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이씨(光山李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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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이씨(光山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일설에는 제47대 헌안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로 전하는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궁예(弓裔)의 5대손인 이종금(李宗金)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종금(宗金)은 본명이 김일형(金日炯)으로 고려 현종 원년(1010년) 거란(契丹)의 40만 대군이 내침하여 송도(松都)와 주읍(州邑)이 허물어지고 왕(王)이 남천(南遷)하는 혼란속에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또한 현종 9년(1018년)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대군을 맞아 적을 격파하는데 대공(大功)을 세웠으며, 덕종 2년(1032년) 이씨(李氏)의 성(姓)과 종금(宗金)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관향(貫鄕)을 광산(光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그의 7대손 각(慤)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슬하에 아들 순백(珣白)ㆍ숙백(叔白)ㆍ승백(升白) 3형제를 두었다. 아들 순백(珣白)은 청주장서기(靑州掌書記)의 미직(未職)으로 있다가 충숙왕 7년(1320년) 원(元)나라 환관(宦官) 빠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가는 상왕(上王ㆍ충선왕)을 박인간(朴仁幹) 등과 함께 호종(扈從)하였다가 3년만에 돌아와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ㆍ정2품)에 오르고 충장(忠莊)으로 추시(追諡)되었다. 순백(珣白)의 아우 숙백(叔白)은 충숙왕 15년(132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 직제학(翰林院直提學)에 올랐고, 막내 승백(升白)도 등과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광산 이씨는 이들 3형제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상서공파(尙書公派)ㆍ한림공파(翰林公派)ㆍ제학공파(提學公派)로 크게 갈린다.
▲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에 자리한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파조 충장공(忠莊公) 이순백(李珣白)의 묘.
상서공파(尙書公派) 파조 순백(珣白)의 아들 기(奇)가 고려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손자 홍길(弘吉)이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했으며, 증손 일영(日英)은 조선조에 와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일영(日英)의 둘째 아들 선제(先齊ㆍ1390~?)는 자는 가부(家父), 호는 필문(畢門)으로 현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매헌(梅軒) 권우(權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태종 13년(141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어 세종 1년(14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 초창기인 20여 년 동안 집현전에서 주로 집현전 수찬ㆍ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ㆍ집현전 직제학을 지내면서 사관이 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의 편찬이나 ‘고려사(高麗史)’ 개찬에 참여하였고,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경찬소문(慶讚疏文)을 짓기도 하였다. 1433년 형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첨지중추원사 겸 지병조사(僉知中樞院事兼知兵曹事)와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46년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오르고, 1448년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50년과 1452년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역임하였다. 강진의 수암서원(秀岩書院)에 배향되었다.
▲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를 영원히 제향하도록 건립된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부조묘(不?廟ㆍ광주민속자료 제7호).
특히 그는 슬하에 시원(始元)ㆍ조원(調元)ㆍ한원(翰元)ㆍ찬원(贊元)ㆍ형원(亨元)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顯達)했다. 장자(長子) 시원(始元)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차자(次子) 조원(調元)은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물러나 후학(後學)을 길러 많은 동량지재(棟梁之才)를 배출시켰으며, 3자(三子) 한원(翰元)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4자 찬원(贊元)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역임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일본 통신사가 되었던 막내 형원(亨元)과 함께 이름을 떨쳐, 이들 5형제가 ‘광산이씨5원화족(光山李氏五元華族)’으로 일컬어졌다.
▲ 이달선(李達善)의 묘갈비로 전남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에 자리한 광산 이씨 승지공비(光山李氏承旨公碑ㆍ전남문화재자료 제162호).
그후 시원(始元)의 아들 복선(復善)이 성종 때 급제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형원(亨元)의 둘째 아들 달선(達善)은 성종 20년(1489년)에 설서(說書)ㆍ전적(典籍)이 되어 경연에서 ‘주역(周易)’을 강하는 데 막힘이 없이 하여, 왕으로부터 사유(師儒)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뒤 경학에 밝다 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치게 하고, 시독관(侍讀官)이 되어서는 도첩제(度牒制) 개혁과 사족(士族) 천첩자손(賤妾子孫)의 종량(從良)으로 군액(軍額)을 확보할 것과 상평창(常平倉) 설치의 목적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에게 이익되게 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연산군 1년(1495년) 장령(掌令)이 되어 왕이 공의(公議)를 받아들이지 않고 혼자만의 편견을 고집하여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또 임금의 호령이 한결같지 않아 일을 그르치고 있다고 하였다. ‘성종실록’ 편찬시 편수관으로 참여하여 한 자급을 올려 받기도 하였다.
