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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연원

합천 이씨(陜川李氏)의 시조 이개(李開)는 신라 초기의 6촌 가운데 알천양산촌(閼川陽山村)의 수장이었던 표암공(瓢巖公ㆍ경주 이씨의 시조) 이알평(李謁平)의 39세손이다. ‘문충공사적기(文忠公事蹟記)’에는 그가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문인으로 유학의 진흥에 힘써 그 공으로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졌으며, 박경엽(朴敬燁)의 난을 토평하고 다시 문학(文學)을 진흥시켜 중국에 버금가게 하였다고 하였다.

‘임술보(壬戌譜)’의 중시조사적(中始祖事蹟)에 따르면 유구국(琉球國)의 20만 대군이 신라에 침입했을 때, 단독으로 적장을 만나 담판을 지어 물리쳤다고 한다. 이 공으로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졌다고 하는데, 강양(江陽)은 합천(陜川)의 옛 이름이다. 그러나 신라 말에 유구국(琉球國)의 침입 사실이 없으므로 이는 후대에 첨삭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경순왕(敬順)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함으로써 신라가 망하게 되었을 때 강양군(江陽君)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를 지켜 끝내 고려에 복속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으로부터 강직(降職)을 당하고 자칫 화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18세인 딸이 조정에 탄원을 하여 화를 면하고 강양호장(江陽戶長)으로 임명되었다. 호장으로 강양 일대를 통치하는 동안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인으로 우러름을 받았으며, 만루정사(晩樓精舍)를 짓고 후학을 기르다가 경순왕(敬順王)이 죽자 애통해 하던 끝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가 합천호장(陜川戶長)을 지냈고, 그곳에서 죽은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합천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계대(繼代)하고 있다.

알평(謁平)의 후손은 경주 이씨(慶州李氏)를 비롯한 10여 본으로 분적되는데 합천 이씨(陜川李氏)도 그 중의 하나다. 세계(世系)가 복잡하여 15개 파로 대별되는데, 교리공파(校理公派)ㆍ목사공파(牧使公派)ㆍ병사공파(兵使公派)ㆍ부사공파(府使公派)ㆍ사간공파(司諫公派)ㆍ사인공파(舍人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ㆍ생원공파(生員公派)ㆍ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ㆍ전서공파(典書公派)ㆍ제학공파(提學公派)ㆍ참지공량실파(參知公良實派)ㆍ참지공량진파(參知公良眞派)ㆍ첨사공파(詹事公派)ㆍ판사공파(判事公派)로 분파되었다. 그 중에서도 전서공파(典書公派)가 가장 번창하였으며, 그밖에 목사공파(牧使公派)ㆍ참지공파(參知公派)ㆍ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 등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 경남 합천군 용주면 월평리 목동 망월산에 자리한 강양군(江陽君) 부인 경주 김씨 묘(上)와 강양군의 묘.

강양군(江陽君)은 1남 1녀를 두었고, 아들 인영(仁榮)에서 2남 위(偉)와 3남 돈(惇)으로 갈라지면서 크게 번성하게 된다. 따라서 합천 이씨는 위(偉) 계열과 돈(惇) 계열로 크게 구분되며, 위(偉) 계열 8파(전객령ㆍ전서ㆍ별사ㆍ교리ㆍ첨사ㆍ목사ㆍ부사ㆍ직제학공파)와 돈(惇) 계열은 3파(상서공파와 두 참지공파) 등 모두 11파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시대 문저(文著ㆍ1113~1180)는 음서(蔭敍)로 벼슬에 나가 인조 16년(1138년) 경령전 판관(景靈殿判官) 등을 거쳐 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이 되었다. 의종 6년(1152년)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이 고을은 산과 계곡이 많아 도적들이 횡행하여 백성에게 피해를 주었으므로 부임한 직후 모두 소탕하였다. 또 6,000여 경(頃)의 논을 관개(灌漑)하여 민생에 기여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고, 이어 1165년에 안서대도호부사(安西大都護府司), 1170년에는 은청광록대부 수사공 우복야(銀靑光祿大夫守司空右僕射) 등을 지낸 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자, 왕이 금자광록대부 태자소보(金紫光祿大夫太子少保)를 가자(加資)하고 윤허하였다.

