) 선전관을 역임하고, 선조 34년(1601년) 7월 건공장군(建功將軍)으로 황해도 소강진절제사(黃海道所江鎭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선조 37년(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을 훈록(勳錄)하고 초배(超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승자하였으며, 광해군 원년(1609년) 낙향하여 후손들의 강학에 노력했다.

▲ 전남 나주시 다사면 동당리에 자리한 문촌(文村) 이광선(李光先) 장군 충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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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충렬공(忠烈公) 이대원(李大源)과 충장공((忠壯公) 정운(鄭運)을 배향한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쌍충사(雙忠祠). (下)전남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에 자리한 충렬공(忠烈公) 이대원(李大源)의 사당(전남문화재자료 제239호).

대원(大源ㆍ1566~1587)은 자는 호연(浩然)으로 선조 16년(1583년) 무과(武科)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1587년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倭寇)를 추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적장을 포로로 잡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심암(沈巖)에게 바쳤으나 전공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신암(沈巖)의 요청을 거절함으로써 미움을 샀다. 이어 흥양(興陽)에 왜구가 또 크게 침입하자 심암(沈巖)의 명으로 피로한 군사 1백여 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원병을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3일간 역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여 포로가 된 후 항복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했다. 이에 앞서 관찰사의 장계(狀啓)로 심암(沈巖)과의 관계를 알게 된 조정으로부터 심암(沈巖) 대신 수군절도사에 발령되었으나 이미 전사했으므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고향인 양성(陽城ㆍ지금의 평택)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

▲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에 자리한 충렬공(忠烈公) 이대원(李大源)의 부인 동래 정씨와 용인 이씨의 묘. 가운데 묘는 절명시가 적힌 이대원의 속적삼을 묻었다. 경기도기념물 제56호.

배원(培元ㆍ1573~1653)은 자는 양백(養伯), 호는 귀휴당(歸休堂), 아버지는 참판 염(琰)이다. 선조 34년(160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광해군 5년(16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평안도 평사(平安道平事)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벼슬을 사퇴, 향리에 은거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이듬해인 1624년 광산현감(光山縣監)이 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묘주(廟主)를 모시고 강화도에 호종(扈從), 뒤에 충원현감(忠原縣監)에 전직되었다. 1634년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승진, 충청도토포사(忠淸道討捕使)를 겸직하여 지방에 횡행하던 도적들을 소탕하여 관찰사의 추천으로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36년 비변사(備邊司)의 추천으로 황해도 관찰사에 특진, 마침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소수의 민병(民兵)으로 싸우다 패배했다. 이듬해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어 청태종이 돌아갈 때에 조정에서 그에게 대접을 잘 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진감사(眞監司)가 가황제(假皇帝)에게 대접할 수 있겠는가.” 하고 청진(淸陣)에 대한 접대를 소홀히 하여 파면당하였다. 9년 후 다시 서용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 구원(九?) 이춘원(李春元)의 시.

춘원(春元ㆍ1571~1634)은 초명은 신원(信元), 자는 원길(元吉), 호는 구원(九?), 일찍이 남양의 홍지성(洪至誠)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박순(朴淳)이 영의정을 그만두고 영평(永平)에 은거할 때 그를 찾아가 다시 배우니 단연 학문에 두각를 나타내었다. 선조 23년(1590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선조 29년(159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직되고, 이듬해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광양현감(光陽縣監)으로 남원(南原)싸움에 참전했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 5년(1613년) 좌승지(左承旨)로서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복직되어 병조참의(兵曹參議)ㆍ우승지(右承旨) 등을 지냈다. 광해군 9년(1617년)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중 대북파(大北派) 일당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당했다. 광해군 12년(1620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어 명나라의 사신을 안주까지 나가서 맞이하였는데 갑자기 중풍에 걸려 사직하고 돌아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구신들을 많이 등용할 때 한직을 맡겨 정양하게 하려 하였으나 사퇴하였다.

▲ 계촌(桂村) 이지익(李之翼)의 간찰.

춘원(春元)의 손자 지익(之翼ㆍ1625~1694)은 자는 여휘(汝輝), 호는 계촌(桂村), 초로(楚老)의 아들이다. 효종 3년(1652년) 진사(進士)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ㆍ정언(正言)을 거쳐 현종 2년(1661년) 지평(持平)으로 공조판서 이일상(李一相)의 탐학(貪虐)을 탄핵하다가 파직, 이듬해 남구만(南九萬)의 신구(伸救)로 복관했다. 그후 성주목사(星州牧使)ㆍ동래부사(東萊府使)ㆍ광주부윤(廣州府尹)ㆍ황해도 관찰사를 역임, 숙종 즉위년(1674년)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처벌 문제가 일어나자 대사간으로서 그의 당론(黨論)에는 반대했으나 처벌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했다가 물의를 일으켜 사임, 이듬해 다시 대사간에 복직되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숙종 2년(1676년) 예조판서로 승진, 이어 대사헌ㆍ우참찬(右參贊)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송시열을 변호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1678년 다시 기용, 공조ㆍ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1680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그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함경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를 역임, 1689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그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고, 169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조정에 있는 40년 동안 정국이 몇 번 바뀌었으나 시세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기 신념대로 시종일관하였다.