달선(達善)의 장남으로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를 지낸 공인(公仁)은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했으나, 그의 아들 백호(伯虎)ㆍ중호(仲虎)ㆍ숙호(叔虎)의 후대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여 가문의 융성을 누렸다. 특히 중호(仲虎)는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내고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멸문지화를 당한 동암(東巖) 이발(李潑)의 간찰.
중호(仲虎)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급(汲)은 사마시(司馬試)에 이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校理)와 정읍현감(井邑縣監) 등을 지냈다. 아우 발(潑ㆍ1544∼1589)은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ㆍ북산(北山)으로 김근공(金謹恭)ㆍ민순(閔純)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 1년(1568년) 생원이 되어 선조 6년(157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했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정랑ㆍ부제학을 거쳐 1584년 대사간이 되었다. 동인의 거두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이끌어 북인의 수령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이(李珥)ㆍ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선조 22년(15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대죄(待罪)하던 중 체포되어 장살(杖殺)되었다. ‘부계기문((?溪記聞)’에 의하면 발(潑)은 효성이 지극하였고, 그의 어머니가 평소에 병이 많아 그는 옷과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을 달이는 것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그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ㆍ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2년 동안에 약 1,000명에 달하는 동인계통 인물들이 정여립 모반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죽고 귀양하고 내몰리고 하는 혹독한 수난을 겪었다.
형인 급(汲)과 함께 화(禍)를 당한 발(潑)의 아우 길(?)도 선조 때 등과(登科)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과 검상(檢詳)ㆍ사인(舍人) 등을 역임한 후 응교(應敎)로 있다가 낙향했는데, 불행히도 역변이 일어나 형과 함께 국문(鞠問) 도중에 절명했다.
?▲ 1820년 건립하여 필문 이선재, 청심당 이조원, 행강 이희, 이소재 이중호, 연재 이언빈, 동암 이발, 남계 이길 등 7현을 배향하고 있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수암서원(秀巖書院ㆍ전남도기념물 제39호). 1868년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919년에 복원했다. ?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叛)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오원화족(五元華族)이 절멸(絶滅)하다시피 되고, 생존한 몇 안되는 그 후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 35년이 지난 인조(仁祖) 2년(1624년) 7월에 역명(逆名)이 거두어졌고 복관(復官)이 허락되었으며, 숙종(肅宗) 20년(1694년) 발(潑)에게 이조참의(吏曹參議), 길(?)에겐 부제학(副提學)이 추증(追贈)되어 실로 105년만에 신원(伸寃)에 따른 마무리를 지은 셈이다. 요행스럽다면 발(潑) 사형제 중 막내인 직(?)의 유자(遺子ㆍ幼子)가 개성(開城)으로 피거(避居)하였고, 그의 5세손(五世孫)인 시욱(時郁)ㆍ시발(時發) 형제가 무과(武科)에 등제(等第)하더니 그 아들 태창(泰昌) 그리고 손자인 중빈(重彬)ㆍ중진(重晋), 증손 희복(熙福) 등 대를 이은 집념의 문과급제(文科及第)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의 괘고정수(掛敲亭樹).
광주의 광산 이씨 종가댁 입구에는 ‘괘고정수(掛敲亭樹)’라는 수령 약 600년의 우람한 왕버들나무(광주시기념물 제24호) 한 그루가 서 있다. 필문(畢門) 선제(先齊ㆍ1389∼1454)가 이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 또한 쇄락해지니 관리를 잘 하라는 당부의 말과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선제(先齊)의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를 하면 이 나무에 급제자의 이름과 북을 걸어 놓고 축하잔치를 열었기에 괘고정(掛敲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1589년 선제(先齊)의 5대손인 발(潑)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심문관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모진 고문을 받아 본인은 물론 어머니와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하자 왕버들나무가 말라죽기 시작했다고 하며, 후대에 발(潑)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게 되자 죽은 지 300여 년을 넘긴 왕버들나무에서 새로 잎이 나와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특히 조선 제14대 선조(宣祖)의 ‘간혼(奸渾) 독철(毒澈)이 살아충량(殺我忠良)’이라고 한 탄식과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명공석경(名公碩卿)들의 신원복관(伸寃復官)을 주청한 사실로 더욱 그 무고함이 입증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곳에 사는 광산 이씨 후손들은 송강 정철을 빗대 깍두기를 담그는 무를 썰 때 ‘송강송강’ 썰고, 생채를 썰 때도 ‘철철철’ 썰어라는 표현을 하며,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감정이 지금도 남아 있어 광산 이씨는 연일 정씨와 혼사를 맺지 않는다고 한다.