순목(淳牧)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신손(信孫)은 좌서윤(左庶尹)을 지냈으며, 덕손(德孫)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승로(承老)는 충목왕 때 밀직사사를 지내고 공민왕 3년(1354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한 후 강양백(江陽伯)에 봉해지고 1360년 축성감독사로 수안, 곡주 등지에서 활약했다.

조선조의 인물인 윤검(允儉ㆍ1451~1527)은 자는 자문(子文)으로 순생(順生)의 아들이다. 성종 3년(1472년) 무과에, 1476년 무과중시에 급제해 사천현감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성종 25년(1494년) 왜구가 침입하자 남도포만호(南桃浦萬戶)로 있으면서 이를 막지 못해 파직되었다가, 연산군 2년(1496년) 창녕부사로 있으면서 향리를 장살하여 파직되었다. 그 후 등용되어 해주목사ㆍ의주목사ㆍ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중종 6년(1511년)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 오고, 1513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521년 영해부사(寧越府使)로서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며, 옥계(玉溪)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을 추모하기 위해 1564년 건립된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청계서원(淸溪書院ㆍ경남문화재자료 제56호).

 

 

▲ 경남 합천군 쌍책면 오서리에 자리한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의 묘. 묘비는 남명 조식(曺植)이 지었다.

검(儉)은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희민(希閔), 희증(希曾), 희안(希顔)의 3형제를 두었다. 장남 희민(希閔ㆍ1468~?)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중종 5년(1510년) 진사가 되고 151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듬해 정자(正字)를 거쳐 이조정랑(吏曹政郞)에 올랐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삭직되었다. 2남 희증(希曾ㆍ1486~1509)은 이귀(李貴)ㆍ정여창(鄭汝昌)의 문인으로 연산군 8년(1502년) 사마시를 거쳐 중종 1년(1506년)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했고,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검열(檢閱)ㆍ대교(待敎)를 거쳐 1509년 수찬(修撰)이 되었다. 3남 희안(希顔ㆍ1504~1559)은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4세때 사마시(司馬試)에 함격하고 중종 33년(1538년)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퇴, 명종 9년(1554년) 고령현감(高靈縣監)에 부임했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곧 사직하고 고향에서 조식(曺植)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이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함께 학문을 연마한 황강정(黃江亭).

 

▲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관수정(觀水亭ㆍ경남문화재자료 제221호)은 이윤서(李胤緖)의 현손 이봉서(李鳳瑞)가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을 추모하기 위해 집앞의 절벽 위에 건립하였다.

희증(希曾)의 증손인 윤서(胤緖ㆍ? ~1624년)는 선조 27년(1594년) 무과에 급제해 1600년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을 겸하고, 이어 청하현감ㆍ함흥별장(咸興別將)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2년(1620년) 구성현감으로 있을 때 정령이 엄하고 분명하여 부근에 주둔 중이던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나라 장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뒤 좌영장(左營將)을 거쳐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 휘하의 중군으로 영변에 있을 때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별장 이순무와 함께 이괄을 죽이려다 실패,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에게로 탈출, 반역자를 죽이지 못한 것을 자책한 끝에 목을 찔러 자결했다.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등에 추록되고, 다시 우찬성겸 판의금부사(右贊成兼判義禁府事)에 가증,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옥계(玉溪)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장의(壯毅).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진영(眞榮)은 기주(紀州) 번주 도꾸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ㆍ이에야스의 10번째 아들)의 시강(侍講)이 되었고, 특히 주자학이 높은 경지에 있어 기주 도꾸가와 번정의 정경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진영(眞榮)은 도꾸가와 요리노부로부터 신하가 되어 달라는 간청을 받았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거절했으며, 현재까지도 진영(眞榮)과 아들 매계(梅溪)의 학문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후손이 일본에서 10세까지 이어졌으나 절손되어 현재는 그가 남긴 역사 기록과 유물들만 남아 있다.