▲ 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 자리한 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의 고택(충남민속자료 제7호)과 영정.

삼(森ㆍ1677~1735)은 자는 원백(遠伯)으로 감역(監役) 사길(師吉)의 아들이다.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修學) 중 병조판서 김구(金?)의 권고로 무예(武藝)를 연마, 숙종 31년(1705년)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정주목사(定州牧使)를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ㆍ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경종 때 소론(少論)으로서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ㆍ총융사(摠戎使)를 역임했으며, 영조 1년(1725년)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경종 때의 죄인을 신문한 사건에 관련, 이정신(李正臣)과 함께 파직되어 경상도 곤양(昆陽ㆍ사천)에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풀려나와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승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함은군(咸恩君)에 봉해졌다. 그 뒤 소론 출신으로서 누차 이인좌의 일당이라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을 받아 무사했으며,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무예가 출중하고 학문에도 뛰어났으며, 기계 제조의 방법과 도창기예(刀槍技藝)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저서에 ‘관서절요(關西節要)’가 있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에 자리한 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의 묘와 1740년 건립된 묘 아래 자리한 재실.

창운(昌運ㆍ1713~1791)은 자는 성유(聖兪)로 경력(經歷) 수귀(壽龜)의 아들이다. 영조 14년(1738년)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이듬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 겸 사복시내승(訓練院主簿兼司僕寺內乘)에 임명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영조 23년(1747년) 상원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병무 행정을 간소화하고 창고를 충실히 하였다. 1751년 삭주부사(朔州府使)에 승진, 이듬해 안동영장(安東營將), 1754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면서 동지중추부사(冬至中樞府事)가 되어 함평군(咸平君)을 습봉(襲封)했다. 이어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ㆍ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고, 정조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ㆍ포도대장(捕盜大將)ㆍ어영대장(御營大將)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ㆍ총융사(摠戎使)ㆍ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했다.

방운(昉運ㆍ1761년∼?)은 자는 명고(明考), 호는 기야(箕野)·심재(心齋)·순재(淳齋)·순옹(淳翁)·기로(箕老)·사명(四明)·화하(華下)·희설(喜雪)·월음(月陰)·취향(醉鄕)·심옹(心翁)·심로(心老) 등 다양하였다.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낸 식(埴)의 아들로, 부사를 지낸 성대중(成大中)과 교유관계가 있었고, 산수와 인물에 능했으며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 그의 화풍의 특징은 간략한 형태와 맑은 담채(淡彩), 단선(短線)이나 점으로 이어진 선, 간략화된 세필(細筆) 등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화풍은 심사정(沈師正)과 강세황(姜世晃)의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또 18세기 화단을 풍미하였던 전형적인 남종화풍을 구사한 김수규(金壽奎)의 화풍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의 현전하는 작품은 대부분 산수화와 인물화이며, 주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담백하고 청신한 분위기를 띤다.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망천십경도(輞川十景圖)’,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계도인도(淸溪道人圖) 등이 전하고 있다.

▲ 조선 후기 화가 이방운(李昉運)의 그림들.

조선 말기의 의병장인 대극(大克ㆍ1875∼1909)은 본명은 순식(淳植), 자는 영화(英華)로 영광의 양반가문이었으나 유업(儒業)보다는 무술연마에 뜻을 두어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으며, 실제로도 담략과 용력이 뛰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영광읍을 공격하려 할 때, 읍민들이 그를 수성장(守城將)에 추대하자 사양하지 않고 군무를 맡아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자 1906년 봄 의병을 조직하여 영광읍을 일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1907년 10월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유진(留陣)하고 있던 고창 문수사(文殊寺)로 찾아가 합진하였으며, 회맹소의 감기(監器)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의병의 군사적 열세를 체험한 뒤 기삼연에게 무기의 개량과 군사훈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시시각각 죄어드는 일제의 침략을 막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라우도의 적을 치기로 합의하고, 먼저 영광의 석대산(石臺山)에 들어가 연병(鍊兵)과 무기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기삼연의 피살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1908년 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였으며, 의병대장인 그는 영광의 불갑산(佛甲山)과 장사산(長沙山)에 근거지를 구축하여 영광ㆍ무장ㆍ고산ㆍ함평ㆍ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의병부대가 전남 중서부지역에서 기세를 올리게 되자, 일본군경은 현상금을 걸고 그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다. 금품에 눈이 어두운 의병 배반자로 인하여 체포되어 1909년 4월에 희생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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