한림공파(翰林公派) 한림공(翰林公) 숙백(淑白)의 계통에서는 그의 아들 순(順)이 공민왕(恭愍王) 23년(137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헌납(獻納)에 올랐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의 심복의 한 사람인 김인찬(金仁贊)과 사돈간임이 원인으로, 왕당파(王黨派)의 최영(崔塋)의 질시(疾視)로 외직인 풍해안염사(豊海按廉使)로 밀려나 많은 고역을 치렀음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벼슬을 던지고 낙향하여 광주구장(廣州舊庄)에 은둔하였으며, 우왕(禑王) 14년(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정권을 쟁취하자 그를 사옹원정(司甕院正)ㆍ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 등 수차의 승차(陞差)로 초빙하였으나 끝내 의를 지켜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맏아들 초(椒)는 조선이 개국한 후 대사성(大司成)을, 차남 매(枚)는 영광교도(靈光敎導)를 거쳐 참판(參判)으로 역임했다.
회령판관(會寧判官)을 지낸 림(林)의 아들 형제 중 차남 근생(根生)은 단종(端宗)이 폐위되고 수양대군(首陽大君ㆍ세조)이 등극하자 이를 개탄하여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곡동(高谷洞)으로 은거하여 학문에 진력하다가 생을 마치니 그후로 영남파조(嶺南派祖)가 되었다.
근생(根生)의 손자 수(樹)는 중종 32년(1537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주위의 선망이 두텁더니 불행히 합포(合浦ㆍ마산)에서 옥절(玉折ㆍ재사나 가인들이 젊어서 죽음)하였다. 졸지에 상주(喪主)가 된 홍기(弘器)ㆍ홍량(弘量)ㆍ홍우(弘宇)는 어린 나이로 치상(治喪)함이 지극하여 상하이사(上下吏士)들이 극히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수백의 군리(軍吏)가 자진하여 200여 리 길 선영장지(先塋葬地)까지 운반하여 장엄한 장례를 치루었다. 세상에 널리 ‘영남(嶺南)의 착한 삼용(三容)’이라 일컬음을 받았으며, 뒤에 영남유림(嶺南儒林)의 총의(總意)로 3형제의 고결한 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에 향배(享配)하였다.
▲ 한강 정구(鄭逑)를 배향하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에는 ‘영남(嶺南)의 착한 삼용(三容)’이라 일컬음을 받은 홍기(弘器)ㆍ홍량(弘量)ㆍ홍우(弘宇)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부귀한 집에 사위되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이씨(李氏) 문중에 장가들기를 원한다(不願富貴壻願入李氏門)’고 하여 광산 이씨 집안에 장가들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김면(金沔)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우고 진천현감(鎭川縣監)을 지낸 후 형 홍량(弘量)과 함께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의 숭앙을 받았던 홍우(弘宇)의 아들 서는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선조 38년(160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스승을 따라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거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후 거처를 승호(承湖ㆍ현 경북 달성군 논공읍)에 옮기고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열어 스스로 호(號)를 야로(野老)라 칭하고 후학을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며, 효종 원년(1650년) 생을 마치니 유림(儒林)의 발의(發議)로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사시(私諡)를 짓고, 선조(先祖)가 모셔진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에 배향하였다.
그 외 숙종(肅宗) 때 부령부사(副寧府使)와 증산현령(甑山縣令)을 거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한 두망(斗望)과 서산현감(瑞山縣監)ㆍ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한 징하(徵夏), 예조좌랑(禮曹佐郞) 중빈(重彬) 등이 유명했다. 규일(奎一)은 철종(哲宗) 때 무과에 급제하고 이원현감(利原縣監) 겸 북청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역임하여, 고종(高宗)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된 필현(弼鉉)과 함께 명문(名門) 광산 이씨의 전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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